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 2>
애슈비는 1902년에 뮌헨미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런던의 학교와 길드를 글로스터셔의 치핑 캠프든 마을로 옮겼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공예뿐 아니라 농업까지 새롭게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애슈비와 그의 제자들은 잉글랜드와 파리, 빈, 뒤셀도르프, 뮌헨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애슈비는 결국 현대문명은 기계작업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는 1911년에 현대문명은 기계에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미술교육을 장려하거나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시스템은 합리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주제에서,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가 1892년에 프랑스어로 쓴 기괴한 미와 환상의 시극 <살로메 Salome>를 위한 삽화나, 런던 태생의 시인이며 평론가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시 <머리카락을 훔친 자 The Rape of the Lock>(1712)에 나오는 퇴폐적인 18세기 풍경을 묘사한 후기 드로잉에는 아르누보의 모든 요소가 나타났다.
와일드의 아버지는 유명한 안과의사이며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와일드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한 것은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일 때였다.
1895년에 동성연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참회록 <옥중기 De Profundis>(1897)는 그 소산이다.
직물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 앓은 병으로 평생 불구의 몸이 된 포프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고전을 익혔고 타고난 재능으로 스무 살 때 이미 시집 <목가집 Pastorals>을 발표했다.
<머리카락을 훔친 자>는 포프가 스물네 살 때 쓴 것이다.
1893년 2월 오랜 학교 친구인 스콧슨-클라크G.F. Scotson-Clarke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98)는 완전히 새로운 드로잉과 구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식을 “일본을 암시하지만 완전히 일본적이지 않은”이라는 표현을 하여 적어도 자신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브라이턴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을 마친 뒤 런던에서 독학으로 화화를 배우고 음악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비어즐리는 번-존스의 권유로 판화를 배우기 위해 야학에 다니며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았다.
1892년 파리에서 프레스코화의 영향을 받아 침묵하는 색조와 구도로 담백미를 풍기는 벽화를 주로 그린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1824-98)을 만났고 툴루즈-로트레크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풍속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1893년 월간지 <스튜디오 Studio> 창간호에 특집으로 실린 <나는 너의 입술에 입 맞추었노라 J'ai baise ta bouche>로 명명된 비어즐리의 삽화는 공중에 떠 있는 악마 같은 살로메가 피를 흘리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다.
영국과 유럽에서 구독되던 <스튜디오>는 비어즐리에게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아르누보 양식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 1894년에 미국인 작가 해런드와 함께 창간한 <옐로 북 The Yellow Book>에 실렸다.
<옐로 북>은 퇴폐적 표현에 대한 비난으로 1897년에 폐간되고 그는 새로 <사보이 The Savoy>를 창간하여 스물다섯 살로 요절할 때까지 제작을 계속했다.
그의 작품은 아르누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국가에서 나타난 성숙된 아르누보 초기의 예가 되었다.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의 리버티상사Liberty Company가 날염한 직물은 또 다른 차원에서 미술공예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부유한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해 가장 성공적인 소매점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티상사는 아서 라젠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1843-1935)가 1875년에 첫 번째로 연 상점이다.
그는 스스로 ‘동인도 상인 East India Merchant’을 자처하며 동양에서 수입한 도자기, 카펫, 그 밖의 제품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함부르크 출신의 화상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1838-1905)도 파리에서 유사한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리버티상사는 영국 미술공예 제품, 특히 아치볼드 녹스Archibald Knox(1864-1933)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웨일스 제품과 튜더 제품을 팔기도 하고 생산해냈으며, 또한 대륙의 아르누보를 런던의 구매자들에게 소개하고 리하르트 리메르슈미트Richard Riemerschmid(1868-1957)의 의자와 헝가리 상사인 졸네이의 도자기 같은 물품도 취급했다.
리메르슈미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미술애호가의 방’을 위한 실내장식 계획을 전시했으며, 다음해에는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세기말 건축물인 극장을 설계했다.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리버티상사는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상업적으로 생산한 자사의 가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서 라젠비 리버티는 1890년 파리에 1931년까지도 남아 있던 오페라 가 38번지에 지점을 열었으며, 이 상사의 제품, 특히 직물과 벽지는 헬싱키부터 밀라노까지 유럽 전역으로 판매되었다.
리버티의 성공은 ‘예술가구’를 좀 더 적정한 가격으로 직접 제작한다는 회사의 정책이 중산층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리버티상사가 취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르누보 이해에 중요한데, 유럽 아르누보의 많은 주요 인물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리버티상사는 1899년에 유명한 자사 제품인 은과 보석류의 쿰릭Cymric(웨일스Welsh 사람들이 선호한) 제품과 뒤이어 1901년에는 튜더식 백랍제품Tudric Pewter range을 출시했다.
보석상자, 벨트, 버클 그리고 모자핀 등으로 이루어진 이 금속제품들은 켈트부활Celtic Revivial과 르네상스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녹스가 디자인한 1900년의 쿰릭 보석상자는 단순한 형태에 당대의 섬세한 곡선이 가미되고 아르누보의 느낌이지만 여전히 미술공예운동에 뿌리를 둔 절제된 선적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다.
자사의 화가와 디자이너를 밝히지 않는 리버티상사의 방침으로 누가 무엇을 설계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