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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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은 애매한 단어다. '헌책'이라는 게 어디 있나. 그냥 책이다. '오래된 책방'이라고 쓰는 것이 더 편하다. 오래된 책방은 정말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책을 팔고 있는 집이다. 그 집에 쌓여있는 책들은 책이 아니고 문화며 역사다. 70년대에 나온 책에는 경제개발 시대의 새까만 먼지가 묻어있다. 80년대 전공서적을 들여다보면 콧구멍 속이 매캐해진다.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건 묘한 전율이 있다. 어떤 책을 사겠다고 작정하고 찾아 나서는 경우는 대개 드물다. 오히려 책이 찾아온다는 게 맞다. 오늘은 어떤 책이 있을지 막연한 호기심으로 기웃거린다.

 

저자나 지인이 면지에 사인을 남긴 책, 행간마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로 굵은 볼펜 심 자국이 선명한 책, 여러 번 넘겨 읽은 증거인양 곳곳에 찢어진 흔적이 있는 책. 고서쯤 되면 가치도 평가받지만 사람 손길을 많이 거친 헌책은 그저 버려도 되는 책으로 치부되는 게 현실이다. 책과 맺은 인연이 이렇듯 하찮다. 그깟 책쯤이야 버린다 한들 무슨 대수랴,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책이 그렇게 버려져야 할 존재인가. 책이라는 게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가.

 

오래된 책을 만나는 또 하나의 묘미는 누군가의 흔적 속에서 나의 어떤 기억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 책 주인의 심중이 드러난 한 줄의 메모는 그 책의 고고학적 연대기이자 숨결이다. 책 안에 들어있는 비밀스러운 사연들은 선택한 이가 받는 덤이다. 커버를 넘기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글이 적혀 있다. ‘보고 싶은, ○○에게로 시작하는 문장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편지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책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가 직접 사인까지 해준 책도 책방에 발견된다. 책을 준 저자, 그 저자의 친필 사인 본을 받은 사람 모두 유명하면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자신의 물건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럽다. 책의 경우 보통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간단한 단상을 적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책 속의 흔적들은 자신이 간직하는 책에 그 소유를 밝히기 위해 찍는 도장과 같다. 동양에서는 책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알리기 위해 장서인을 찍는다. 우리나라 애서가들은 책에 있는 전 주인의 장서인을 따로 도려낸다. 장서인이 잘려나간 종이 부분이 흉물스러운 상처처럼 남는다. 그러면 거기에 종이를 덧대어 붙인 뒤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는다. 반대로 중국 애서가들은 전 주인의 장서인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인이 많이 찍혀있는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도장이 많이 찍힌 종이가 지저분하게 보여도, 책값은 올라간다. 유명인의 장서인이 하나라도 있으면 책값이 더 오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인의 흔적이 있는 책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는 책방에 가면 전 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책을 산다. 지저분하게 보이는 남의 흔적들을 애써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장서가인 최석정의 말씀처럼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 것이다. 책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때를 밀려고 때밀이 수건으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면 피부 살갗이 벗겨지듯이 종이의 때를 억지로 없애면 책 상태가 더 나빠진다. 헌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을 선뜻 사지 않는다. 당연히 새 책이 좋다. 누구나 깨끗한 상태의 책을 읽고 싶어 한다. 그래야 읽을 맛이 난다. 연필 자국으로 덮인 활자가 눈에 거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의 친필 메모에 공부에 대한 주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활자가 적힌 책이어도 그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눈에는 타블라 라사(Tabla rassa)일 뿐이다. 진정한 애서가는 책 한 권을 읽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책의 여백에 기록해둔다.

 

 

 

 

 

 

내가 책방에 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 1권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한 부분이 많다. 더러는 그 밑줄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부분은 의문을 품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더듬는 것이 즐겁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늠하는 것 말고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다른 인생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알뜰살뜰 적어둔 주인의 메모는 다음 책 주인의 가슴에 식은 공부 열정의 온도를 다시 뜨겁게 해준다. 굳이 주인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내 생각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면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만들면 된다. 또 다른 여백에 메모를 남기는 것이다. 메모에는 책 읽은 사람의 생각이 갇혀 있다. 이것은 서가에 꽂혀있을 때는 박제돼 있다가도 지식이 필요한 독자들을 만나면 다시 살아 숨 쉰다.

 

특별한 하늘의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책의 전 주인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추측만 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이 남긴 글씨 속에 주인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그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책을 파고드는 모습 말이다. 책 속의 메모는 한 인간이 책에 쏟아온 열정과 떨림을 엿보게 해 준다. 애서가는 눈빛으로 책을 갉아먹는다. 책벌레가 사라졌다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책방에 가면 이름 모를 책벌레들의 흔적으로 지저분한 책들을 발견한다. 책방에 가득 쌓인 책더미 사이를 지나다니는 책벌레를 만나곤 한다. 두어(蠹魚, 책벌레)가 습기를 좋아하고, 햇볕을 싫어하는 것처럼 인간 책벌레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을 때까지 어두컴컴한 책방에 서식한다. 나는 또다시 그곳에 간다. 책을 구경한다. 메모 흔적 가득한 낡은 책을 고른다. 다시 한 번, 책 속에 내 취향이 비슷한 독자, 아니 인간 책벌레 동지의 인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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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1-3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래서 글씨 연습이 필요한거 같아요. 저는 신랑이 글씨 못쓴다고 구박할 정도의 악필인데 악필속에 비친 희미한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생각만해도 끔찍해요 ㅋㅂㅋ~~~

cyrus 2015-12-01 18:00   좋아요 0 | URL
제가 발견한 헌책의 낙서는 심하게 알아보지 못하는 악필 수준은 아니었어요. 자세히 읽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있어요. 저는 책을 메모하는 데 굳이 글씨를 잘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들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만 알아보면 됩니다. ^^

단발머리 2015-11-30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어쩜 이런 다른 생각과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정말 신기해요^^

cyrus 2015-12-01 18:02   좋아요 0 | URL
서평 대회 적립금을 받고 싶어서 다른 분들의 글을 쭉 읽어봤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들을 이미 다른 분들이 다 썼더군요. 그래서 뭐 써야할지 한참 고민했습니다.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1-30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 읽은 흔적을 많이 남기는 편이라 사진 속의 책에 어쩐지 정이 가네요^^ 읽은 책은 곳곳에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도 그어 놓는데 그걸로도 부족하면 책과 비슷한 크기의 노트 모양 포스트잇에 이런저런 메모들을 해서 책 뒷장 안쪽 날개에 붙여 두어요. 어떤 책은 앞 뒷면을 모두 빼곡히 채운 여러 페이지의 노트가 생기기도 하는데, 어느 날 그 책을 다시 펼쳐볼 때면 책도 책이지만 책 속의 제 흔적들을 보며 상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마치 저자와 제가 같이 쓴 일기장을 보는 것 같거든요ㅎ

사실 그 흔적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재독할 때인데 처음과는 전혀 다른 부분에 밑줄을 긋게 되거나 메모의 내용이 추가되면서 책을 통해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일부러 재독하는 경우도 있어요. `나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가 궁금해서요ㅎ 근데 이런 책은 제 일기장이나 마찬가지라 팔기는커녕 가까운 사람이 빌려달라고 해도 꺼려져요^^ 하지만 타인의 흔적이 남은 책은 저도 읽고 싶네요ㅎ 누군가와 같이 쓰는 일기 같을 것 같아요..

cyrus 2015-12-01 18:06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난 뒤에 쓴 기록들을 ‘일기’로 비유하는 물고기자리님의 표현이 멋져요. 맞아요. 맨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을 기록하고 난 후에 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달라져요. 사실 저도 이런 소중한 기록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지금 알라딘에 서평을 쓰는 것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공개하는 일기를 쓰는 행위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친구들은 제가 블로그 활동 사실을 몰라요. ㅎㅎㅎ

살리미 2015-11-3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모을 힘이 있어서 책이 내게 모인것!! 너무 멋지네요^^ 책장에 써서 붙여놓고 싶어요.
가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다보면 타인의 흔적이 지나쳐서 너무 지저분한 경우도 있던데, 마구 그어놓은 밑줄이나 동글뱅이 같은 것들요 ㅎㅎ
저런 메모정도라면 전에 읽은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반가울듯 합니다^^

cyrus 2015-12-01 18:08   좋아요 0 | URL
저 문장을 보면서 감동받았습니다. 제가 책방에 좋은 책을 만날 때 그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거든요. 도서관 책의 메모는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기 흉할 정도로 공공도서관 책에 메모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단, 약간의 밑줄은 봐줄 순 있습니다. ^^

보슬비 2015-12-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cyrus님을 위해서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cyrus 2015-12-01 18:10   좋아요 0 | URL
보슬비님은 알라딘에서 책에 관한 흔적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는 일까지 기록하시는 모습이 대단해요. ^^

인디언밥 2015-12-01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요. 그때 반 아이들이 책 한 권씩 교실에 기증하는.. 뭐 그런 식의 행사가 있었는데, 기증한 책은 학년이 올라가면 책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는 식이었거든요. 어린마음에 제 책에 손때묻고 더러워지는 게 싫었는데, 그런 책은 친구들이 그만큼 많이 읽었던 책이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책을 집에 가져갈 때 새책처럼 깨끗한게 좋은게 아니라고 하시던..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요. 그때 기증한 책이 <유명한 이야기>였는데, `유명한`이야기 인 줄 알고 샀다가 `유 명한 씨 이야기`였는줄은 모르고...

cyrus 2015-12-01 18:13   좋아요 0 | URL
인디언밥님의 추억담을 보면서 감동과 웃음이 한 번에 느꼈습니다. ㅎㅎㅎ 정말 좋은 은사를 만나셨군요. 요즘은 새것이 더 많이 나오는 세상이라서 헌 물건을 물려 쓰는 일이 잘 없는 것 같아요.

최호영 2015-12-05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감사합니다

2016-01-21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