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96)>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대표하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96)는 1834년 3월 24일 런던 근교 에섹스Essex의 월탐스토Walthamstow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주식중개인이자 구리광산의 공동 소유주였으며, 그 덕분에 모리스 가족은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집 주변의 에핑 숲Epping Forest과 어린 시절에 방문한 중세기 영국의 정신적 중심지로 6세기에 건립된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은 어린 모리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버지가 오십 세로 타계한 이듬해 열네 살의 모리스는 말버러 대학Marlborough College에 입학했으며, 학교 친구들은 그가 땅땅한 몸에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검은 곱슬머리로 온순하고 친절하지만 성을 내면 두려울 정도라고 기억했다.
어릴 적부터 책벌레로 소문난 모리스는 중세 기사의 세계와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
말버러 대학에 재학할 시기에 그는 환경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라파엘전파주의의 중세적 경향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달리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853년 옥스퍼드로 가서 엑서터 대학Exeter College에 입학한 모리스는 그곳에서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을 선도한 중심도시인 버밍엄Birmingham 출신의 젊은 에드워드 번-존스를 만났다.
시를 좋아한 번-존스에게는 종교개혁 뒤 생긴 영국국교 가운데 한 유파로 예배와 성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고교회파the High Church(or Puseyite school)의 성향이 있었다.
모리스와 번-존스의 우정은 비슷한 취향과 새로운 발견에 대한 공통된 관심에 근거했다.
중세의 낭만주의 세계에 빠져든 두 사람은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지만 여러 해에 걸쳐 북프랑스와 벨기에를 여행하며 샤르트르, 루앙, 아미앵 등의 고딕 성당을 방문하고 훗날 인생 최대의 기쁨이었다고 토로했다.
두 사람은 또한 보들리 도서관Bodleian Library에 소장되어 있는 장식필사본들을 연구하며 독일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1471-1528)의 판화복사본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사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그룹을 만들고 스스로를 형제단The Brotherhood으로 불렀다.
모리스와 번-존스는 러스킨이 밀레이와 함께 글렌핀라스에 있을 때 쓴 에든버러Edinburgh 강의의 출판을 계기로 라파엘전파에 관해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헌트, 밀레이, 브라운, 로제티의 작품을 보았고, 그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은 로제티가 1853년에 그린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그리고 있는 단테 Dante Drawing the Head of Beatrice>였다.
두 사람은 성직자가 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모리스는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옥스퍼드에서 중세 부활을 지향하는 가장 독창적이며 힘 있는 건축가들의 사무실 가운데 하나인 G.E. 스트리트G.E. Street의 사무소에 자리 잡았다.
번-존스는 화가가 되고자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로제티가 그에게 영웅이 되었다.
노동자 대학 구내였던 그레이트 오먼드Great Ormond 가에서 번-존스는 로제티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소개받았으며, 그 뒤 블랙프라이어스Blackfrias 다리 근처에 있는 그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로제티의 지도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편 모리스는 옥스퍼드에 남아 일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들을 만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로제티의 영향이 젊은 수습건축가에게 점차 커져갔다.
모리스가 일하던 사무소가 런던으로 이전한 뒤에 모리스와 번-존스는 라파엘전파 후기시절에 로제티와 데버럴이 사용했던 레드 라이언 광장의 방으로 이사했다.
건축에 관심이 없던 로제티가 모리스로 하여금 건축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일 년에 9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리던 모리스는 이를 감당할 수 있었고 시적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로제티의 확신에 찬 말에 쉽게 흔들렸을 것이다.
모리스는 1857년 봄과 여름에 드로잉과 회화를 열심히 그렸지만, 영국의 기사이면서 작가 토머스 맬러리Thomas Malory(1408-71)의 산문 대작 <아서 왕의 죽음 Morte d'Arthur>(24권, 1485)에서 주제를 가져와 제대로 된 유화를 처음 시도했을 때 실망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
그때 레드 라이언 광장의 방에 가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와 번-존스 그리고 로제티는 각자의 디자인에 따라 장식적 가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로제티는 찬장의 문 위에 유화를 그리기로 했고, 번-존스는 자신의 옷장을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수녀원장의 이야기 Prioress's Tale>에서 따온 장면들로 뒤덮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재능이 패턴 만들기와 디자인에 있음을 알았고, 주변 환경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몹시 열의를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