베네치아의 번영
15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번영하고 화려한 도시로 발전했다.
상인 귀족들의 꿈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대운하의 연안에 연립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도시로 발전했다.
화사한 나선형의 둥근 기둥, 장미의 창을 등지고 섬세하고 우아한 발코니, 나란히 나 있는 아름다운 작은 창문들, 창문에 드리워진 편물 레스의 경쾌함, 세밀한 기교에 의한 금속세공이 환상적 화려함을 주었다.
비잔틴과 고딕, 세련된 극에 달한 두 양식이 여기에서 완벽하게 융화되고 있었다.
내부의 화려함도 외관에 손색이 없다.
실내에는 화려한 가구들이 늘 놓여 있었으며, 벽은 밝고 경쾌한 색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었고, 직물로 짠 벽걸이, 둥근 천장에는 프레스코화, 벽에 걸린 그림들의 액자는 금으로 도금되어 빛에 강렬하게 반짝였다.
많은 부분이 피렌체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솜씨였다.
베네치아는 15세기 미술 최대 전당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명성을 쌓기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은 벨레니 일가의 작업장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 공방의 창시자 야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1400년경~70/1)는 두 아들 젠틸레Gentile(1429?~1507)와 조반니Giovanni(1430?~1516)와 함께 공방을 운영했고 그는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1506)의 장인이기도 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의 문하에서 회화를 수학하면서 피렌체에서 작업한 적이 있는 벨리니는 각지를 편력하며 수업을 연마한 후 베네치아에 돌아와 공방을 차리고 아들들을 화가로 육성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야코포 벨리니는 정부의 어용화가이기도 했으며 역대 총독들의 초상을 그가 독점해서 그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장중한 늙은이들을 그리는 데 염증을 느낀 그는 고대 신화에서 주제를 구하여 은유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들의 축제>에는 요염한 미녀들과 반나체의 취한들이 풍경 속에 그려져 있어 이교적이며 관능적 장면으로 15세기 베네치아의 풍속을 충실히 묘사한 듯했다.
큰 아들 젠틸레는 성 조반니 교회로부터 기적의 치유, 성체의 행렬, 성 십자가 단편의 발견을 세 개의 판화로 그리라는 주문을 받았으며 그림이 빼어나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려고 몰려들어 상 마르코 광장에 줄을 섰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였으며 작업 도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젠탈레의 인물 묘사와 원근법은 빼어났으며 만테냐가 초기에 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베네치아의 인문주의는 피렌체와 같이 일찍이 발전되지는 못했고 또한 페렌체 만큼 많은 학교와 아카데미를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열의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으며 15세기에는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더욱 더 진전이 있었다.
책을 소장하지 않은 귀족이 없었고 어느 관저에서도 다투어 문인과 시인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았고 귀부인들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초대해 강의를 들었다.
학교는 서민 자제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활판인쇄의 발전에 따라 문화 보급의 폭이 넓혀졌으며 고금의 명저들이 일반 독자의 손에 들어오기 한결 수월했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인쇄출판의 최대 중심지가 되었고 출판물들은 인쇄의 선명도, 지질의 우량함, 아름다운 자체로 호평받았다.
이 세기 말에 베네치아에서 1만 2천 835점의 서적이 간행되었다.
대부분 알드 마누티오의 손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천재적 인쇄출판업자는 1449년 출생으로 어려서 로마에서 성장했고 라틴 문학에 정통했다.
그후 페라라에 살면서 그리스 고전의 번역에 치중하면서 풀라톤, 키케로에 관해 강연함으로써 박식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교육에 열을 올려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마누티오의 학식에 감복한 비고는 그의 족하 리오네로와 이르베르트의 교육을 그에게 맡겼고 두 사람이 훗날 마누티오의 출판사업 개시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리스 고전의 염가판을 출판해 만인이 애독하게 하는 것이 마누티오의 이상이었으나 다만 값을 싸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원전의 여러 사본의 비교 연구가 큰 작업이었고 판매시장도 개척해야 했다.
그가 베네치아로 이주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그는 고전학자들을 베네치아에서 동원하여 원전 비판과 주석을 청탁했다.
그의 사업은 성공해 사후 아들에게 유업으로 계승하게 했다.
활판인쇄가 이와 같이 신속하고 광범하게 위력을 발휘한 도시는 메디치 치하의 피렌체뿐이었다.
15세기의 유럽에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베네치아와 대항할 수 있었던 도시는 피렌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