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88년 하면 무슨 장면이 떠오르시는가. 하나씩 열거하면 너무나도 많다. 88올림픽의 굴렁쇠 소년,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그대에게’를 열창하던 젊은 마왕 신해철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추억의 물건들이 생각날 수 있다. 오백원짜리 지폐, 연탄보일러, 석유곤로, 워크맨 등이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아날로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긴 강력범 지강헌의 인질극도 잊을 수 없다. 씁쓸하지만, 권력형 범죄자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강헌 인질극이 당시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줘서 그렇지, 그 해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을 얼마나 될까. 1988년의 정서를 거의 완벽히 재현했다고 호평을 받은 ‘응팔’ 드라마 제작진들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유시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 《나의 한국현대사》에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그 사건을 ‘소환’했다.

 

 

 

 

 

 

문송면 사망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8년 7월 2일 자)

 

 

 

점점 다가오는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국민이 들떠있던 1988년 7월. 15살 소년이 세상을 떠났다. 소년의 이름은 문송면. 사인은 수은중독. 문송면은 혼자 상경하여 수은을 온도계에 넣은 작업을 진행하는 공장에 일했다. 문송면은 마음이 성숙한 소년이었다. 없는 집안 살림에 고생하는 부모님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서 중학교 졸업을 포기하고 자립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에 다닌 지 두 달 만에 문송면의 건강이 나빠졌다. 심각한 수은중독으로 인해 손발이 마비될 정도였다. 문송면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으나 공장은 그의 병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파문은 컸다. 심각한 청소년 노동 현실이 폭로된 것이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중금속 중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공장 환경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문송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 직업병 피해자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1981년에 일어난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다. 원진레이온은 박정희 대통령이 공장 기공식에 참여할 정도로 제1차 경제개발 역점사업에 참여한 인조견사 생산 공장이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이황화탄소의 위험성을 모른 채, 장시간 동안 일을 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황화탄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신체마비, 정신이상 등의 증상에 시달렸다. 1988년이 돼서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상 증상의 원인이 직업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노동부는 회사에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했고, 회사는 피해 노동자들의 산재신청을 거부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의 실태가 알려지게 되자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등의 야당 의원들이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를 막으려고 하자, 정부는 태도를 돌변하여 피해자들의 호소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안전과 작업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텄다.

 

20년이 지난 사이, 한국은 많이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발전하면 노동 환경도 좋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20년 전에 견줘 노동조건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삼성전자나 한국타이어 등 많은 대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암에 걸려 숨지거나 폭발사고 등으로 희생되고 있다. 십 년이 넘는 직업병 고통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가져와 자살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부는 노동자·민중의 안전과 건강보다 성장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 기업을 옹호하는 우파들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역사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소개하는 유명한 노동자는 전태일이 유일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절규에 우리 사회는 응답하지 않고 있다.

 

1988년 전국에 알려진 소년은 두 명이었다. 어느 소년은 사회의 음지 속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두 달 뒤에 한 소년은 푸른 잔디밭을 달려가며 굴렁쇠를 굴렀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회든지 어두운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단지 그것에서 눈을 돌려 밝은 면만 보려는 사회가 있고, 반면 그늘진 곳에 더 빛을 비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회가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두운 이면을 감추거나 그로부터 고개를 돌린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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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열 다섯이었다는 것이 더 마음아파요.
잘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4 17:3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yureka01 2015-12-03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차량 크레인 무너져서 노동자 2명이 사망했고,
서해대교 주탑에서 소방관 1명이 사망했다는 뉴스..
언제까지 우린 후진적 뉴스는 변함이 없을까요..

cyrus 2015-12-04 17:34   좋아요 0 | URL
이런 사고가 발생하면 보상을 해주면 끝이라고 생각해요. 이러니까 우리 사회에 노동 작업환경의 문제점을 개선할 마음이 없어요.

살리미 2015-12-03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어두운 이면은 존재하죠. 건강한 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둠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 어둠을 응시하는 자세에 있을 것 같아요.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늘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문제 해결이 시작되는 것일텐데 언제부턴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기가 어려워진 듯 하네요.

cyrus 2015-12-04 17:3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회에 무슨 잘못을 지적하면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오랜만에 듣느 이름이네요. 제가 아는 분 중 한 분이 원진레이온 노동자였습니다. 그분 말씀에 의하면 진짜 열악했다고 하네요...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원진레이온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죠....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cyrus 2015-12-04 17:39   좋아요 0 | URL
원진레이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직업병`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분신 사건 다음으로 한국현대사에서 기억해야 할 사건인데도 교과서에 짤막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과서 개정 때 이 사건을 반영하자고 건의하면, 분명 보수 쪽에서 반대할 겁니다.

루쉰P 2015-12-0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시간 cyrus님의 글을 읽어 온 독자이지만 글을 흐름은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전 글을 읽을 때 호흡이 끊어지면 좋지 않은 글이라 여깁니다 근데 정말 너무 부드러워요 ㅋ 부럽네요 전 너무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왕국 생활이죠 부끄러운 인생입니다;;;

cyrus 2015-12-04 18:15   좋아요 0 | URL
저보다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제 글은 어디 보여주기에 민망한 수준입니다. ㅎㅎㅎ 저도 혼자 지내는 생활이 많아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워질 때가 있지만, 혼자 있는 게 편해졌어요.

csp 2015-12-0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맣게 잊고 있다 기억이 났습니다. 어렸을 적 선물받은 환경보호 만화책에 고인의 이야기가 실려있었어요. 그 때 만화를 읽으며 참 공포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었는데... cyrus님 덕분에 오래 잊고 지낸 이름을 되새김질 하게 되네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13   좋아요 0 | URL
문송면 사건은 노동문제에 관심 많은 분들만 아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많이 회자되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12-08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진레이온 사건은 나중에와서 뉴스로 본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한창 노조운동도 그렇고 연탄공장 주변에 사는 분들의 진폐증 문제 같은게 다뤄지기 시작했지요. 문송면 사건은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접하는 느낌입니다. 일단 법적으로는 집단소송이 가능해져야 하고, 징벌적피해보상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보아도 맘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