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제롬>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는 마돈나를 그린 후 <성 제롬 St. Jeorme>을 그렸다.
광야에서 제롬의 모습은 148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언제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롬은 로마와 가울에서 살다가 성서를 번역하기 위해 안디옥 근처 샬시스 광야로 가 수행자의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베들레헴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주석을 달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어준 후 사자의 친구가 되었다.
제롬을 그린 화가들이 있는데, 비토레 카르파치오Vittore Carpaccio(1450/60?~1525/6)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방에 있는 학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렸으며 코시모 투라Cosimo Tura(1430년경~95)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투리와 마찬가지로 제롬을 학자보다는 참회하며 고행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제롬을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바싹 마른 체구에 움푹들어간 눈으로 표현했다.
제롬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구주를 바라보듯 어디엔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의 앞에는 사자가 앉아 있고 제롬의 오른손에는 돌이 들려 있는데, 자신의 가슴을 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실재 사자가 서양화에 그려진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으며 레오나르도는 실재 사자의 모습을 여기에 삽입했다.
메디치가와 몇몇 피렌체의 부유한 가문에서는 야생동물을 길렀고 사자 외에도 기린 등을 길렀다.
레오나르도가 누구를 위해 패널에 그리기 시작했으며 왜 미완성으로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머리 부분의 패널은 훼손된 채 18세기까지 남아 있다가 19세기에 와서야 보수되었다.
<베노이스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게 남아 있다가 19세기 초에야 우연한 기회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저씨가 되는 추기경 페슈는 어느 날 로마의 거리를 걷다가 고물상 뒤켠에서 훌륭한 그림이 문에 그려진 작은 찬장을 발견했다.
그는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는 그것이 르네상스 대가의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찬장 문은 다름 아닌 <성 제롬>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것을 누군가가 찬장의 문으로 단 것이다.
페슈는 머리 부분을 떼어 낸 나머지 패널이 로마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알고는 여러 달을 수소문한 끝에 구두점에서 발견했는데, 구두수선공이 그것을 의자에 못을 박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 부분을 부착하여 유악을 발라 보수했으며 페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845년 바티칸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도가 인물을 묘사할 때 얼마나 해부학적 정확함을 추구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성 제롬의 목과 앙상한 갈비뼈가 실재 인체를 묘사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절망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그는 29살이었거나 30살이었을 성 싶으며 더욱 더 외로움을 느낄 때였다.
그는 비탄의 글을 많이 적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며칠 전에 말했듯이 난 완전히 의욕을 잃었고 ..."라고 적었다.
그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가 적은 노트를 보면 단어를 갖고 발음으로 뜻이 되게 했음을 보며 증조할아버지의 이름 디 세르 피에로di ser Piero를 di. s. p. ero로 적어 dispero라고 읽어 그 뜻이 '나는 절망한다'가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