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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고기 - 연어 이야기
고형렬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2월
평점 :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은 그리운 서정의 공간이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풍요로운 서사의 공간이다. 동시에 언젠가는 죽어서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귀착지이기도 하다. 고향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여울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우리의 지친 영혼에 손짓하여 정화하는 소중한 장소이다. 마찬가지로 연어도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머나먼 북태평양에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현상을 모천회귀(母川回歸)라고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살던 연어가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는지 그 비밀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강원 양양군 남대천은 가을이면 연어가 회귀하는 모천이다. 우리나라를 찾는 연어의 70%가 이곳을 찾기 때문에 ‘연어의 고향’이라 손꼽힌다. 예전에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산란과 죽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했지만 이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연어가 거의 없다. 남대천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에 돌아오는 연어들은 대부분 인공수정을 해서 방류한 것들이다. 인간들이 연어의 생명활동 일부를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다. 연어의 귀향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어서 대부분 연어잡이 선단이나 바다표범 등 천적에 희생되고 극히 일부만이 살아남아 남대천으로 돌아온다.
고형렬 시인의 《은빛 물고기》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한 마리 연어처럼 은빛 몸체를 드러낸다. 회귀를 꿈꾸는 건 연어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려고 온 몸을 던진다. 시인은 고향에 대한 아스라한 기억을 씨줄로 삼아 ‘연어’라는 날줄과 함께 엮는다. 오래 두고 써 왔던 낡은 글감을 전혀 다른 새것으로 빚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서두르지 않고 시간 속에 흘러가는 기억들을 건져낸다.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연어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과연 누가 이들을 하찮은 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삶의 길을 묻고 또한 삶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고향으로 향하는 연어의 역류 과정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시인은 험난한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려는 치어의 모습을 어린 시절 추억의 장면과 병치한다.
치어들은 성어가 되어 모천으로 되돌아오는 기억을 갖기 위하여 모천의 흙내와 물내를 후각에 담는다. 그들의 모습은 코흘리개들이 가슴에 아버지의 성을 따른 자신의 이름을 쓴 명찰을 달고 어머니 손을 잡고 쌀쌀한 3월의 바람 속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모습이다. (91쪽)
굶주림과 긴 항해에 지친 연어는 산란 후 힘을 모조리 빼앗긴 채 흐르는 물에 상처투성이 몸을 맡긴다. 장엄하고 숭고한 순간이다. 시인의 문장은 떠나고 없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늘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회귀 본능을 따스한 시선으로 전환하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교차하는 연어들의 회귀 장면은 연어의 희생이 왜 아름다운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미 연어들은 어미다웠다. 그들은 움직임이 관음의 딸들처럼 어머니 같았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큰 구덩이에 수정란들을 강돌로 덮어놓고 서서히 몸에서 사라져가는 의식의 희미한 등불을 떠나보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먼 항해를 마치고 오늘에서야 생의 소명을 마친 그들의 어디론가 떠나가던 일들도, 수많은 ‘나’를 낳은 어미도 오기는 했지만 알지 못할 그 먼 곳으로 떠나간 일들도 생각이 난다. (324쪽)
스스로 은빛 물고기로 변신한 시인의 글을 따라가면 마치 고향을 대하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우리네 굴곡진 인생사라는 거대 서사와 연어의 은밀한 이야기를 한데 버무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들여다보게 한다. 어느 힘센 사내가 있어 저 아스팔트를 쭉 잡아당기면 고구마 덩이처럼 고향의 정다운 추억이 딸려 나올 것도 같지만, 모천회귀는 언제나 고통스러워 영광스럽다. 연어를 보러 멀리 갈 것 없다. 연어의 치열한 일생을 이 책 한 권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 딴죽걸기
* 이 책에 ‘스몰트(smolt)’라는 단어가 나온다. 북태평양으로 이동하는 젊은 연어를 의미한다. 118쪽에 스몰트가 들어간 문장이 처음으로 나온다. 그런데 스몰트의 주(註)가 131쪽에 있다.
* 「오십천과 남대천은 두견이, 뙤꼬리, 산제비, 파랑새 등 여름 산새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태백산맥 속에서 흘러온다.」 (262쪽) : 여름 철새로 알려진 꾀꼬리가 ‘뙤꼬리’로 잘못 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