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대하여

 

 

 

 

그릇은 인간 됨됨이에 대한 은유이다. 평생 대접받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곰곰생각하는발의 그릇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동시대 함께 살아있는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고 난 후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손이 떠납니다. 떠나버린 작가의 허울 같은 작품이야 남겠지만 작가의 살아있는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에 귀를 열고 눈으로 듣는 그런 활동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yureka01동시대를 함께 사는 작가들중에서)

 

    

 

 

세상에 수많은 그릇이 있다. 재료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놋쇠·플라스틱·나무·자기로 나뉘고, 용도에 따라 밥그릇·접시 등으로 분류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 만큼 큰 용기도 있고, 물 한 방울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그릇도 있다. 사람의 능력은 곧잘 그릇에 비유된다. 큰 그릇은 능력이 크고, 작은 그릇은 능력이 작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릇의 크기와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듯이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그릇이라도 개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된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담고 비운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그래야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다. 그릇이란 자고로 뭔가를 담아두는 게 그 쓰임의 본 용도이건만, 요즘은 싸움판에 차출(?)됐다. 정치판의 밥그릇 싸움이 그 대표라 할 만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맡긴 신성한 권력을 이용해 밥그릇이나 챙기고 팔자를 고치느라 바쁘다.

 

 

 

 

우리나라 전통식기 중에 탕기(湯器)’라는 것이 있다. , 찌개를 담는 그릇이다. 탕기는 밥그릇(주발)의 모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탕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탕기는 12역을 소화할 줄 아는 식탁 위의 주연배우다. 그러나 특별한 음식을 담는 그릇이 식탁 위에 등장하면, 탕기는 잠시 물러나 있다. 반병두리는 떡국이나 비빔밥을 담을 때 쓰는 그릇이며, 벙거짓골  전골 요리를 담는 그릇이다. 특별한 날이면 이 두 개의 그릇이 탕기를 대신하여 식탁 위의 주연배우로 발탁된다. 탕기는 가장 많이 식탁에 등장했고, 아주 많이 사용했음에도 다른 그릇에 비하면 너무 평범하다. 이름도 평범하다. 뜨거운 국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서 이름이 탕기로 남게 되었다. 조반기, 대접, 바리, 보시기, 양푼, 이런 그릇의 이름이나 용도는 사람들이 알아도, 탕기는 잘 모른다. 사람들에 눈에는 그저 국그릇일 뿐이다. 밥그릇을 닮아서 이걸 탕기라고 부르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식탁의 주연배우가 아니라 약방에 감초역할을 하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에 가깝다. 그래서 탕기는 소중하다. 밥과 국 아무나 담을 수 있는 편안한 그릇이니까.

 

 

 

 

 

 

 

 

 

 

 

 

 

 

 

 

 

 

 

그릇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외국에서 탕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탕기는 사람이다. 외국인 이름이 탕기라니, 특이하다. 쥘리앙 탕기(Tanguy)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그림물감 가게를 운영했다. 탕기의 가게는 단순히 물감을 파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화가들이 탕기의 그림물감 가게를 자주 방문했다. 탕기는 싼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그림은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들이 많았다. 탕기는 가난한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았다. 돈이 없는 화가들은 품질 좋은 그림물감을 사지 못한다. 탕기는 화가들에게 그림물감을 빌려주었다. 물감뿐만 아니라 미술 도구와 돈도 잘 빌려주었다. 탕기의 배려에 크게 감동한 화가들은 돈 걱정 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은 완성한 그림을 재력이 있는 그림 애호가에게 팔지 않고, 바로 탕기에 건네주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으로 탕기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의 온정을 잊지 않은 화가들은 탕기를 페르(Père, 아버지, 영감, 아저씨)’라고 불렀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7)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탕기가 물감을 파는 가게 주인이지만, 나름 그림 보는 눈이 있었다. 탕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가게에 오는 화가들 역시 자연스럽게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었다. 파리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화가도 탕기가 수집한 목판화에 푹 빠졌다. 이 화가 또한 탕기에게 신세를 지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가게를 찾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마음씨 좋은 탕기를 위해서 초상화를 제작했다. 탕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다. 그의 태도에 인자한 품성이 느껴진다. 초상화 배경에 일본 목판화들이 가득하다. 이 그림에 관한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탕기의 초상화가 너무 성의 없게 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화가는 탕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드러내려고 일본 목판화를 그려 넣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의 모습이나 품행은 아들이 그대로 전해 받는다. 화가는 탕기를 만나게 되면서 일본 목판화의 매력에 빠졌고, 인상주의 회화에 주목했다. 탕기의 심미안을 화가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화가의 친아버지는 예술에 자도 모르는 목사였다. 크게 낙심했던 화가는 파리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았다. 파리의 이방인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소중한 아버지. 탕기는 화가의 삶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버지(Père)였다.

 

이 네덜란드 화가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의 장례식에 탕기가 와주었다. 화가의 생의 온기가 멈추는 순간, 그가 남긴 그림의 온기도 사라진다. 탕기는 자신이 보관해둔 화가의 그림이 허무한 운명을 맞이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탕기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무명 화가의 그림에 이토록 애정을 가졌으니.

    

 

 

 

 

빈센트 반 고흐 글라디올러스 화병(1886)

 

! 가여운 빈센트! 어떻게 그런 불행한 일이...... 미르보 씨! 얼마나 엄청나게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천재적인 사람이! 그처럼 선량한 인간이! 잠깐, 그 사람의 중요한 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의 그림들은 걸작입니다!”

 

사람 좋은 탕기 영감은 자신의 상점에서 4, 5점의 캔버스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의자의 발판 틀에다 기대어 놓았다. (중략)

 

인간이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렇게 슬플 수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직 빈센트가 그린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알지 못하는 것 같구려. 마지막 그린 그림 중의 하나올시다. 대단한 작품이지요! 그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찾아보렵니다. 몇 분만 기다려 주세요.”

 

(옥타브 미르보의 <화가들> 중에서, 파스칼 보나푸 반 고흐, 태양의 화가146~147쪽 발췌 인용)

    

 

 

탕기(湯器)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서민적 체취가 짙게 느껴진다. 탕기(Tanguy)는 소탈하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자주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탕기(湯器)는 밥그릇이 되어도 투정하지 않는다. 탕기(Tanguy)는 화가들이 돈이든 물감이든 빌려달라고 자신을 찾아오면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정신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상관이 없다.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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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12-0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마음에 듭니다.^^

cyrus 2015-12-07 09:4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5-12-0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시대의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그 온기를 느끼는 공감력...결국 인품에서 나오나 봅니다.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 뒤에는 후원자가 꼭 필요한 이유더라구요..

cyrus 2015-12-07 09:46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의 글에 제 글을 먼댓글 설정할려고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유레카님의 블로그에 먼댓글 설정이 안 된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그 보니 제가 탕기와 룰랭을 혼동했거든요. 탕기는 물감 파는 사람이었고, 룰랭은 우체부였죠... ㅎㅎㅎㅎㅎ 룰랭이 그렇게 자주 찾아갔다네요. 술 마시러... 갈 때는 고흐 형편을 알고 있어서 늘 술과 안주가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cyrus 2015-12-07 09:47   좋아요 0 | URL
저는 탕기가 그림 파는 화상인 줄 알았어요. 착각했어요. 그림물감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쓸 때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

서니데이 2015-12-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릇 사진을 보다보니, 뚜껑이 있는 그릇이 많이 있네요. 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뚜껑있는 국그릇을 집에서 쓰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그릇처럼 느껴져요.
고흐는 동생이 먼저 생각나는 편인데, 앞으로는 탕기는 그림보다 그릇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cyrus 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7 09:5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뚜껑 있는 그릇을 가정집에서 보는 것이 드물어졌어요. ^^

yureka01 2015-12-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몰랐습니다..저도 이런 기능을 모르겠더라구요.트랙백 걸기..해본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인용..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49   좋아요 1 | URL
가끔 이웃이 쓴 글을 읽고, 영감을 얻으면 감사의 의미로 먼댓글 기능을 사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