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만 받다 보니 그릇이 작아진 사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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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이웃이 링크를 걸어 두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칼럼을 읽었다. 제목이 << 간장 두 종지 >> 라고 하길래 손수건부터 준비했다. 오갱끼데스까 ? 와따시와갱끼데스 ! 그래, 울, 어, 주, 리, 라. 구리 료헤이의 << 우동 한 그릇 >> 나 함민복의 << 눈물은 왜 짠가 >> 와 유사한 힐링 푸드 ㅡ 서사'인 줄 알았다. 가난이 죄이라, 지게미와 쌀겨로 허기를 채우던 부부 / 가난한 남편이 손수 차린 밥상 /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 쌀은 어떻게 구했다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 / 상 위에 놓인 쪽지 c.u / (인써트)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 낯익은 남편의 글씨를 본 아내는 눈물이, 팽이도 아니면서 핑 돈다 / 아아, 그날 밤........ ㅡ 이런 신파 말이다.
나는 최불암 목소리 버전으로 읽기 시작했다. " 모든 우리 회사 앞에는 맛있는 집이 없고 모든 남의 회사 앞에는 맛있는 집이 많다. 파 ~ " 문장을 보니 : 남의 떡이 더 커 보안다는 농담 같은데 문장 배열이 상당히 걸리적거린다. 모든 우리 회사 앞 ??! 논술 강사'였다면 < 모든 > 이라는 관형사에 빨간 색연필로 x 표시를 한 후 " 지랄 " 을 했을 것이다. 그냥 우리 회사 앞에는 맛있는 집이 없다라고 작성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굳이 " 어쩔 수 없이 " 회사 근처 식당에 갔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평소에는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 가든 " 에서 식사를 하시는 모양이다. 이 칼럼을 읽은 조선일보 근처 식당들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 그래도 그렇지. 이 얼마나 걸리적거리는 문장인가, 니미 !
뭐, 그것은 그냥 그렇다 치자. 맛집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 모든 > 이란 관형사를 사용했다면 차라리 부정을 강조하는 < 너무 > 라는 부사를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우리 회사 앞에는 맛있는 집이 너무 없다. 따순 밥 한 그릇을 기대했는데, 문장 첫머리부터 빈정이 상해서 밥맛이 떨어졌다. 이런 신파 ~ 이게 뭐얌 ! 뭐, 기자가 마감에 쫓겨서 문장 고르기 작업을 허투루 넘겼다고 치자.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기자가 < 모든 > 을 < all without...... > 으로 사용했다면 땅값 비싼 태평로 근처 가게는 백이면 백, 다 맛이 없는 식당이라는 말이 된다. 이 기사를 읽으면 조선일보 근처 광화문 뒷골목과 태평로 맛집들이 화를 낼 만하다. 기자는 왜 회사 앞 모든 식당이 맛이 없다고 강조했을까 ?
이런 태도를 사회심리학적 용어로 "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 라고 한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 는 태도'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태도 > 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이유는 < 하나와 열 > 때문에 가 본 적도 없는 " 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 " 도 동일한 족속으로 싸잡아서 비난한다는 데 있다. 기자가 < 모든 우리 회사 앞에는 맛있는 집이 없다 > 라고 선언하는 것도 이와 같다. 몇몇 식당이 맛이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자는 자신이 경험한 < 부분 : 제한된 정보 > 을 가지고 < 전체 > 에 대한 결과를 도출한다. 물론 << 하나 = 열 >> 이 성립될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 = 열'이 성립된다고 해서 2,3,4,5,6,7,8,9도 동일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형편없는 태도'다.
짬뽕은 맛있지만 짜장이 맛이 없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있지 않은가 ? 첫 문장부터 밥맛이 떨어져서 읽지 않으려 했으나, 그 자세 또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태도'이렷다. " 첫 문장부터 밥맛 떨어져서 읽지 않았다. 끄읏 ! " 이라고 작성하면 수많은 비난 댓글이 달리리라. 내가 모를 줄 알았지 ? 하는 수 없이 끝까지 읽었다. 이 칼럼은 논리적 비약의 끝판왕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장 두 종지 때문에 아우슈비치를 소환하는, 이 환장할 만한 논리적 비약은 판타스틱하며 아, 아아아스트랄했다. 간장 때문에 아우슈비츠가 호출될 줄 그 뉘 알았으랴 ? 간장이 뭐길래, 이토록 애간장을 태우는 것일까. 기자는 분노한다. 기자라는 알량한 권력으로 매타작을 한 것으로는 성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실명으로 까발릴 수는 없는 노릇. 그 식당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중화, 동영관, 루이는 아니란다. 역시 기자 정신은 살아 있다. 그런데 어쩌나. 그 동네에는 네 개의 중국집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일은 탕슉 2인당 간장 한 종지'만 나오는 식당에 가서 짬뽕에 탕슉'이나 시켜 먹어야 겠다. 솔까말, 탕수육은 이미 탕수육 소스가 제공되는 음식이니 간장 소스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짜장면을 시켜 놓고서는 비벼 먹겠다며 고추장 소스도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신문의 품격은 칼럼이 좌우하는 법. 오랫동안 통 큰 < 대접 > 만 받다 보면 나중에는 그릇이 < 종지 > 처럼 작아지기 마련이다. 이 글과는 상관없이 김규항의 문장으로 끝을 맺자. " 온갖 책을 다 읽어도 수영을 읽지 않았다면 지식인으로 결격이란다.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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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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