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리처드 세라와의 인터뷰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번역서도 원서도 서점에 없으므로 새로운 자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브란쿠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질문): 조각가가 되려고 할 때 브란쿠시Brancusi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까?
(답): 브란쿠시가 내게 준 영향은 <끝없는 기둥 Endless Column>, <수탉 Cocks>, <여상주 Caryatids>(건축에서 사용하는 말로 성별을 지닌 뜻으로 이에 반대디는 말은 남상주이다) 등에 나타난 면, 부피, 그리고 용적으로 이것들은 가장자리에서 윤곽을 묘사한 완전한 것들이지요.
그의 드로잉은 훌륭했으며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모방했습니다.
예일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1964~5년 파리로 유학 갔습니다.
모던 뮤지엄Musee d'Art Moderne에 있는 브란쿠시 스투디오에서 4개월 동안 매일 그의 작품을 드로잉했습니다.
그곳은 브란쿠시의 원래 스투디오를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작업실과 삶의 공간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브란쿠시 스투디오에서 전체 작품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의 창작의 발생뿐 아니라 작업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난 1969년에 <카드의 집 House of Cards>을 제작했는데 브란쿠시의 드로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수직선을 수직선이 아닌 중앙 축으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브란쿠시가 1918년에 제작한 <건축적 프로젝트 Architectural Project>는 기본적으로 내게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세 개의 부분을 각기 위에 얹어 위로 세운 것으로 수직으로 쌓아올리는 문제와 관련 있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균형으로 쌓아올리고 중앙의 축으로 연결시킨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내게는 궁금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조립한 작품보다도 내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무튼 내 작품의 균형과 억류된 운동 개념은 브란쿠시의 작품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1969~71년 나는 카이저Kaiser에서 커다란 스케일의 쌓아올린 작품을 제작했는데 머리 부분의 무게로 수직이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중력의 지레장치 원리가 요소들을 아래로 향하도록 평형시켰는데 브란쿠시가 1918년에 제작한 작품과 유사합니다.
그 후 제작한 작품들은 카이저에서 익힌 원리에 의존한 것들로 좀더 복잡한 평형을 시도한 것들이었습니다.
(질문): 당신이 1969년에 제작한 <2-2-1>의 경우 추상의 질이 나타나도록 자른 것, 선, 재료의 물리적 현존, 그리고 불규칙을 위한 잠재 세력을 느끼게 하는 것들 사이의 긴장감과 브란쿠시의 작품에 나타난 추상 문장 구조법, 가장자리 선의 리듬, 그리고 용적의 불규칙 사이의 긴장감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답): 선을 긋는 것은 아이디어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선을 그은 것은 구성물에 대한 기본입니다.
선이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의 정의가 되게 했어요.
선이 조직을 정의하고 다시 정의했습니다.
자르는 것은 선을 긋는 것이며, 분류하는 것이고,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2-2-1>에서 선과 같은 기둥은 대칭적 머리 부분 평형을 붙드는 역할을 하고 중심으로 나누는 역할을 했습니다.
(질문): 브란쿠시로부터 받은 영향 중에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답): 1970년 일본에서 작업할 때 나는 원형 고리 모양의 것을 땅바닥 속 또는 위에 놓는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그해 브란쿠시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의 <끝없는 기둥>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브란쿠시의 이 작품은 뉴욕에서 소개되었다.) 그것은 바닥으로부터 천정에 닿는 최초의 조각이었습니다.
(질문): 긴 것을 잘라서 방안에 설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답): 몰랐습니다. 브란쿠시의 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의 분명한 공간은 도날드 저드Donald Judd(1928~94)로 하여금 바닥으로부터 천정에 닿는 조각을 제작하도록 했으며, 칼 안드레이Carl Andre(1935~)로 하여금 벽으로부터 벽까지의 작품을 제작하게 했습니다.
난 브란쿠시의 무한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미국 예술가들의 감각을 바꿔놓았어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1936~)의 검정색 그림과 저드의 연속적 관계는 <끝없는 기둥>에 빚이 있습니다.
<끝없는 기둥>의 문제는 그때만 해도 내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열린 작품 <키스의 문 Gate of the Kiss>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질문): <끝없는 기둥>의 (건축에서 말하는 각 부분의) 산출 기준 증설module extension에 의한 무한의 아이디어에 관해 언급했는데 물론 안드레이가 브란쿠시의 <끝없는 기둥>을 바닥에 깐 건 문제로 남아 있지요.
(답): 수직으로 세운 조각과 수평으로 존재하는 조각이 지닌 아이디어를 비교하면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구성에 대한 상이한 개념이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관한 상이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관망하더라도 눈의 위치 그 이상으로 위로 뻗은 조절된 작품은 원근법에 따라서 줄인 것이 되지만 수평으로 조절된 작품은 무한히 사라지는 포인트가 되고 맙니다.
이것들의 상이한 점은 몬테냐Montegna와 우첼로Uccello의 상이한 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수직성 대 수평성의 문화적 상징적 도상학은 십자형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수직은 초월을 표현하지만 수평은 물질성을 대신합니다.
(질문): 당신은 브란쿠시의 조각과 그의 받침대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답): 브란쿠시의 작품이 받침대 위에 기교적으로 올려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받침대를 포함한 전체를 조각이라고 생각했지 받침대 위에 배열시킨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의 조각과 받침대 모두는 의도를 갖고 깍아 만든 것들로 받침대만 따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질문): 브란쿠시가 표면을 닦고 정련한 것에 대해 당신의 관심은 어떻습니까?
(답): 표면이나 장식의 수준에 관한 물질성에 도달한 예술가에게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원리나 아이디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지 미화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은 갈고 닦은 것들이 아닙니다.
조각의 표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퇴폐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질문): 당신은 수직 고도에 관해 말했습니다. 당신은 수직 질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까?
(답): 현재 나의 관심은 대부분 수직에 있습니다.
땅에 낮게 세운 작품이라도 고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작업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높이에 대한 관망적 상이함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는데 관람자가 왼쪽이나 오른쪽에 볼 때, 또는 조각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거나 조각을 통해 걸어갈 때 그것들이 같게 보이는지 아니면 다르게 보이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근래 내가 작업하는 것들 대부분은 수직 고도에 관한 것이며 면이 수평적일 때라도 높은 데서 바라볼 때 수직 고도가 확인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형태가 스스로 끝나고 스스로 결론을 짓는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꼭대기 가장자리를 주어진 지형 안에서 고도의 선처럼 선을 긋거나 공간을 붙들고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의 열린 작품들은 내면적인 관계에 관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공간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들로 건립된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를 공간 안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브란쿠시가 말년에 티르구 지우Tirgu Jiu에서 작업한 테이블, 문, 기둥 같은 것들과 관련이 있으며 작품과 풍경과의 관계입니다.
그것들은 풍경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 안에 위치하는 것들입니다.
1973년 나는 페루에 있었는데 인카Inca 문명의 유적들을 바라보면서 인카인들이 돌을 아주 정밀하고 정확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열두 면이 있는 돌을 코너에 놓아 직각의 기능이 되게 한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지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어떤 의도를 갖고 돌을 깍은 것이 아니라 지형에 맞도록 깍았던 것입니다.
(질문): 당신이 지금 말한 것과 브란쿠시의 작품에 나타난 질과의 관련성에 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답): 브란쿠시가 재료를 깍을 때 작품 내용은 장식적인 것보다는 재료 자체에 있습니다.
재료의 선택을 미학적 가능성과 제한에 두었습니다.
스틸을 갖고 작업할 때 직접 조립하거나, 구성하거나, 또는 간접적 암시를 기술적 유물론주의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돌을 사용할 때는 이런 것들과는 무관해집니다.
돌은 자체의 삶을 갖고 있다는 점과 그것이 수준 낮은 엔트로피entropy(균질성)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돌은 시간의 반대가 되는 질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물질과는 달리 돌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돌은 세상의 또 다른 질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 브란쿠시의 <공간의 새 Birds in Space>는 그가 돌을 영속성 있는 질로 만들었다는 느낌입니다.
(답): 그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성취했습니다.
나의 초기 많은 작품들은 육중하게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만 나는 어떤 것들의 균형이 무게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힘이나 무게가 지주, 지레, 또는 평형력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이 동등하게 균형을 갖출 때는 무게에 대한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에 긴장감이나 중력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두 개의 정지된 상태에 있는 불연속 요소들이 공중에 떠 있는 질의 효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이 브란쿠시의 최고 미학이며 <치메라 Chimera>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에 나는 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취한 것이지요.
그것은 예술가와 재료와의 관계 또는 예술가 자신의 몸과 지면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