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생각했다.
하루키가 변한걸까? 아님 내가 변한걸까?

<어둠의 저편>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터넷 서점 독자서평에 "배신과 실망", "늙어버린 하루키" 이런 제목의 글들이
많은 걸 보면,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허탈해 한 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도리스 되리의 [Der Fischer und seine Frau](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러
설레이는 마음으로 메가 박스에 갔다.
(강남은 메가 박스, 강북은 씨네 큐브에서만 상영중)
"파니 핑크"가 떠올라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런데...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95년에, 그러니까 11년 전, 독일에 어학연수 갔을 때,
독일 할머니랑 일주일에 한번씩 "꽁짜"로 "free talking"을 했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말동무도 할겸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했다.
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했다.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그런데....한달쯤 지나니까 그 할머니를 만나는 시간이 슬슬 힘들어졌다.
할머니는 만날 때 마다 똑 같은 얘기들을 했다.
말이 "free talking"이지 난 몇번을 들었음에도 놀라는 표정으로
"echt? (really?)" 하며 듣는 것 밖에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외로우면, 얼마나 말할 사람이 없으면 그럴까...생각하며 열심히 들었다.
누가 자원봉사를 하는 건지 헛갈리는 상황이었다.

오늘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다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도리스도 이제....늙은걸까?

<파니핑크>는 1994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2005년.
11년 동안 휙휙 세상이 변했듯이, 도리스도...변했다.
'♬ 사람들은 모두 변화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그래...나도 변했다.
내가 11년 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봤다면,
그저 웃긴 장면에서 킥킥 거리며 즐겁게 봤을지도 모른다.
이것 저것 많이 생각하지 않고...

도리스도 변했다.
11년의 세월만큼 성숙해지고 깊어졌다면 좋으련만,
그런 느낌 보다는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처럼 관객을 가르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또, 전형적인 서양인의 관점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직도 많은 서양인들에게 인도는 명상과 요가의 나라고,
일본은 소박하고 순하고,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나라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에서 일본은 완전 시골이고,
주연급 조연 Yoko(한국계 배우 김영신)는 오직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일본 여자 캐릭터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난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p.s) 이 영화의 원제는 [Der Fischer und seine Frau].

그림 형제의 동화 제목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어부가 물고기를 잡았다.
그 물고기는 자기가 마술에 걸린 왕자라고 말하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어부는 물고기를 보내줬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다시 가서 마술에 걸린 왕자를 불러서
보답으로 새 집을 달라고 하라며 남편을 들볶는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물고기(왕자)를 불러 집을 달라고 말한다.
집이 생기자 더 큰 욕심이 생긴 아내는 성(castle)을 지어 달라고 하고,
성이 생기자 왕이 되고 싶다고 하고,
왕이 되자 하느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왕이 되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에
어부와 욕심 많은 아내는 성도, 왕관도 다 잃고
다시 헛간에 살게 된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의 제목과 모티브는 바로 이 동화다.
그렇게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 안해줘도 되는데,
비단잉어 부부(진짜 잉어다!!!)가 나레이션으로 주제를 다 말해준다.

도리스 언니는 너무 친절해진 것 같다.
내겐 너무 친절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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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7-0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자고 뭐해요? ㅋㅋㅋㅋㅋ

로즈마리 2006-07-02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보러갈까 했는데...아닌가? ㅠㅠ

마태우스 2006-07-02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내일 이 영화 볼건데...퍼니펑크의 기대감으로 이걸 본 분들이 많군요. 전 다행히 퍼니를 안봤답니다 근데요 수선님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프레이야 2006-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의 눈을 참고해서 볼게요^^ 좋은 글입니다...

moonnight 2006-07-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기대만큼 아닌가보네요. 역시 수선님의 맛이 나는 멋진글이세요. ^^

다락방 2006-07-0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보고싶었던 영화예요. 아마 제가 보기도 전에 내려질것 같네요.흐음~

kleinsusun 2006-07-0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매너! 울산에서 술을 넘 많이 마셨어.ㅠㅠ 당분간 술을 못 마실 것 같아... 넌 안자고 뭐했어? 행복한 일요일 보내....^^

로즈마리님, 아니진 않아요. 기대를 넘 많이 해서 실망이 컸을 뿐...^^
<흑설 공주>나 <루비 레드>처럼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동화를 재해석하는 그런 영화거든요. 도리스판 <어부와 그의 아내>라고나 할까요?

마태님, 아...오늘 보시는 군요. 씨네 큐브에서 보시나요?
<파니 핑크> 안 보셨군요. < 내 남자의 유통기한 > 먼저 보고 보세용!^^

혜경님, 감사합니다.^^

달밤님, 전 별로였는데 친구는 재미있었데요. 빨리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영화 오래 안하쟎아요.^^

다락방님, 네... 보시려면 서두르세용. 메가 박스는 14관(젤 작은데), 씨네 큐브 달랑 2군데서만 해요. 언제 끝날지 모르죠.
참! 그림 형제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읽고 보시면 더 재미있으실 꺼예요.^^

로드무비 2006-07-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친절하면 부담스러운데.
도리스 언니, 수선님과 저한테는 그러지 마세유.^^

kleinsusun 2006-07-0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직 영화 안보셨죠?
제가 삐딱하게 쓰긴 했지만 그건 넘 애정과잉상태라 그런 거구요,
여전히 도리스만의 뭔가가 있어요. 언제 보실꺼예욤?^^

비로그인 2006-07-03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도리스 되리.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그저 보셨다는 그것 하나로 부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