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 1>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은 기계생산으로 인한 공산품의 질 저하에 대한 불만족으로 수작업의 공예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중세의 직인제도에 대한 향수가 내재된 이 운동의 사상은 건축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1812-52)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끼친 존 러스킨의 저작에 잘 나타나 있다.
가구, 은그릇, 직물, 스테인드글라스, 보석 등을 디자인하기도 한 퓨진은 영국 건축 전체의 운동으로까지 확산된 고딕복고 양식의 제창자였다.
그는 저서 <대비 Contrasts>(1836)에서 기독교의 중심을 이룬 중세 건축물을 칭찬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르네상스 양식의 경박함과 대비시켰다.
퓨진은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과 함께 1836년에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착공했으며 이는 고딕 부활에 있어 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이런 고딕에 대한 취향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통해 국수주의의 감정이 고조되었고 영국뿐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고딕이 국민정신의 고유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술가를 영감 받은 예언자로 본 러스킨은 미술의 위대함을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성실함과 소박함을 회복하며 아카데미즘의 원류로 간주되는 라파엘로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라파엘전파의 옹호자로 나섰다.
러스킨은 퓨진과 함께 고딕양식의 부활을 주창했지만, 장식에 있어서는 퓨진과 달리 고전적 전통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예술과 건축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 형식이 요구되고, 고딕이야말로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을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그의 사상을 모리스가 받아들였다.
러스킨은 저서 『베네치아의 돌』에서 “아름다운 미술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의 책에는 그가 미술가들에게 세밀하게 연구할 것을 요청한 바위와 잎의 곡선 형태들이 뒤엉킨 모습을 묘사한 도판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모리스였다.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미술가들로는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 월터 크레인, 찰스 로버트 애슈비,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를 비롯하여 글래고스 출신 건축가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및 프란시스 맥도널드와 마거리트 맥도널드 자매를 꼽을 수 있다.
잉글랜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Arthur Heygate Mackmurdo(1851-1942)는 러스킨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와 함께 고건축물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s에 관여했다.
맥머도가 1882년에 세운 센추리 길드Century Guild는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의 단체로 맥머도는 이 길드가 “공예의 모든 분야를 더 이상 장인의 영역이 아닌 미술가의 영역으로 만들고 건축물, 장식, 유리회화, 도자기, 목조각 그리고 금속을 그들의 정당한 자리인 회화와 조각의 옆자리로 되돌려놓은 것”이라고 천명했다.
센추리 길드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인식될 물결모양의 자연주의 장식을 실험했다.
맥머도는 1884년에 길드의 기관지로 공예전문지 <하비 호스(목마) Hobby Horse(Wooden Horse)>를 창간했다.
그는 등받이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의자를 디자인해 유명해졌다.
이 장식은 나중에 아르누보로 규정되었다. 등받이를 장식한 비대칭의 덩굴식물은 1년 뒤 약간 변형되어 그의 저서 <렌즈 시티 교회 Wren's City Churches>의 표지에 다시 등장했다.

맥머도와 함께 미술공예운동의 전통에 속한 월터 크레인Walter Crane(1845-1915)은 미술공예전시협회Arts and Crafts Exhibition Society의 의장이었다.
그의 목표는 미술가를 수공업자로 만들고 수공업자를 미술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크레인은 미술의 진정한 근원과 토대는 수공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론서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공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확산에 기여했다.
모리스와 함께 사회주의연맹Docial League의 회원이었던 크레인은 모리스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누보를 “기이한 장식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크레인은 1890년대 유럽 아르누보 디자인의 초기 중심지 중 하나인 브뤼셀에서 전시한 최초의 영국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였다.
그곳에서 그는 1891년에 아동도서 삽화를 선보였는데, 1889년에 처음 출판되어 이제는 잘 알려진 그의 <꽃의 축제 Flora's Feast>와 같은 삽화에서는 벨기에 대중이 선호한, 자연주의 주제에 토대를 둔 운동감이 보였다.
문학적, 신화적 주제를 즐겨 그린 크레인은 아동도서에는 컬러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르누보를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인은 1900년 당시로서는 아르누보 미학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선과 형태 Line and Form』라는 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는 미술공예운동의 전통 속에서 영국 디자이너들이 아르누보로 인식될 만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1888년에 수공예 길드를 설립하여 영국 미술공예운동에 앞장을 선 찰스 로버트 애슈비Charles Robert Ashbee(1863-1942)는 1887년과 1904년 런던의 이스트엔드에 수공업 학교School of Handicraft와 공예 학교School of Arts and Crafts를 각각 설립하기도 했다.
애슈비는 정규 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건축과 장식미술이 모든 예술의 기본 토대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설립한 수공업 길드와 두 개의 공예학교는 비자본주의적 강령을 따랐으며, 그곳들에서 제작된 생산품을 가지고 단체 토론을 벌이곤 했다.
모리스 양식을 좇은 가구 외에 정교하게 조각되고 마무리된 은공예품이 이 공방의 특별 상품이었다.
애슈비가 1890년대 중반부터 제작한 사각형 가구는 국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국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가 1898년경에 디자인한 필기용 캐비닛은 아르누보 양식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것은 1899년 런던에서 열린 미술공예전시협회전과 1900년 빈에서 열린 제8회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빈의 한 가정에 판매되었다.
짙은 마호가니 외장에 구식의 구슬다리가 달린 이 캐비닛은 영국 고유의 가구 제작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당대의 유행이 반영된 부분은 서립의 손잡이를 이루는 정교한 투각 잎 무늬 장식판과 상단 문에 부착된 열쇠구멍 덮개와 띠 장식이다.
상단 문을 열면 본격적인 아르누보 양식이 드러난다. 여섯 개의 호랑가시나무 문에는 디자인된 튤립이 상감으로 장식되었으며, 은제 투각 자물쇠는 디자인된 잎 무늬로 장식되었다.
애슈비와 아르누보의 관계는 그가 근대적인 제작방식을 거부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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