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데일리 서프라이즈>에서 "홍세화 ‘나는 더 이상 한국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이 기사로 홍세화는 택시운전사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후에 <한겨레 21>의 홍세화 칼럼을 보니 홍세화는 자신이 그런 발언을 하게 된 맥락과 절박한 문제의식을 뒤로 한채, '택시운전사와 얘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발췌해 제목으로 쓴 <데일리 서프라이즈>의 기사를 '어느 진보매체의 조선일보스러움’이라는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며칠 전, 회식을 하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데 택시 아저씨가 계속 말을 시켰다. 선거 전날이었기에 당연히 화제는 선거 얘기였다. 나한테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물어 보기에 난 "잘 모르겠어요."하며 대답을 피했다. 한밤의 택시에서 운전사의 의견에 반대되는, 또는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아저씨는요?" 하고 물었더니 "당연히 오세훈을 뽑아야지." 하며 강금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투도 '반말'로 바껴 있었다. 택시 기사들이 자기 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들에게 은근히 말을 놓는 건 친절한 택시 기사를 만나는 것 보다 흔한 일이다. 그 아저씨는 강금실을 '씨족사회를 붕괴하는 나쁜 여자'라며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했다. 난 어이가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 아저씨의 길고 긴 연설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강금실은 이혼녀다. 가정 하나 못 지키는 여자가 무슨 정치를 하냐? 요즘 여자들 잘났다고 이혼하는 거 정말 재수 없다.
둘째, 강금실은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다. 호주제가 폐지돼서 이제 씨족사회가 붕괴될 판이다. 이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냐? 친남매들끼리 결혼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짐승처럼 살게 생겼다.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애써 심호흡까지 하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그런데 왜 친남매들끼리 결혼을 해요? 그게...호주제 폐지하고 상관이 있나요? "
아저씨는 나의 질문에 열과 성을 다해서 설명했다. 교단에 선 후로 처음 질문을 받아 본 비인기 과목 교사처럼.
" 호주제가 폐지되면 어떻게 돼? 여자들이 이혼하고 애를 데리고 다른 남자랑 재혼하면 성이 바뀌쟎아. 이혼한 남편이 아들을 키우고, 여자가 딸을 키운다고 생각해봐. 보통 아들은 여자한테 안주지. 그럼 남매끼리 성이 다르쟎아. 그 남매가 어른이 되서 만난다고 쳐봐. 성이 다르니까 지들이 남매라는 것도 모르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도대체 짐승하고 다른 게 뭐가 있어?"
난 회사생활 10년차의 숙련된 '인내심'을 발휘하여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질문을 하나 더했다. 아주아주 공손하게.
" 저....그런데요. 부모가 이혼을 해도 남매들끼리는 계속 만날텐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아가씨, 참...세상 물정 모르는구만. 여자들이 남자 생기고 재혼해봐. 옛날 남편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자식 새끼도 다 까먹고 산다고."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침묵모드로 일관했다. 만약 내가 술 취해서 그 아저씨가 하는 말에 반박이라도 했다면 위험할 뻔 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건 정말이지 멍청한 일이다. 우발적 범죄의 대부분이 상대방의 '말'에 열 받아서 일어난다고 한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 만큼 쓸데 없고 미련한 짓도 없다. 홍세화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을 했는지 절절히 공감했다.
인간은 잘못된 믿음일지라도, 한 번 믿은 건 계속 믿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평생 그렇게 믿을 꺼다. 그 아저씨를 페미니스트 100명이 날마다 찾아가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 해도 그 아저씨의 믿음은 달라지지 않을 꺼다. <올드 보이>처럼 최면이라도 걸지 않는 한 그 아저씨는 달라지지 않을 꺼다. 참...씁쓸하고 또 슬펐다. 대한민국에 그 아저씨처럼 생각하는 중년 남자들이 어디 한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