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대하여

 

 

 

 

그릇은 인간 됨됨이에 대한 은유이다. 평생 대접받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곰곰생각하는발의 그릇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동시대 함께 살아있는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고 난 후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손이 떠납니다. 떠나버린 작가의 허울 같은 작품이야 남겠지만 작가의 살아있는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에 귀를 열고 눈으로 듣는 그런 활동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yureka01동시대를 함께 사는 작가들중에서)

 

    

 

 

세상에 수많은 그릇이 있다. 재료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놋쇠·플라스틱·나무·자기로 나뉘고, 용도에 따라 밥그릇·접시 등으로 분류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 만큼 큰 용기도 있고, 물 한 방울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그릇도 있다. 사람의 능력은 곧잘 그릇에 비유된다. 큰 그릇은 능력이 크고, 작은 그릇은 능력이 작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릇의 크기와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듯이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그릇이라도 개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된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담고 비운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그래야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다. 그릇이란 자고로 뭔가를 담아두는 게 그 쓰임의 본 용도이건만, 요즘은 싸움판에 차출(?)됐다. 정치판의 밥그릇 싸움이 그 대표라 할 만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맡긴 신성한 권력을 이용해 밥그릇이나 챙기고 팔자를 고치느라 바쁘다.

 

 

 

 

우리나라 전통식기 중에 탕기(湯器)’라는 것이 있다. , 찌개를 담는 그릇이다. 탕기는 밥그릇(주발)의 모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탕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탕기는 12역을 소화할 줄 아는 식탁 위의 주연배우다. 그러나 특별한 음식을 담는 그릇이 식탁 위에 등장하면, 탕기는 잠시 물러나 있다. 반병두리는 떡국이나 비빔밥을 담을 때 쓰는 그릇이며, 벙거짓골  전골 요리를 담는 그릇이다. 특별한 날이면 이 두 개의 그릇이 탕기를 대신하여 식탁 위의 주연배우로 발탁된다. 탕기는 가장 많이 식탁에 등장했고, 아주 많이 사용했음에도 다른 그릇에 비하면 너무 평범하다. 이름도 평범하다. 뜨거운 국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서 이름이 탕기로 남게 되었다. 조반기, 대접, 바리, 보시기, 양푼, 이런 그릇의 이름이나 용도는 사람들이 알아도, 탕기는 잘 모른다. 사람들에 눈에는 그저 국그릇일 뿐이다. 밥그릇을 닮아서 이걸 탕기라고 부르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식탁의 주연배우가 아니라 약방에 감초역할을 하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에 가깝다. 그래서 탕기는 소중하다. 밥과 국 아무나 담을 수 있는 편안한 그릇이니까.

 

 

 

 

 

 

 

 

 

 

 

 

 

 

 

 

 

 

 

그릇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외국에서 탕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탕기는 사람이다. 외국인 이름이 탕기라니, 특이하다. 쥘리앙 탕기(Tanguy)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그림물감 가게를 운영했다. 탕기의 가게는 단순히 물감을 파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화가들이 탕기의 그림물감 가게를 자주 방문했다. 탕기는 싼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그림은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들이 많았다. 탕기는 가난한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았다. 돈이 없는 화가들은 품질 좋은 그림물감을 사지 못한다. 탕기는 화가들에게 그림물감을 빌려주었다. 물감뿐만 아니라 미술 도구와 돈도 잘 빌려주었다. 탕기의 배려에 크게 감동한 화가들은 돈 걱정 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은 완성한 그림을 재력이 있는 그림 애호가에게 팔지 않고, 바로 탕기에 건네주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으로 탕기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의 온정을 잊지 않은 화가들은 탕기를 페르(Père, 아버지, 영감, 아저씨)’라고 불렀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7)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탕기가 물감을 파는 가게 주인이지만, 나름 그림 보는 눈이 있었다. 탕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가게에 오는 화가들 역시 자연스럽게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었다. 파리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화가도 탕기가 수집한 목판화에 푹 빠졌다. 이 화가 또한 탕기에게 신세를 지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가게를 찾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마음씨 좋은 탕기를 위해서 초상화를 제작했다. 탕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다. 그의 태도에 인자한 품성이 느껴진다. 초상화 배경에 일본 목판화들이 가득하다. 이 그림에 관한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탕기의 초상화가 너무 성의 없게 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화가는 탕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드러내려고 일본 목판화를 그려 넣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의 모습이나 품행은 아들이 그대로 전해 받는다. 화가는 탕기를 만나게 되면서 일본 목판화의 매력에 빠졌고, 인상주의 회화에 주목했다. 탕기의 심미안을 화가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화가의 친아버지는 예술에 자도 모르는 목사였다. 크게 낙심했던 화가는 파리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았다. 파리의 이방인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소중한 아버지. 탕기는 화가의 삶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버지(Père)였다.

 

이 네덜란드 화가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의 장례식에 탕기가 와주었다. 화가의 생의 온기가 멈추는 순간, 그가 남긴 그림의 온기도 사라진다. 탕기는 자신이 보관해둔 화가의 그림이 허무한 운명을 맞이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탕기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무명 화가의 그림에 이토록 애정을 가졌으니.

    

 

 

 

 

빈센트 반 고흐 글라디올러스 화병(1886)

 

! 가여운 빈센트! 어떻게 그런 불행한 일이...... 미르보 씨! 얼마나 엄청나게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천재적인 사람이! 그처럼 선량한 인간이! 잠깐, 그 사람의 중요한 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의 그림들은 걸작입니다!”

 

사람 좋은 탕기 영감은 자신의 상점에서 4, 5점의 캔버스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의자의 발판 틀에다 기대어 놓았다. (중략)

 

인간이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렇게 슬플 수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직 빈센트가 그린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알지 못하는 것 같구려. 마지막 그린 그림 중의 하나올시다. 대단한 작품이지요! 그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찾아보렵니다. 몇 분만 기다려 주세요.”

 

(옥타브 미르보의 <화가들> 중에서, 파스칼 보나푸 반 고흐, 태양의 화가146~147쪽 발췌 인용)

    

 

 

탕기(湯器)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서민적 체취가 짙게 느껴진다. 탕기(Tanguy)는 소탈하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자주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탕기(湯器)는 밥그릇이 되어도 투정하지 않는다. 탕기(Tanguy)는 화가들이 돈이든 물감이든 빌려달라고 자신을 찾아오면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정신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상관이 없다.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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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0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마음에 듭니다.^^

cyrus 2015-12-07 09:4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5-12-0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시대의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그 온기를 느끼는 공감력...결국 인품에서 나오나 봅니다.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 뒤에는 후원자가 꼭 필요한 이유더라구요..

cyrus 2015-12-07 09:46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의 글에 제 글을 먼댓글 설정할려고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유레카님의 블로그에 먼댓글 설정이 안 된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그 보니 제가 탕기와 룰랭을 혼동했거든요. 탕기는 물감 파는 사람이었고, 룰랭은 우체부였죠... ㅎㅎㅎㅎㅎ 룰랭이 그렇게 자주 찾아갔다네요. 술 마시러... 갈 때는 고흐 형편을 알고 있어서 늘 술과 안주가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cyrus 2015-12-07 09:47   좋아요 0 | URL
저는 탕기가 그림 파는 화상인 줄 알았어요. 착각했어요. 그림물감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쓸 때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

서니데이 2015-12-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릇 사진을 보다보니, 뚜껑이 있는 그릇이 많이 있네요. 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뚜껑있는 국그릇을 집에서 쓰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그릇처럼 느껴져요.
고흐는 동생이 먼저 생각나는 편인데, 앞으로는 탕기는 그림보다 그릇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cyrus 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7 09:5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뚜껑 있는 그릇을 가정집에서 보는 것이 드물어졌어요. ^^

yureka01 2015-12-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몰랐습니다..저도 이런 기능을 모르겠더라구요.트랙백 걸기..해본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인용..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49   좋아요 1 | URL
가끔 이웃이 쓴 글을 읽고, 영감을 얻으면 감사의 의미로 먼댓글 기능을 사용합니다. ^^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88년 하면 무슨 장면이 떠오르시는가. 하나씩 열거하면 너무나도 많다. 88올림픽의 굴렁쇠 소년,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그대에게’를 열창하던 젊은 마왕 신해철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추억의 물건들이 생각날 수 있다. 오백원짜리 지폐, 연탄보일러, 석유곤로, 워크맨 등이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아날로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긴 강력범 지강헌의 인질극도 잊을 수 없다. 씁쓸하지만, 권력형 범죄자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강헌 인질극이 당시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줘서 그렇지, 그 해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을 얼마나 될까. 1988년의 정서를 거의 완벽히 재현했다고 호평을 받은 ‘응팔’ 드라마 제작진들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유시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 《나의 한국현대사》에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그 사건을 ‘소환’했다.

 

 

 

 

 

 

문송면 사망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8년 7월 2일 자)

 

 

 

점점 다가오는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국민이 들떠있던 1988년 7월. 15살 소년이 세상을 떠났다. 소년의 이름은 문송면. 사인은 수은중독. 문송면은 혼자 상경하여 수은을 온도계에 넣은 작업을 진행하는 공장에 일했다. 문송면은 마음이 성숙한 소년이었다. 없는 집안 살림에 고생하는 부모님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서 중학교 졸업을 포기하고 자립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에 다닌 지 두 달 만에 문송면의 건강이 나빠졌다. 심각한 수은중독으로 인해 손발이 마비될 정도였다. 문송면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으나 공장은 그의 병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파문은 컸다. 심각한 청소년 노동 현실이 폭로된 것이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중금속 중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공장 환경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문송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 직업병 피해자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1981년에 일어난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다. 원진레이온은 박정희 대통령이 공장 기공식에 참여할 정도로 제1차 경제개발 역점사업에 참여한 인조견사 생산 공장이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이황화탄소의 위험성을 모른 채, 장시간 동안 일을 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황화탄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신체마비, 정신이상 등의 증상에 시달렸다. 1988년이 돼서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상 증상의 원인이 직업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노동부는 회사에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했고, 회사는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신청을 거부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의 실태가 알려지게 되자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등의 야당 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를 막으려고 하자, 정부는 태도를 돌변하여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안전과 작업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텄다.

 

20년이 지난 사이, 한국은 많이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발전하면 노동 환경도 좋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20년 전에 견줘 노동조건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삼성전자나 한국타이어 등 많은 대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암에 걸려 숨지거나 폭발사고 등으로 희생되고 있다. 십 년이 넘는 직업병 고통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가져와 자살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부는 노동자·민중의 안전과 건강보다 성장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 기업을 옹호하는 우파들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역사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소개하는 유명한 노동자는 전태일이 유일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절규에 우리 사회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1988년 전국에 알려진 소년은 두 명이었다. 어느 소년은 사회의 음지 속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두 달 뒤에 한 소년은 푸른 잔디밭을 달려가며 굴렁쇠를 굴렀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든지 어두운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단지 그것에서 눈을 돌려 밝은 면만 보려는 사회가 있고, 반면 그늘진 곳에 더 빛을 비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회가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두운 이면을 감추거나 그로부터 고개를 돌린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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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열 다섯이었다는 것이 더 마음아파요.
잘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4 17:3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yureka01 2015-12-03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차량 크레인 무너져서 노동자 2명이 사망했고,
서해대교 주탑에서 소방관 1명이 사망했다는 뉴스..
언제까지 우린 후진적 뉴스는 변함이 없을까요..

cyrus 2015-12-04 17:34   좋아요 0 | URL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보상을 해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이러니까 우리 사회에 노동 작업환경의 문제점을 개선할 마음이 없어요.

살리미 2015-12-03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어두운 이면은 존재하죠. 건강한 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둠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 어둠을 응시하는 자세에 있을 것 같아요.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늘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문제 해결이 시작되는 것일텐데 언제부턴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기가 어려워진 듯 하네요.

cyrus 2015-12-04 17:3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회에 무슨 잘못을 지적하면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오랜만에 듣느 이름이네요. 제가 아는 분 중 한 분이 원진레이온 노동자였습니다. 그분 말씀에 의하면 진짜 열악했다고 하네요...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원진레이온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죠....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cyrus 2015-12-04 17:39   좋아요 0 | URL
원진레이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직업병`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분신 사건 다음으로 한국현대사에서 기억해야 할 사건인데도 교과서에 짤막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과서 개정 때 이 사건을 반영하자고 건의하면, 분명 보수 쪽에서 반대할 겁니다.

루쉰P 2015-12-0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시간 cyrus님의 글을 읽어 온 독자이지만 글을 흐름은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전 글을 읽을 때 호흡이 끊어지면 좋지 않은 글이라 여깁니다 근데 정말 너무 부드러워요 ㅋ 부럽네요 전 너무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왕국 생활이죠 부끄러운 인생입니다;;;

cyrus 2015-12-04 18:15   좋아요 0 | URL
저보다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제 글은 어디 보여주기에 민망한 수준입니다. ㅎㅎㅎ 저도 혼자 지내는 생활이 많아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워질 때가 있지만, 혼자 있는 게 편해졌어요.

csp 2015-12-0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맣게 잊고 있다 기억이 났습니다. 어렸을 적 선물받은 환경보호 만화책에 고인의 이야기가 실려있었어요. 그 때 만화를 읽으며 참 공포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었는데... cyrus님 덕분에 오래 잊고 지낸 이름을 되새김질 하게 되네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13   좋아요 0 | URL
문송면 사건은 노동문제에 관심 많은 분들만 아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많이 회자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12-08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사건은 나중에와서 뉴스로 본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한창 노조운동도 그렇고 연탄공장 주변에 사는 분들의 진폐증 문제 같은게 다뤄지기 시작했지요. 문송면 사건은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접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법적으로는 집단소송이 가능해져야 하고, 징벌적피해보상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보아도 맘이 아프네요.
 
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해방공간은 일제에서 벗어난 19458월부터 19488월까지 3년간이다. 해방이 찾아왔지만,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소군정의 지배를 받았던 과도기다. 해방정국의 시대정신은 건국을 어떤 모습으로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모색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즉 좌우익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격렬한 좌우체제의 대립 구도 속에 건국을 위한 노선 투쟁이 진행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사회주의의 소련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극심한 좌우익 대립 끝에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두 나라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38선을 긋고 신탁통치를 검토했다. 해방 이후 독립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섰다가 사라졌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등이 우후죽순 난립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1945년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건준은 좌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고 우파의 참여로 구성된 좌우합작 정당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와 조선공산당의 방해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력이 냉전적 잣대로 해석되는 바람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이나 정치활동에서 모든 정파와 주의·주장을 떠나 조국 광복이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 민족의 과업을 위해서는 정파와 이념을 개의치 않았으며 누구와도 만나 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박헌영은 민족 통일보다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열중했고, 미군정은 박헌영의 행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은 마치 철길에 놓인 레일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실패함으로써 역사는 8.15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건국과정에서 자신의 정치기반이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잡았다.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건국 역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우고 말았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후손이 오히려 영화를 누리는 현실이 우리 사회에 기회주의, 출세주의 등을 만연케 하는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승만 정부 시절은 경제면에선 해방됐지만 일제치하보다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주를 상대로 파업을 전개했다.

 

현재와 미래문제의 해법을 찾는데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혼란상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역사관에서 너무나 깊은 골이 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좌우대립의 원형질은 8.15해방 정국으로부터 존재한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와 친일파, 좌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뉴라이트 세력들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1948815일에서 찾고 있다. 그 날은 유엔총회 결의와 유엔 참관 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뉴라이트의 눈에는 1948815일 중앙청 광장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의 얼굴만 보일 뿐이다. 박헌영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행적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저해한 부정적 역사로 보고 있다. 그래서 민족해방운동과 좌우대립의 해방공간 역사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김일성, 박헌영의 활동이 언급되면, 뉴라이트는 “그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하고 발끈하게 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억하자는 것이지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탈분단 시대의 역사의식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왜곡됐던 현대사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되돌아보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회가 미루어지면 해방공간의 반쪽 역사, 지워진 과거와 비틀린 역사로 가득한 괴랄한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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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3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진 사내 이야기

 

 

 

 

 

 

 

 

 

 

 

 

 

 

 

 

 

 

 

조선일보를 구독 신청하지 않은 게 후회한다. 지난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문제의 칼럼이 게재된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칼럼의 필자는 간장 두 종지를 가지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한 편을 완성했다. 필자가 칼럼 데드라인의 압박에 쫓겨 급한 마음에 이런 글을 쓴 것일까. 중국집에 간장 두 종지 더 달라고 주문했다가 주인에게 거절당한 자신의 경험을 야마로 잡을 줄이야.

 

필자는 그 당시 상황을 겪으면서 느꼈던 불쾌한 감정을 심하게 과장해서 표현했다. “간장님은 너 같은 놈한테 함부로 몸을 주지 않는단다. 이 짬뽕이나 먹고 떨어질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 문장을 쓰고 있을 필자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상상이 된다. 아마도 여기가 칼럼의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독자의 썩소를 부르는 최악의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필자의 환청은 그를 괴랄한 정신 상태로 이르게 한다. 필자는 평범한 중국집을 매정한 '배급주의' 공기로 가득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받고, 식당 종업원에게 고마운 인사를 남기는 행동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더 이상 쓸 내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무 것 아닌 행동을 지적한다. 필자는 문제의 중국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 맺힌 앙금이 남아있는지 친절하게 힌트를 남겨주셨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수습기자 시절부터 이 말을 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언론의 힘이 크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이 압도하던 권위주의 시대에 정의로운 언론인은 펜을 무기 삼아 온몸으로 진실을 기록했다. 그런데 펜이 생각 없는 사람에게 쥐어지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해로운 무기가 된다. 언론이 무책임하게 휘갈긴 펜은 선량한 사람의 가슴 속을 후벼 파기도 한다. <간장 두 종지> 필자는 펜이 아닌 망나니 칼을 쥐었다. 칼날은 권력이 아닌, 중국집 종업원으로 향했다.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간장 두 종지> 필자, 그리고 그 글을 옹호하는 기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필자의 옹졸함을 공개적으로 야유하는 동료 기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칼럼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따질 때가 아니다. 자신들의 무기를 엉뚱한 데서 사용하고 있다. 칼럼 한 편 가지고 보수·진보 기자들이 서로 펜 싸움질을 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천명하는 장면

    

 

서슬 퍼런 유신 시대에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펜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 하나하나 검열했다. 시위 상황을 알리는 기사가 있으면 누락되곤 했다. 이를 참다못한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1024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자유언론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317, 134명의 언론인이 해직됐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의 기세에 눌려 펜을 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펜 대신에 정부를 위한 나팔을 쥐고 열심히 불어댔다. 1971년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권력에 무력한 언론을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학생들은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 화형식을 진행했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중에, 유신215)

 

이 사건 이후로 기자들은 학생 시위 현장에 취재하러 가면 야유와 욕을 들었다. 취재해도 제대로 된 기사 한 편 쓰지 못하는 기자들은 권력 앞에 힘 못 쓰는 고자처럼 여겼다. 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들이 농성장에 취재 기자들을 무시하는 팻말을 걸어둔다. 기자들은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

 

동아일보 기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유신독재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권력이 은폐하는 진실을 캐내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겠다는 결의로 펜을 쥔다.

 

농성장 팻말을 본 기자 중에는 정연주도 있었다. 그때 당시 정연주는 동아일보 소속 기자였고, 자유언론 실천 성명 발표에 참여하여 해고당했다. 정연주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 KBS 사장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고초를 겪었다. 그 이후로도 권력기관을 동원해 언론의 손발을 묶는 정부를 비판했다.

 

펜으로 부정한 자들을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를 살리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언론인의 책임감이고 의무이다. 민주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언론은 사실 보도권력 견제를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권력 언론으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 1974년 상황에 비하면 요즘 언론인들이 개보다 못한소리를 들어도 전혀 이상한 점이 없다.

 

<동아일보> 주필을 하다가 권력에 의해 쫓겨난 천관우권력 앞에 벌벌 떠는 언론을 연탄가스에 취해 비명 한 번 못 지르는 기절한 상태라고 비유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연탄을 쓰는 가구가 잘 없을 텐데. 아직도 언론인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손에 쥔 펜이 정의의 칼인지 망나니 칼인지 구분도 못 한다. 분명히 제정신인데 이상하게 권력자들 앞에만 서면 무기력하다. 그런 기자들은 앞으로 기레기라고 부르지 말고, ‘고자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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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12-0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졌어요 ! 사람믄 무릇 그릇이 커야 합니다.

cyrus 2015-12-02 21:14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부장급이던데 회사에서 부장 대접 받지 못하면 부하들에게 눈치주는 사람일 것 같아요.

만병통치약 2015-12-0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화요리집˝에서 대접받을때는 분명 1인 1종지였겠죠 ㅋㅋ 근데 직원들 데리고 ˝중국집˝ 가니 전용 종지를 안 줘 ㅋㅋ / 부장님께서 서민용 중국집은 오랜만이라 감을 못 잡으셨답니다. ㅎㅎ

cyrus 2015-12-02 21:15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필자가 글 쓰는 감도 못 잡았군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5-12-0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찾아보고 나서 기자의 놀라운 문학적 비약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네요.

cyrus 2015-12-02 21:18   좋아요 0 | URL
칼럼 필자가 주문한 음식 받으면 감사 인사를 하는 손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황당했습니다.

yureka01 2015-12-0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기자 보고 기레기라고 하더군요.
기자쓰레기.결국 펜이 쓰레기란 소리더라구요.

이젠 권력보다 자본에 휘둘리죠.
같은 기사 짜깁기와 베껴쓰기에 얼마나 뷰를 많이 찍는가 라는 거...

아마 양심이 살아 있는 기자는 스스로의 자괴감 때문에 버티기 힘들겠다 싶더군요.

cyrus 2015-12-02 21:19   좋아요 0 | URL
기자가 잘못 쓴 기사를 써서 욕 먹으면 신문 제일 구석에 짤막한 정정 보도 기사 내면 끝입니다. 크게 부끄럽지 않은가봐요.

2015-12-01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02 21:23   좋아요 0 | URL
창피스러운 기후총회 연설 봤어요. 그런데 조중동은 보도를 안하더군요. 그런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북다이제스터 2015-12-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초 객관적 언론이란 것이 가능한 일인지 근본부터 궁금해 집니다.

cyrus 2015-12-02 21:25   좋아요 0 | URL
기레기들 때문에 정당하게 취재를 하는 진짜 기자들의 존재감이 알려지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CREBBP 2015-12-0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래기들이라는 별명이 괜히 따라다니는 게 아니죠. 발로 안뛰고 손가락으로 기스크린 따라다니며 `취재`하는 기래기들도 많은 시대에 뭐 자기는 대우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기래기들이야 널렸는데 무 써는 칼이라도 있으니 권력

cyrus 2015-12-02 21:28   좋아요 1 | URL
날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팩트 검증을 제대로 안 하고, 일단 관심 끌 만한 기사가 나오면 내용을 똑같이 써요.

서니데이 2015-12-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내용인지 원문이 궁금해졌어요. 지난주 토요일에 실린 글이면, 종이신문 대신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3 15:44   좋아요 1 | URL
앤드류대디님의 말씀대로 ‘간장 두 종지’ 칼럼 원문, 한겨레 만평, 그리고 문제의 칼럼을 소재로 한 다른 언론들의 칼럼을 같이 보면 좋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간장 두 종지’라고 치면 다 나옵니다. ^^

마키아벨리 2015-12-02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문에다 한겨레만평, 한겨레 칼럼까지 보셔야합니다

서니데이 2015-12-0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드류대디님, cyrus님, 고맙습니다^^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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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은 애매한 단어다. '헌책'이라는 게 어디 있나. 그냥 책이다. '오래된 책방'이라고 쓰는 것이 더 편하다. 오래된 책방은 정말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책을 팔고 있는 집이다. 그 집에 쌓여있는 책들은 책이 아니고 문화며 역사다. 70년대에 나온 책에는 경제개발 시대의 새까만 먼지가 묻어있다. 80년대 전공서적을 들여다보면 콧구멍 속이 매캐해진다.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건 묘한 전율이 있다. 어떤 책을 사겠다고 작정하고 찾아 나서는 경우는 대개 드물다. 오히려 책이 찾아온다는 게 맞다. 오늘은 어떤 책이 있을지 막연한 호기심으로 기웃거린다.

 

저자나 지인이 면지에 사인을 남긴 책, 행간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로 굵은 볼펜 심 자국이 선명한 책, 여러 번 넘겨 읽은 증거인양 곳곳에 찢어진 흔적이 있는 책. 고서쯤 되면 가치도 평가받지만 사람 손길을 많이 거친 헌책은 그저 버려도 되는 책으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책과 맺은 인연이 이렇듯 하찮다. 그깟 책쯤이야 버린다 한들 무슨 대수랴,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책이 그렇게 버려져야 할 존재인가. 책이라는 게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가.

 

오래된 책을 만나는 또 하나의 묘미는 누군가의 흔적 속에서 나의 어떤 기억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 책 주인의 심중이 드러난 한 줄의 메모는 그 책의 고고학적 연대기이자 숨결이다. 책 안에 들어있는 비밀스러운 사연들은 선택한 이가 받는 덤이다. 커버를 넘기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글이 적혀 있다. ‘보고 싶은, ○○에게로 시작하는 문장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편지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책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가 직접 사인까지 해준 책도 책방에 발견된다. 책을 준 저자, 그 저자의 친필 사인 본을 받은 사람 모두 유명하면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자신의 물건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럽다. 책의 경우 보통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간단한 단상을 적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책 속의 흔적들은 자신이 간직하는 책에 그 소유를 밝히기 위해 찍는 도장과 같다. 동양에서는 책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알리기 위해 장서인을 찍는다. 우리나라 애서가들은 책에 있는 전 주인의 장서인을 따로 도려낸다. 장서인이 잘려나간 종이 부분이 흉물스러운 상처처럼 남는다. 그러면 거기에 종이를 덧대어 붙인 뒤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는다. 반대로 중국 애서가들은 전 주인의 장서인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인이 많이 찍혀있는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도장이 많이 찍힌 종이가 지저분하게 보여도, 책값은 올라간다. 유명인의 장서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책값이 더 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인의 흔적이 있는 책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는 책방에 가면 전 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책을 산다. 지저분하게 보이는 남의 흔적들을 애써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가인 최석정의 말씀처럼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 것이다. 책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때를 밀려고 때밀이 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면 피부 살갗이 벗겨지듯이 종이의 때를 억지로 없애면 책 상태가 더 나빠진다. 헌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을 선뜻 사지 않는다. 당연히 새 책이 좋다. 누구나 깨끗한 상태의 책을 읽고 싶어 한다. 그래야 읽을 맛이 난다. 연필 자국으로 덮인 활자가 눈에 거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의 친필 메모에 공부에 대한 주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활자가 적힌 책이어도 그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눈에는 타블라 라사(Tabla rassa)일 뿐이다. 진정한 애서가는 책 한 권을 읽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책의 여백에 기록해둔다.

 

 

 

 

 

 

내가 책방에 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 1권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 부분이 많다. 더러는 그 밑줄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부분은 의문을 품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더듬는 것이 즐겁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늠하는 것 말고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다른 인생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알뜰살뜰 적어둔 주인의 메모는 다음 책 주인의 가슴에 식은 공부 열정의 온도를 다시 뜨겁게 해준다. 굳이 주인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내 생각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면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만들면 된다. 또 다른 여백에 메모를 남기는 것이다. 메모에는 책 읽은 사람의 생각이 갇혀 있다. 이것은 서가에 꽂혀있을 때는 박제돼 있다가도 지식이 필요한 독자들을 만나면 다시 살아 숨 쉰다.

 

특별한 하늘의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책의 전 주인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측만 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이 남긴 글씨 속에 주인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그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책을 파고드는 모습 말이다. 책 속의 메모는 한 인간이 책에 쏟아온 열정과 떨림을 엿보게 해 준다. 애서가는 눈빛으로 책을 갉아먹는다. 책벌레가 사라졌다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책방에 가면 이름 모를 책벌레들의 흔적으로 지저분한 책들을 발견한다. 책방에 가득 쌓인 책더미 사이를 지나다니는 책벌레를 만나곤 한다. 두어(蠹魚, 책벌레)가 습기를 좋아하고, 햇볕을 싫어하는 것처럼 인간 책벌레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을 때까지 어두컴컴한 책방에 서식한다. 나는 또다시 그곳에 간다. 책을 구경한다. 메모 흔적 가득한 낡은 책을 고른다. 다시 한 번, 책 속에 내 취향이 비슷한 독자, 아니 인간 책벌레 동지의 인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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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1-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래서 글씨 연습이 필요한거 같아요. 저는 신랑이 글씨 못쓴다고 구박할 정도의 악필인데 악필속에 비친 희미한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ㅋㅂㅋ~~~

cyrus 2015-12-01 18:00   좋아요 0 | URL
제가 발견한 헌책의 낙서는 심하게 알아보지 못하는 악필 수준은 아니었어요. 자세히 읽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있어요. 저는 책을 메모하는 데 굳이 글씨를 잘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들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만 알아보면 됩니다. ^^

단발머리 2015-11-30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어쩜 이런 다른 생각과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정말 신기해요^^

cyrus 2015-12-01 18:02   좋아요 0 | URL
서평 대회 적립금을 받고 싶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쭉 읽어봤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이미 다른 분들이 다 썼더군요. 그래서 뭐 써야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1-30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 읽은 흔적을 많이 남기는 편이라 사진 속의 책에 어쩐지 정이 가네요^^ 읽은 책은 곳곳에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도 그어 놓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면 책과 비슷한 크기의 노트 모양 포스트잇에 이런저런 메모들을 해서 책 뒷장 안쪽 날개에 붙여 두어요. 어떤 책은 앞 뒷면을 모두 빼곡히 채운 여러 페이지의 노트가 생기기도 하는데, 어느 날 그 책을 다시 펼쳐볼 때면 책도 책이지만 책 속의 제 흔적들을 보며 상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마치 저자와 제가 같이 쓴 일기장을 보는 것 같거든요ㅎ

사실 그 흔적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재독할 때인데 처음과는 전혀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게 되거나 메모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책을 통해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재독하는 경우도 있어요. `나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요ㅎ 근데 이런 책은 제 일기장이나 마찬가지라 팔기는커녕 가까운 사람이 빌려달라고 해도 꺼려져요^^ 하지만 타인의 흔적이 남은 책은 저도 읽고 싶네요ㅎ 누군가와 같이 쓰는 일기 같을 것 같아요..

cyrus 2015-12-01 18:06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난 뒤에 쓴 기록들을 ‘일기’로 비유하는 물고기자리님의 표현이 멋져요. 맞아요. 맨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을 기록하고 난 후에 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달라져요. 사실 저도 이런 소중한 기록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지금 알라딘에 서평을 쓰는 것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공개하는 일기를 쓰는 행위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친구들은 제가 블로그 활동 사실을 몰라요. ㅎㅎㅎ

살리미 2015-11-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것!! 너무 멋지네요^^ 책장에 써서 붙여놓고 싶어요.
가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보면 타인의 흔적이 지나쳐서 너무 지저분한 경우도 있던데, 마구 그어놓은 밑줄이나 동글뱅이 같은 것들요 ㅎㅎ
저런 메모정도라면 전에 읽은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반가울듯 합니다^^

cyrus 2015-12-01 18:08   좋아요 0 | URL
저 문장을 보면서 감동받았습니다. 제가 책방에 좋은 책을 만날 때 그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거든요. 도서관 책의 메모는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기 흉할 정도로 공공도서관 책에 메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단, 약간의 밑줄은 봐줄 순 있습니다. ^^

보슬비 2015-12-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cyrus님을 위해서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cyrus 2015-12-01 18:10   좋아요 0 | URL
보슬비님은 알라딘에서 책에 관한 흔적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는 일까지 기록하시는 모습이 대단해요. ^^

인디언밥 2015-12-01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요. 그때 반 아이들이 책 한 권씩 교실에 기증하는.. 뭐 그런 식의 행사가 있었는데, 기증한 책은 학년이 올라가면 책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는 식이었거든요. 어린마음에 제 책에 손때묻고 더러워지는 게 싫었는데, 그런 책은 친구들이 그만큼 많이 읽었던 책이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책을 집에 가져갈 때 새책처럼 깨끗한게 좋은게 아니라고 하시던..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 기증한 책이 <유명한 이야기>였는데, `유명한`이야기 인 줄 알고 샀다가 `유 명한 씨 이야기`였는줄은 모르고...

cyrus 2015-12-01 18:13   좋아요 0 | URL
인디언밥님의 추억담을 보면서 감동과 웃음이 한 번에 느꼈습니다. ㅎㅎㅎ 정말 좋은 은사를 만나셨군요. 요즘은 새것이 더 많이 나오는 세상이라서 헌 물건을 물려 쓰는 일이 잘 없는 것 같아요.

최호영 2015-12-0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감사합니다

2016-01-21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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