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방공간은 일제에서 벗어난 19458월부터 19488월까지 3년간이다. 해방이 찾아왔지만,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소군정의 지배를 받았던 과도기다. 해방정국의 시대정신은 건국을 어떤 모습으로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건국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모색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즉 좌우익 간의 대립이 극심했다. 격렬한 좌우체제의 대립 구도 속에 건국을 위한 노선 투쟁이 진행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사회주의의 소련과 손잡고 건국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극심한 좌우익 대립 끝에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의 길로 들어섰다.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두 나라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38선을 긋고 신탁통치를 검토했다. 해방 이후 독립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섰다가 사라졌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독촉국민회 등이 우후죽순 난립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1945년에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건준은 좌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고 우파의 참여로 구성된 좌우합작 정당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실시와 조선공산당의 방해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력이 냉전적 잣대로 해석되는 바람에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이나 정치활동에서 모든 정파와 주의·주장을 떠나 조국 광복이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 민족의 과업을 위해서는 정파와 이념을 개의치 않았으며 누구와도 만나 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박헌영은 민족 통일보다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열중했고, 미군정은 박헌영의 행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시각은 마치 철길에 놓인 레일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실패함으로써 역사는 8.15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건국과정에서 자신의 정치기반이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친일파와 손잡았다.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면서 건국 역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우고 말았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후손이 오히려 영화를 누리는 현실이 우리 사회에 기회주의, 출세주의 등을 만연케 하는 심각한 해악을 끼쳤다. 이승만 정부 시절은 경제면에선 해방됐지만 일제치하보다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소작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주를 상대로 파업을 전개했다.

 

현재와 미래문제의 해법을 찾는데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혼란상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역사관에서 너무나 깊은 골이 패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좌우대립의 원형질은 8.15해방 정국으로부터 존재한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와 친일파, 좌우익 간의 격렬한 대립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뉴라이트 세력들은 광복과 건국의 의미를 1948815일에서 찾고 있다. 그 날은 유엔총회 결의와 유엔 참관 하의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뉴라이트의 눈에는 1948815일 중앙청 광장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의 얼굴만 보일 뿐이다. 박헌영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행적을 대한민국 정통성을 저해한 부정적 역사로 보고 있다. 그래서 민족해방운동과 좌우대립의 해방공간 역사는 반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김일성, 박헌영의 활동이 언급되면, 뉴라이트는 “그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하고 발끈하게 된다. 그들이 활동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억하자는 것이지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다. 탈분단 시대의 역사의식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왜곡됐던 현대사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되돌아보고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회가 미루어지면 해방공간의 반쪽 역사, 지워진 과거와 비틀린 역사로 가득한 괴랄한 교과서가 나오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12-03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