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의 그 장대한 시간 속에 책을 빚어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정도 되면 그 스펙트럼을 나의 인생으로 옮겨봄직하다.
나의 인생에 계기를 만들어준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는 그런 책들을 '내 인생의 책'이라고 하고 몇 개씩 꼽아 본다. 나도 오늘 그 꼽아 봄을 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려고 한다. 연대기처럼 나열하기에는 기억이 희미해서 생각나는 대로 가능한 이른 시간순으로 써본다.
(덧붙임: 북플에 있는 읽은 책 목록을 광속으로 스크롤 해보니, 여기에 추가하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나에게 많은 계기를 만들어준 굵직한 책들만 열거하는 것도 쓰는 나도 고욕일 것 같고 보는 이도 어지러울 것 같아 많이 줄였다)
<백년 동안의 고독> 내가 이 앞에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내가 이 앞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을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내 유년 시절의 굴레와 그런 벗겨낼 수 없고 피해갈 수 없던 일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될 때, 그 영원 회귀를 이보다 더 공감해주고 이보다 더 격려해주었던 책이 어디에 있던가. 더 나은 처지도 더 못한 처지도 아닌 동병상련의 정확한 위치에서 무엇도 말하지 않고 그저 공감하고 위로해주었던 책이 또 어디에 있던가. 모든 것이 마술적 리얼리즘처럼 거짓말 같았고 또 거짓말같이 흘러가 버린 것을 그 어떤 책이 이보다 더 고요한 슬픔으로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느꼈던 것을 좀 더 전문적이고 학문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영원 회귀'라는 말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카뮈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방인> 그랬다.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취해있을 때, 참.존.가를 보고 '영원 회귀'에 눈을 떴고, <이방인>의 카뮈에 그 '영원 회귀'가 현실에 내려앉은 '부조리'를 맛보았다.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일들과 사람들 속에서 어느 날 문득 같은 하늘이지만 몽환적이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그 하늘 아래에서 '왜'라는 질문과 함께 숨 막히듯 몰려오고 '의문'이라는 액체로 익사할 것만 같은 '부조리'를 만났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문득 '나는 왜 출근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 회사에 이렇게 다니고 있을까', '나는 왜 이 프로젝트를 이 사람들과 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 부조리한 질문이 고개를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증을 우리의 뇌가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되면 위험할 수 있다고 자각하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현실을 지속시키지 않게 무기력하고 극도로 우울하게 만들고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처럼 부조리를 느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남들 눈에는 잘 다니고 있는 회사를 별 이유 없이 그만두고, 오랫동안 준비해서 곧 끝날 일들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잠적을 해버리는 것을 남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결정을 야기한 부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조리와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마다 나에게 그 녀석은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스럽게 그리고 따스하게 찾아와주었다고 생각해준 책들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지금도.
<소크라테스의 변명> 인간 사유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을 이 한 권의 책이 제대로 경이롭게 보여 준다. 책을 덮은 이후에 가장 오랫동안 내 속에서 화자된 책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양립하는 두 존재가 대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아직도 나에게 소중한 진리를 알려준 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립으로 영원불멸을 설파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나도 닭 한 마리를 바치고 싶다. 그리고 지행합일의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한 그의 독배는 언제나 나에게 알고 있음을 (가치관) 행하라고 격려하고, 주저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질책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나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질문을 할 용기를 가지게 해주었고, 세상의 진리라고 믿고 있던 것을 의심하며 질문하고 고민함으로써 새로운 창의적인 산출물들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후배 (신입) 개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차피 기술은 항상 새롭게 나오고 그 기술 앞에서는 10년이 넘은 개발자이든 1년의 뉴비(newbie)이든 평등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었던가.
<사진에 관하여>에서 수전 손택이 펼쳤던 내용은 사실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것은 생전 처음 '사상가'를 만나 그 '사상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 어렴풋이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어렴풋하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서 아주 오랜 세월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그것에 관한 책이며 논문을 읽고 또 읽으며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상가들은 글을 써가며 인용구들이 저절로 발상 되고 참고 문헌이 새싹처럼 자연스럽게 샘솟고, 그래서 그들의 논지는 전문적으로 보이고 타당하며 또한 공을 들여 잘 가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상가'들은 그들의 사유가 '처절' 하다는 것이다. 사사에 사상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사상이 아직도 일상에 완전히 스며들지 않았기 때인 일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그 완성을 위해 언제나 처절하다. 그 사상가들의 사상을 어쩌다 한 번씩 이야기의 주제로 올리거나 어떤 여가에 다루는 이들과 사상이 다른 것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손택은 말했다. 부재하기 때문에 사진에 담았다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명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사진에 관하여>를 보며 치열하게 사유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를 러시아 문호들의 불에 끌려 들어가는 나방으로 만들어주는 작가와 작품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안나 카레니나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도스토옙스키가 나의 시발점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저 넓은 러시아 땅과 같이 나를 광대한 러시아 문학에 제대로 흠뻑 빠지게 해준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이다. 문동의 까만 책 표지가 마치 러시아의 밤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안나 카레니나를 표지로 삼았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표지가 되기 위해 최초에 문동의 표지는 그런 의도로 디자인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러시아 문학은 삶의 긴 부분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 말 많은 양반들은 그 길게 다루어지는 삶의 모퉁이 곳곳에서 그들 러시아의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러시아의 이야기는 변화하고 있는 러시아 속에 있는 종으로는 각 세대들을 횡으로는 각 계급들을 입체적으로 대변한다. 그리고 그들의 러시아적 사랑을 담은 안나 카레니나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한때는 부부였다고 한다. 한 사람은 눈이 멀어가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 맞추기 위해 글을 쓰듯이 보이려고 흰 종이에 흰 것을 쓴 채로 종이를 쌓아가는 이야기를 썼다. 또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찾듯이 찾아 나선다. 종이의 활자들이 의미를 전달하는 용도가 아니었고 감정을 전달하는 그 원래의 의도를 흰 종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채워나갔다. 처음의 한 사람은 <사랑의 역사>를 썼고, 나중의 한 사람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썼다. 나중의 한 사람의 책 마지막은 하염없이 떨어진다. 처음의 한 사람은 불어난 물에 원고가 위태롭다. 둘은 한때 부부였지만, 이제 부부가 아니고, 둘은 함께였을 때였는지 그전이었는지 그 이후였는지 책을 덩그러니 남겨 놓았다.
나는 이 두 책과 두 작가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왜 잊지 못하는 것일까. 동시대의 두 작가가 함께였다가 이제는 함께 가 아닌 것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실을 그저 알게 되어 '놀람' 때문일까.
<사랑의 역사>는 그리고 <엄청나게는>는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이 우리가 갈망했던 것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다. 서로가 그 할머니처럼 눈이 잘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두 책은 0과 1로 이루어진 세상에 갇혀있던 나에게 3과 함께 다른 많은 숫자가 그리고 마이너스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이다.
역사와 글쓰기와 경영과 이론물리학과 기술 트렌드와 미술과 의식과 심리학의 모든 분야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밝혀주었던 책을 모조리 망라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책들을 읽은 시간만큼이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마지막으로 여기에 두고 싶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두 명 중 한 명의 어머니가 쓴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다섯 권은 산 것 같다. 내가 읽기도 전에 네 권을 선물했다. 책 제목만으로도 이 책을 먼저 발견한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떤 변명도 어떤 항변도 어떤 재발견도 없는 이 책은 그저 자신이 그날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죽은 총기 난사 사건의 어머니임을 제목으로 말하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나 자신보다 더 위하는 존재가 그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을 알지 못했음을 말하는 이 책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선물하고 싶었다. 마치 내가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되기 위한 하나의 의식적인 과정처럼 말이다.우리는 상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결과물인 것 같다. 그 상대는 내가 내 마음속에 만들어버린 형상이 아닌데 말이다.
나의 자존감은 사회 심리학에서 상대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쩐 면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그저 개인적 동물일 뿐일 수 있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단다'의 가장 슬프고 비통한 사례를 이 책은 용기 있게 보여 준다.
이렇게 글을 써보고 나니 내 인생의 계기가 되어주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계기. 그것은 나의 가치관을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다. 내 모든 사유와 행동 선택하는 그 기준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책들은 나에게 지식과 지혜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책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것들을 내 속의 서랍들에 차곡차곡 쌓기 위한 '분류'를 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