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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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에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년)의 독자 서평을 읽었다. 서평만 봤을 뿐인데도 ‘정희진처럼 읽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희진처럼 읽기》 서평의 글쓴이는 ‘정희진처럼 읽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뻔한 독서를 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독서는 온몸으로 한 권의 책을 체득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독서는 생각하는 노동이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몸에 이입하고 나면, 눈앞에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광활한 길이 펼쳐진다. 정희진의 독서 행위는 이하준 교수의 고전 읽기와 비슷하다. 책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에 공통점이 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자기 삶의 행로를 걸어보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사유의 노동을 체험한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 읽기를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고 비유했다. ‘오래된 생각’은 고전을 의미한다. 고전은 한 인간의 고민에서 우러나온 굵은 땀방울의 결실이다. 그 책 속에 오랜 세월 동안 흘린 사상가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생각의 땀방울을 삶 또는 영혼 속에 스며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적 열망의 포로가 되면, 고전을 무류성(無謬性)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한다. 가짜 지식인들은 ‘고전의 무류성’을 선포하여 하나의 교리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자기 계발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고전에서 찾는다. 인문학 장사꾼들은 고전 독서가 생소한 대중에게 과장 광고를 한다. 과거 무지의 죄를 청산하고, ‘성공’이라는 달콤한 천국으로 향하고 싶다면 고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인문학 장사꾼만 믿고 따라 하는 고전 독서는 ‘생각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 삶과 세계에 맞게 고전을 재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래된 생각’과 마주하면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하나의 진리를 만나면 확실한 내용이 남을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우리도 데카르트처럼 고전에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생각과 내 생각 사이의 대화’다. 여전히 고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독자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문 읽기를 추천한다. 이하준 교수의 서문은 고전에 겁먹은 독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하준 교수는 우리에게 고전의 권위 앞에서 쫄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어려운 고전을 억지로 읽는 것보다는 읽고 싶을 때 골라 읽는 것이 고전을 읽는 자신만의 길이 된다. 여담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이하준 교수 이름 뒷글자만 비슷한 김어준의 명대사 “쫄지 마, 시바!”까지 있었으면 시원한 ‘핵 사이다’급 발언이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유명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을 쉽게 풀어쓴 흔한 교양 인문학 서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책은 단단히 잠겨 있던 생각의 서랍을 흔들리게 했다. 그 서랍 속에는 지난 한 달 동안 날 괴롭혔던 서평의 정의와 관련된 생각 덩어리들이 어지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고 어지럽게 널린 생각 덩어리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니체와 데카르트의 귀띔에 나는 ‘뻔한 독서’에 ‘뻔한 서평’을 작성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봤다.

 

니체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시도’라고 말했다. 우리 삶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수많은 도전에 부딪힌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사회의 힘에 순응하는 순간 아무런 비판을 하지 못한다. 독서와 서평작성 행위도 마찬가지다. 책 또는 지식의 권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힌 채 안주하면, 꼿꼿하고 안정적인 주류의 관점만 따라가는 ‘뻔한 독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앵무새처럼 읊어대기만 하는 독서가’가 된다. 우리가 정말 정희진처럼 읽고, ‘오래된 생각’과 대화를 잘하려면 책 속의 지식 앞에 순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책 속의 지식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능력은 ‘생각하는 노동’이다. 저자의 주장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일단 직접 부딪혀서 맞는지 아닌지 과감히 비벼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서평도 독자에게 ‘생각하는 노동’ 임무를 부여해주는 좋은 일감이 된다. 같은 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사람마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름 있는 서평가의 글도 독자 자신들의 관점으로 비판할 수 있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자신을 향한 합리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서평가나 독자는 지적 허영심에 눈이 먼 사람이다.

 

“아니야! 젊은 친구, 그건 아닐세.”

 

가만히 있던 존 스튜어트 밀이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그래서 선한 의도가 있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비판과 간섭은 상대의 자유를 방해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밀의 주장대로라면 책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를 강제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나는 밀 선생의 절대적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생각과 다른 상대방에게 인신공격하거나 명예훼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를 비판하는 행위는 전혀 해가 없다. 튼튼할 것만 같았던 나의 지식이 쉽게 허물어지는 상황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시간만 지나면 그 고통이 싹 잊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폐허 한가운데에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책을 쓴 유명 저자나 서평가의 생각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조건 전문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이하준 교수는 비판적 독서를 긍정하는 내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그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의심하는 자아가 되라고 말한다. 물론 상대방을 비판하는 나의 관점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결점을 인정해야 한다. 결점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민낯’과 같다.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몽테뉴가 드디어 입을 연다. 몽테뉴는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자신의 ‘민낯’을 마주 보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와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능력 있고 지적 수준 높은 사람들만 실천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가 절대로 아니다. 책 속의 진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독서는 ‘저항과 불복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행위다. 이것은 정희진만 이용할 수 있는 화려한 레드카펫이 아니다. 누구나 실천 의지가 있다면 자신만의 독서의 길을 발견하면서 걸을 수 있다.

 

 

 

 

※ 딴죽걸기

 

* 저자는 수많은 사상가가 쓴 고전 속 문장들을 꽤 많이 인용했다. 이하준 교수 개인이 직접 고전 원문을 읽으면서 인용문을 번역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이하준 교수가 인용한 고전 도서들을 참고문헌 목록으로 따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특정 출판사의 고전 번역본을 참고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책 뒤편에 인용문의 출처를 알려주는 참고문헌 목록이 있어야 했다.

 

* 이 글 역시 적립금이 걸린 서평대회에 맞춰 정성 들여 쓴 서평이다. 시간이 있을 때 평소에 작성된 서평과 이벤트용 서평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시라. 해당 서평 이벤트 기한은 오늘까지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밤 9시부터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평이 연달아 나오고, ‘공감’을 받은 서평만은 ‘화재의 서재글’ 뉴스피드에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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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2-2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 서평대횐가?ㅋㅋㅋ
이책 서평대회 한 줄 몰랐네.
근데 꽤 괜찮은 책인가 보다.
정희진도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하던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ㅠ

cyrus 2016-02-29 11:04   좋아요 0 | URL
제가 서평집은 잘 안 읽는 편이에요. 알라딘에 접속하면 내용이 좋은 독자서평을 공짜로 볼 수 있으니까요. ^^

예스24나 반디앤루니스에는 출판사 서평대회를 많이 여나요? 알라딘에 서평대회가 줄어드니까 심심해요. 예스24, 반디 회원 가입해서 그쪽에 진행되는 서평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생각을 해봤어요.

stella.K 2016-02-29 13:51   좋아요 0 | URL
잘 안 해.
그런데 예스 24는 동아일보와 함께
서평대회를 금년 말까지 한다고 광고가 났네.
출판 6개월안에 나온 책을 1000자 내외로 써서 당첨되면
20만원 적립금 준다네.
확실히 알라딘 보다 그짝 동네가 기회가 많긴 하지.
북켄드 제도도 있고. 파워블로그 제도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은 이쪽이 활발하긴 한데 말야.
관심있으면 기웃거려 보라구.

콜린 맥콜로우 소설 서평대회 하는가 본데
준비하고 있나? 얼마 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난 너무 늦게 알아서 손을 놓고 있다.
그건 참가해 볼만 한데.ㅠ

cyrus 2016-03-01 21:48   좋아요 0 | URL
어제 예스24 홈페이지 기웃거리다가 그 서평대회 확인했습니다. 예스24가 단단히 마음 먹고 동아일보와 손잡고 대회를 준비한 것 같아요. 이 서평대회에글 좀 쓰는 사람들이 몰릴 겁니다. 그러면 예스24 서평 수준도 높아질 거예요. 재밌겠어요. ^^

오후즈음 2016-02-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알아 서평대회는 포기하고 천천히 읽어봐야 겠군요!

cyrus 2016-02-29 11:18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이 괜찮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의 사상을 쉬운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사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덧붙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철학사상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 책만 가지고 철학사상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품격 -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빌 게이츠 선정 올해의 추천도서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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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교육을 통해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가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인성교육을 의무로 가르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딱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딘지 아시는가. 바로 여기 대한민국이다. 2014년 12월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이 제정된 목적은 이렇다.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시민을 육성하는 것. 이 법안은 작년 7월부터 발효되었다. 정부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학교에 인성교육 의무를 부과했다. 그리고 인성교육진흥위원회를 설립하여 5년마다 인성교육계획 및 방침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게 된다. 전국의 초 · 중 · 고교는 매년 초 인성교육계획서를 교육감에게 제출하여 보고해야 한다. 

 

이 법을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일단 학생들이 부담스러워 한다. 학교 수업량을 따라가기가 벅찬 마당에 이제는 참된 인성을 기르는 법까지 배우게 생겼다. 인성교육을 위한 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것이다. 인성도 사교육으로 가르치는 시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인성은 한 가지로만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이 평범한 단어 안에 다면적인 의미가 가득하다. 그런데 교육부는 인성을 자가진단으로 평가하겠단다. 여러분이 직접 자신의 인성이 어떤지 스스로 평가해보시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가 문항들 모두 교육부가 만든 인성평가 자가 진단법에 포함되어 있다.

 

 

* 나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자기존중)
*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존중)
* 나는 나의 목표를 위해 현재의 유혹을 잘 참는다. (성실)
* 나는 다른 사람을 잘 도와준다. (배려, 소통)
* 나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를 잘 한다. (배려, 소통)
* 주변 어른들은 나에게 예의가 바르다고 말씀하신다. (예의)
* 나는 내 감정과 행동을 잘 조절한다. (자기조절)
* 나는 내 생각이나 판단이 늘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자기조절)
* 나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내 잘못이라고 솔직히 말한다. (정직, 용기)
* 나는 진실하고 솔직하다. (정직, 용기)
* 나는 태극기, 무궁화, 애국가 등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시민성)
* 나는 다문화 친구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시민성)

 

 

잠깐만! 인성이 애국심과 무슨 상관? 우리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국민의례로 충분하다. 나는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경일이면 집 앞에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 그렇군, 나는 시민성이 부족해서 인성이 좋지 않았어.

 

세계 최초이자 지구상 유일하게 의무교육을 하는 이 땅에 《인간의 품격》 같은 책이 독자들에게 높은 평점을 받고, 추천도서로 소개되는 상황이 이상하다. 아이들은 인성교육을 학교에서 배우게 되니까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자녀를 애지중지 여기는 강남 어머님들에게 당부한다. 아이가 이런 책을 읽으면 따끔하게 혼내주세요. 교과서나 문제집이 아닌 책은 그냥 쓸데없는 종이 덩어리일 뿐, 자식들 수능 성적을 향상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인간의 품격》을 짧은 문장으로 축약하면 이렇다. “여러분, 우린 결함이 많은 ‘뒤틀린 목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페이스북에 자랑질 그만하고, 겸손하면서 도덕적으로 성숙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인간다운 성품을 지닙시다!” 끝. 이게 전부다. 내가 요약한 문장 안에 교육부의 인성 자가 진단법 문항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내 생각이나 판단이 늘 옳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자기조절)’, ‘나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내 잘못이라고 솔직히 말한다. (정직, 용기)’.

 

《인간의 품격》의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도 우리에게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평가해보라고 당부한다. 브룩스가 우리 앞에 마련한 평가 문항은 간단하다. 아담 I과 아담 II. 아담 I는 야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자신의 성취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담 II는 도덕적 자질을 구현하는 올바른 인간이다. 교육부의 자가 평가 문항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뒤틀린 목재로 비유되는 인간은 자신의 결함을 잘 알기에 내적 성숙을 위한 ‘목표를 위해 현재의 유혹을 잘 참는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려면 외부 유혹에 흔들리는 내면의 자아와 맞붙어 싸워야 한다. 그래서 아담 II는 ‘감정과 행동을 잘 조절한다.’

 

그러나 교육부의 문항 내용 모두 아담 II가 되려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문항은 아담 I에 가깝다. 브룩스는 능력주의 체제가 발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서 고집부리거나 자기 과시에 흠뻑 취한 사람들이 많아진 ‘빅 미(Big me)’의 시대로 변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겸손과 절제를 몸에 지닌 사람들이 많았던 ‘리틀 미(Little me)’의 시대였다. 우리 사회도 자신을 24시간 공개하고, 과시하는 ‘빅 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신의 능력과 성취를 남들에게 공개해야 비로소 만족감을 느낀다. 이처럼 능력주의 체제가 작동되는 이 사회는 개인의 성공이 손쉽게 찬양받을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픽셀' 포스터)

 

 

 

자기과시에 열을 올리는 이 사회 속에서 아담 II가 아담 I로 완전히 탈바꿈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능력주의는 너무나도 비대해진 상태다. 말 그대로 ‘빅 미’다. 그것은 도덕적 성품을 지닌 ‘리틀 미’마저 집어삼켰다. 성숙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그런데 타인의 기준으로 도덕심을 평가받으면 인성이 올바른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 된다. 능력주의 체제가 개입된 인성 평가는 사회가 원하는 성과(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시민 육성)에 맞춰 그럴듯하게 흉내를 내는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는 능력주의 체제가 부여한 인성을 하나의 능력으로 과시한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자신의 선한 행동을 공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아담 I와 아담 II 중 어느 쪽으로 봐야 하는가? 이러면 진짜로 성품이 뛰어난 사람이 누군지 분간하지 못한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짝퉁' 인간들만 생길 것이다.  

 

《인간의 품격》은 우리 삶을 성찰하게 하는 유익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빌 게이츠가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이 책은 기본적인 도덕심이 부재한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준은 아니다. ‘빌 게이츠 추천 도서’를 강조하면서 광고하는 언론과 찬양 일색의 서평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학교에서 인성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이상한 나라에 이 책의 핵심 내용이 제대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학교에서 인성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데 혼자 끙끙거리면서 삶의 내적 투쟁을 실행하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솔직히 정직하게 삶의 내적 투쟁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력이 없다. 나 또한 ‘뒤틀린 목재’ 같은 인간이며 아담 II에 가깝다. 만년필 한 자루 받으려고 《인간의 품격》 서평을 쓰고 있다. 그렇다. 이 글은 이벤트용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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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2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도 어마어마 읽으시고 쓰시네요. 저도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만년필 꼭 받으시길. 응원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6 21:51   좋아요 2 | URL
사이러스 님이야 워낙 애서가이시니..
인간의 품격 출판 이벤트 담당자는 보시오..
반드시 사이러스 님을 뽑아주시오 !

cyrus 2016-02-27 17:06   좋아요 1 | URL
To. 시이소오님 / 책은 2월 초부터 읽기 시작했어요. 책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

cyrus 2016-02-27 17:09   좋아요 0 | URL
To. 곰발님 / 다음부터는 잘 쓰든 못 쓰든 간에 이벤트용 서평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

2016-02-26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생이 있는데 대강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군요. 사이러스님의 주장 대로 능력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혹은 더 큰 빅미가 되기 위해 모럴의 포장을 두르는 가짜 리틀 미가 판칠 수 있다는 지적은 날카롭네요. 이를 테면 혜민스님의 책이 성공한 현상의 후폭풍 같은 것이 있겠네요. 혜민스님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스님이 쓴 책 자체가 상업적 성공의 모델로 삼켜져 버린 것도 일정부분 사실이니까요.

걱정은 그런 식의 진정성 논란(최근에 앤드류 포터가 이에 관해 쓴 책도 번역돼서 출간됐죠?)이 도덕에 대한 냉소주의로 전락하는 반향성이 커지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답이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도덕은 반드시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가라타니를 통해서 곱씹게 된)을 곱씹어 봐야겠습니다.

cyrus 2016-02-27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도덕이라는 미덕의 개념이 상업적으로 변질되면 도덕의 진정성을 구분하기가 모호해집니다. 게다가 성과를 위해서 보여주기식 도덕이 강조될 수 있어요. 쥰님이 언급하신 마이클 포터의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읽을거리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6-02-2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선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그렇다면 그 시대는 선의로 포장된 지옥일 수도 있겠네요^^;;

cyrus 2016-02-27 17:1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예를 들면 이런 경우인거죠.

국회의원 후보자가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봉사 활동을 합니다. 이런 후보의 모습이 방송으로 전파됩니다. 제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후보자의 인성을 가늠하기 어려워요.

전호수 2016-02-27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명문유치원에선 인성교육을 광고홍보하면서 대학등록금맞먹는 교육비를 받아요 참 씁쓸한 모습이죠 인성을 가르치지 말고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6-02-27 17: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인성 교육을 시행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책 제목처럼 낭비에 가까운 `공부 중독`입니다.

2016-02-27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7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림스네 2016-02-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눈에 띄였던 책인데..
피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읽었어서, 제목이 비슷하다 생각하면서 봤었거든요.
삶의 격은 철학적이라면, 이 책은 실천적인 얘기들이 많네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흠칫 찔리는 구석들도 있을 것 같아요.

저두 인성교육을 한다는 얘기 참 한심하죠. ˝인성을 책으로 배웠어요˝. 이건가요.

cyrus 2016-02-27 17:26   좋아요 0 | URL
림스네님이 언급하신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인간의 품격》의 내용과 제대로 비교해보고 싶어집니다. 읽을거리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어느 인간의 머리에서 저런 단순한 생각이 나왔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인성 교육을 알면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보면 주인공 아드소가 수도원 장서관 내부에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거대한 미로로 묘사된 2차원의 장서관 내부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화가이자 건축가인 피라네시의 스케치를 재현한 듯 수많은 계단과 다리로 복잡하게 얽힌 3차원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그 기이한 구조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예의 장서관이라는 대상에서 대단히 폐쇄적이며 종교적 신비감과 더불어 뭔지 모를 중압감에 휩싸인 그 시대의 지식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장서관 풍경만 본다고 해서 중세의 텁텁한 공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이건 소설 일부에 불과하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완성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중세의 시대적 배경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종교적 지식을 쌓았으며 의학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다고 한다. 중세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수사도들의 의상을 묘사하기 위해 몇 달간을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역사에 해박한 에코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소설이다. 중세를 생생하게 복원한 《장미의 이름》을 읽어 보지 않고, 시공사 출판사의 ‘에코의 중세 컬렉션’에 눈독을 들이는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두꺼운 양의 책을 소화해낼 자신이 없으면, 《장미의 이름》 독서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건 에코를 위한 예의다. 왜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높이 솟아오른 산에 올라가려고만 하는가.

 

《장미의 이름》 1권의 ‘6시과’ 이야기는 윌리엄 수도사가 프란체스코회의 우베르티노 수도사를 만나는 장면이 핵심이다. 이전 장면은 아드소의 서술로 되어 있다. 윌리엄과 동행한 아드소는 우베르티노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교회 문전과 기둥 장식을 만난다. 아드소는 교회 장식물을 관찰하듯이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한다. 속독하는 독자들은 이 장면을 그냥 훌쩍 넘겼을 것이다. 사실 나도 예전에 이 장면을 주마간산으로 보기만 했다. 하지만 에코가 중세에 낯선 독자들을 엿 먹이려고, 혹은 일부러 책의 분량을 늘리려고 채워 넣은 것이 아니다. 즉, 교회 장식에 대한 아드소의 서술은 이 소설의 불필요한 장면이 절대로 아니다. 중세 기독교 도상학을 이해해야만 아드소처럼 중세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아드소는 사자 형상이 새겨진 기둥의 인각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자 인각에 대한 인상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내 눈은 노인들의 발치에 장미꽃처럼 피어난 창들의 균형 잡힌 리듬에 따라 움직였고, 박공의 삼각면을 떠받치고 있는 중앙 기둥에 인각된 형상에 이르렀다. 무엇이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듯, 한 덩어리로 어우러진 세 쌍의 사자가 전하려는 상징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 사자는 뒷발을 대지에 박고 앞발로는 동료의 곱슬곱슬한 갈기를 그려쥔 채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는 형태로 덩굴 더미에 휩싸여 기둥의 몸체에 붙어 있었다. 이들 사자의 인각은, 악마적인 사자의 본성을 순치하여 보다 나은 존재로 변용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2002년 구판 《장미의 이름》 1권 89쪽)

 

 

 

중세 사람들은 자연을 창조주가 만들어 낸 피조물로 여겼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도들은 동물이나 식물의 습성에 창조주가 부여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적 상징으로 체계화되었고,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렇듯 아드소 역시 사자의 본성에서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고 탐색한다. 하지만 각각의 종파마다 자연 대상을 보는 시각에서 상반된 차이가 있었다. 전국 곳곳에 혼재된 기독교 상징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줄 ‘박식한 자’가 있어야 했다.

 

 

 

 

 

 

 

 

 

 

 

 

 

 

 

 

 

 

 

중세 사람들이 보고, 말했던 수많은 상징적 의미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책이 바로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다. 피지올로구스는 ‘자연에 대해 박식한 자’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 말은 원래 익명의 저자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판본이 수백 년 동안 보급되면서부터 책의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지올로구스는 5세기 무렵 에티오피아에 나온 판본이다.

 

기독교들은 피지올로구스를 통해서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해로운 자연의 피조물을 분류하여 경계했다. 이들은 악마에 가까운 존재로 알려지게 된다. 아드소는 악마의 짐승들이 나열된 장식을 구경하게 되는데, 마치 무서운 환영을 목격한 것처럼 공포심을 느낀다.

 

 

악마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이 추기경 회의를 위해 모인 듯, 옥좌를 향해 영광의 노래(자신들에게는 패배를 뜻하는)를 부르며 옥좌를 보호하고 있다. 판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네레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피아이, 인쿠부스, 용어(龍漁) 무리, 미노타우로스, 스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兩頭數),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리폰,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용,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催眠蟲),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雙胴)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2002년 구판 《장미의 이름》 1권 91~92쪽)

 

 

이름이 생소한 짐승의 정체가 궁금한 분은 《장미의 이름》 1권의 주석을 참고하면 된다. 악마의 우화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이 나온다. 도마뱀, 올빼미, 독수리, 표범, 고래, 족제비, 수달, 까마귀, 개구리 등이 있다.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는 흔히 악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지올로구스는 어두운 밤에 사는 올빼미의 습성을 어둠 속에서 헤매는 신자들을 인도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이해했다. 표범은 잔꾀가 많은 사악한 짐승으로 알려졌지만, 피지올로구스는 표범의 용맹함을 예수의 상징으로 삼았다. 고래는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향기를 내뿜는 사악한 괴물로 봤다. 개구리는 탐욕에 환장하면서 뛰어드는 타락한 인간을 상징했다. 동양에서는 원숭이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지만, 서양에서는 거의 악마로 취급받았다. 피지올로구스는 원숭이를 마귀가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이처럼 《장미의 이름》에 언급되는 동물들과 피지올로구스의 도상학을 같이 비교해보면 상징 해석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뿐만 아니라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 혹은 중세 문학을 읽을 때 기본적인 도상학 지식을 알고 있으면 본문에 나오는 종교적 상징들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속에는 중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암호처럼 숨겨져 있다. 우린 소설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에코의 암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다 읽은 척’ 자랑했다. 줄거리는 다 알고 있어도, 에코가 텍스트 속에 숨겨놓은 상징들을 반 정도 이해하지 못했다. 《장미의 이름》은 한 번 다 읽고 마는 소설이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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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2-2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먼저 봤습니다..실감나더군요..중세의 수도원 ㄷㄷㄷ그 침울한 기분....ㄷㄷㄷ

cyrus 2016-02-26 18:19   좋아요 1 | URL
영화를 지금까지 총 세 번 봤습니다. 영화를 못봤으면 장미의 이름을 다 읽은 척 자랑하지 못했을 겁니다. ㅎㅎㅎ

책한엄마 2016-02-26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 있지만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소설이죠.다 읽고 나서도 작가가 숨겨 놓은 보물찾기로 결국 소장할 수 밖에 없는 책인가 봐요.저도 빨리 중세 시대에 빠져들고 싶어요.^^

cyrus 2016-02-26 18:20   좋아요 2 | URL
`보물찾기`,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이래서 에코의 소설은 아무리 어려워도 읽고 싶어지게 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

서니데이 2016-02-2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 되세요.
오늘도 퀴즈 준비합니다.^^

cyrus 2016-02-26 20:29   좋아요 1 | URL
주말 잘 보내세요. ^^

2016-02-26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을 읽다가 이 비기하학적인 두뇌로는 장서관의 구조가 도무지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영화를 부랴부랴 찾아 봤던 경험이 떠오르네요. 얼마나 답답하고 궁금하던지...

cyrus 2016-02-26 20:31   좋아요 0 | URL
저도요. 5년 전까지만 해도 <장미의 이름> 1권도 다 못 읽었어요. 그러다가 영화를 먼저 봤어요. 소설을 다 읽기 전에 영화로 결말을 다 알게 되었어요. 미로의 도서관을 영상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

fledgling 2016-02-27 23:50   좋아요 0 | URL
저도 책보고나서 영화를 한 번봤는데 영화는 도서관 미로를 완벽히 재현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책과 비교해봐야겠지만 영화는 좀더 단순화한 것처럼 느꼈네요. 제한된 공간에서 책과 완벽히 구현하기는 힘드니...

cyrus 2016-02-28 17:20   좋아요 0 | URL
To. fledgling님 /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소설 속 묘사와 영화 장면을 비교해본 적이 없어서 차이가 나는 줄 몰랐습니다. ^^;;

alummii 2016-02-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있었는 줄 몰랐네요~~^^많이 배우고 가요~장미의 이름 어렵다던데 저도 조심스럽게 시작해봐야겠어요 평생 다섯번 읽으면 반 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ㅎㅎ

cyrus 2016-02-26 20:32   좋아요 0 | URL
읽다가 중도 포기한 것까지 합하면 저는 <장미의 이름>을 열 번 이상 펼쳐봤어요.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은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

달팽이개미 2016-02-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으니 장미의 이름을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ㅠ 무섭;;두렵;; 그러네요..하..;

cyrus 2016-02-27 17:29   좋아요 1 | URL
어떤 독자는 《장미의 이름》이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보다 내용이 쉬운 편이라고 평가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한 번 도전해보세요. 읽을수록 에코의 해박한 지식 수준에 감탄하게 됩니다. ^^

yamoo 2016-02-2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을 읽은 것만으로도 추천!
이런 멋진 리뷰를 남겨준 거에는 추천 10개!^^

cyrus 2016-02-28 17:22   좋아요 0 | URL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쓴 글입니다. 생소한 책이 소개된 내용인데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레삭매냐 2016-03-0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 번 <장미의 이름>을 읽고 싶은데
쉽사리 도전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오만 비디
오방을 다 뒤졌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책보다
훨씬 못했죠.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아마도.

cyrus 2016-03-03 17:57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 속 도서관 장면만 제외하면 나머진 보통이었습니다.
 
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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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은 그리운 서정의 공간이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풍요로운 서사의 공간이다. 동시에 언젠가는 죽어서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귀착지이기도 하다. 고향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여울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우리의 지친 영혼에 손짓하여 정화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연어도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머나먼 북태평양에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현상을 모천회귀(母川回歸)라고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살던 연어가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는지 그 비밀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강원 양양군 남대천은 가을이면 연어가 회귀하는 모천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연어의 70%가 이곳을 찾기 때문에 ‘연어의 고향’이라 손꼽힌다. 예전에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산란과 죽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했지만 이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연어가 거의 없다. 남대천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에 돌아오는 연어들은 대부분 인공수정을 해서 방류한 것들이다. 인간들이 연어의 생명활동 일부를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다. 연어의 귀향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어서 대부분 연어잡이 선단이나 바다표범 등 천적에 희생되고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남대천으로 돌아온다.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한 마리 연어처럼 은빛 몸체를 드러낸다. 회귀를 꿈꾸는 건 연어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온 몸을 던진다. 시인은 고향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을 씨줄로 삼아 ‘연어’라는 날줄과 함께 엮는다. 오래 두고 써 왔던 낡은 글감을 전혀 다른 새것으로 빚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서두르지 않고 시간 속에 흘러가는 기억들을 건져낸다.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연어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과연 누가 이들을 하찮은 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삶의 길을 묻고 또한 삶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고향으로 향하는 연어의 역류 과정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시인은 험난한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려는 치어의 모습을 어린 시절 추억의 장면과 병치한다.

 

 

치어들은 성어가 되어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기억을 갖기 위하여 모천의 흙내와 물내를 후각에 담는다. 그들의 모습은 코흘리개들이 가슴에 아버지의 성을 따른 자신의 이름을 쓴 명찰을 달고 어머니 손을 잡고 쌀쌀한 3월의 바람 속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모습이다. (91쪽)

 

 

굶주림과 긴 항해에 지친 연어는 산란 후 힘을 모조리 빼앗긴 채 흐르는 물에 상처투성이 몸을 맡긴다. 장엄하고 숭고한 순간이다. 시인의 문장은 떠나고 없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회귀 본능을 따스한 시선으로 전환하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교차하는 연어들의 회귀 장면은 연어의 희생이 왜 아름다운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미 연어들은 어미다웠다. 그들은 움직임이 관음의 딸들처럼 어머니 같았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큰 구덩이에 수정란들을 강돌로 덮어놓고 서서히 몸에서 사라져가는 의식의 희미한 등불을 떠나보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먼 항해를 마치고 오늘에서야 생의 소명을 마친 그들의 어디론가 떠나가던 일들도, 수많은 ‘나’를 낳은 어미도 오기는 했지만 알지 못할 그 먼 곳으로 떠나간 일들도 생각이 난다. (324쪽)

 

 

스스로 은빛 물고기로 변신한 시인의 글을 따라가면 마치 고향을 대하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우리네 굴곡진 인생사라는 거대 서사와 연어의 은밀한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들여다보게 한다. 어느 힘센 사내가 있어 저 아스팔트를 쭉 잡아당기면 고구마 덩이처럼 고향의 정다운 추억이 딸려 나올 것도 같지만, 모천회귀는 언제나 고통스러워 영광스럽다. 연어를 보러 멀리 갈 것 없다. 연어의 치열한 일생을 이 책 한 권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 딴죽걸기

 

* 이 책에 ‘스몰트(smolt)’라는 단어가 나온다. 북태평양으로 이동하는 젊은 연어를 의미한다. 118쪽에 스몰트가 들어간 문장이 처음으로 나온다. 그런데 스몰트의 주(註)가 131쪽에 있다.

 

* 「오십천과 남대천은 두견이, 뙤꼬리, 산제비, 파랑새 등 여름 산새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태백산맥 속에서 흘러온다.」 (262쪽) : 여름 철새로 알려진 꾀꼬리가 ‘뙤꼬리’로 잘못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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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2-2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2-26 15:4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외톨이 선언
애널리 루퍼스 지음, 김정희 옮김 / 마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 중에서)

 

 

 

산에 피는 꽃은 소박하다. 내색하지 않고, 유난 떨지 않고, 저만치서 봄을 이야기한다. 야생화들은 조용한 외톨이의 삶을 닮았다. 화려하게 봄 행세를 하지 않더라도, 나직하게 피어오르더라도, 소리 없이 씨앗을 퍼뜨린다. 모든 존재는 저만치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고 살아간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고, 친구가 있지만 모두 저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은 혼자라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존재이므로 본질적으로 외롭고 불안하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부득이하게 혼자 있어야 하면 갑자기 우울감이 엄습한다. 개인의 독립적인 생활이 늘어나면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외톨이가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향한 시선은 조금은 곱지만 않다. 주변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ひきこもり)로 쉽게 규정한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히키코모리가 감정 처리에 굉장히 미숙하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아예 모든 인간관계를 차단하거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솔직한 성찰의 기회가 부족해진다고 본다. 그들은 고독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히키코모리의 상황을 우려한다. 단절된 관계 속에서 괜히 엉뚱한 데 화풀이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히키코모리는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다. 뉴스는 살인 사건 용의자를 히키코모리라는 프레임 안에 가둔다. 단순한 프레임에 익숙해진 우리는 히키코모리를 흉포한 사람으로 여긴다.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발명되기 전부터 이미 외톨이는 특이하고 음습한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살아왔다. “나를 좀 제발 놔두시오!” 좀머 씨의 독백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좀머 씨는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마냥 걸어 다닌다. 일반적인 사람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작가 애널리 루퍼스는 독자들 앞에서 외친다. “나를 좀 제발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그녀의 외침은 외톨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현실로부터 상처 입은 순수한 영혼의 몸부림이다. ‘하나의 유령이 도시를 배회한다. 외톨이주의 (Ioneriem)라는 유령이.’ 루퍼스는 이렇게 자기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외톨이를 문제아로 보는 사회 앞에서 당당히 외친다. ‘만국의 외톨이들이여, 단결하라!’ 그녀의 책 《외톨이 선언》은 외톨이가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꿈꾸고, 세울 수도 있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강조한다.

 

외톨이에게 세상은 언제나 난세였다. 대중은 외톨이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모든 손님의 시선을 받는다. 영화 속 외톨이는 고독의 절망감 속에서 점점 미쳐가는 병적인 인간으로 묘사한다. 미디어는 ‘병 주고 약 주기’식으로 외톨이들을 제 입맛대로 이용했다. 반 고흐 같은 예술가를 재주가 넘치는 위대한 외톨이로 내세운다. 외톨이들의 특별한 재주는 만인의 추앙을 받는다. 세상의 외톨이들은 미디어의 ‘약’을 넙죽 받아먹는다. 그러나 이 약은 외톨이들의 존재를 드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외톨이들에게 일종의 ‘힐링’을 유도하는 가짜 약이다. 현실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외톨이들은 외톨이들의 재주를 선호하는 주류의 반응에 흥분한다.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위로와 안도감을 받으려고 한다.

 

루퍼스는 비록 외톨이가 현실에서는 비주류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만큼은 주류라고 자부심을 표출한다. 당대에 멸시받던 무명의 외톨이 예술가가 후대에 제대로 인정받아 성공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루퍼스는 외톨이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들떴던 것일까. 외톨이로 살다 간 유명 인사와 예술가 들을 열거하고 설명하는 데 지나치게 열을 높였다. 외톨이의 창조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외톨이 선언》을 읽으면 헛바람이 들어갈 수 있다. 이건 책의 핵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서다. 외톨이가 돼서 방 안에 틀어박혀 창작에 열중하면 대중의 시선에 한 몸에 받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꿈 깨시라. 여기에 착각한 외톨이들은 주류에게 인정받는 성공에 대한 열망에 들떠서 혼자 흥분한다. 그들의 눈에는 인정의 욕망이 만든 ‘성공’이라는 신기루가 보일 뿐이다. 외톨이가 대중문화에 이바지한 공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재주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외톨이는 외로운 창작의 임부를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루퍼스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진정한 외톨이는 따로 있다. 그들은 이 세상 한가운데에 자신이 ‘홀로 있음’을 알면서도 관계의 끈을 여유 있게 잡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들은 관계의 끈을 밀고 당길 줄 안다. 혼자 있고 싶을 땐 혼자서 시간을 잘 보내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잘 듣는다.

 

《외톨이 선언》은 ‘외톨이들은 이 세상에 특별한 존재’라고 떠벌리면서 자신들을 광고하는 책이 아니다. 외톨이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굴하지 않고,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다. 진짜 외톨이는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불만으로 가득 찬 유별난 존재가 아니다. 가짜 외톨이는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외톨이라는 가면을 사용한다. 그 가면 속에 숨으면서 자신을 향한 타인들의 눈치를 살핀다. 진짜 외톨이는 외로운 감정을 느껴도 참을 줄 안다. 또한, 남들 앞에서 자신의 고독을 광고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삶’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를 타인 앞에서 표현하는 공간과 기회를 충분히 확보하고 넓힌다. 즉, 건강한 외톨이는 저만큼 떨어져 살아도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일 줄 안다. 살다 보면 관계보다 혼자가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당신이 혼자여도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다.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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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2-2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도현아`라는 가수의 `외톨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제 여식의 18번입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ㅋㅋ

cyrus 2016-02-24 08:28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노래 `외톨이`는 아웃사이더가 부른 비트가 빠른 랩입니다. 도현아의 `외톨이` 한 번 들어봐야겠습니다. ^^

yureka01 2016-02-23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독하더라도 외롭지는 말아야 될텐데요^^..(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더불어라면 좋겠습니다.^^))책과 더불어가 알라딘 서재잖아아요 ㅎㅎ^^

cyrus 2016-02-24 08:29   좋아요 2 | URL
맞아요. 가끔 외로우면 사람들과 가까이 다가가서 어울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죠. ^^

하양물감 2016-02-23 22: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인 것을 좋아하는것과 외톨이라는건 다른데 그걸 오해하는 사람도 있구요.
아무리 혼자하는것이 좋다해도
같이 해야할 때는 해줄수도 있어야하지않을까 해요^^

cyrus 2016-02-24 08:33   좋아요 2 | URL
외톨이를 품성이 덜 된 이기적인 사람으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안되겠습니다. ^^

서니데이 2016-02-2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점점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외로움도 문제가 될 수 있겠군요.
cyrus님, 좋은 밤 되세요.^^

cyrus 2016-02-24 08:33   좋아요 1 | URL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페크pek0501 2016-02-2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싶어서
예술적이어서 그래, 라는 말을 할 때가 있어요. 비사교적이고 때론 신경질적이고 인간 관계에 서툰 사람이 정말 예술적으로 보일 때가 있거든요.

예술가들에겐 외톨이 기질이 있을 것 같아요...

cyrus 2016-02-24 21:31   좋아요 0 | URL
그런 면이 있어요. 폴 오스터도 글쓰기를 고독을 동반한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까요. 김갑수 씨는 자기만의 작업실에서 클래식을 듣는 일이 정말 좋아해서 방송 일 끝나고나면 회식 없이 바로 작업실에 간다고 합니다. 그분도 고독과 창작의 관련성을 인정했어요.

서니데이 2016-02-24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좋은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