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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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지인이 편해영과 황정은(지인은 이분을 조금 더 좋아하신다고) 작가를 좋아하고, 두 작가가 친구라는 TMI까지 곁들여서 얘기를 했었다. 나한테 추천하고 싶은 책 있냐고 물으니 발간 당시 그러니까 7~8년 전에 추천했던 편해영의 책이 이 책이다. 길게 설명해줬는데, 구덩이, 사위, 장모 이 세 키워드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달 도서모임에서 책을 선정하는데 멤버 누군가의 입에서 이 책 이름이 나왔다. 다른 멤버들이 제목을 검색하는데 잘 안 찾아지니까 제목이 뭐라구요? 라고 하시고, 나는 발음을 이야기 하는 줄 알고, "'홀로' 할 때 '홀'이요," 그랬더니 책 추천인이 "그게 아니고 구멍할 때 홀이에요." 무튼 홀은 홀이잖아! 라고 혼잣속으로 .. 좌중에게 " '더 홀'로 검색하시오들!" 


딴소리를 조금 하자면, 과거의 나는 (픽션에 한정하여) 책읽을 시간이 조금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 온다 리쿠를 포함하여 일본 미스터리를 즐겨 했었다. 국내 소설보다는 더 읽었던 것 같다. 물론 몇몇 국내 좋아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즐기면서 많이 읽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밀리의 서재로 굵직한 국내 작가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 내 산만한 읽기 회로를 꽉 붙들어 주는 것이었다. 책을 통 못 읽고 안 읽히는 정신산만한 상태이기도 해서 뭘 잡아도 끝까지 읽어내지를 못하는 와중이었는데, 단비 같았다. 그러다가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꿀같은 국내 작가의 소설들이 많다는 것을 또 새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늘 배운다. 모르는 게 참 많다는 걸 배운다. 굵직한 작가의 목록에 편해영 님도 넣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참 이렇게 늦게야 만나는 작가들이 있다. 


다시 더 홀로 돌아와서, 우리 인생의 기본값은 평범함의 균열이나, 일상의 안전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상실과 공포 같은 것. 그래선지 나는 이 소설 진짜 흥미롭게 잘 읽혔다.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 수도 있고,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수도 있고, 또 삶은 실패가 쌓일 뿐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아니야 인생은 그렇지 않아, 실패를 통해 성장해야지! 너 자신을 찾아야 해. ' 같은 서술로 독자에게 다가온다면 그또한 결이 다른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내 다리 가려운데 옆사람 허벅다리 긁는 표현으로 밖엔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데, 스포일러를 비껴가면서 굳이 말을 하자면, 나는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남편 오기의 아내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아내 생각은 제대로 정확히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남편 오기의 입에서 그려지는 것으로 추측할 뿐인데, 남편 오기가 아내의 진면목을 제대로 서술해 줄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모습에 이입이 되는 것은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모르기는 뭘, 작가의 촘촘한 설계이지) 


또 훌쩍 넘어가서 독서모임에의 분위기를 전달하자면, 대개의 독자들이 그럴수도 있겠지만 우리 멤버들돠 인간 내면의 불안, 은근한 폭력성 등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모호하고 차갑게 제시한 것에 대단히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과 등가로 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 마음씀을 만류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ㅋ 어쩌겠어 감상은 각자의 몫이니까. 


하기는 나도 부정적인 한마디를 보태기는 했다. 이혼숙려캠프에 나왔던 에피소드와 장치가 클리셰처럼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클리셰일리가!  이혼숙려캠프는 이 작품이 나오고도 한참 후의 프로그램이고, 심지어 리얼다큐인데? 그냥 평범하다는 우리네의 삶이 기실 어이없고 남루한 것일뿐.


이 책이 또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이 끝나고, 뒤에 평론가의 해설이 붙지 않았다는 점이고, 또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작품 속에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거나 직접 언급한 참고 서적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아 요즘 소설들은 이렇게 저작권을 소상히 밝혀 주나요?)


참고 

-베른하르트 알브레히트, <탁터스>. 배명자 옮김, 한스미디어, 2014

-허연, <슬픈 빙하시대2>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대실 해밋, <<몰타의 매>>, 고정아 옮김, 열린책들, 2007

-제리 브로턴, <<욕망하는 지도>> 이창신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에밀 졸라, <<전진하는 진실>>, 박명숙 옮김, 은행나무, 2014


이 소설은 한국 최초로 미국의 셜리 잭슨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셜리 잭슨(1916~1965)은 단편 〈추첨(The Lottery, 1948)〉으로 유명한 미국의 여성 작가라고 한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계열의 작가일까? 



77

마흔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이였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개인 사업을 궁리하며 바깥으로 나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말하자면 사십대는 세상에 적응하거나 완벽하게 실패하는 분기점이 되는 시기였다.

 (...)

자괴를 이겨내기 위해 아내가 읽어준 허연의 시를 종종 떠올렸다. 사십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라는 표현 다시 찾기 위해 허연의 시를 찾았지만, 제목에 사십대라거나 마흔이 붙은 시는 없었다. 시집을 전부 읽어나가다 예의 그 시를 찾았지만, 제목은 물론이고 본문에도 사십대라는 표현은 없었다.

시인의 나이로 미루어 대략 그정도의 나이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79

아내는 하려던 일에서 지속적으로 좌절했고, 스스로의 재능에 성취감을 느낀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렇더라도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여긴다면 좋은 일이지만, 아내는 어느 순간 달라졌다.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뭔가를 배우러 다니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87

오기가 생각하기에 아내의 불행은 그것이었다. 늘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언제나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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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2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홀로‘의 ‘홀‘을 구태여 ‘hole‘의 ‘홀‘로 수정해주시는 분은 문해력 센스가 영 고쟁이셔!!!ㅎㅎ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으로 등가시키는 경험은 누구나 해 봄직 합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나 할까요.

icaru 2025-09-21 12:30   좋아요 1 | URL
조직의 말버릇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긍정으로 처음엔 응수한 다음 그렇지만, 이렇게~.. 근데, 이 모임에서는 일단 ‘아니‘로 시작해요. 심지어 저도요. ㅋ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으면서 아니, 이래요 ㅋ 저조차도 ㅋㅋ ˝마음의 불편함을 재미없음으로 등가시키는˝ 맞습니다. 그러네요. 내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캬. 사실 저도 그런 면이 있으면서 ㅎ 책 추천자도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가 먼저 이 책을 읽고 복잡해져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고요~

2025-09-26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2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9-27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5-09-3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하도 익숙해서 이 책 이미 읽은줄로 알았거든요. 밑에 인용문 읽어보았더니, 저 이 책 안 읽었네요.
얼른 찾아가서 읽어봐야겠어요. 마흔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5-10-01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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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 소개했다가 시원찮은 반응을 얻었던 책 중 하나이다. 대체로 이런 수박 겉읽기가 싫단다. 

사실, 이 책은 철학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보다, 여행기 형식에 가까운 가벼운 필치로 “철학을 일상에서 곁눈질하듯 맛보기” 하는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철학의 본질’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다분히 피상적이고, 수박 겉핥기로 비쳐졌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틀은 흥미롭다.

  • 새벽 : 태어나고 자라며 배우는 시기

  • 정오 : 삶의 한가운데서 부딪히고 실천하는 시간

  • 황혼 : 마무리와 성찰, 떠남을 준비하는 시간

이렇게 하루의 흐름에 인생을 포개고, 각각의 국면마다 철학자들을 배치했는데, 특히 나는 황혼의 철학자들 이야기에 오래 머물게 되더라는, 삶의 무게를 더 실질적으로 건드리는 대목이기 때문일 터다. 이를테면 몽테뉴의 죽음에 대한 태도, 보부아르의 노년 성찰 같은 주제들이, 단순한 “삶의 팁”을 넘어 독자에게 실존적인 울림을 준다.




197

 

쾌락은 의심스럽다. 쾌락은 어두운 곳에, 닫힌 문 뒤에 머문다. ‘은밀한쾌락이나 숨겨진쾌락 같은 말을 할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이 인간 본능에 수치심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다. 다른 모든 것(명성과 돈, 심지어 덕까지)은 그것이 쾌락을 더 증가시키는 만큼만 중요하다. 에피쿠로스는 늘 그렇듯 도발적인 문체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209

 

톰은 모든 쾌락은 좋은 것이고 모든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고통 대신 쾌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어떤 쾌락은 미래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러므로 피해야 한다. 폐암의 고통은 흡연의 쾌락보다 더 크다. 마찬가지로 어떤 고통은 미래의 쾌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러므로 견뎌야 한다. 예를 들면 운동을 하는 고통이 그렇다.

 

 

 

222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은 꼿꼿이 걷는 능력이나 피클병을 여는 능력과 더불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능력 중 하나다. 모든 눈부신 과학적 발견과 모든 뛰어난ㄴ 예술 작품, 모든 친절한 태도의 근원에는 순수하고 사심없는 관심의 순간이 있다.

 

살말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이런 드문 순간에 우리는 베유가 '극도의 관심'이라 부르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몰입'이라고 부른 정신 상태에 진입한다.

 

 

 

 

227 ~228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 시몬 베유는 썼다. 베유는 중국의 기근 소식을 듣고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동료 철학자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보부아르는 이렇겍 회상했다. "전 세계에 맥박이 울리는 심장을 가진 그녀가 부러웠다."

 

 

베유는 관심을 어떤 수단이나 기법으로 보지 않았다. 베유에게 관심은 용기나 정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사심 없는 동기가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더 훌륭한 노동자나 부모가 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지 말 것.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기울일 것.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이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 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이 질문이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가 "집합체의 한 단위, 또는 '불행하다'라는 딱지가 붙은 사회 범주의 한 표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저 어느 날 고통이 특별한 흔적을 남겼을 뿐인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기차역이라면 전부 좋다. 못생긴 역도 마찬가지다. 뉴욕 펜실베니아역보다 못생긴 역은 없다. 구린 역이라 해도 기차역에는 공항에는 없는, 심지어 좋은 공항에도 없는 활력이 고동친다. 기차역은 관심 기울이기를 연습하는 훈련장이다. 윌리엄 프리스라는 작가가 그린 <기차역>이라는 단순한 작품명의 그림.

 

"신을 사랑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펼친다.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턱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가늘어지며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베유는 이런 식으로 근육을 쓰는 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타인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참을성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278

 

간디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생각을 바꾸길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괴짜와 변덕쟁이, 미치광이"를 끌어 모아 그들을 전부 수용한 사람이었다. 지독한 수줍음과 자기 회의를 극복하고 한 국가를 이끈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되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대제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신이나 성인군자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싸음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준 사람이었다.

 

간디는 영적 잡식동물이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까지 여러 다양한 종교의 별미를 맛보았지만, 결국 간디의 허기를 확실히 채워준 것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카>였다.

 

간디가 이 종교적 서사시를 처음 만난 것은 런던에서 법을 공부할 때였다. 두 영국인 신지학회 회원이 간디에게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물었다. 당황한 간디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에드윈 아널드의 영역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간디는 서양으로 떠나고 나서야 동양을 발견했다.

 

간디는 <바가바드기타>에 푹 빠졌고 이 종교적 서사시를 '마더기타'라고 불렀다. <바가바드기타>는 간디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위로였다.

 

 

285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수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붇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루소처럼 간디도 평생을 걸었다. 루소와 달리 간디의 결음은 신속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단호한 항의의 걸음이었다. 1930년의 어느 날 아침, 간디와 80명의 추종자들은 아마다바드에 있는 간디의 아시람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바다로 향했다. 하루에 20킬로미터씩, 어떤 때는 그보다 더 많이 걸었다. 이들이 해안에 도착했을 무렵 80명의 추종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간디가 아라비아해에 몸을 담근 뒤 영국 법에 대한 노골적 위반 행위로서 바다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연 소금을 한 움큼 퍼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91

 

파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도 내가 원하는것을 얻는다. 언젠가 간디는 비폭력 운동을 유클리드의 선에 비유했다. 유클리드의 선은 길이는 있지만 폭은 없다. 여태껏 인간은 한번도 유클리드의 선을 긋지 못했고 앞으로도 긋지 못할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간디의 이상처럼, 유클리드의 선 개념에는 가치가 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카일라스와 나는 비를라하우스 바깥의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다. 긴 시간을 함께한 두 사람 사이의 편안한 침묵이다. 누구도 입을 열어 침묵을 채워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진이 들어간 돈을 좋아한다. 그게 다다.

 

 

311

 

"삶도 아직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말이 바르지 않으면 판단이 분명할 수 없다."

 

공자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게 인만큼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인은 <논어>105번 등장하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많은 횟수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존재하지 않으며(공자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연민, 이타주의, 사랑, 어짐, 진정한선, 온전한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은 '인간다운 마음'이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물론 공자가 친절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공자는 친절과 사랑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려놓는 첫번째 철학자였다.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보다 약 500년 일찍 황금률을 제시했다. 공자에게 친절은 무른 마음이 아니다. 약함도 아니다. 친절은 실용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한 추종자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면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313

 

노자가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노자가 중국 철학계의 서핑족이라면 공자는 땍땍거리는 선생님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올바른 의례적 행위'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주 조금도, 내게 의례는 반항해야 하는 것이지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여러 철학자들의 외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칸트도 이렇게 말했다. "과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하지만 의례가 유교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유교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유교는 생각 없이 의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동기가 중요하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경 없는 의례, 나는 이런 것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공자의 목표는 인성 개발, 즉 도덕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도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었다. <논어>의 매 페이지에는 부모님의 손가락질이 희미하게 찍혀 있다. 아들은 마땅히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며, 아버지의 죄조차도 덮을 수 있어야 한다.

 

 

319~320쪽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져야 한다. 공자는 그 방법이 바로 공부라고 본다. <논어>는 공부를 칭송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의 '공부'는 기계적 암기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움 그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자에겐 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도덕적 자기 수양이다. 우리는 교육받은 내용을 배운다. 수양한 것은 흡수한다. 작은 친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민에서 나온 행동 하나하나는 곧 삼나무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그 나무의 키가 어디까지 자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정말로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면 왜 세상은 이토록 잔인할까? 친절은 우리가 발견하든 못하든 늘 그 자리에 있다.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현상에 거대한 비대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길을 끄는 한번의 악랄한 사건은 1만 번의 친절한 행동으로 상쇄될 것이다."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평범한 친절이 존재하지 않거나 영웅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친절의 힘을 기록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거의 성ㅇ스럽기까지 한 책무라고 굴드는 말한다. 냉철한 과학자인 굴드는 선함을 기록하는 데 실용적인 이유가 있닫고 보았다. 친절으 귀하게 여기면 더욱 늘어난다. 친절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잔인함은 학습되는 것이다. 먼지 쌓인 방 안에서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듯, 카일라스를 도운 나의 반사적 반응도 좋은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다.

 

 

328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나의 목록 작성은 절대로 이만큼 위대하지 않다. 내 목록은 존재를 보장하거나 문화를 이룩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한 나의 목록은 가치를 인식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의 목록은 내가 세상을,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보다 더 철학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P. 337

 

누군가는 이 말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라고 말이다. 소셜미디어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스시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339

 

진정한 기쁨은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쓰디쓴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진정한 기쁨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기에 사라져도 그립지 않다.

 

모든 것은 딱 좋거나 완전 글렀거나 둘 중 하나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소는 이마에 흰색 털이 약간 섞여 있어야 하지만 고양이는 반드시 새까만 색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의 배는 예외인데, 배만은 새하얘야 한다." 음악 연주는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밤에만 그러하다.

 

쇼나곤이 진정한 기쁨이라 선언하는 것은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알맞아야 한다. 분위기와 계절에 어울려야 한다. 본질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은 극도로 더울 때가 최고이며, 겨울은 지독히 추울 때가 최고다."

 

쇼나곤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활용하지만 그중에서도 후각을 가장 많이 쓴다. "소가죽으로 만든 안장 끈의 낯선 냄새가 불현 듯 풍길 때""한낮에 희미한 땀 냄새가 나는 살짝 폭신한 기모노를 걸치고 몸을 웅크린 채 낮잠을 잘 때" 기쁨을 느낀다. 옷에 향을 입힐 수 있도록 나무로 특별 제작한 "향 옷걸이"를 사랑한다.

 

 

P. 340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 쇼나곤은 사쿠라, 즉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벚꽃은 순식간에 져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삼 일쯤 만개했다가 다 떨어져버린다. 다른 꽃(예를 들면 매화)은 훨씬 오래 피어 있다. 어째서 그렇게 연약한 것을 피우려고그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P. 341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불확실성이다. 14세기 승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만개한 꽃보다 막 꽃이피어나려는 나뭇가지, 시든 꽃잎이 떨어진 정원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말한다. 벚꽃은 그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수명 때문에 사랑스럽다. 일본 연구자인 도널드리치는 ˝아름다움은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붙잡으면 부서져버린다. 사람들이 소로에 대해서 한 말은 쇼나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소로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꽉 붙잡거나 이용하거나 남김없이 파악하려 하지는 않는다.

 

 

P. 345

 

이 시대의 일본인은 관념적인 추론보다 미적 경험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 보는 방식, 듣는 방식, 그리고 당연히, 냄새를 맡는 방식이 무엇을 아는가보다 더 중요했다.

 

헤이안 일본은 모든 예술을 높이 쳤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가장으뜸이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는 늘 시가 있었다. 출생과 연애, 심지어 죽음까지도, 헤이안 시대의 존경받는 신사는 작별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시를 쓰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거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를 못 쓰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조롱당했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포장도 아름답게 해야 했다. 당신이 970년의 교토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낵 ㅗ싶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종이를 골라야 한다. 아무 종이나 골라선 안 된다. "전하고자 하는 정서뿐만 아니라 계절, 심지어 그날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적절한 두께와 크기, 디자인, 색깔의 종이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다양한 구성과 붓질을 실험하며 초안을 여러 번 써본다. 내용과 글씨가 마음에 든다면 널리 쓰이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이용해 종이를 접고, 그에 어울리는 나뭇가지나 꽃잎을 동봉한다. 마지막으로 "똑똑하고 잘생긴 전달자"를 불러 올바른 주소로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감사가 돌아올지 조롱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무시당할 수도 있다. '읽씹'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P. 353

 

점심을 먹은 후 공책을 꺼내 대문자로 쓴다. 일본 탄환열차:목록.˝좋은 시작이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다.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더 작게 들어가야 한다. 일본 탄환열차에서 나를 즐겁게한 것들, 더 낫다.

 

1. 승무원이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왔다가 몸을 회전하고, 승객을 만나자 인사하는 모습. 2. 하이힐을 신고 복도를 걸어오던젊은 여성이 아주 살짝 휘청했다가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중심을 잡는 모습. 3. 고통스럽지 않은 기분 좋은 따뜻함을 내뿜는 단단하고 두꺼운 스티로폼 커피 컵의 감촉. 4. 컵에 영어로 ˝AromaExpress Café˝라고 쓰여 있고, ˝Aroma˝˝0˝가 커피 원두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 5. 도쿄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점점 도시로바뀌는데, 그 변화가 점진적이어서 도시가 급작스럽게 나타난다.

 

기보다는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 6.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화장실, 7.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8. 반대 방향 기차가 정면충돌을 걱정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내는소음. 9. 창문 위로 작은 개울과 지류들을 만들면서 마치 자기 의지가 있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빗방울들. 접기 - ashram21

 

 

P. 362

 

지나친 나이스함은 지나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나 지나친 사랑과 같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란 뜻이다.

 

P. 365

 

나는 니체보다 124년 늦게 실스마리아에 도착한다. 왜 니체가이곳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생강쿠키로 만든 집과 똑같이 생긴 사랑스러우면서도 우직한 집들, 맑고 차가운 공기, 그리고 눈돌리는 곳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알프스 산맥이 보인다. 만약 스위스에 더러운 때라는 것이 있다 해도 여기에서는 그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통조차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다.

 

P. 368

 

니체는 이곳에서 여러 대담한 발상을 떠올렸다. 여기 실스마리아에서 ˝신은 죽었다˝라며 철학에서 가장 뻔뻔한 주장을 했다.

 

또한 실스마리아에서 춤추는 예언자이자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자기 지혜를 인류와 나누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가상의 페르시아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가장 위대한 사상(사상 중의 사상˝)이 상상하지 못한 흉포함으로 니체를 덮친 곳 또한 실스마리아였다.

 

 

371~372

 

<사랑의 블랙홀>에서 매우 분노한 주인공이 말하듯, 다른 것은 좋은 것이다. 나에게는 사명이 있다. 신이 주신 사명이 아니라 니체의 춤추는 예언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내린 사명이다. 나ㅡㄴㄴ 니체가 처음으로 영원회귀 개념을 떠올린 곳, 그 거대한 바위를 찾을 작정이다. 그 바위를 보고 만짐으로써 그날 니체가 생각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기를, 아니, 그날 니체가 느꼈던 것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걷고 또 걷는다. 다리가 아프다. 하지만 걷는다.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고통 때문에 걷는다. 니체라면 내가 나의 권력에의 의지를 단련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며 위버맨시 (초인) 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기꺼워했을 것이다.

 

"최소한 하루의 삼분의 일을 정념과 사람들, 책 없이 보낼 수 없다면 어떻게 사상가가 될 수 있겠는가."

 

니체의 나쁜 시력은 아무도 모르는 축복이었다. 덕분에 니체는 책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니체는 책을 읽지 못할 때 걸었다. 한번에 몇 시간씩 엄청난 거리를 걸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이동할 때 탄생하지 않은 생각은 그 어떤 것도 믿어선 안 된다." 니체가 말했다. 우리는 손으로 글을 쓴다. 발로는더 좋은 글을 쓴다.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니체에게는 그런 분기점 중 하나가 일찍 찾아왔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니체는 어느 날 고서점에 잠깐 들르게 된다. 그는 어떤 책 한 권에 특히 마음이 이끌렸다고 회상했다. 바로 쇼펜하우어의 걸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집에 돌아온 니체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 "그 정력적이고 음울한 천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두었다. 니체는 기뻤다. 그리고 큰 중격을 받았다.

 

 

P. 374

 

이런 극적인 행동으로 니체는 교수의 안정적인 생활을 방랑하는 철학자의 삶과 맞바꾸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해명할 필요가 없고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인 삶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기 있는 행동, 혹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니체만큼 과거의 삶을 멀리 내던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P. 375

 

아직도 니체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바위"를 찾지 못했고, 멈춰서 니체의 책을 읽기로 한다. 이 저항의 행위를 니체도 분명히 이해하리라.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펼친다. 몇 문장을 읽자마자 니체가 내게 말을 걸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니체는 내게 고함을 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라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니체는 느낌표를 사랑한다! 가끔 두세 개씩 붙여 쓰기도 한다!!!!!

 

니체는 읽기 즐거우면서 동시에 읽기 버겁다. 니체가 읽기 즐거운 것은 문장의 명료함과 상쾌한 단순함이 쇼펜하우어에 맞먹기 때문이다. 니체는 중요한 할 말이 있는 10대의 당당한 패기로글을 쓴다. 온 삶이 글쓰기에 달린 것처럼 글을 쓴다.

 

니체는 철학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장난기 넘치고, 통렬하게 웃기다. 니체는 모든 진실에는 최소한 한 번의 웃음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을,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논다. 아포리즘과 동요와 가곡을 쓰고, 자신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인, 성서 속 인물을 가장한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로 글을쓴다. 니체의 짧고 간결한 문장은 트위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니체가 읽기 버거운 것은 소크라테스처럼 니체도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P. 378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그 무엇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기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마치 예술가처럼, 니체 같은 철학자는 우리에게 안경 하나를건네주며 말한다. ˝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오. 내가 보이는 게 당신 눈에도 보입니까? 정말 기적 같지 않습니까?˝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384

 

실제로 삶의 나쁜 순간들은 좋은 순간들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보인다. 항암 치료의 고통과 비교하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주는 기쁨은 별게 아니다.

 

완전 쇼펜하우어처럼 되어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니체였다. 하지만 니체는 힘들고 너무 짧았던 자기 삶의 끝을 향해 다가가면서 인생 전체에 감사한다고 공표하고 쾌활한 다 카포를 덧붙인다. 다시 한번.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가는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니체가 말한 "본질적인 고통'을 경험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 그에 못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가? 우리는 그저 고통을 참아내고 있나? 아니면 고통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는가?

 

니체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었다. 니체는 고통을 좋은 삶의 구성 요소로, 배움의 수단으로 여겼다. "오로지 고통만이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P. 385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 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 해야 하는 부름이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399

 

심리학자들은 지혜의 정의에 대해 수십 년간 합의를 이루지 못햇다.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중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스토아 철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 교리는 격동의 시기에 더욱 매력을 뽐낸다. 나는 마르쿠스의 책을 읽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철학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즐거운지는 알지 못했다.

 

어려운 시기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은 재앙 속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00년경 제논이라는 이름의 페니키아 출신 상인이 배를 타고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로 향하다 난파되었고, 자색 염료를 실은 귀중한 화물을 전부 잃었다. 목숨을 건진 제논은 파산.

 

 

409

 

벽난로의 불이 뜨거운 재로 변하고 커피는 점점 더 차가워지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스토아철학에 무릎을 담갔고, 더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에픽테토스의 안내서 속 날카로운 문단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어떤 문단은 긴 토론을 벌일 만하고, 어떤 문단은가병누 끄덕임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이 문장이 나타난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자린에 앉아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20000년 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보낟.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라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433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사람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느다. 요즘 이러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게 갑자기 쥐위에 젊은이들이 많아지다니 당혹스럽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거다. 나는 늙지 않았다.

 

 

435

 

노년은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물체이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 노년과의 만남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노년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옆구리를 살짝 부딪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어느 날 아침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매일 아침 그렇게 하듯 거울을 들여다보고 웬 낯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람은 누구지? 거울 속 여자는 "눈썹은 눈 위로 흘러내렸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깔렸으며, 내가 여전히 나이면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저 글을 쓸 무렵 보부아르는 쉬한 살이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노년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했듯이 나이는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 보부아르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눈앞의 모스블 좋아하지 않을까 봐 더 나쁘게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p.474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카이로스의 지혜.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심지어 물러나는 것에도.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_들어가는 말 - P6

우리에겐 늘 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 살에게 중요한 ‘어떻게’ 질문과 서른다섯 살, 또는 일흔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지 않다. 철학은 각 단계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P14

아침은 그날의 느낌을 결정한다. 아침이 나쁘면 하루가 나쁘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렇다. 춥고 칙칙한 월요일 아침에는
지위와 특권이 아무 쓸모가 없다.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너무나 큰 도움이 되는
재산마저 소용이 없다. 오히려 부유함은 푹신한 이불과 한패가 되어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든다.
아침은 강렬하고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아침은 희망의 냄새를 풍긴다.
- P24

"이런 끔찍한 불평불만과 원숭이 같은 삶은 이걸로 충분하다.
너는 오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내일을 택한다."
마르쿠스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남겨두었다가 자신의 이기심에 내리 꽂는다.
"지금처럼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불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마르쿠스는 이러한 차이를 알았지만, 늘 그렇듯 스스로에게 그 차이를 상기시킨다.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스토아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 - P36

제이컵 니들먼의 <철학의 마음>이라는 작고 이상한 책에서 그런 문장을 발견했다. 이상한 책이라고 한 이유는 그때 나는 철학에 마음이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에 오로지 머리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문장은 바로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질문을 경험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몇 주 후, 나는 이 심오하고 당혹스러운 문장을 쓴 사람과 마주 앉았다. - P43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 P51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항 창문은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보는 것이다.

"모든 철학은 궁금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고 말했을 때 소크라테스도 그런 마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궁금해하는 능력은 기술이며, ‘궁금하다‘는 멋진 단어다. 이 단어는 경이로운 것, 놀라움의 대상을 뜻하는데, 궁금해하는 마음은 절대로 반짝이는 대상을 쫒지 않는다. 절대로 고양이를 죽이지 않는다.

궁금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식사처럼 절대 서두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도 절대로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점점 지치고 분노할 때조차 인내심을 갖고 대화에 임했다.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심리상담가였다. 그는 질문으로 질문에 답하곤 했다. 그에게는 늘 시간이 더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계속 한 곳에 머물렀다. - P54

"그는 가끔 멈춰서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 서 있곤 했다." 또 다른 친구는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겪었던 기이한 에피소드를 들려 준다.



어느날 새벽 그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계속 고민하며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정오가 되었고 사람들은 궁금해하며 소크라테스가 새벽부터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곳에 계속 서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저녁이 되자 이오니아 사람 몇 명은 그가 밤새 그곳에 서 있는지 보려고 차가운 바깥 공기 아래로 침구를 들고 나왔다. - P56

우리는 명백한 것은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간과가 실수라고 생각했다. 명백해 보이는 문제일수록 더 시급하게 물어야 한다.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 P57

소크라테스가 보가에 잘못된 양육을 비롯한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무지에서 나온다. 만약 우리의 실수가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제이컵의 부모는 이 소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장남이라 반드시 의사가 되어야 했어요." 제이컵이 무표정한 얼굴로말한다. 의료 계통은 아니지만, 제이컵은 정말로 닥터가 되었다.

철학 박사 학위를 딴 것이다. 제이컵은 어머니가 계신 곳에서 처음으로 ‘닥터 니들먼‘이라고 소개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사람의 말을 끊고 지적했다. "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종류의 닥터는 아니에요."

제이컵은 평생 어머니가 틀렸음을 입증하며 살았다. 학계에서높은 지위와 큰 영예를 얻었고, 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려고 애썼다. 그는 이런 궁극적인 질문이 왜 이렇게 작은 관심밖에 받지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59

소크라테스 근처에 있거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 논쟁에 말려들기 쉽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간에 소크라테스가 졸졸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소크라테스와 얽히면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하고 완전하게 털리기 전까진 그를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가 좌절스러운 것은 꼬치꼬치 캐묻는 다섯 살짜리와의 대화가 좌절스러운 것과 비슷하다. - P65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언어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직감할 때 통찰의 순간이 찾아왔다." - P71

소크라테스는 실패자였다.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다. 소크라테스가 나눈 많은 대화들은 제우스의 천둥 같은 돌파구가 아닌 교착 상태로 끝이 난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다. - P76

소로가 받는 혹독한 비난은 주로 위선에 관한 것이었다. 소로는 숲속에서 홀로 자족하는 척하면서 몰래 엄마 집에 들러 파이를 먹고 빨래를 맡겼다.

소로는 사회와의 끈을 전부 끊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소로는 마을로의 나들이나 오두막집에 방문한 손님을 숨기지 않았다.

소로의 심술궂은 성격에 관해서라면, 소로는 유죄가 맞다. - P116

소로는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오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하지만 소로는 보이는 것을 더욱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관심이 더 있었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그럴 수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상당히 경이로우니,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보이는 저 물체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안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뿐이다." - P119

소로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소로는 느끼지 않고는 보지 못했다. 어떻게 느끼느냐가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결정했다. 소로에게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였다. 예를 들어 장미를 보면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주고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데이빗 소로는 성인이 된 후에 거의 쉬지 않고 일기를 썼고, 열네 권에 이어진 일기는 거의 200만 단어에 달한다고. 일기 속의 글쓴이는 가장 진실하고 취약한 상태의 한 사람이다. 소로는 말했다고 한다. 더 잘 보려면 손을 움직이라고! 소크라테스처럼 소로 역시 "두려움 없는 자기 점검을 통해 성찰하는 삶을 살았다. 소로 역시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완전한 정지 상태 사이를 오갔다. 마르쿠스와 달리 소로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 P120

의식이 막 돌아온 순간, "꿈과 사색 사이의 그 모호한 지대"를 만끽했고, "모든 지성을 아침과 함께 깨어난다."라는 고대 인도 경전의 한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고. - P121

소로는 모두가 자신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월드>은 각성제로 쓰인 것이지, 처방전은 아니었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실상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들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떄 내가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로는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피곤했다. 소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너무 많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이 있어서 감각들이 쉬질 못하고 늘 긴장 상태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 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 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 P132

<월든>에서 소로는 오두막집 근처에서 우연히 썩어가는 말의 사체를 본 이야기를 전한다. 소로는 그것이 역겹지 않았다고,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었으며,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느꼈다. 그것은 자연의 지혜였다.

자신만의 월든을 찾으라는 소로의 충고에 대해 쭉 생각해봤다.
- P139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이었던 첫번째 철학자도, 마지막 철학자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매우 독보적인 염세주의자였다. 쇼펜하우어의 강점은 우울함이 아니라 우울을 설명하기 위해 쌓아올린 철학적 체계, 고통의 형이상학이었다.

관념론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정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는 사람을 뜻한다. 물리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이 호수의 전부가 아니듯이, 인지적 세계 역시 실재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호수의 깊이를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 P153

이마누엘 칸트 같은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깊이가 감각 인식 너머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호수의 바닥이 실재하듯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찰나의 감각적 현상보다 더욱 실재적이다. 철학자들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칸트는 이를 예지체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를 이상적인 형태의 세계라고 불렀다. 인도 철학자들에게 이는 곧 브라만이었다. 이름은 다 다르지만 개념은 동일하다. 서둘러 직장에 출근하고, 넷플릭스를 몰아서 보고, 이 그림자의 세계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의 차원.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 개념을 지지했지만 여기에 흥미롭고 우울한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였다. 칸트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실재가 단일하고 통일된 독립체이며,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접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인간과 동물, 심지어 무생물을 뒤덮고 있다. - P154

취미 동물학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어느 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새로운 종류의 개미가 발견되었음을 알게 된다. 미르메키아라는 학명을 가진 이 오스트레일리아 불독개미는 악랄함으로 악명 높을 만하다. 불독개미는 강력한 턱으로 먹이를 꽉 움켜쥔 후 반복해서 치명적인 독침을 쏜다. 이 불독개미가 반으로 잘리면, 강력한 턱을 가진 머리가 독침을 가진 꼬리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둘 모두가 죽거나 다른 개미가 와서 이들을 죽이기까지 30분이나 이어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개미가 자기 자신을 집어삼키게 만드는 것은 악의나 피학증이 아니라 바로 의지다. 쇼펜하우어는 개미가 의지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곧 손에 머그컵을 놓으면 컵이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불독개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잔인함의 저자이자 독자이며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스스로를 집어 삼킬 운명이다.

- P157

절망하지 마시게. 어둠의 철학자가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떨쳐냄"으로써 의지하는 블랙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번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때때로 며칠씩 굶고, 몇 시간동안 명상을 하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예술이다. 훨씬 낫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이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예술은 의지라는 끊임없는 분투와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 P157

루소처럼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집 없는 떠돌이로 여겼다. 자기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학계의 최하층민이었던 쇼펜하우어는 비판받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가혹한 운명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거의 평생 동안 그의 책은 읽히지 않았고 그의 생각은 사랑받지 못했다.
- P160

플루트는 쇼펜하우어가 성인이 된 후 힘들 때마다 늘 곁을 지켜준 벗이었다. 매일 정오가 되기 직전 쇼펜하우어는 자리를 잡고 앉아 애정을 담아 플루트를 불었다. 쇼펜하우어는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로니시를 흠모해서 그의 모든 음악을 플루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이 점에서 의문을 품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가 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체리 한 그릇을 그린 정물화 앞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배고픔 뿐이라면 그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 P163

쇼펜하우어는 미학의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연극(물론 그중에서도 비극은) 사다리 꼭대기에 있다. 건축은 사다리 가장 아래에 있다. 음악은 이 카테고리 안에 없다. 음악은 따로 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천국의 이미지, 심지어 세속화된 천국의 이미지 안에 그림과 조각상은 포함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음악이 있으리라고는 자명한 사실이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음악은 중력이나 뇌우처럼 인간의 사상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 P163

음악은 다른 예술과 달리 개인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없을 수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마 다들 있을 것이다. 열세 살 난 나의 딸도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와 아닌 장르를 발견하고 있다. 자신 음악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상 끝. 우리가 듣는 음악은 우리가 입는 옷이나 우리가 모는 자동차, 우리가 마시는 와인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무것도 와 닿지 않을 때에도 음악만은 와 닿을 수 있다. 음악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이다.
- P165

모든 페티시에는 정반대에 있는 혐오가 똑같이 따라오고, 모든 열정에도 상보적인 짜증이 따라온다.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강렬한 음악 사랑은 그에 상응하는 소음 혐오를 낳았다.

쇼펜하우어는 에세이 <소음에 관하여>에서 "두드리고, 찧고, 쾅쾅대는 소리가 평생 동안 매일 나를 괴롭힌다."라고 했다. 그는 특히 말의 옆구리를 갈기는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채찍 소리"를 싫어했다. 그 쇨가 "뇌를 마비시키고 싶이 빠지려던 생각을 찢어발기며 모든 사고를 죽여 없앴다. 는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던 쇼펜하우어가 말의 고통을 느낀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쇼펜하우에게 소음은 단순히 짜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음은 사람의 특성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그는 소음에 대한 내성이 그 사람의 지능과 정확히 반비례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느 집 마당에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로 개가 몇 시간이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 P176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의 소음을 미리 보여준다. 소셜미디어 안에서 진정한 소리는 새로움이라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 P178

‘읽다‘를 ‘클릭하다‘로 바꾸면 현재 우리가 겪는 고충이 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니들먼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P179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먼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비웃음은 지혜의 대가다. - P179

장소는 중요하다. 장소는 생각의 보고다. 그래서 여행을 하는 것. 호화로운 삶에 으레 따라오는, 예를 들면 고급 레스토랑 프렌치런드리에서 5코스 정찬을 먹은 후에 따라오는 불쾌함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에피쿠로스는 신체 감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가 주로 언급하는 것은 더 드러나지 않는 고통, 즉 갖지 못한 고통이다. 당신이 대서양에서 잡은 자연산 왕연어 테린을 맛있게 즐겼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제 연어 테린은 다 먹고 없고, 당신은 다시 그 요리를 간절히 갈망한다. 당신은 연어 테란에 즉, 그 연어를 잡은 어부에게 레스토랑에 사먹을 월급을 준 상사에게 당신의 행복을 의탁했다. 이제 당신은 연어 테린 중독자이며, 당신의 행복은 연어를 주기적으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이게 다 당신이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욕망은 우리를 최고서능로 이끌고 텅 빈 욕망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연의 GPS다. - P191

현재 우리는 쾌락의 황금시대를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우리를 애태우는 수많은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급 요리, 메모리폼 매트리스, 다양한 종류의 기기들, 에피쿠로스라면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유인하는 가짜 쾌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훌륭한 미끼처럶 이것들도 전부 진짜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이 미끼를 겨냥한다. 표적을 쏘지 못하면 본인의 사격 실력 부족을 탓하며 총알을 다시 장전한다.

미끼를 겨냥하는 짓을 멈추라고, 에피쿠로스는 조언한다. 아예 사격을 관두는 것이 훨씬 낫다.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 P191

에피쿠로스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쾌락은 더 증가할 수 없으며 (눈부시게 밝은 하늘이 그보다 더 밝아질 수 없듯이) 그저 다양해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 산 실발 한 켤레와 스마트워치는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소비문화 전체는 다양한 쾌락이 곧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잘못된 동일시가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

쾌락의 다양성이 우리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듯이 쾌락의 지속 시간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20분간의 마사지가 10분간의 마사지보다 반드시 두 배 더 즐거운 것은 아니다. 평정심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화로운 상태이거나 평화롭지 못한 상태 둘 중 하나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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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14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목록에 넣어두고 있는데 도서관 철학 코너에 꽂혀 있어 선뜻 손이 가지 않더군요. 철학 코너 책은 큰 맘 먹고 읽어야 하거든요. ㅎㅎ

icaru 2025-09-15 15:07   좋아요 0 | URL
사람의 인생을 하루의 시간대에 비유해서, 새벽 정오 황혼 이렇게 셋으로 나누고, 열네명의 철학자를 배치했는데요~ 저는 황혼 부분에 철학자들의 이야기에 오래 꽂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22년도에 사내 도서관에 읽은 것 같은데 뭐라 정리가 안 되어서 무조건 필사하기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이럴거면 그냥 한 권을 사자 싶더라고요. 그래서 구입을..

책읽는나무 2025-09-15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다놓았어요.
근데 어째 수박 겉읽기가 아닌 것 같아요?
인용문들이 예사롭지 않아요.
사다 놓았음 빨리 읽어야 하는데…뭐하고
있는 건지…참.🙄
근데 필사까지 하셨어요?
더욱 더 저는 사다 놓고 그동안 뭐한 건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ㅋㅋㅋ

icaru 2025-09-17 19:39   좋아요 1 | URL
제 모자라고도 어렴풋한 기억으로 더듬건데, 이 책에 대해서 책나무님하고 뭔가 소통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아요 ㅎㅎ;; 저는 이 책 진짜 너무 좋았습니다! 의외로 이동진 이하 책비평가들이 깐깐하게 평가를 해놓으셔 가지고, 선입견들을 가지실 것 같은데, 요정도의 말랑말랑함이라면 사랑스럽습니다 ㅎㅎㅎ 근데,,, 참 일찍도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진짜 책밖의 제 인생은 그러니까 내 지금의 현생은 혐생입니다. 흑흑흑흑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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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혀 몰랐던 사람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라니, 만약 제목대로라면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해 주려나 하는 호기심 정도가 일어났다. 책날개를 보니, 일본의 저명한 학자라고 하네.

우연히 들춰본 문구 속에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의 어린이들이 볼 것으로 의식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든 게 아니라 일본 어린이들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세계적으로 통했다. 라는 것. 아울러 재밌는 구절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게는 실패작이 몇 개 있습니다.” <붉은 돼지>라는 작품을 두고 실패작이라고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 관객인 어린이가 아니라 자신의 미의식이나 기호에 맞추어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참 흥미로운 구절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서점 안을 걷고 있었더니, 책과 눈이 맞았다 라고나 할까. 어쩌다 집어든 이 책에는 마침 내가 읽어야 할 것이 쓰여 있었던 것.

이 책은 2010년부터 2011년 1월 사이에 작가가 몸담았던 고베여학원대학에서의 마지막 강의를 손질하여 엮은 글로 총 14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은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필사적으로 손짓발짓과 다양한 표정을 동원하고 온갖 언어 표현을 시도하겠지요.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  ‘마음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독자를 향한 경의의 표시인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정보 취득만을 위한 독서)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씹고, 핥고, 후룩후룩 마시기도 하는 식도락처럼 책에서 최대한의 열락을 끌어내려는 독자가 빠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책 읽는 방식은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환경에서만 허용되니까요.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비오는 일요일 오후라든가, 친구가 놀러 오지 않는 여름방학의 어느 날 대낮이라든가, 눈 내리는 밤 아랫목 방구들이라든가, 시간이 남아돌아 몸이 배배 뒤틀릴 때, 우리는 책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끌어내기 위해 창의적으로 궁리합니다. 이 상태를 독서의 초기 설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말 할 것 없이 내가 그렇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 친구가 “이것 좀 읽어봐, 정말 마음에 들 거야.”하고 추천해서 책을 읽으면, 재미는 확실히 있을지 모르지만 ‘숙명의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여름방학 과제로 읽어야 해서 읽은 책도, 찬사 가득한 서평을 받은 책도 안 됩니다. 타인의 평가가 끼어들었으니까요. 그런 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이 책이 내비치는 아우라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야.’ 이런 서사가 성립해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몹시 기분이 좋을 때는 글을 쓰고 있을 때 ‘끝까지 다 글을 쓴 자신’의 성취감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연속적으로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몰두하고 있으면 뜻밖에도 ‘아카데믹 하이’ 상태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전부 다 글을 쓴 자신의 이미지를 선취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되돌아보듯이 결론에 이르는 논의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보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논증을 대고, 어떤 인용을 통해 어떤 결론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죄다 보입니다. 순간적인 ‘비전’이기 때문에 곧장 사라져버리지만, 그 후에는 충만한 행복감에 휩싸입니다. ‘이 논문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논문을 다 쓰고 난 다음의 자신과 만났기 때문에! 모든 물음에 대답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다 보았단 말이다!’
이런 선구적인 비전은 긴 글을 쓸 경우 필수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한 비전을 가져다주는 것은(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수동적인 전지전능의 느낌’입니다. 자신이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어 공중 높이 들어 올린 다음, 유체이탈을 한 상태로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까지 글을 다 쓰고 난 이후 깊은 만족감을 맛보는 자신이 보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수동적인 전지전능의 느낌에 강렬하게 열광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뇌 속에 엔도르핀이 대량으로 나올테니까요. 오싹하는 쾌감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바보의 벽’,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은 고역일 따름입니다. "

"언어에도 ‘생명이 있는 언어’와 생명이 없는 언어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높여주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가는 힘을 잃게 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잠수해가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어디까지든 한없이 들어갑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개별성이나 개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 뚫고 나가버립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뜹니다.>에서 그는 소설 쓰는 행위를 가리켜 ‘지면에 구멍을 파서 수맥을 찾아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구멍을 파다가 무언가 솟구쳐오르면 그것을 길어올리는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 그는 “양을 쫒는 모험‘을 쓸 때 전문작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독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독자가 될수록 기분 좋 게 술술 읽어주기는 바라는 속 깊은 마음이 설명에 특별하고도 풍부한 색채를 더해줍니다. 잘 쓰는 것도, 정확하게 쓰는 것도, 논리적으로 쓰는 것도, 제대로 논증하는 것도, 적절한 비유를 섞는 것도, 때때로 ‘커피 타임' 같은 휴식을 끼워 넣는 것도, 독자가 기분 좋게 읽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경기 회복만 이루어지면 고용 조건도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얘기라면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성공 체험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맛을 들인 기업이 고용하는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용 환경의 변화를 바랄 리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 가망이 없다고 보고 악성 기업에는 취직하지 않는다든가 더 즐거운 일을 찾겠다는 방향으로 돌아서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건강한 사람’이 이렇게 불합리한 상태를 참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핏대를 세우고 취직에 매달리는 일은 명확한 잘못입니다.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 ‘말이 안 돼, 말이 안 돼서 못해먹겠어.’ 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에서 볼 때 올바른 반응입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남기 위한 리터러시’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20대 청년 시절에 난해한 책으로 잘 알려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슨 말을 썼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지 않으면 그 당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3주에 걸쳐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통독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는데 3주일 동안 줄기차게 읽었더니 어렴풋이 감이 잡혔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가며 외국어로 떠드는 연극을 3주일 동안 매일 본 느낌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지면 어느새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등장인물도 나오고, 편들어주고 싶은 배우도 생기고, 귀에 익숙한 반주음 악이나 익숙한 무대 장치도 식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이야기인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점차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일 정보의 입력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 인간의 뇌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조직화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언어는 도구가 아닙니다. 돈을 긁어모으거나 자신의 지위와 위신을 추어올리거나 스스로를 문화 자본으로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렇게 욕망하는 주체 자체를 해체하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것입니다. 생생한 언어를 습득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타자에 동기화하는 것, 그것을 통해 기존의 자아를 일단 해체하고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자아로 재편성하는 것, 이런 과정이야말로 생명의 자연에 적합합니다. 따라서 일부러 이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인간은 자연스레 타자의 언어에 가상적으로 동일화하고 타자에 동기화하려고 합니다. 이익의 유도는 도리어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한다고 봅니다.

"나는 이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글을 잘쓰는 능력이 아닙니다. 글을 '정확하게 쓰는 능력'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독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독자가 될수록 기분 좋 게 술술 읽어주기는 바라는 속 깊은 마음이 설명에 특별하고도 풍부한 색채를 더해줍니다. 잘 쓰는 것도, 정확하게 쓰는 것도, 논리적으로 쓰는 것도, 제대로 논증하는 것도, 적절한 비유를 섞는 것도, 때때로 ‘커피 타임' 같은 휴식을 끼워 넣는 것도, 독자가 기분 좋게 읽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우리가 무의식 상태에 있는 동안 어떤 작업의 어떤 순서로 해나가는 것일까요? 그들은 대량의 정보를 잘게 나누어 이리에게 먹기 좋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인데, 거꾸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량의 정보를 ‘이런 것은 먹을 수 없어.' 하고 말하고 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너그램을 다룬 책도 있지요. 영어 애너그램 중 재미있는 것이있어서 소개합니다.
'Dormitory(기숙사)의 애너그램은 매우 잘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Dirty Room(더러운 방)'입니다.
'Psychiatrist(정신과 의사)는 ‘Sit, chat, pay, sir(앉아, 얘기해, 돈을내)'랍니다. 대단하지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세계문학은 자신이 있는 곳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인 문맥을공유하지 않는 타국의 독자들과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나눌 수 없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는 것에 대해 독자는 글쓴이가 자신과 똑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장소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경험적으로 확실한 점은 신체를 매개로 삼으면 효율적이라는 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은 오랫동안 내 연구 주제였습니다. 왜 그는 온 세계의 수억명의 독자를 얻고 있을까? 자신이 직접 트라우마를 경험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경험에 대한 기억의 결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물려받은 작가', '거짓 경험'을 자신의 근거로 받아들인 작가는 어쩌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에 근거를 이루지 않았을까 합니다.

작가의 후기
(...) 통독하는 동안 반복적인 이야기가 잦아서 스스로도 싫증이 났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반드시 '반복'이 있는 법입니다. 미묘하게 음조가 다른 반복이 이어지다가 이야기의 수준이 겨우 한 눈큼 만큼 깊어집니다. 산을 오를 때 빙글빙글 산 주위를 도는 길을 헤맬 때와 마찬가지로 몇 번이나 똑같은 경치와 마주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때마다 조금씩 등고선이 더 높은 곳에서 본 경치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경치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바다가 보이기도 하고, 먼 산이 보이기도 하면 경치의 '문맥'이 변합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곳은 '고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니까 눈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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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9-07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떤 서재인이 글쓰기 시작할 때? 읽어보기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 책이라 저도 제목은 기억하고 있던 책이네요.
하야오의 이야기도 담겨 있었군요?
인용문들이 와…
나중에 도서관에 가서 검색해봐야 겠어요.^^

icaru 2025-09-07 11:24   좋아요 1 | URL
그 서재인 중에 저도 있지 않나 몰것어용 ㅎㅎ;; 2년전에 진짜 저한테는 이 작가의 해였는데, 별 신변잡기적인 것까지 나와 있는 책도 찾아 읽고(자녀를 홈스쿨링으로 교육시켰다거나..) 찾다보니 재밌었던 건 하류지향 이라는 책은 15년 전에 읽었던 이 작가의 책인데, 글쎄 저는 이 작가가 이 책이 처음인 줄 알았던 거죠.

잉크냄새 2025-09-07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참 많이 나오는데, 인용하신 글들이 가슴에 와 닿는 게 많아요.
‘필사적으로 손짓발짓과 다양한 표정을 동원하고 온갖 언어 표현을 시도하겠지요.‘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는데 3주일 동안 줄기차게 읽었더니 어렴풋이 감이 잡혔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가며 외국어로 떠드는 연극을 3주일 동안 매일 본 느낌입니다.‘

icaru 2025-09-07 11:26   좋아요 0 | URL
잉크님 저보다 더 옮긴 문장들을 촘촘하게 읽어 주셨네요. 와아- 현학적으로 쓰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직설적인 정치 발언도 좀 하는 사람이고, 또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이라 자국에서는 비호로 생각하는 무리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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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트러스트의 뜻은 (알다시피) 믿음이고, 또다른 의미로는 독점(금융과 기업 권력의 결합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를 모두 뜻한다. 독자가 라쇼몽 같은 서술 서사 기법을 좋아하고, 주식이나 대공황기 포함 미국 혹은 경제(경제, 금융, , 권력, 계급)에 관심이 다소 많이 있다면 꽤나 꿀잼으로 읽힐 소설이다. 동일한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반복적으로 서술한다. 장르를 다양화해가면서(총4부작 구성인데, 1부는 이 소설속의 또다른 소설로 주인공은 극중 실존 '베벨'임을 짐작하게 함, 2부는 베벨의 자서전, 3부는 베벨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작가의 회고록, 4부는 자서전의 주인공의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 각 서술은 부분적으로 맞닿지만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어서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절대적 진실로 확정할 수 없게 하지만, 이 소설의 경우 아내 밀드레드의 일기인 마지막 챕터가 진실에 가깝고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24년에 읽은 소설 중에 최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지속하고 있는 도서모임(큰애 중학교 어머니독서회)의 도서로 추천했다가 품평할 때 욕 좀 먹은 작품이다.

 “이게 소설이에요, 에세이예요, 자서전이에요, 회고록이에요? 뭐예요?”

 

인정한다. 1부는 재미없고 지루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을 암묵적으로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속의 소설인데, 거의 고발이나 다름없게 인간미 없는 파렴치한 부자처럼 서술하고 있어, 정나미가 안 붙기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2부에 가면 실제 그 인물의 자서전을 읽게 된다. 1부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괴리감을 느끼면서.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소설이다. 그래서 초반부 지루하다는 분들에게는 조금 더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달라질 것이다 라고 말해 주었다.


23년에는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몰표를 받았다는 거 같다.

   

3부에서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3부는 거물급 주식 부자 주인공 베벨의 자서전을 써준 작가가 자서전을 대필했던 23세의 그 당시를 회고하는 회고록.

 

267

베벨 투자회사에서 시험과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할 기회가 생긴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291

당시 저택은 가장 융성할 때였고, 내게 끼치도록 고안된 모든 영향을 끼쳤다. 저택은 내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나 자신이 어색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뭘 달라고 하는 입장도 아닌데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압도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답게, 나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저택 때문에든, 저택에 대한 나의 순종적인 반응에든.

나는 아이다가 처음 베벨의 저택에 발을 딛으며 느낀 감상을 고급 호텔의 로비에 들어설 때 느끼곤 한다. 특히 반얀트리나 워커힐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어려운 호텔일수록 더.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난 자체가 내가 그곳을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임을 증언하고, 언덕을 지나 마침내 호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비싼 외제차나, 평일 낮인데도 호텔의 야외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난 그걸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거지가 된 것 같아진다. 내겐 이게 역사가 우리를 배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도 느껴졌다. 개인의 욕망이 무관해지는 압도적이고 철저한 배제.

 

 

311

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 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 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은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양 등등--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혹시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의미로 하는 말인가?”

마침내 내가 베벨을 화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혹시 내가 악의나 복수심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그보다 더 나쁘게는 잔인함에서 변태적인 전율을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 모든 일이 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그 표현이 이 상황에 적용되는 것인지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가 남이 자기 말을 인용하는 걸 좋아하다는 건 알았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현실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베너가 존재한 적도 없던 세상에서 베너의 흔적이 발견되다니, 얼마나 앞 뒤가 맞지 않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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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9-07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밀리의 서재에 둥둥 떠다니길래 일단 서재 보관함에 담아둔 책이었는데 까먹고 있었던 책이네요.ㅋㅋㅋ
이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이나 어딜 가는 곳마다 책표지가 늘 눈에 띄었었는데 icaru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읽으라는 그동안의 계시였던가? 싶은 맘이 드네요.ㅋㅋㅋ
와. 근데 어머니 독서회.독서 모임을 아직도 유지 중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다들^^

2025-09-07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 최인아 대표가 축적한 일과 삶의 인사이트
최인아 지음 / 해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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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의미'와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기'에 관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된 화두일 터다.

이 글의 저자 최인아 대표는 본문에서 그런말을 한다. 마흔부터10년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꺼며 일을 그만둔 이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하는, 마흔으로부터 10년 가까이 보낸 끝에 퇴직을 할 때는 '앞으로 내 인생에 일은 없다. 더는 일하지 않겠다'라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직 후 2년쯤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일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다고. 텍스트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뭔가를 새로 알게 되거나 희미하게 알던 것들이 책 속의 한 대목과 만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지적 호기심이 아직 살아 있었다고.

광고 계통에서 일한 사람들은 대학원에 갈 때 대개 마케팅이나 브랜딩, 커뮤니케이션 같은 업무 관련 전공을 택하는데, 자신은 역사를 공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을 때, 주인공 장그래가 속한 오 차장 팀이 예전에 중단했던 요르단 사업을 재개해 보겠다며 대표이사와 전 임원들 앞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대목을 보는데, 몇 차례나 방향을 바꾸고 콘셉트를 수정하고, 또 초조하게 시간에 쫒기며 그들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맥박이 두근부근 크고 빠르게 뛰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 안쪽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어? 나 저거 해야 되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결국은 자신이 잘 하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맥락이었다.

나 자신은 어떤가?

사실 그냥 하는 것이지 잘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자아 실현을 해봤습니다. 라고 하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매순간 자아 실현을 경신해야 하는 것일까?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 고민은 70대가 되어서도 할지 모른다.

내 주변 가까이 어머니 연배의 어르신 또한 힘들고 피곤하시단 말을 반복하지만 꿋꿋하게 가게를 꾸려 가며 사회 생활을 하고 계시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피곤죽이 되었다가도 어머님 이하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곤 한다.

사람이란 왜 자꾸 자신의 길을 확신하지 못해서 주변을 쭈뼛거리며 회피나 변명을 삼을 만한 롤모델을 구하려 하는 걸까? 유퀴즈에 나온 방영 내용을 찾아보기까지 하였다! 잘 몰랐었는데 선구자적인 직장 여성의 모델이었던 것 같다. 대중들에게는.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는 자기 주도권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자신을 입증해 보인 사람만이 누리는 권리요, 권한이다. 특히 일터에서는 말이다. 맡길 만해야 맡기는 거고 잘 해내야 계속 맡길 수 있다."


이런 회사 오너 같은 죽비소리 말이 되게 듣기 싫을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데, 

보통은 이분의 에세이가 피와 살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확신 못하겠고 대다수 대부분의 날들이 아마 그럴껄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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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06 2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가 원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산다는 건 참 축복받은 인생이구나 싶어요.

icaru 2025-09-07 08:51   좋아요 0 | URL
그죠,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마저도 그 입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표현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지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