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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이틀 전에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년)의 독자 서평을 읽었다. 서평만 봤을 뿐인데도 ‘정희진처럼 읽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희진처럼 읽기》 서평의 글쓴이는 ‘정희진처럼 읽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뻔한 독서를 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독서는 온몸으로 한 권의 책을 체득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독서는 생각하는 노동이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몸에 이입하고 나면, 눈앞에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광활한 길이 펼쳐진다. 정희진의 독서 행위는 이하준 교수의 고전 읽기와 비슷하다. 책을 대하는 두 사람의 방식에 공통점이 있다. 독자는 책을 통해 자기 삶의 행로를 걸어보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사유의 노동을 체험한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 읽기를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고 비유했다. ‘오래된 생각’은 고전을 의미한다. 고전은 한 인간의 고민에서 우러나온 굵은 땀방울의 결실이다. 그 책 속에 오랜 세월 동안 흘린 사상가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생각의 땀방울을 삶 또는 영혼 속에 스며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적 열망의 포로가 되면, 고전을 무류성(無謬性)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한다. 가짜 지식인들은 ‘고전의 무류성’을 선포하여 하나의 교리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자기 계발의 가장 근본적인 동력을 고전에서 찾는다. 인문학 장사꾼들은 고전 독서가 생소한 대중에게 과장 광고를 한다. 과거 무지의 죄를 청산하고, ‘성공’이라는 달콤한 천국으로 향하고 싶다면 고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인문학 장사꾼만 믿고 따라 하는 고전 독서는 ‘생각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이하준 교수는 고전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 삶과 세계에 맞게 고전을 재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래된 생각’과 마주하면서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하나의 진리를 만나면 확실한 내용이 남을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우리도 데카르트처럼 고전에 의심하고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생각과 내 생각 사이의 대화’다. 여전히 고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독자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문 읽기를 추천한다. 이하준 교수의 서문은 고전에 겁먹은 독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하준 교수는 우리에게 고전의 권위 앞에서 쫄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는다. 어려운 고전을 억지로 읽는 것보다는 읽고 싶을 때 골라 읽는 것이 고전을 읽는 자신만의 길이 된다. 여담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이하준 교수 이름 뒷글자만 비슷한 김어준의 명대사 “쫄지 마, 시바!”까지 있었으면 시원한 ‘핵 사이다’급 발언이 되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유명 철학자들의 주요 사상을 쉽게 풀어쓴 흔한 교양 인문학 서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책은 단단히 잠겨 있던 생각의 서랍을 흔들리게 했다. 그 서랍 속에는 지난 한 달 동안 날 괴롭혔던 서평의 정의와 관련된 생각 덩어리들이 어지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서랍을 열고 어지럽게 널린 생각 덩어리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니체와 데카르트의 귀띔에 나는 ‘뻔한 독서’에 ‘뻔한 서평’을 작성하지 않는 법을 생각해봤다.
니체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하나의 시도’라고 말했다. 우리 삶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수많은 도전에 부딪힌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사회의 힘에 순응하는 순간 아무런 비판을 하지 못한다. 독서와 서평작성 행위도 마찬가지다. 책 또는 지식의 권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힌 채 안주하면, 꼿꼿하고 안정적인 주류의 관점만 따라가는 ‘뻔한 독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앵무새처럼 읊어대기만 하는 독서가’가 된다. 우리가 정말 정희진처럼 읽고, ‘오래된 생각’과 대화를 잘하려면 책 속의 지식 앞에 순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책 속의 지식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능력은 ‘생각하는 노동’이다. 저자의 주장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일단 직접 부딪혀서 맞는지 아닌지 과감히 비벼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서평도 독자에게 ‘생각하는 노동’ 임무를 부여해주는 좋은 일감이 된다. 같은 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사람마다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름 있는 서평가의 글도 독자 자신들의 관점으로 비판할 수 있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자신을 향한 합리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서평가나 독자는 지적 허영심에 눈이 먼 사람이다.
“아니야! 젊은 친구, 그건 아닐세.”
가만히 있던 존 스튜어트 밀이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밀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 그래서 선한 의도가 있어도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비판과 간섭은 상대의 자유를 방해하는 행위로 생각한다. 밀의 주장대로라면 책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하는 자세는 그 사람의 생각하는 자유를 강제하는 행위가 된다. 그런데 나는 밀 선생의 절대적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생각과 다른 상대방에게 인신공격하거나 명예훼손을 하지 않는 이상, 그를 비판하는 행위는 전혀 해가 없다. 튼튼할 것만 같았던 나의 지식이 쉽게 허물어지는 상황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시간만 지나면 그 고통이 싹 잊힌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폐허 한가운데에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책을 쓴 유명 저자나 서평가의 생각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조건 전문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다. 이하준 교수는 비판적 독서를 긍정하는 내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그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의심하는 자아가 되라고 말한다. 물론 상대방을 비판하는 나의 관점이 잘못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결점을 인정해야 한다. 결점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민낯’과 같다.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몽테뉴가 드디어 입을 연다. 몽테뉴는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자신의 ‘민낯’을 마주 보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와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능력 있고 지적 수준 높은 사람들만 실천할 수 있는 특별한 행위가 절대로 아니다. 책 속의 진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독서는 ‘저항과 불복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행위다. 이것은 정희진만 이용할 수 있는 화려한 레드카펫이 아니다. 누구나 실천 의지가 있다면 자신만의 독서의 길을 발견하면서 걸을 수 있다.
※ 딴죽걸기
* 저자는 수많은 사상가가 쓴 고전 속 문장들을 꽤 많이 인용했다. 이하준 교수 개인이 직접 고전 원문을 읽으면서 인용문을 번역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이하준 교수가 인용한 고전 도서들을 참고문헌 목록으로 따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가 특정 출판사의 고전 번역본을 참고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책 뒤편에 인용문의 출처를 알려주는 참고문헌 목록이 있어야 했다.
* 이 글 역시 적립금이 걸린 서평대회에 맞춰 정성 들여 쓴 서평이다. 시간이 있을 때 평소에 작성된 서평과 이벤트용 서평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시라. 해당 서평 이벤트 기한은 오늘까지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밤 9시부터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서평이 연달아 나오고, ‘공감’을 받은 서평만은 ‘화재의 서재글’ 뉴스피드에 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