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아르누보와 앙리 반 데 벨데>
벨기에, 프랑스, 독일의 아르누보에는 공통점이 많다. 자연에 대한 매료, 추상성, 곡선에 대한 관심, 상징주의와 정신주의에 대한 내밀한 관심, 그리고 현대적이기를 바라는 열망 등이 그 예이다.
영국 아르누보의 대조적인 두 경향인 찰스 로버트 애슈비와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의 양식, 즉 단순함과 호화로움, 도덕적인 요소와 퇴폐적인 요소는 영국의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인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의 벨기에 화가들을 통해 유럽 아르누보에 전해졌다.
아르누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이 벨기에였듯이 이 양식이 완성된 곳도 1890년대 초반의 벨기에였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반대한 봉기였던 1830년 혁명 이후에 건립된 작은 나라로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져 19세기 중반과 후반 세계에서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국가로 부상했다.
벨기에 왕국의 수도인 브뤼셀의 인구는 1850년에 12만 5천 명이었던 것이 1900년에는 19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브뤼셀은 아르누보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고 영국과 대륙의 매개역할을 수행했다.
벨기에 화가들은 영국의 영향 외에도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벨기에 화가들이 급진적 색채를 수용할 수 있었던 데는 벨기에 정치상황이 한 몫을 했다.
1840년대 이래 벨기에에서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나중에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그래서 정치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1886년에 리에주Liege와 그 밖의 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의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다.
벨기에 노동자당Belgian Workers` Party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노동자당은 특이하게도 전위적인 미술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벨기에 아르누보 양식은 처음에는 영국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앙리 반 데 벨데,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 빅토르 오르타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