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의 ready made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의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우선 백신님이 저의 글을 열심히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사실 제 글에 대해 그동안 누구도 지적을 해주지 않아 과연 계속해서 글을 올리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몇 사람에게라도 공감을 주고 미술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글쓰가의 보람은 있겠다 싶어 스스로 자위를 하곤 했습니다.

백신님의 글을 읽으니 서양미술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뿐 아니라 지적하신 점 또한 매우 타당하고 중요해서 앞으로 더욱 글을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이 명확하지 않는 데 대해서 앞으로는 좀더 명확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뒤샹의 ready made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의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백신님이 언급한 대로 뒤샹의 변기는 상점에서 구입한 기성품입니다.
워홀의 상자는 목공을 시켜 만든 나무 상자에 원래 브릴로 상자를 모방하여 색을 칠한 것입니다.
하나는 기성품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품을 제작한 것입니다만, 후자 역시 예술에 있어서의 '만들기'와는 무관한 것이란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뒤샹과 워홀의 작품 모두의 중요한 점은 평범한 것의 '변용 transformation'에 있습니다.
기성품과 기성품의 모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미술품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오브제를 변용의 의미를 담아 미술품으로 소개한 것이 문제를 야기시킨 것입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고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면 미학학회에서 단토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학회에서도 그럴 생각이 있습니다. 언제가 될른지는 나중에 의논해야 사항이지만 ...

만약 단토가 우리나라에 오신다면 제가 그분에게 질문할 사항이 바로 앞서 언급한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은 <브릴로 상자>를 예술의 종말을 알리는 작품으로 꼽았는데,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단토가 워홀의 작품을 꼽은 이유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소개될 때만 해도 그린버그의 '모던 회화론'이 나오기 훨씬 전인 데다 '변용'이라는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브릴로 상자>라고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저는 뒤샹의 변기가 <샘>이란 작품명으로 이미 변용되었다고 보지만 그분은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여하튼 나무상자에 비누상자 포장을 그대로 디자인해서 책색한 것은 자연을 따라 모방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으로서의 '만들기'와는 다름니다.
변용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레디메이드와 이런 만들기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단토의 논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토는 1964년 4월 맨해튼 이스트 74가의 스테이블 갤러리에 가서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조각 전시회를 보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린버그의 후예들이 비평에 크게 관여할 때라서 워홀의 작품은 진정으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때였습니다.
그때 단토는 그 작품이 미술품임을 확신했으며 <브릴로 상자>가 슈퍼마켓의 저장실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의 그 어떠한 지각적 차이도 사물과 예술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할 때 양자 사이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심원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단토는 말했습니다. "모든 철학적 물음들이 그러한 형식을 갖는다고 주장해왔다. 즉 겉으로는 식별불가능한 두 가지가 상이한, 실로 대단히 상이한 철학적 범주들에 속할 수 있는 것이다."

단토의 말에서 그분 자신도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작품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도 워홀의 변용을 위한 만들기를 과거 미술에 대한 개념으로서의 '만들기'와는 달리 취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단토의 말에서 이런 점은 더욱 확연해집니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은 언제나 예술작품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철학적 문제란 왜 그것이 예술작품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워홀과 함께 예술작품이 이래야 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브릴로 상자처럼 보일 수도 있고 스프 깡통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단토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예술의 종말로 보지 않은 이유는 변용으로서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중요한 쟁점으로 꼽는 것은 기성품과 기성품의 모방의 차이가 아니라 변용의 가능성이 워홀의 작품에 와서야 분명해졌음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술의 종말은 '변용'에 있고 이의 조짐이 미술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타 예술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단토의 말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납니다.

"워홀은 이런 심원한 발견을 이룩한 예술가 집단들 중의 한 명에 불과하다. 음악과 소음의 구별, 무용과 몸동작 사이의 구별, 문학과 한갓된 글쓰기 사이의 구별도 워홀의 돌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며 그것과 모든 면에서 평행선을 그으면서 진행되었다."

양식으로서의 '만들기'가 더 이상 미술품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워홀의 상자 만들기는 '양식 style'으로서의 만들기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 점을 중요하개 여기지 않으며 다만 레디메이드와 같이 평범한 오브제라는 점에서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뒤샹은 미술품이 되는 데 '만들기'가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음을 강조했다면 워홀은 똑같이 만들어서 '변용'이 미술품 자체의 의미라고 주장한 것이 다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레디메이드에도 변용의 의미가 내포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기회가 되면 단토에게 질문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1963년 워홀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매우 놀라울 정도로 미래를 예견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의 양식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음 주면 추상표현주의자나 팝아티스트, 아니면 사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워홀은 모든 양식들이 동등하게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것보다 나은 양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모든 예술이 동등하면서 무차별적으로 훌륭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 올바른 양식에 속하는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나 가질 수 있는 사고로 단토는 그래서 워홀을 예술의 종말을 알리는 언행을 한 인물로 꼽았습니다.

백신님,

백신이란 이름을 처음 대하는 것 같은데 미술 관련 글도 종종 올리세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의 글에 대해 지적할 점이 있으면 서슴치 마시고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을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술의 종말 이후> 읽고나서 소감을 적어주시면 또한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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