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네덜란드 거래선 담당자 Robert와 저녁을 먹었다.

Robert는 180cm가 약간 넘는 큰 키에 곱슬머리 금발, 40대 후반의 네덜란드 남자.
대학 졸업 후 쭈~욱 chemical sales를 해 온 이 바닥의 베테랑이다.
1년에 3개월 이상은 중국 출장을 다닌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암스테르담에 처음 갔을 때 내가 겪은 "정신적 충격"을 말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Robert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 I can understand your feeling. I fully understand you."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고 안네가 불쌍해서 막 울었다.
아....가엾은 안네! 얼마나 무서웠을까....

많은 어린이들이 울었겠지.나처럼.
지금도 이 세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그런데....
내가 처음 암스테르담에 갔던 1995년.
"Anne Frank House"를 방문한 나는 너무너무 놀랐다.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아주아주 비참한 환경을 상상했었다.
전쟁 통에, 그것도 숨어 살았으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까....생각했다.

그런데...안네가 살았던 집은....너무 좋았다.
건물 외부도, 내부도....훌륭했다.
고풍스런 가구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소리 때문에 물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안네가 그 집에 살았던 시기는 1942년 6월부터 1945년 3월.
생각 보다 너무 "럭셔리"한 Anne Frank House에서 쌩뚱 맞게 이런 생각을 했다.

1942년에,
일본 식민지였던 그 암담하고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기에,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어떤 집에 살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 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마구마구 아팠다.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Robert가 말했다.
70년대 초에 중국 출장을 처음 갔는데, 너무 가난해서 놀랐다고...
특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서 계속 꾹꾹 참으면서
미팅 내내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를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고....

Robert가 11년 전의 내 기분을 이해한다며 말했다.
Anne Frank House는 솔직히... 요즘 중국 시골에 있는 집들 보다도 좋다고...

11년 전, 학생이었을 때 느꼈던 굉장한 "쇼크"를
이젠 편하게 술안주 삼아 말하게 되었다.

11년 전, 난 노가리 안주를 사치로 생각하는 학생이었고,
11년이 흐른 지금, 난 고급 한정식집이나 일식집에서
바이어들이랑 저녁을 먹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정말....많은 것이 변했다.
너무 큰 충격이었고, 또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젠 편하게 얘기한다.

어제 11년만에 Anne Frank House에 다녀온 소감을 얘기했다.
11년 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견문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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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4-2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네의 가족들은 다락방에서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저런 집이었단 말이죠.
저도 처음 알았네요.
가끔은 저도 그런 생각해요. 예전에는 맥주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치여서 늘 소주만 먹었는데.... 학교앞 자장면도 어쩌다가 먹어보는 사치였고....근데 지금 너무 잘사는게 아닌가 괜시리 세상에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프레이야 2006-04-26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도 안네의 방을 나름대로 상상해보곤 했는데.. 충격적이네요. 문화의 차이랄까요 사는 방식의 차이랄까요..

moonnight 2006-04-2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요? 저도 몰랐어요. 책 읽을 때는 아주 좁고 불편한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차이가 크네요. ㅠㅠ;;

비로그인 2006-04-2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럴 줄 알고 첨부터 안네의 일기를 읽지 않았습니다
ㅡ,.ㅡ 힝

kleinsusun 2006-04-26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그죠? 님도 안네가 다락방에서 살았는지 알았죠?
11년 전, Anne Frank House에 갔을 때, 전 정말 집이 너무 럭셔리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침략군에게 죽음을 당한 한 가난한 나라의 시골 소녀가 쓴 일기가 발견됐다면, 과연 그 일기는 <안네의 일기> 처럼 될 수 있었을까?

혜경님, 월요일 밤, 술 한잔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
11년 전 Anne Frank House가 생각났답니다.
Anne 가족들은 원래 부유했어요. 부자고 아니고에 관계 없이, 나찌의 만행과 숨어 사는 공포가 본질적인 거지만, 그래도 상상을 통째로 깨는 Anne Frank House를 처음 봤을 때, 전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달밤님, 아....저만 그렇게 상상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책에 그림도 없었는데 혼자 그렇게 상상했구나...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담에 네덜란드 여행 가시면 한번 가 보세요! 아....여행가고 싶다.^^

나를 찾아서님, 제가 어렸을 땐 독후감 숙제 때문에 모두가 읽었답니다.ㅎㅎㅎ

BRINY 2006-04-2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략군에게 죽음을 당한 한 가난한 나라의 시골 소녀가 쓴 일기가 발견됐다면, 과연 그 일기는 <안네의 일기> 처럼 될 수 있었을까? -->동감입니다.

2006-04-26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4-2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생각하면....씁쓸해요. ㅠㅠ

stella.K 2006-04-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도 몰랐어요. 너무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하군요.

kleinsusun 2006-04-2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 것 같아요.이 경우엔....
식민지 시대, 6 25 , 베트남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란 우리들에게
전쟁 통에 숨어 사는 집이란 당연히 아주 황폐하고 피폐한 환경이라고 상상할 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 않을까요?^^

플레져 2006-04-2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영화에서도 방공호가 더 멋있더라구요 ㅎㅎ
환경이 사람의 상상력까지 지배한다는거... 당연한건데 괜히 오싹해요.

kleinsusun 2006-04-2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오싹해요. 우리의 상상력이라는게.....공간적, 시간적 환경의 제약 속에 정형화 된다는게.... 다들 비슷한 상상을 한다는게....
 



어제 상하이에서 돌아왔다.

거의 항상 그랬듯이
비행기에서 부터 가슴이...답답했다.
차라리 비행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이런 생각을 했다.

출장보고서며,
다음주에 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
해야 되는데 미루고 미루다 아직 안한 일들,
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다는 봉숭화 연정처럼
한마디 툭뱉는 말에 스트레스로 감전될 것 같은 팀장의 얼굴,
이런 저런 별로 "happy"하지 않은 일들이 잔뜩 떠올랐다.

외국에 갈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무슨 나라건 상관 없이 그냥 이런 생각을 한다.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내가 전생에 이 나라에서 태어났나 보다."하는 찌릿찌릿한 필이 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일상으로의 복귀"가 두려워서.

아까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친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잘 지냈어?"

난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 어, 잘 지내. 남들 보기엔..."

친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야, 그건 전혀 중요한게 아니쟎아.
회사 사람들한테 보이는 대외용이지. 넌 참...."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중요한건 뭘까?

상하이 시내를 걸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어떤걸까?

항상 사춘기 같다.
이리 저리 헛갈리는 생각이 많고, 쉽게 불안해 한다.

" When will I accept where I am?"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때는 세상 어느나라에서 돌아오더라도,
우주 끝까지 날라갔다가 다시 변한 것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더라도,
편안할 수 있지 않을까?

자꾸만 두리번 두리번 거리지 말고,
가지 않은 길을 뒤돌아 보며 후회하지 말고,
겉으로만 센 척하고 속으로는 주눅들어 움추리지 말고,
그저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지.

온갖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쭈그리고 있기에
봄날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리고 나도...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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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3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앞으로 살 날이 걱정스러워지네요
수선님 홧팅~

혜덕화 2006-04-2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범 스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 기분에 속지 말라고. 조건이 사라지면 따라서 사라지는 행복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구요. 그 후로 가끔 묻곤합니다. 지금의 조건들이 사라져도 행복할까? 자신이 없더군요. 그말에 예스라고 하기가...... 우울함에 속지 마세요. 행복함에도 속지말구요. 대외용 나 속에 숨어있는 진짜 수선님을 찾으세요. 씩씩하게 보이는 수선님이 아니라, 정말로 씩씩하고 아름다운 수선님을......제 눈엔 보이는데요. 그렇게 찾으려고 하는 그 속에 바로 수선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가까워서 안보이시나요?_()_

BRINY 2006-04-2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춘기만 우울한가요 뭐.
어제 고2학생 하나가 그러더라구요. [요즘 이런 저런 안좋은 일이 많아 심적으로 우울했어요. 제 나이엔 고민이 많은 게 정상이죠?] 저는 순간 [어른이 되면 고민이 줄어들 거 같냐. 고민만 하면 뭐하냐. 답이 나와야지~]그러려다가 다시 맘을 고쳐먹고 [그럼, 그 나이땐 고민 많은 게 정상이야]하고 그냥 위로해주고 말았어요.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또 다 잘해내실거잖아요~~ 다 그런거죠 뭐~

kleinsusun 2006-04-23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찾아서님, 어....제가 괜한 글을 썼나봐요. 왜 갑자기 걱정을...???
어쨌든....같이 홧팅해요!^^

혜덕화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음이 누그러지네요.^^
맞아요,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저도 생각해요.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이 없어져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때, Yes라고 대답하지 못해요. 그런 것처럼 순간순간의 우울함에도 같이 춤을 추면 안되겠죠? 감정의 장난에 속지 말기!!! 네, 오늘의 우울함에 안 속을께요, 감사합니다.^^

Briny님, 깜짝 놀랐어요."어른이 되면 고민이 줄어들 거 같냐?" 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고...ㅎㅎㅎ 그런데....대부분의 고민들이 답이 없쟎아요. 그냥 시간이 흐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결되는게 대부분의 경우....
맞아요, Briny님 , 다 그런거죠 뭐~ 내일 부터 또 다른 한주를 즐겁게 시작하자구요!^^

moonnight 2006-04-2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수선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내 자리가 어디일까. 항상 고민하고 찾으려 노력하는 그 모습도 무척 아름답구요. ^^ 일요일이 가고 있어서 너무 슬퍼요. 흑흑. 또 월요병 시작이에요. ㅠㅠ;;

kleinsusun 2006-04-23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저도 일요일이 가는게,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게 슬퍼요.
시간이 째각째각...잘~도 가네요.그래도...곧 5월 1일 연휴가 오쟎아요? ㅎㅎㅎ
혹시...병원은 5월 1일에도 하나요?
우리 같이 홧팅하구요, 저랑...술 한잔 하셔야죠? ^^

플레져 2006-04-23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사춘기라고 느끼는 수선님의 일상이야말로
시들 염려가 없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어요. 깨어있는 꽃! ^^

로드무비 2006-04-2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 인상적이었는데......
잘 다녀오셨어요?
여행 후의 우울 모드 알 것 같아요.
수선님과는 상관이 별로 없는지 모르지만 제 방에 재밌는 글 하나 퍼놨으니
읽으시고요, 잠깐 낄낄거리세요.^^

마늘빵 2006-04-2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kleinsusun 2006-04-2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여독은 다 푸셨어요? 전 오늘 쫌 피곤하네요. 그래서 초콜릿을 마구 먹었어요.아침부터...ㅎㅎ 우리 행복한 한주 시작해요!^^

로드무비님, 낄낄거리려고 페이퍼를 읽었는데 웃기지가 않고 "감정이입"이 느껴지는데요. ㅎㅎㅎ

아프락사스님. ^^

2006-04-24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6-04-2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상하이 간 사이 저는 서울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저녁때 시간이 나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말았습니다.너무 뻔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것을 미리 우려하여.혼자 다니던 학교를 찾았습니다.저녁 시간이어서 학교 안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중간고사 기간이어서 거리가 썰렁하더군요.... 그냥 여기 저기 걸어다니다 집으로 갔습니다.수선님이 서울에 계셨으면 제가 전화라도 한 번 드렸을텐데....ㅆㅆ
전 최근에 '굿바이 솔로'마지막 장면 보고 발리 같은데서 살고 싶어져서 큰일이에요.따뜻한 나라..여름에는 무척 덥겠지.

kleinsusun 2006-04-25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팀전님의 마음 백배 공감해요.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려다 너무 뻔한 얘기가 오고 갈 것이 생각나 슬쩍 핸드폰 폴더를 다시 덮는 그 심정.....
오랜만에 만나서 "넌 요즘 뭐하니? 누군 뭐 했데, 누군 뭐 했데..." 하는 그 일상적인 대화에서 느끼는 허탈함이라고나 할까?
아....제가 있었으면 "처음처럼"이라도 한잔 사드렸을텐데...ㅎㅎㅎ
<굿바이 솔로>에 발리가 나오나요?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저도 어디 외국에서 살고 싶어요.훌~쩍.

2006-04-25 0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6-04-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처럼"이 뭐에요????? 새로 나온 술이름이에요????

kleinsusun 2006-04-2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처럼" 안 마셔 보셨어요? ㅎㅎㅎ
저희 동네는 참이슬 → 처음처럼 으로 싸~악 바꼈어요. 훨 순해요. Please try!^^

드팀전 2006-04-2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렇군요.그래도 소주는 부산 '시원' 소주가 최고!!!
제가 부산 내려와서 첨에는 이걸 먹고 "에고 맛이 뭐이래" 이랫는데 한 6개월쯤 지나고 나니까..역쉬 소주는 시원.......
진짜라니까요.예전에는 서울에 한 두병 가지고 가서 애덜 먹인적도 있답니다.ㅋㅋ
부산에서는 거의 90%이상이 시원소주 먹어요.진짜 진로보다 나은데...입맛이 적응돼서 라고 하데요.그래도 시원이 더 좋아요.ㅋㅋㅋ
 

토요일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내가 신입사원 때 결혼한 절친한 친구 H는
모대학의 겸임교수이며, 어엿한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학부형이다.
큰 애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라니....시간 한번 정말 빠르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H와 함께 삼총사였던 친구 B는
세 아이의 엄마다.
쌍둥이 엄마가 되서 주위를 놀라게 한게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 귀여운 쌍둥이들의 동생을 낳았다.

H와 B를 만나면 물론 반갑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자란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런데....H와 B를 만나면 내 자신이 작아 보인다.
솔직히...불안함을 느낀다.

H와 B는 이미 오래 전에 한 일들이
내겐 숙제로 남아 있다.

결혼하기, 엄마 되기, 부자 되기 등등...

물론 내가 꼭 해야 할 숙제는 아니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모두 다 똑 같은 길을 걸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서
쿨한 척, 멋있는 척 하며 살기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일이란 게, 물론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버겁고 힘들 때도 많다.
정말 확~ 때려 치고 싶을 때도 많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주위에서는 출장 자주 다니고, 겉 보기 화려해 보이니까
"멋있어요!"
"피오리나 같은 CEO가 될꺼예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사,회계사,변리사 같은 든든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엔지니어나 연구원 같은 전문인력도 아니고,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 밖에 없는 평범한 회사원 입장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에겐 한 능력하면서 집도 부자인 남편이 있다.
친구들에겐 벌써 뛰어 다니는 애들이 있다.
친구들이 소유한 부동산은 고공행진을 하며 쉴새 없이 오르고 있다.

"비교"라는 게 마음의 평화에 가장 나쁘다는 걸 안다.
"비교"라는 게 얼마나 부질 없고, 파괴적인 건지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솔직히 불안하다.

친구들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우뚝 서있는 저택이라면,
난 낯선 바다를 떠돌고 있는 유리로 만든 배 같다.

너무 self-esteem이 부족한걸까?

토요일에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와서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켰다.
한시간, 아니면 두시간 후?
난 쌩뚱 맞은 site들에서 헤엄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난....몇몇 대학의 MBA 입학 과정을 보고 있었다.

주위에 퇴근하고 대학원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느낀 불안감이 보태지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부채질 했나 보다.

내가 졸업한 학교를 비롯한 2~3 대학의 MBA 입학과정, 지원절차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지금....뭘 하고 있는 거지?
왜 항상....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왜 항상....스스로를 좀 편하게 놔두지 못하는 거지?

자기계발은 좋지만 MBA는 뭔 MBA냐?
하고 싶은 공부가 얼마나 많은데...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공부를 하려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 말은 진실이다.
쓸데 없이 불안에 떨지 말자.
불안 때문에, 쓸데 없는 일을 벌이지 말자.

수~금 상하이 출장이다.
월요일 아침부터 정신 못 차리지 말고, 출장 준비를 잘하자.
현재 주어진 일에 충실하자.
쓸데 없는 감상, 쓸데 없는 불안에 휩쓸리지 말자.

48시간 후면 상하이로 날아가는데,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구.오키?

불안~ 꺼져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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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04-1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 불안~ 꺼져버려!!!

마늘빵 2006-04-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으세요 (이런 쌩뚱맞은 멘트를 하다니! )

이리스 2006-04-1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백배 공감하고 갑니다! 추천 누르고 화이팅 외쳐드려요~

마태우스 2006-04-17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날에 대한 불안은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잘릴까봐 늘 불안해하구... 주위에선 니가 왜 잘리냐고 하지만, 저 스스로는 그렇거든요. 수선님도 주위에서는 피오리나처럼 될거라 하지만, 님 스스로 너무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신 듯... 그게 인간의 속성이겠지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아무리 앞서 있어도 불안하고, 조금만 뒤지면 :"오늘 졌네" 이러잖아요.

비연 2006-04-1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하이, 잘 다녀오세요^^
비교한다는 건, 제 인생에서 남의 인생을 사는 참 소용없는 시간들입니당
출장지에서 더욱 님을 찾는 경험들 많이 하시길 바라며..^^
참고로 상하이, 재밌슴다~^^ 구경도 실컷 하세요~~

다락방 2006-04-1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은 월요일은 수선님 앞에 앉아 소주잔을 부딪치고 싶네요. 맑은 소주가 마음을 달래주려나요..휴~

kleinsusun 2006-04-17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그래도 아침에 "꺼져버려!" 소리치고 났더니 슬슬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당.

아프락사스님, <불안> 사서 책장에 꽂아둔지가 벌써 작년이네요.
읽어볼께요. 근데....이 책이 불안을 잠식시키는데 도움이 되나요?

낡은구두, 아.... 낡은구두님도 이런 기분 느끼신 적이 있군요. 위안이 됩니당.
우리 빨리....곱창 먹으러 가요. 곱~창!

마태님, 잘리실까봐 걱정하시는거....정말이었어요? 전 농담 또는 겸손함인지 알았는데....
마태님 같은 슈퍼스타도 불안해 하신다니....위안이 되네요. 언제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연님, 맞아요. 비교 한다는거 참 부질 없고, 소용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예요.
알면서 못하니깐 문제지만....
제 자신에 좀더 다가가는 좋은 시간 보내고 올께요. 감사합니다, 비연님^^

다락방, 날씨가 참 꾸물꾸물하네요.
다락방님도 약간 우울모드? 아님 저를 위해 소주 한잔?
우와....다락방님, 감동이예요. 저 상하이 같다 와서 한잔 하자구요.
직장이 강남역 근처라 하셨죠? ^^

혜덕화 2006-04-1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장이 수선님, 불안은 사라졌나요?
불안이 어디에 있었죠? 마음 속에? 아니면 마음 밖에?
마음 속에 있었다면 꺼내서 던져 버리면 되고, 마음 밖에 있는 거였다면, 마음 밖은 수선님이 아니니 상관없겠죠?
저는 그렇게 자기 일 잘하고 글 잘 쓰고 여행도 많이 다니는 수선님이 대단하게 보이는데요. 상하이 잘 다녀오세요._()_

mannerist 2006-04-1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사다줘요. 씨익 앤드 화알짝 ^_^o-

(버르장머리 없는 매너놈 다녀와서 사정없이 두들겨 패셈... 불안 날아갈때까지. ㅎㅎ)

kleinsusun 2006-04-18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욕심장이"라고 부르시니 꼭 선생님 앞에서 떼쓰다 다독거려지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아요.ㅎㅎㅎ 글쎄요...불안이 제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걸까요, 아님 마음 바깥을 떠돌던 불안이 제가 약해졌을 때 침투한 걸까요? 음....요걸 생각해 봐야 겠네요. 마음 속에 있는 불안이면 툭툭 먼지털 듯 털어내게요.^^
혜덕화님 댓글은 언제나 제게 힘이 된답니다. 잘 다녀올께요, 감사합니당.

매너야, 헉....정말 때려도 되는거얌? ㅎㅎㅎㅎㅎㅎㅎㅎ
내 어찌 연애하는 알흠다운 청년을 때릴 수 있겠어?^^

2006-04-18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4-22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년 후, 한국
공병호 지음 / 해냄 / 200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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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정말 깜짝 놀랐다.

10년 후 한국경제가 암담하다면,
그건 <10년 후, 한국>에 기술된 공병호가 지적한 현상들 때문이 아니라, 이런 책이 "CEO를 위한 도서"로 추천되는 한심한 세태 때문이다.

이런 책을 추천하고,
이런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한국사회의 암담함 아닐까?

황당하게도 <10년 후, 한국>에는 10년 후의 전망이 없다.
그저 2004년 현재 한국의 현상들에 대한 비판만이 가득하다.그것도 논리의 오류로 가득한.
글의 전개는 극도로 감정적이며, 논거는 빈약하다.

이 책은

1.한국의 현재 : 무엇이 문제인가?
2.10년 후 한국 :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3.한국의 위기 :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4.미래 준비 :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렇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한국의 현재"가 전체의 절반을 가볍게 넘는다.

모든 페이지가, 아니 한줄 한줄이 비약과 왜곡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11 대미외교,감정만으로는 안된다"라는 장을 보면,
공병호 아저씨는 한국을 로마에 멸망 당한 코린트와 비교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역사의 한 대목이 있다.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명분에만 치우치는 민족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그 사례가 <로마인 이야기>에 소개되어 있다.아테네,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3대 국가였던 코린트의 비극적인 멸망이 그 예이다.

그리스 문화를 존경했던 로마인들은 그리스 민족의 독립과 자치를 존중해 주고자 했다.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로마의 태도를 힘 있는 자의 관용이 아니라 그리스 문화에 열등감을 가진 자의 저자세로 받아들이게 된다.결국 로마인들은 관용을 거두고 코린트에 군대를 급파하고,로마군에 의해 송두리째 파괴된 코린트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p94)

코린트의 멸망을 곱씹으며 한국인으로서 되돌아봐야 할 것은 도대체 뭘까?
힘 있는 자 앞에서 까불다가 후회하지 말자?

공병호는 이런 식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로서
수많은 "인용"을 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인용한 저자는 우습게도 복거일과 공병호 자신이다.

"필자와 김정호 박사가 공동으로 집필한 <갈등하는 본능>의 내용을 인용한다."(p163)

이 부분에서는... 그 어떤 코믹북을 읽을 때 보다 큰소리로 웃었다.
세상에....책을 많이 읽은건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거로 자신의 다른 저서를 인용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공병호는 "한국 난리났다. 당신 큰일났다." 고 선동적으로 말한다.
그런데...공병호가 지적하는(?)- 대부분 일간지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현상들의 대부분은 한국 뿐만 아니라 짧은 기간에 고성장을 한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겪는 현상들이다.
고성장을 한 후에 저성장기가 오는건 경제 싸이클이다.

이 책의 I맺는 글I에서 공병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강조해 두고 싶은 점은 현실을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자신의 방식대로 곡해해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인간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의 약점을 벗어날 수 있다면,세상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없다.(p226)

참....알면서 왜 그러실까?
왜 공박사님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게다가 우기기 까지 하시는지?

공박사님, 앞으로는 번역만 하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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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6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키노 2006-04-1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네요 ㅎㅎㅎㅎ

글샘 2006-04-16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치의 책을 들쳐 보면, 자기가 '믿는' 것이 '진실'이고 '알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는 거 같더군요. 한국이 난리났다고 떠들어봤댔자, 난리난 사람은 서민이요 못사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저 사람의 책이 '처세술'의 교과서인 양 광고된 걸 보면, 좀 웃깁니다.

릴케 현상 2006-04-1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근데 번역은 잘한다는 뜻인가요

딸기 2006-04-1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추천...

2006-04-17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6-04-1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후 전망이 있을라믄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던가요? 궁금하네~
인간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의 약점을 벗어나는 게 대안이라고 말하던가요? 아...! 추상적이어라~
대안 없이... 난리났다 난리났다 열불 내는 것은 누군 못 한담... 해요..

kleinsusun 2006-04-1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님, 키노님도 이 책 읽으셨어요? 정말....이런 책이 추천도서로 선정된다는게....암담하네요.ㅠㅠ

글샘님, 공병호의 편파적인 시각이 정말 "교과서"처럼 인식될까봐 걱정입니다요.

산책님, 잘하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독서 노트> 보면 요약은 잘 되어 있더라구요. 책을 제발 그만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ㅎㅎ

딸기님, 감사합니다.^^

속삭이신님, 아........그렇군요. 그럼 공박사한테 대안으로 뭘 제시해주죠? 이민? ㅎㅎ

icaru님, 대안이란게 참....빈약하더군요.
뭐 기업은 "핵심 인재"를 뽑고 이런 다 아는 얘기고,
개인은 자기를 계발하고 이런..... 너무나 빈약한..... 그냥 호떡집 불났다고 난리치다가 슬그머니 끝나는 그런 책이예요.ㅎㅎㅎ 읽지마세용!^^

코마개 2006-04-1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자를 ILLHVHL이라고 부릅니다.

kleinsusun 2006-04-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쥐님, ILLHVHL이 뭐예요? ㅎㅎㅎ

외로운 발바닥 2006-04-2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께서 여러가지로 잘 지적해 주신 것 같네요. 저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지적 정말 공감이 갑니다.
그리고 인용에 대해서는 저도 좀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된 적이 많았지만, 정말로 자기책까지 인용했었나요?

kleinsusun 2006-04-2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자기가 쓴 책을 길게도 인용했다니깐요.
이 부분이 이 책의 백미라고나 할까요? ㅎㅎㅎ
복거일 등 자기랑 같은 생각하는 사람 책 인용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책을 직접 인용하다니....대단하죠? ㅎㅎ

nada 2006-05-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박사님 번역도 날로 드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본업이 뭐죠? 그거나 하시면 좋겠다는...

kleinsusun 2006-05-0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번역도 날로........생각 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로또라도 당첨되면 그만 하실라나요? ㅎㅎㅎ
 
사랑의 달걀 4 - 완결
마키무라 사토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오늘 사무실로 도착한 택배.
언제나처럼 기분 좋게 분홍색 칼을 들고 소포를 뜯었다.

<회사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문장 강화> 두권의 책을 들어 내자, 노란 만화책 4권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기분 좋게 <사랑의 달걀> 4권을 꺼내서 만화책을 싸고 있는 비닐을 벗겨 내는데, 하필 오늘 첫출근한 신입사원이 흘끔흘끔 쳐다 봤다.

뭘 그렇게 보나 했는데,
"과장"이라 불리는 한참 선배가
한낮의 사무실에서 만화책을 뜯으며 킥킥 거리는 모습은
놀라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사랑의 달걀> 4권을 들고 씩씩하게 퇴근했다.
월요일에는 차가 많이 막히는데,
기다렸던 만화책과 함께라면 "happy"한 퇴근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어찌나 "몰입"을 했는지,
버스에서 옆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았는지 얼굴 한번 쳐다 보지 못했다.

<사랑의 달걀>을 읽으며,
난 어렸을 때 꿈이 뭐였더라...생각했다.

꿈을 잊고 그저 "무사안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30살이란 나이에 부담을 느끼며 결혼을 고민하던 마코는
뜬금 없는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하루 아침에 잘 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백조가 된다.

우연히 찾은, 어렸을 때 그린 그림 한장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마코에게 힘이 되어준다.

" 나의 꿈은 가게 주인 "
글씨 위로는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한손에는 앙징 맞은 케익을 들고 있다.

난 어렸을 때 꿈이 뭐였더라?

요즘 애들은 학교에서 꿈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땐 하나 같이 비슷비슷한 대답들을 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꿈 또는 장래희망을 조사하면,
많은 여자애들이 이런 대답을 했다.

피아니스트, 선생님, 간호원, 현모양처....
아직도 기억 나는 가장 웃기는 대답은 "영부인"이었다.

학교가 <내 마음의 풍금> 배경 같은 시골이었냐구?
내가 다닌 학교는 지금은 타워펠리스가 있는 도곡동에 있었다.
교육열, 치맛바람이 젤로 세다는 강남 노른자 학교에서도
애들의 장래희망은 어찌 그리 촌스럽게 다 비슷비슷했는지...
또 여자애들은 왜 그리 여성스러운(?) 직업을 대답했는지...

난 한번도 현모양처라고 대답한 적도 없고,
선생님, 피아니스트,간호원이 되고 싶은 적도 없었다.
물론 "회사원"이 되고 싶은 적도 없었지만...

어렸을 땐 <미녀 스파이> 이런 외화 시리즈들을 TV에서 많이 했는데,
한 동안은 "미녀 스파이"가 되고 싶었다.
말광량이 삐삐를 보고는 삐삐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었다.
뭐 취미로라도, 잡문이나마 끄적끄적 거리고 사니깐,
그래도 그 때의 꿈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건 아닌 것 같다.

2년 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고3때 독서실 총무 아저씨한테 메일이 왔다.
정말 깜~짝 놀랐다.

감동스럽게도,
마음 짜~안하게도,
아저씨는 나는 잊고 있던 그때의 내 모습을 또렷히 기억하고 계셨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몇십번 읽으면서 니가 느낀건 뭐였니?"

아...전율이 흘렀다.
나는...내가 문고판 <싯다르타>를 몇십번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또 이렇게 쓰셨다.

" 니가 꼭 문학을 할꺼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은 것 같구나.
니 홈피를 보니 아저씨 생각이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네."

<사랑의 달걀>을 읽고,
어렸을 때 꿈을 생각하고,
나도 잊고 있던 내 모습을 기억해준 독서실 총무 아저씨를 기억했다.
또, 문고판 <싯다르타>를 심각하게 읽던 내 어린 모습을 기억했다.

만화책 사서 보면 돈 아깝지 않냐구?
난 오늘 저녁....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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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4-1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만화책 일단 찜!!!
어렸을 때 꿈은 저도 늘 평범했던 것 같은데.... ^^

2006-04-1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4-11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사랑의 달걀> 재미있어요. 함 읽어 보세용^^

숨어계신님,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데요^^

마태우스 2006-04-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그 시절에 싯타르타를 수십번 읽으셨다니...존경스럽습니다. 글구 님의 귀염성이라면 미녀 스파이도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듯합니다

kleinsusun 2006-04-1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이제 체력이 떨어져서 스파이를 할 수 있을까요? ^^

BRINY 2006-04-1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비교적 어릴 때 꿈을 이룬 케이스지만, 현실이 되고 보이 또 100% 만족은 안되더라구요. 그래도 만족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마키무라 사토루의 근작들은 거의 다 패턴이 비슷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kleinsusun 2006-04-11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어렸을 때 꿈이 선생님이었어요?
어렸을 때 꿈꾸었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이란건 참 멋진 일이네요.^^
마키무라 사토루는 처음 읽어봤어요. 다른 책들도 "여자의 독립" 이런 내용인가보죠? 저 <이매진> 주문했는데.....실망할까요? ㅎㅎ

로드무비 2006-04-1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들어와 첫 마이리스트에 올렸던 만화.
'사랑보다 일이라고라?'라는 제목으로.ㅎㅎ
언제 제가 수선님께 절판된 좋은 만화 뭉텅이로 빌려드릴게요.
제 안목 믿으시죠?ㅎㅎ

kleinsusun 2006-04-1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로드무비님 리스트 보고 읽었어요.ㅎㅎㅎ
<이매진>도 샀답니다. 로드무비님 안목은 정말 짱이예요!!!
근데...오늘 제가 회사에서 된통 깨지고 기분이 완전 바닥인데요,
오늘 같은 날은 "일이라고라? 다 때려치자!" 이런 생각이 드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