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동식의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일반인들과 문학전공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 그 깊고 깊은 심연에 대해 절감했다.

회사생활 10년차.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 '나부랭이'를 즐겨 읽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30대 여자들은 그래도 좀 많이 읽는 편이고,
남자들이 소설을 읽는다면 주로 <삼국지>,<로마인 이야기> 이런 책들이거나,
아님 출장갈 때 지루한 비행시간을 견디기 위한 무협지가 대부분이다.

매일 소설을 읽고 평론을 쓰는 것이 생업인 문학평론가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회사원들의 독서 수준을 가늠하기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번은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회의에서 K과장이 엉뚱하면서도 쌩뚱 맞은 말을 하자 K2 과장이 말했다.
" 형! 꼭 황만근 같아."

K과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물었다.
" 황만근? 황만근이 누구야? 개그맨이야? "

K2 과장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뻘쭘해 하며 말했다.
" 아...그게...얼마 전에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는데,
그 주인공 황만근 같다구."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 야...너 그런 소설도 읽냐? "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배수아, 김영하, 박민규, 전경린, 조경란...
이런 소설가들은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다.
당연히 문학평론가들은, 문학평론가까지 아니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작가들의 이름 정도는 알겠지...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모른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회사 가서 옆에 앉은 사람한테 물어보라!
(출판사나 신문사 문화부, 이런 회사는 제외)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실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원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마시멜로 이야기>,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괴짜 경제학>, <경제학 콘서트>.... 이런 책들은 많이 읽는다.

최근에 울 팀장이 읽고 술 마실 때 마다 얘기하며 직원들에게 권한 책은
공병호의 <10년 후 한국>이고,
울 상무님이 읽고 팀장들에게 읽어보라고 한 책은 <양치기 리더십>이다.

2005년 SERI CEO 추천도서 목록에는 소설이 단 한권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20권 중에 소설은 단 한권도 없다!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짐 콜린스의 경영전략>, <미래 기업의 조건>, <톰 피터스의 미래를 경영하라>.....
다 이런 경영/경제서들이다.
그나마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이러니 기업들한테 '문화 경영', '감성 경영'을 바라는 건 웃기는 소리다.
CEO들의 책장을 보라, 소설이 몇권이나 있는지!

회사원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퍽퍽하고 드라이하다.
이 '드라이'한 환경에서 감수성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면 힘들기만 하다.

그래서 난...신입사원 때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삼국지> 빼고.
안 그래도 힘든데, 힘들어 죽겠는데,
읽고 나면 우울해지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을 대하기가 싫었다.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은 1997년,
'드라이'한 인간이 되려고 발악을 했던 해였다.

요즘 문단과 출판사들은 '한국 소설의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한국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탓만 하지 말고,
소설가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회사원들은 죽어나는데, 소설가들은 너무 뜬금 없는 얘기들만 하고 있는게 아닌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은희경 소설 중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여자가 훌쩍 여행을 떠나며
사표를 우체통에 넣어 부치는 '낭만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소설가들이여!
요즘 회사들에 그런 낭만은 없음을 알아주시라.
사표도 다 전자결재다. 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자결재가 나야 한다.

여름방학에 대학생들이 인턴을 하듯이,
소설가들을 위한 인턴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어떨까?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Koni 2006-06-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녔던 회사는 작은 데라, 전자결재란 게 아예 없었고, 당연히 사직서도 전자결재가 아니었는걸요.^^;;

하이드 2006-06-18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물론, 위에 언급하신 작가들의 소설들은 들쳐봤습니다만 ^^;) 위의 말은 참 공감이 가네요.

2006-06-18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18 0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6-1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시와 동떨어져 사는 제게 조금 위안이 되는 글이네요. ^^;;

마태우스 2006-06-1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만근은커녕 성석제도 모르는데요 뭐... 은희경을 모르는 친구도 숱하게 있더이다... 문학은요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조그만 나라라고 알더군요.

BRINY 2006-06-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결재는 아니더라도 미리 얘기 안하고 저런 식으로 사표 던지고 떠나버리면 욕 무지 먹는 거 사실이죠 뭐~~

kleinsusun 2006-06-1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네...제가 대기업 생각을 했네요. 갈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드님, 한국 여자 작가들이 쓴 소설에서 툭하면 여자 주인공들이 인도나 아프리카로 떠날 때 허망하다니깐요.ㅎㅎㅎ

조선인님, 며칠 전에도 <신 기생뎐> 읽으셨쟎아요. 소설이랑 친하신데요 뭐^^

마태님, 맞아요 . 소설 전혀 안 읽는 사람들 많아요. 국어 시간에 나왔던 소설가 아니면 대부분 모르는 게 현실이죠.ㅠㅠ

BRINY님, 네....소설 속 사표는 '낭만적'이긴 한데.... 엄청 욕 먹고, 또한...담 직장 구하기 힘들겠죠? ㅎㅎㅎ

stella.K 2006-06-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맞는 말씀하시네요. 글치 않아도 엊그제부터 간만에 우리나라 신세대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긴 합니다만, 그게 모문학상 후보에 올랐드리구요. 평도 좋아 읽어 볼 생각을 했습니다만, 묘사는 그럭저럭 좋은데 서사가 없다고나 할까? 수선님 말씀 공감은 가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한숨이 나오네요. ㅜ.ㅜ

kleinsusun 2006-06-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stella님도 밤 새셨어요?^^
소설가 지망생들이 처음부터 문창과 가서 계속 습작만 하지 말고, 뭔가 일을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소설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는건 좀 허망하쟎아요.ㅎㅎ

2006-06-2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즈마리 2006-07-02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수선님 욜라 동감입니다...ㅋ ㅠㅠ
근데 소설가들이 다 백수거나 시간강사거나 그렇죠 모..ㅋㅋ
악순환인 거 같네요. 회사다니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고, 소설가는 백수독자를 위해서만..쓰는 듯..ㅋ ㅠ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kleinsusun 2006-07-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네...요즘 문학상 수상작들도 다 소재가 "백수" 더군요.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자전적 경험"을 참고해서 썼다는데....
정말 악순환인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