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탄생 -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비밀
톰 밴더빌트 지음, 박준형 옮김 / 토네이도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페이스북에서 ‘좋아요’가 많은 게시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다.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과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린다. 이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에게 일상을 과시 · 자랑하며 주변의 공감을 얻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행위가 보편화했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접속해서 하는 일은 무척 단순하다. 누군가 글, 사진, 동영상을 공유한다. 우리는 그 게시물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거나 댓글을 단다. ‘알라딘 서재/북플’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페이스북이다. 사실 ‘페이스북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얻기 위해서 실명과 프로필 사진을 공개한다. 반면 북플은 실명을 공개하지 않아도 책과 리뷰를 통해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리고 ‘친구 신청(팔로워, 즐겨찾기)’으로 연대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친목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친분 활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대방을 배려해가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이것이 소셜미디어의 의례다.

 

넉넉한 마음으로 공감과 호응을 보내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나는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르는 편이다. ‘좋아요’가 글에 드러난 상황에 따라 이상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묻고 싶다. 독감에 걸려 며칠 동안 아팠다는 상대방에게 ‘좋아요’는 진심의 위로일까, 아니면 아픈 환자를 놀리기 위해 누른 걸까. 나는 이런 글을 보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쾌유를 비는 인사말을 남겼다. ‘좋아요’가 격려의 인사를 의미하는 기호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면 무례한 행동이다. 실제로 독감 환자를 만나면 빨리 나으라고 인사를 하지, ‘당신이 독감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좋아요. 엄지 척!’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가 하나도 모르는 소재나 분야의 글에 누른 ‘좋아요’는 정말로 글이 훌륭하다는 의미일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심리를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글을 보지 않고 단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이 상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소셜미디어의 의례’와 관련 있다.

 

‘좋아요’는 사람을 연결해주고 보통 사람들의 소통창구를 확대해준 긍정적인 혁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치중하면, 손쉽게 ‘좋아요’를 누른다. 과시욕으로 포장된 게시물의 ‘좋아요’ 수에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비판과 토론의 기회가 줄어든다. 인간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비판과 검증 없이 ‘좋아요’ 수를 많이 받은 게시물을 신뢰한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은 대세를 따르지 않는 고집 많고 괴팍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좋아요’로 소통하는 ‘소셜미디어의 의례’는 우리의 취향을 변하게 한다. 우리는 원하는 정보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특정의 기호집단을 구성할 수 있다. 취향이 공유되는 하부문화가 형성되고,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파악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취향은 죽을 때까지 평생 유지되지 못한다. 인간은 모방 심리와 자기주장을 펼치려는 심리, 이 두 가지 심리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하면서도 개인의 자유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취향이 모두 하나로 동일화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성을 추구하고, 기존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특한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공유하는 취향과 자신의 특별한 개성 사이에 고민하는 반응을 ‘수용주의자들의 성격’이라고 한다.[1] 수용주의자들을 흔히들 표현하는 말로 풀어내면, 개성이 강한 사람 또는 무리 중에 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다. 《취향의 탄생》의 저자 톰 밴더빌트는 남과 같아지고 싶을 때 취향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남과 달라질 때도 취향이 변화한다고 말한다.[2]

 

나는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취향을 속이거나 충분한 공감 없이 억지로 남의 취향을 따르면서 ‘좋아요’를 누르는 일이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을 키우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글이 ‘좋아요’ 수가 많고, 댓글 수가 많이 달린다고 해서 그 글 내용이 훌륭할까? 절대로 아니다. ‘(북플) 친구’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고 해서 내 글을 챙겨 보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추천한 책이 ‘(북플) 친구’가 읽고 싶다고 밝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독서 취향을 따르는 걸까? 절대로 아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착각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착각에 취약하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착각에 빠져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속성이 바로 ‘허위 합의 효과(False consensus effect)’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반적 상황이다.[3]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은 모두 같을 수 없고, 외부적 영향에 의해 자주 바뀐다. ‘좋아요’ 수만 가지고 취향을 공유하는 행동이 진정성 있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소셜미디어의 의례’에 조금 어긋나도 된다. 내가 선호하지 않는 상대방의 취향이 모든 이들이 따른다고 해서 여기에 억지로 따를 필요가 없다. 혹시 지금도 내 글을 보는 분들에게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내 글이 여러분들 개인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안 봐도 된다. 보기 싫은 글에 억지로 ‘좋아요’ 받고 싶지 않다. 친구 관계를 해제해도 된다. 절대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여러분들의 취향이 존중되길 원하는 필자의 간곡한 부탁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되, 내가 진짜 취향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취향이 무조건 하나여야만 하고, 고정적인 특성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히면 취향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이러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취향과 비교까지 한다. 이건 정말 무의미한 생각이다.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즐길 줄 아는 사람, 즉 ‘덕후’는 자신의 취향을 먼저 존중할 줄 안다.

 

 

[1] 톰 밴더빌트 《취향의 탄생》 262~263쪽

[2] 같은 책, 267쪽

[3] 같은 책, 45쪽

 

 


댓글(25)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기농베베 2017-01-1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인이 글을 올리면 좋아요만 먼저 누른 제 자신에대해 진실성을 갖자고 말하고싶어지네요.. 또한 평소 제 글에 좋아요만 누르고 댓글을 달지않은 사람들을 보면 의아 하기도했는데.. 이런 심리였던가보네요. 저도 읽어보고싶네요~~

cyrus 2017-01-16 21:31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한 분이라면 누구나 베베님과 같은 생각 한 번쯤 해봤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정답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까 궁금증이 해소되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상대방 기분이나 감정에 너무 맞추면 원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친분 활동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것이 뭔지 알고, 그걸 자연스럽게 표출하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서재 활동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7-01-17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0   좋아요 0 | URL
저는 하루에 글 두 편을 오전과 오후 시간대로 나누어 정해서 올리거나 아니면 일부러 2~3시간 간격으로 띄워서 올립니다. 하루에 두 편 이상 글을 올리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간대에 올린 여러 편의 글을 다 보지 않습니다. 한 편 한 편 대충 읽어도 다른 분들의 글을 보지 못합니다. ***님 말씀처럼 글쓴이는 상대방이 자신의 글을 여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비종 2017-01-17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요‘를 신중하게 누릅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누른 글에는 댓글을 달려고 노력합니다. 그 글의 어떤 점에 공감했는가, 그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밝히는 것이 글을 쓴 분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의 폭을 넓혀주셨으니까요.
위로가 필요한 글에 대한 ‘좋아요‘는 대부분 위로의 마음일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카스처럼 버튼이 다양하면 ‘힘내요, 슬퍼요‘등을 누를 텐데 말이죠. 아님 차라리 ‘좋아요‘가 ‘공감해요‘정도였으면 나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좋아요‘가 많은 글 중에는 꽤 괜찮은 글들도 있지만, cyrus 님의 말씀대로 허탈한 내용에 실망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나의 취향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몇 번 읽으며 오래 머물게 되는 글입니다.^^

cyrus 2017-01-17 11:25   좋아요 1 | URL
댓글을 다는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댓글 다는 일보다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게 편하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분명 읽어봐도 좋은 글인데도 댓글을 달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글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좋습니다’라고 댓글을 달기가 민망해서, ‘좋아요’만 누릅니다. 서재 활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쓰는 서재를 방문하거나 친하게 지내면 됩니다. ^^

블랑코 2017-01-17 0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공감하는 글에 좋아요는 누르지만 정말 하고픈 말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댓글을 달지 않아요. 친구맺기라고 표현되지만 제 경우 편하게 뉴스피드에서 받아 보기 위해 구독 개념으로 팔로잉하는 거거든요. 뉴스는 매일봐도 독자편지는 자주 보내지 않는 것처럼요. ^^

전 페이스북을 안 하는게 예전에는 진짜 아는 지인들 소식만 주고받았는데 점점 좋아요 수가 많은 뉴스기사, 광고, 지인이 좋아요 누른 모르는 사람 소식까지... 넘쳐나더라고요. 그래서 끊었습니다. 북플은 지인들의 책소식, 파워(!) 독서가들의 서재를 보려고 가입한 건데 차츰 친구가 늘면서 뉴스피드에 책소식 아닌 글도 넘쳐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이웃관계를 끊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사이러스 님 글을 보니 미안해하지 말고 내 취향을 존중해야겠어요. ^^

cyrus 2017-01-17 11:32   좋아요 0 | URL
하루에 제 이메일 함에 페이스북 게시물 알림 메일이 두 세 개 이상 옵니다.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의 생일날짜가 알려주는 메일도 와요. 이 메일 때문에 페이스북 접속하기가 싫어져요.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자신이 친구 관계를 해제하는 것에 사죄의 마음을 드러낸 공개 글을 쓴 적이 있었어요. 그분이 상대방을 배려할 정도로 마음씨가 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조용히 친구 해제를 해도 모르는 분도 있고, 친구 해제 했다고 욕할 사람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북플 시스템상 친구 해제에 관한 일은 금방 잊기 쉽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7-01-17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누르다가 잠깐 멈칫 했습니다ㅎㅎ 이거 누르지 말아야하나? 하고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sns상의 좋아요도 일종의 인정욕구라고 하더군요. 인간은 기본욕구라고요. 현대에 오면서 강해진 욕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받는 것도 예전보다는 조심스럽게 누르고는 있는데... 그래도 고민스러울 때가 있었는데 이제 그 고민도 안 해야겠습니다.
윗분의견 처럼 좋아요가 아니라 공감합니다 가 더 좋을듯 하긴해요.

취존은 당연한겁니다^^

cyrus 2017-01-17 11:35   좋아요 0 | URL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지만, ‘좋아요’를 누르는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도 웬만하면 시간을 내서라도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내가 몰랐거나 잘못된 생각을 알려주는 분들을 만나면 더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

새아의서재 2017-01-17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친구로 맺어진 사람들 (특히 제가 먼저 친구 신청을 한 분들과는) 거의 독서취향이 비슷한것 같아요. 오지에 있는 저에겐 그나마 소중한 정보 역할을 해 주고요. ^^ 소중한 정보든, 즐거운 글이든,감동이든 뭐든 밀려오는게 있으면.. 엄지 척... 그 정도까지만 정직할래요.

cyrus 2017-01-17 11:39   좋아요 1 | URL
다양한 취향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상대방 기분 맞추려고 예전 취향을 포기하면서까지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의 확고한 취향을 즐기되, 다른 취향을 천천히 접하고 받아들이는 서재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Dora 2017-01-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첨에는 좋아요만 있다가...이거저거 생긴 게 좀 웃겨요. 감정이 그거밖에 없나 사지선답 주입식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편하긴 해요 ^^

cyrus 2017-01-17 11:41   좋아요 1 | URL
온라인 공간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집단으로 공유되는 감정을 억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

잠자냥 2017-01-17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통 정성들여 잘 쓴 글이나, 제가 몰랐던 정보를 담고 있을 경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 같습니다. 긴 글이 아니더라도 제 기준에 괜찮은 책을 읽고싶은 책으로 등록해놨을 경우에도, 그 책 좋다는 의미에서 좋아요를 누른 적도 몇 번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저는 좋아요를 생각없이 남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좋아요를 매번 달아주는 이웃보다는, 좋아요를 달지 않아도 제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분이 더 고마울 것 같더라고요. (이건 확인이 불가능하지요. 하하하)

cyrus 2017-01-17 11:44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잠자냥님은 ‘좋아요’를 받을 만한 글을 쓰시는 분들 중 한 분입니다. ^^

2017-01-17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7-01-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은 정말 좋습니다.
전 좋은 글을 읽었지만 불쑥 댓글을 달기가 쑥스러울 땐 살포시 좋아요만 누르고 갈 때가 있거든요
뭐라고 표현할 수없이 좋거나 혼자 오래오래 음미하고싶거나 혹은 수줍어서요~~

cyrus 2017-01-17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라딘 서재 활동했을 때 푸른희망님처럼 수줍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의 서재를 방문해서 댓글을 남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줍음을 잊고 자연스럽게(?) 하니까 그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서재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저에게 친구 신청을 하면, 제가 그 분 서재에 댓글을 먼저 남깁니다. ^^

stella.K 2017-01-1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다양한 문항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나서 더 이상 진전이 없네.

알라딘은 얼마 전부터 더 많은 좋아요를 유도하기 위해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명단을 공개하고 있잖아. 그것도 좀 신경 쓰이는 부분이기도 해.
예를들어 친한 알라디너가 누른 것이 확인되면
기분이 좋긴 한데 없으면 아쉽고.
또 굳이 좋아요를 누를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안 누르면
괜히 오해 받는 것 같아 찜찜하고,
예전 같으면 좋아요 없이 댓글만 쓰는 것이 용이했는데
지금은 좋아요가 없으면 댓글도 못 쓰겠더군.
차라리 안 읽은 척 하는 게 낫지 댓글은 쓰면서 왜 좋아요는 없나
오해 받기는 싫거든.
이걸 내 페이퍼에 써 볼까 하다가 귀찮아 안 썼는데
여기에 댓글로 쓰게 되네.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거든 나중에 네가 페이퍼로 써 주면 안 될까?
그럼 좋아요 눌러 줄 용의 있는데.ㅋㅋ

cyrus 2017-01-17 20:34   좋아요 1 | URL
서재 활동을 하면서 알라디너분들의 장단점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장점 : 착하다, 단점 : 착하다

대부분 알라디너분들은 예의가 아주 바릅니다. 그런데 상대방 감정과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싫어하는 점, 불편한 점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참으면 서재 활동하는데 스트레스 받을 겁니다.

서재에 대해서 쓴소리 한 마디하려면 비판을 감수해야하고, 알라디너 몇 명이 알아서 친구 해제하는 상황을 각오해야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집단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진지하게 댓글을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져버렸군요.. ㅎㅎㅎ

누님. 그런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누르고 싶으면 누르고, 댓글 달고 싶으면 달면 됩니다. 그리고 별로 친하지 않은 알라디너가 있으면 ‘친구 해제(즐겨찾는 서재)‘하면 됩니다.

stella.K 2017-01-18 13:15   좋아요 0 | URL
장점 : 착하다, 단점 : 착하다. ㅎㅎㅎ
맞아!!!

vzvz1004 2017-01-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 내에서 활동을하지는 않지만 네이버 블로그를 하고있어요..ㅋㅋ 계속 고민되던 내용이었는데...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cyrus님이 올리신 글을 읽다보니 제가 고민하고 약간은 우울하고 또 약간은 건방지게 오만했던 고민들에 답을 조금 주는 글이었네요.

개인적으로는...의미없는 좋아요에 뭐지? 싶을때도 있고 간절히 친해주게 싶던 사람에게 받은 좋아요에 설레기도 하고 내글을 보긴 본건가? 싶은 댓글에 힘빠지기도 하지만, 가끔 짧은 댓글이라도 아 진짜 고맙고, 감사할때가 있긴해서 끝없는 도돌이표 같긴합니다.

좋아요든, 댓글이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쿨하지 못한 감정에 지배되는건가 싶기도 하고요.....뜬금없이 주절주절 남기고 조금은 성장했다고 믿고 갑니다.

어제 사실 오프라인 알라딘 매장 다녀왔는데...이 책, 사러가야겠어요. ㅎㅎ

cyrus 2017-01-24 14: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천사님. 저는 네이버 블로그를 알라딘 서재 블로그만큼 게시물을 올리면서 활동을 한 적이 없어요. 네이버, 알라딘 블로그를 같이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어요. 아마도 네이버 블로그 활동이 알라딘 서재 블로그 활동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싶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일이 많아지면 블로그 활동에 대한 의욕이 떨어집니다. 괜히 온라인 공간에 만나서 친한 분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다들 복잡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한번쯤 저나 천사님과 같은 심경을 겪었을 겁니다.
 

 

 

 

 

 

 

사흘 전에 곰곰생각하는발님의 글에 달린 흥미로운 내용의 댓글을 접했다. 그 댓글을 작성한 분은 수다맨님이다. 수다맨님의 설명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는 13년 넘게 사형집행관을 맡았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형 방식은 참수형이다. 즉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의 직업은 우리말로 하면 ‘망나니’다. 온갖 잡다한 지식이 정리된 ‘나무위키’에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부터 언급될 내용은 나무위키에 참고한 것이다.

 

무함마드가 십 년 넘게 망나니를 하는 이유가 그의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형집행관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보수를 넉넉하게 받는 직업이다. 무함마드는 죄인 한 사람씩 목을 자를 때마다 오랫동안 피땀 흘리면서 번 돈보다 더 많이 받는다. 그런데 그는 현지 인터뷰에서 자기 일이 알라가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람을 한 번에 죽이는 일에 죄책감을 느꼈다.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이슬람이 살상이 허용된 위험한 종교로 오해받는다. 그런데 이슬람은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살인의 경우를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특히 명분 없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밝히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의 구절을 마음대로 인용, 해석하여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한다.

 

 

 

 

 

참수형에 사용된 도구는 장검과 도끼다. 초기의 참수형은 지체 높은 사람들, 즉 왕족이나 귀족들이 받는 형벌이었다. 강도, 절도, 간통 등 단순 범죄자들은 교수형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참수형의 권위적인 의미가 잃기 시작했고, 왕족이 아닌 사람도 참수형을 받았다.

 

 

 

 

 

 

 

 

 

 

 

 

 

 

 

 

 

 

참수형이 기계화로 발전된 것이 바로 단두대, 즉 ‘기요틴(guillotine)’이다. 단두대는 프랑스 혁명사를 논할 때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필수 요소다. 프랑스 혁명 말기 자코뱅당이 주도한 공포정치 시대를 ‘단두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포정치 시대는 단두대로 시작해서(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단두대로 끝났다(로베스피에르 처형). 단두대의 이름으로 남게 된 기요틴 박사는 흔히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단두대를 새로운 사형 방식으로 도입하자고 국민의회에 제안했다. 기요틴 박사는 고통 없이 ‘인간답게’ 목을 치는 인도적인 사형 방법을 원했다. 기요틴의 등장으로 사형집행자는 사형수의 목을 향해 검과 도끼를 내려치지 않아도 되었고, 사형수는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취지는 그럴 듯했지만 진행 상황은 그리 인간적이지 않았다. 단두대에서 공개 사형이 진행되는 날에는 인간 본성과 거리가 먼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군중들은 참수된 인간의 피가 불치병을 낫게 해준다는 미신을 믿었다. 사형이 집행된 후에 군중들이 단두대 주변으로 몰려왔다. 사형집행관의 조수들은 잘려나간 머리나 목 없는 시신에 흘러나오는 피를 컵에 받거나 손수건에 적셔서 군중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집행관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망나니’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는 ‘망나니’는 성직이 포악한 사람을 비난할 때 쓰는 단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사형집행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망나니에 가까운 인성을 가지지 않았다. 무함마드 사아드 알 비쉬는 자기 일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날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자신처럼 사형집행관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최고의 사형집행관이었던 샤를 앙리 상송이라면 무함마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남았을 것이다. 상송은 루이 16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목을 잘랐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사형집행인으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상송 가문의 증조부가 사형집행인의 딸을 만나 결혼하지 않았으면 상송 가문은 훌륭한 귀족 집안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나 하기 힘든 직업이 으레 그러하듯, 상송 가문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았다. 그래서 상송은 자신의 회고록에 사형제가 폐지되기를 밝혔다.

 

 

 

 

 

 

 

 

 

 

 

 

 

 

 

 

 

 

 

과거의 공개 사형은 군중을 겁주고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시작됐다. 그렇지만 잔혹한 처벌의식의 잔인성은 군중을 길들여 놓았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은 축제 분위기다. 공개 사형은 황홀한 구경거리다. 권력자가 단두대에 오르면 군중은 일상에서는 맞설 수 없었던 권력에 대해 조롱을 하거나 돌팔매질까지 한다. 그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에게 조롱하는 군중이 자주 등장한다. 미셸 푸코의 분석대로, 누군가를 하나의 속죄양으로 삼고 타자화함으로써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개인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여러 문제가 중첩돼 벌어진 사건을 한 개인에게 향한 분노로 표출된다면,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비극적인 과정을 보지 못한다. 사형이 또 하나의 살인인가 아니면 마땅한 정의의 실현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의 하나다. 사형집행인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사형집행인조차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의 일부로 보고, 그를 비하하는 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1-1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인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그런데 군중의 화풀이용으로 사용되어질텐데요..문제는 그 화풀이의 대상이 자신이 되어졌을 때는 빽 돌아갈 일이죠...

cyrus 2017-01-16 15:55   좋아요 1 | URL
정말 억울하고, 통탄할 노릇이죠. 억울한 희생자의 가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stella.K 2017-01-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수다맨님 그 댓글 봤어.
좀 놀랐지. 그런 직업이 아직도 있다는 게.
우리 여자들은 환호했을 거야.
가끔 누가 성폭력 했다고 그러면 저런 놈들은
광화문 광장에 매달아 놓고 총살을 시켜야 한다.
거길 거세해야 한다 막 그러거든.
사람은 조용히 말로해서 못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기요틴 하니까 옛날에 보았던 <길로틴 트래지디> 영화 생각났어.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암튼 수작이었지. 그것도 19세기 사형을 다룬 영화거든.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올레 tv는 없는 것 같기도하고...

cyrus 2017-01-16 18:55   좋아요 0 | URL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인간이길 스스로 거부하는 범죄자들은 가혹하게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권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들이 법적 보호의 그늘 속에 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2017-01-16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6 18:57   좋아요 0 | URL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끝까지 변명하는 최순실이 80년대식 고문을 당해봐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페이퍼 재미있네요. 전 이상하게 이런 잡학에 흥미롭더군요.
역사도 거시보다는 미시학에 관심이 높고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1-16 19:00   좋아요 0 | URL
수다맨님과 곰발님 덕분에 저도 흥미로운 내용을 알았습니다.

나무위키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정말 다양한 잡식이 많습니다. 다만 잘못된 정보도 있긴 합니다만 가끔 심심할 때 들어가서 보면 재미있어요. ^^

겨울호랑이 2017-01-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 청조말 중국에서 사형수들의 살점이 돈으로 거래된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하던데, cyrus님 글을 읽으니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네요

cyrus 2017-01-16 19:04   좋아요 1 | URL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인종 학살은 정당한 행위로 주장하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합니다. 내로남불이죠.. ^^;;

북프리쿠키 2017-01-1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나니는 현재로 치면 공무원이네요^^;

cyrus 2017-01-16 1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사형집행관은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특수 직업입니다. ^^

블랑코 2017-01-1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존재하는 직업인지 몰랐어요. 저도 이런 잡학 좋아하는데요. ^^

장르 소설인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꽤 자세하게 중세 사형집행인의 이야기가 나와요. 후손이 자기 조상의 직업과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쓴 소설인데 장르적 재미가 뛰어나진 않지만 당시 생활상을 알게 되는 재미가 아주 커요.

cyrus 2017-01-16 19:07   좋아요 1 | URL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소설을 말씀하시는군요. 제가 그 책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사실 사형을 주제로 한 책이 그리 많지 않아요. 관련 도서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 서머싯 몸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하고 계량할 수없는 불가해한 존재인가를 그려내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의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과학적 객관성에 입각해 인간의 정신을 해부하는 데 전 생애를 보낸 그였지만, 몸은 자서전에서 “나는 여전히 인간을 모르겠다”고 썼다.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는 그만큼 어렵다.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은 모든 사회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비합리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경제학 이론의 출발점이다. 남보다 더 잘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심은 경제학을 지탱해주는 두 개의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 이론이 실제 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들이 밝혀졌으며 이와 관련 최근 들어서는 완전하게 합리적일 때보다는 약간은 비합리적일 때가 더욱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제기되었다.

 

우리는 기상예보가 틀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지만, 기상통보관은 적어도 현재 기상상태에 대해서는 80%의 정확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경기예측은 차치하고 현재의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다. 새해가 다가오면 각종 경제 관련 연구소들이 앞다투어 경제전망치를 내놓는다. 물론 예측의 어려움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전망치와 실적치가 몇 배씩 차이가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전망치들이 틀렸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 선택을 잘못하면 현세대에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고통이 전달된다. 잘못된 정책의 선택은 두고두고 말썽이 된다. 그래서 장하준은 경제학이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1]

 

경제학자들 가운데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보통 극단적인 예측과 독설로 주위의 관심을 끈다. 반대로 밋밋하거나 방향성 없는 예측을 하는 경제학자는 인기가 없다. 기상예측은 틀리면 난리지만 경제예측은 맞으면 오히려 난리다. 우리 사회가 경제예측의 오류에 더 관대한 덕분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틀려도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여기서 경제예측을 실패한 경제학자들 자체를 비판할 의도는 없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도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경제학자들이 문제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잘못된 예측을 되풀이하는 경제학자들이 여전히 각종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며 또 다른 엉터리 예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경제이론을 근거로 경제를 예측한다. 거듭된 오판에도 여전히 자신의 경제학이 과학이라며 떠들고 다닌다. 이들은 어쩌다 우연히 홀인원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점점 더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든다.

 

경제이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가정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론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문제는 이론과 현실 간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론의 현실 설명력이다. 과거에 잘 맞던 이론이 지금은 아닐 수 있고, 특정 시대에서 잘 통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현실은 늘 변하며 그것을 느낀 다음에야 기존 이론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의 잣대로 문제에 접근할 때 반드시 다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다양성을 고려하면 경제학이라는 일반적 원칙이 적용되더라도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제학은 ‘자기충족의 학문’이 아니다. 경제학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그 다양성 속의 혼성(Hybrid)을 축복하는 지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장하준은 서로 다른 학파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을 '이종 교배'라고 표현했다) 재벌로부터 기금을 두둑이 받아 설립한 자유경제원은 좌익을 ‘시장경제의 적’으로 설정하여 한국사회를 국정 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이냐 분배냐, 시장이냐 정부냐 등의 기존 좌우 담론은 모두 철 지난 유행가에 불과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게 여전히 이념이란 믿음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득권 세력이 대항세력을 좌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대항세력이 기득권 세력을 극우 반동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도발이요 치우친 시각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고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는 존재다. 기존 이론을 수정하고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려는 경제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없이 현실 경제가 발전할 수는 없다. 충분한 해답은 아니더라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경제이론이다.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손잡아 이익집단 간의 상충한 이해관계를 정당이나 개인의 권력 확장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학의 지적 토양을 피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비효율을 초래하여 국가경쟁력을 약화하고, 우리 국민 모두의 삶의 수준이 저하된다. 이러한 과대망상증 경제 선동가 · 정치꾼들 때문에 중요한 경제문제들이 정치적 이슈의 홍수 속에 잠겨 정책 시행의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런 경제 선동가를 비판하지 못하고 정치꾼들을 계속 선출해 준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래, 다 좋은 얘기 같기는 한데,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야?”[2]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경제학이 전문적 권위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학자들은 비아냥거리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에 점점 더 무관심해졌다. 예전에는 위대한 한 개인의 노력이 그 시대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경제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제현상에 대한 기본 지식은 이 시대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우리 개인은 잘해야 ‘제한적 합리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를 공부할 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만나는 게 좋다. 토론과 비판은 기본이다. 그래야 엉터리 경제학자나 ‘블랙 스완(black swan)‘을 만나더라도 덜 충격 받는다.

 

 

 

 

[1]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25쪽

[2] 같은 책, 440쪽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맥(漂麥) 2017-01-1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경련·자유경제원이 좀 그랬지요. 우측으로 너무 함몰된... 전 이 책이 상당히 균형(?)잡힌 서술이었다고 생각한답니다...^^

cyrus 2017-01-16 00:13   좋아요 0 | URL
자유경제원은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학파를 적 또는 무용한 것으로 설정하여 까내립니다.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의 페북 계정을 봤는데, 지적 우월감에 빠져 있어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상대하고 싶지 않게 만듭니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면 이 책에 문제점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

2017-01-16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6 00:15   좋아요 1 | URL
어제(15일)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리뷰 이벤트 응모 마감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이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썼습니다. ^^;;

yureka01 2017-01-16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학자인지 경제이론중에 경제이론의 가정부터가 틀렸다고 지적하더군요..인간은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경제활동을 한다고 전제 했던 기존의 입장과 달리,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경제활동도 자주 하고 뻔한 오류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얼추 이해 되더군요..대구 경북지역에 조희팔의 사기에 4조씩이나 떨려서 당하는거 보면요....경제적 이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과욕과 탐욕이 이성과 논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이유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1-16 15:04   좋아요 0 | URL
인간은 오래 살아봤자 죽으면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죽을 때까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실수를 하고 생각이 틀립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당연한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1-16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경제학 전공자로서 아직 21세기자본도 읽기 버거워 이러고 있네요
싸이러스님의 다양한 독서에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17-01-16 15:05   좋아요 1 | URL
저는 피케티의 책을 안 읽어봤습니다. 경제학 원론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원론 그 이상의 내용의 경제학 책은 일부러 피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꼬마요정 2017-01-16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계효용의 법칙도 사실 불완전하죠.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니까요. 이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7-01-16 15:07   좋아요 0 | URL
패러다임이 바꾸려면 일단 자유경제원 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부터 싹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면 자유경제원을 해체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01-16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한다고
그가 생각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은 최고의 이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는 균형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 교수가 생각나네요..

그 분의 업적보다도 정신분열증을 극복해내는 의지가 존경스러워요..

cyrus 2017-01-16 15:09   좋아요 1 | URL
존 내쉬의 명언이 좋군요. 박근혜를 좋아하는 자유경제원 소속 사람들은 자신들만 옳게 생각한다고 믿지,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간단하게 종북주의자로 몰아세우죠.
 

 

 

 

※ 글 제목에 대한 주석 : 일본 애니메이션 '도쿄 구울'을 패러디했음

 

 

 

 

 

 

 

 

 

 

 

 

 

 

 

 

 

 

 

《러브크래프트 전집 4》는 전집 중 유일한 공동 번역본이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1, 2, 3, 5, 6권은 정진영(필명 정탄) 씨가 단독으로 번역했고, 정진영 씨와 함께 전집 4권을 번역한 분은 러브크래프트 관련 웹사이트인 ‘위어드 테일스(Weird Tales)’ 공동 운영자인 류지선 씨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출간의 서막을 알린 1권은 2009년에 첫 선을 보였다. 이미 5년 전에 정진영 씨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한 편 번역한 적이 있다. 그 작품이 바로 『사냥개(The Hound)』다. 이 작품은 《세계 호러 걸작선》(책세상)에 수록되었고, 정진영 씨의 번역이 있는 《러브크래프트 전집 4》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두 권의 책에 있는 『사냥개』를 같이 읽어보면, 문체가 확연히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원문 1

By what malign fatality were we lured to that terrible Holland churchyard? I think it was the dark rumor and legendry, the tales of one buried for five centuries, who had himself been a ghoul in his time and had stolen a potent thing from a mighty sepulchre.

 

* 《러브크래프트 전집 4》 282쪽

대체 어떤 사특한 운명이 우리를 그 소름끼치는 네덜란드 교회 묘지로 꾀어냈을까? 그 시작은 음산하게 떠돌던 풍문과 전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평생을 도굴꾼으로 살면서 한 거대한 분묘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쳐냈다는, 5세기경에 매장된 어느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 《세계 호러 걸작선》 228쪽

그 무슨 사악한 숙명이었기에, 우리는 그 오싹한 폴란드의 교회 묘지로 이끌렸던가? 그것은 오백 년 전 그 자신이 구울로서 권력자의 무덤에서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는 어느 인물의 이야기와 관련된 음산한 풍문이며 전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원문 2

I remember how we delved in the ghoul's grave with our spades, and how we thrilled at the picture of ourselves, the grave, the pale watching moon, the horrible shadows, the grotesque trees, the titanic bats, the antique church, the dancing death-fires, the sickening odors, the gently moaning night-wind, and the strange, half-heard directionless baying of whose objective existence we could scarcely be sure.

 

* 《러브크래프트 전집 4》 283쪽

삽으로 그 도굴꾼의 묘지를 팠던 모습과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우리가 얼마나 전율적인 흥분을 느꼈는지 나는 기억한다. 그 무덤, 창백한 목격자인 달, 으스스한 그림자, 괴상망측한 나무들, 거대한 박쥐 떼, 고색창연한 교회당, 춤추는 도깨비불, 그 병적인 악취, 길게 울음 울던 밤바람, 그리고 어디선가에서 들려오곤 있으나 존재한다고 객관적으로 확신할 수도 없었던 음산한 개 짖는 소리.

 

* 《세계 호러 걸작선》 229쪽

우리가 어떻게 그 구울의 무덤을 삽으로 파들어 갔는지, 우리 자신과 무덤의 형체에, 창백히 지켜보는 달과 섬뜩한 그림자들에, 괴괴한 나무와 거대한 박쥐 떼에, 낡은 교회와 춤추는 도깨비불에, 메스꺼운 악취와 나지막이 탄식하는 밤바람에, 그리고 어딘지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기이하고 아득한 정체불명의 짖음에 우리가 얼마나 전율했는지, 나는 기억한다.

 

 

 

‘Holland’는 네덜란드의 미국식 표기다. 《세계 호러 걸작선》를 번역한 정진영 씨는 ‘폴란드’로 잘못 썼다. 구울(ghoul)은 묘지를 파내어 시체를 먹는 괴물이다. 《러브크래프트 전집 4》의 『사냥개』를 정진영 씨가 번역한 건지, 아니면 류지선 씨가 번역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했든 간에 ‘ghoul’은 정식 명칭이기 때문에 ‘도굴꾼’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고딕 소설에 관심 많고, 오래전부터 러브크래프트 전집 번역 작업에 착수한 정진영 씨가 구울을 모를 리가 없다. 특히 구울은 『사냥개』 이외에도 러브크래프트의 다른 작품에서도 언급되는데, 『픽맨의 모델』에서는 비중 있게 등장한다. 『픽맨의 모델』은 《러브크래프트 전집 1》에 수록되었으며 물론 이 책의 역자는 정진영 씨다. 그는 러브크래프트 전집보다 먼저 나온 《세계 호러 걸작선》에서 ‘구울’이라고 썼다. 자신이 이미 번역한 적이 있는 작품을 새로운 문체로 재번역한다고 해도 기억력이 좋지 않는 이상 ‘구울’을 ‘도굴꾼’으로 쓰지 않는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 전집 4》의 『사냥개』를 번역한 사람은 류지선 씨일 가능성이 높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1-15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5 22:02   좋아요 0 | URL
네. 리뷰 작성 부담 갖지 마시고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

yureka01 2017-01-1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라인 게임에 보면 구울,, 몹으로 나오죠..

cyrus 2017-01-15 22:0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게임을 하면서 구울을 처음 알았어요. ^^

transient-guest 2017-01-2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놈의 번역문제는 정말 짜증나네요 편집간계에서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텐데 말이죠

cyrus 2017-01-20 15:32   좋아요 0 | URL
번역가들도 가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제일 나쁜 건 독자나 다른 번역가들이 오역을 지적했는데도 이를 수정하지 않는 뻔뻔한 출판사들의 태도입니다.

hskim890 2021-02-08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1판 1쇄 3권 읽는데198쪽 윗문단에서 가스트의 얼굴은 코와 입 따위가 없음에도라고 나옵니다. 근데 가스트 이미지로 볼라고 위키 보니까 입이 나올 부분이 forehead고 따위는 important particular더군요. 이걸 그냥 따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1, 2권도 검색해보니까 아닌 부분도 몇번 봤고요.

hskim890 2021-02-0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아식 건축이라고 자주 나오는데 검색하니까 그루지야하곤 무관하게 영국왕 조지 양식인데 왜 조지아로 되는지도 모르겠고 Arcturus를 아루크투루스라고 할 때는 일본어판 중역본인가 의심도 들었고요. 첫판 나올때 사서 이제야 읽을 엄두를 내서 보는 데 도대체 얼마나 왜곡이 있을지 생각하니 진짜 짜증납니다.

hskim890 2021-02-0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hose face is so curiously human despite the absence of a nose, a forehead, and other important particulars

hskim890 2021-02-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브크래프트 원전을 전집으로 읽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안의 크리처에 대한 묘사를 읽고자 하는 것도 있는데 최소한 그 부분만은 신경써서 번역해 주었으면 합니다. 위에 한 문장만 보더라도 번역자가 원문을 얼마나 뭉개서 번역했을까 싶어 불안하네요.

cyrus 2021-02-12 12:01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오역이 많군요.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이 쓴 러브크래프트 평전이 나온다고 해요. 그래서 오랜만에 러브르래프트 전집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hskim890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순탄치 않은 독서가 될 것 같아요. ^^;;
 

 

 

 

 

 

 

 

 

 

 

 

 

 

 

 

 

 

파블로 네루다의 처녀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제목을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인생이란 많은 사랑의 시와 오직 하나의 큰 절망의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 『절망의 노래』는 절망 속에 빠져 침잠하지 않고 무거운 인생 위로 가볍게 띄워 올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천근 무게의 절망을 띄워 올리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강력한 희망의 힘을 발휘해야 할까. 네루다는 인간이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우리가 녹아들고 절망한 / 희망과 힘의 미친 결합’이라고 썼다. 육체적인 큰 고통에 비하면 사소하다 할 만한 것들, 이를테면 사회생활에서 빚어지는 온갖 오해와 갈등들,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 비하의 감정과 뒤범벅이 되었을 때 삶은 내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느껴진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정신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희망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절망은 잠깐일 뿐이다.

 

 

 

 

 

 

《시, 희망을 노래하다》는 삶의 고통이나 위기를 늘 행복으로 전환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찾아온 편지처럼 시인들의 시는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독자들에게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일상과 평범함 속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 같은 것을 준다. 이 시집을 통해 우리들의 누추한 삶 또한 삶의 아름다움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시를 읽는 우리 독자들의 즐거움이자 기쁨이다.

 

 

 

 

 

 

 

 

 

 

 

 

 

 

 

 

 

새벽에 창을 사납게 두드리던 비도 그치고

이른 아침, 햇살이 미친 듯 뛰어내린다

온몸이 다 젖은 회화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물끄러미 서서 조금씩 몸을 흔든다

간밤의 어둠과 바람 소리는 제 몸에 다 쟁였는지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들을 떨쳐 낸다

내 마음보다 훨씬 먼저 화답이라도 하듯이

햇살이 따스하게 그 온몸을 감싸 안는다

나도 저 의젓한 회화나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리에 서 있고 싶다

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 대도, 눈보라쳐도

모든 어둠과 그림자를 안으로 쟁이며

오직 제자리에서 환한 아침을 맞고 싶다

 

(이태수 『환한 아침』, 14쪽)

 

 

삶이 내던져진 채로 바쁘게 살다 보면, 살아가는 나날의 의미 같은 것을 물어볼 틈이 없다. 여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것을 보면 시간이 없다고 마냥 엄살만 떨 일도 아니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 하루를 맞아서 그냥 흘려보내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일 수는 없다. 무릇 어떤 것에나 비교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지만, 어떤 삶이 더 낫고 잘 사는 삶인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에게 삶의 아름다움이란 예술에 있지 않다. 사소한 일상, 익숙한 자연 등 흔한 것들에서 건져 올린 그 무엇이다. 시인은 세상의 탁함에도 찌푸리지만은 않는다. 맑은 언어로 걸러내서 희망의 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제자리에서 맞이한 환한 아침’이다. 시인이 맞은 아침은 세상과 쉽게 통정(通情)하지 않겠다는 고고한 결의로 읽힌다.

 

 

모처럼 저녁놀을 바라보며 퇴근했다

저녁밥은 산나물에 고추장 된장 넣고 비벼먹었다

뉴스 보며 흥분하고 연속극 보면서 또 웃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났건만 보람될 만한 일이 없다

 

그저 별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고 자책하면서도

남들처럼 세상을 탓해보지만

늘 그 자리에서 맴돌다 만다

 

세상살이 역시 별 것 아니라고

남들도 다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살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 생각났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이 별 것도 아닌 곳에서

별 것처럼 살려고 바둥거리니 너무 초라해진다

한심한 생각에 눈감고 잠 청하려니

별의별 생각들 다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오늘 하루 우리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무탈한 모습들 보니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워

행복의 미소가 눈언저리까지 퍼진다

 

(공영구 『오늘 하루』, 122쪽)

 

 

이 시에서 언급된 행복은 그리 요란하지 않다. 가족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사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이다. 새해에 의례적으로 나누던 덕담은 ‘복 많이 받으세요’다. ‘복’이라는 말에는 재물 복, 자식 복, 부인 복, 남편 복 등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제물 복이다.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재물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의 벌이로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상대적 상실감은 매우 깊어진다. 돈이나 명예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이나 쾌락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은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따라온다. 삶을 제대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덜 가지고 덜 욕망해도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며 내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사람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생의 위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생의 고통을 당했더라도 내게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언제든지 새롭게 일어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절망한 순간 이 삶의 끝에 있는 희망을 생각해보자. 견뎌야 할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진정한 복이다.

 

 

 

※ 정경진의 『꽃자리 한때처럼』 9행(34쪽)에 ‘달아나는 베꼽’이라는 표현이 있다. ‘배꼽’의 오자로 보인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1-14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이 오늘을 살게 하니까요...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cyrus 2017-01-14 16:06   좋아요 1 | URL
희망이 무조건 내 자신의 마음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깁니다. 그래서 희망을 쉽게 포기해선 안 되고, 그 희망을 꿈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

프레이야 2017-01-14 1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시 내용이 와닿네요. 새해 들어오늘따라. 새해 좋은 희망의 기운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

cyrus 2017-01-14 16:08   좋아요 0 | URL
몇 분을 제외하고는 알라딘 서재에서 알고 지내는 분들과 일면이 없지만, 다들 모두 행복하고, 잘 살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dellarosa 2017-01-14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의별 생각들...... 다들 그런것 같아서 힘이됩니다 ^^;

cyrus 2017-01-14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별의별 생각 많습니다. 결혼은 해야 되나, 집은 구할 수 있을까 등 고민이 많습니다. 온라인 공간 속 사람들은 늘 좋은 것만 보여주고, 늘 좋은 것만 보고 싶어 합니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나름 고민이 있습니다. 몇 몇 분들의 진심어린 위로와 격려는 살아가는 데 힘이 됩니다. ^^

우민(愚民)ngs01 2017-01-14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게 나라냐! 라는 혼란의 시대에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힘조차 없겠지요
그래서 희망을 가져봅니다. 아자 아자
대한민국 화이팅! !

cyrus 2017-01-14 16:15   좋아요 1 | URL
사회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걱정하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어서 세상에 대한 희망을 염원해봅니다.

2017-01-15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