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치의 다음 이야기
노구치는 1949년 양차세계대전 사이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브란쿠시를 꼽으면서 그가 자연의 사물을 외관보다는 보편적 본질을 추상으로 나타낸 데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동기가 되고 있다면서 자기 자신은 사물들의 자체 관계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세계가 원자와 돌발적인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실존이 그런 공간 안에 있는 것이며,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물리학의 발견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우주의 운동에 부분적으로 불확정적인 요인이 작용함을 인식한 미학으로 들린다.
브란쿠시와 마찬가지로 노구치는 실재하는 사물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므로 그의 작품은 정확하게 어떤 사물에서 형태를 취했는지 알 수 없고 사물의 본질을 그가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부여준다.
조각과 그 밖의 예술은 늘 달라져야 하지만 불변하는 실재의 모습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9년에 말했다.
“의미가 예술의 범위에 속한다면 질서 또한 예술에 속한다. 삶의 주요 의미가 모호하고obscure 혼돈스럽다chaotic면 예술이 잔인함brutality만이 있다고 지적하지 않는 가운데 조화를 통해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다. 나는 조각이 특별히 조화로서의 공간과 인간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질서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질서는 공간에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며 물질의 실재reality of matter 혹은 정신의 상태state of mind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은 질서이며 질서가 없으면 사물들은 단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런 사고는 몬드리안의 미학과 상통하는 것으로 몬드리안은 자연을 불운한 사건으로 보았다.
자연을 무질서로 보고 예술이 자연을 질서 있게 정돈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노구치의 미학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조각을 ‘공간의 예술 art of apaces’로 본 것이다.
에너지의 집중, 비이성적이지만 의미를 강조, 이런 것들이 조각의 미학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감지할 수 없는 빈 공간voids, 공간의 압력과 중단이 노구치가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들이다.
“조각이 돌덩이로 이루어졌을 경우 돌과 돌 사이의 공간, 돌과 인간 사이의 공간, 그것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관조”가 그의 주요 관심사이다.
노구치는 유기적 형태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어 질서와 기하를 중시했다.
그는 기술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여겼는데,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을 축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기술에는 한계가 있으며 지나친 기술이 오히려 창조를 억제시키므로 기술보다 중요한 것으로 작가의 의도를 꼽았고 기술은 이차적인 요소로 보았다.
조각이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되었다면서 초기의 발전된 기술이 상상력을 일으켜 새로운 형태를 만들게 했고, 실재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본래의 인간의 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고 했다.
사물의 기본적 원리를 형태화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의 수평적 요소와 브란쿠시의 새가 지닌 수직적 요소를 진보된 형태로 지적했다.
최근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재료와 연장이 나와 조각의 영역이 범람하며 많은 재료와 연장의 발견은 매우 반길만 하지만, 그것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개념으로 진일보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수공예로 전락하거나 상업적 장식으로 혐오감을 주는 조각이 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그는 취미와 재료의 선택 그리고 궁극적으로 조각에 대한 우리의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조각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수공예 혹은 상업적 장식인지를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 노구치의 주장이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