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책을 사고 난 뒤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일단 가게 밖으로 나와 책을 쥐고 나머지 손으로 책을 몇 번 친다. ‘탁탁’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쳐야 한다. 책에 쌓인 미세먼지를 공중에 내보낼 수 있다. 그다음에 먼지가 남아 있을 만한 책의 부위를 꼼꼼하게 휴지로 닦는다. 반면 알라딘 중고서점에 사는 책은 먼지를 털지 않는다. 거의 책 상태가 깨끗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고서점에 진열된 모든 책이 먼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의 먼지는 휴지로 닦는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산  책을 깨끗하게 닦는 일보다 제일 중요한 과정은 책 뒷면에 붙여진 바코드 스티커를 제거하는 것이다. 손으로 스티커를 살살 긁어내서 떼어내면 된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일이지만, 재수가 없으면 끈적거리는 스티커 접착제나 스티커 종이 일부가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다. 이럴 땐 아세톤이나 선크림을 천에 묻힌 후에 스티커 자국에 살살 문지르면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다. 헌책방에 산 책에도 도서관 혹은 대여서점 바코드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제거하려면 아세톤이나 선크림은 필수다. 오랫동안 동안 스티커가 책에 붙어 있어서 알라딘 중고서점 바코드 스티커처럼 수월하게 떼어내기 힘들다.

 

알라딘 바코드 스티커 안에는 중고매장과 이 책이 진열된 책장 위치가 적혀 있다. 작년 9월에 청주점이 들어선 것을 포함하면 전국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은 총 19개이다. 지금까지 서울 대학로점, 종로점, 신촌점 그리고 울산점을 가본 적이 있는데 책을 주제별로 분류한 책장을 가리키는 알파벳 기호가 달랐음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대구점에서 G 코너 책장에 가면 소설, 시, 만화책이 있다. 반면 종로점의 G 코너에는 베스트셀러 혹은 새로 매장에 들어온 책들이 꽂혀 있다. 알라딘 중고매장 통합 사이트에 들어가면 전국에 있는 매장 안내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으로 중고 책을 주문하거나 매장에서 책을 직접 사는 사람들은 바코드 스티커를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들에게 스티커는 떼어내야 할 작은 종잇조각일 뿐이다. 나는 스티커를 떼기 전에 이 책이 어느 매장에 있는지 확인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중고 책 대부분은 서울에서 온 것이 많았다. 간혹 중고 책에 바코드 스티커가 두 겹으로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지난번에 대구점에서 《괴테의 프랑스 기행》(인화, 1998)이라는 책을 샀다. 젊은 괴테가 프랑스 혁명에 참전하면서 겪은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희귀한 글인데 절판되었다.

 

 

 

 

 

책 뒷면에 스티커가 두 장 붙어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두 장의 스티커를 동시에 떼어냈다. 그런데 그날따라 ‘대구점’이 적힌 스티커 밑에 있는 처음 붙여진 스티커 속 내용이 궁금했다. ‘대구점’이 적힌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자 ‘분당점’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 《괴테의 프랑스 기행》은 경기도 성남에 있는 분당점에 새 주인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진열되어 있었다가 대구점으로 옮겨진 것이다. 멀리서 온 책은 대구에서 사는 책 좋아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바코드 스티커에 적힌 매장 위치만으로도 책의 이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종로점에 진열되었던 책이 대전점으로 옮겨져서 대전에 사는 사람이 그 책을 살 수 있다. 다만 내가 알라딘 중고매장의 유통 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분당점에 있는 책이 어쩌다가 대구점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헌책방에 잠들고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헌책방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대형서점 ‘종로서적’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는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먼 곳에서 온 책은 그저 침묵할 뿐이다. 알고 보면 헌책방이나 중고서점에 있는 책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제대로 된 책 주인을 만나지 못해 이리저리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결국엔 허름한 헌책방에 정착했다. 책의 입장에선 서글픈 사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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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mi 2015-04-02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 책을 통해 새 책이나 새 헌 책을 들였을지도 모르니 책 입장에선 그저 돌고 도는 순환의 과정 중에 있는 거 아닐까요? 주인을 만났든 못 만나서 서점에 있든 책 입장에선 책장에서 가만히 잠만 자고 있을 때 가장 슬플 것 같아요. 그리고 <괴테의 프랑스 기행>은 지금 자신을 아끼는 새 주인을 만나서 엄청 기쁠 것 같고요.^^

cyrus 2015-04-03 11:06   좋아요 0 | URL
시중에 구할 수 없는 책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중히 보관하면서 읽어야겠습니다. ^^

새아의서재 2015-04-0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을 만나도 아직, 여전히, 간택되어 읽히기까지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책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는거지요..

cyrus 2015-04-03 11:08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을 사면 바로 읽지 않는 못된 습관이 있어서 지금도 책장에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요. 버릇을 고치기 힘들겠지만 집에 있는 책들도 살펴봐야겠습니다. ^^

에이바 2015-04-0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중고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바코드에 입고일이 적혀 있더라고요. 꽤 오래 서고에서 날 기다려줬구나(?) 싶어 혼자 막 뭉클해졌어요. 집에 와서 깨끗하게 닦고 지우개로 지워서 후후 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cyrus님이 말씀하신 코너는 보지 못했는데 앞으로 눈여겨봐야겠어요.

cyrus 2015-04-03 11:09   좋아요 0 | URL
저도 지우개로 스티커 자국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여러 번 지우개로 지우면 지우개 가루가 많이 나와서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방법입니다. ^^

blanca 2015-04-0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군요. 저는 평소에 무심코 지나친 부분인데. 알라딘 중고 직거래가 책상태가 대부분 참 좋아요. 어떤 분은 사탕도 같이 ㅋㅋ 주셔서 맛나게 먹었어요 님의 책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참 놀랍기도 하고 대단해 보입니다.

cyrus 2015-04-03 11:12   좋아요 0 | URL
작년에 온라인으로 중고 책을 주문했는데 판매자께서 책 한 권 덤으로 얹어 주셨어요. 생각지 못한 책 선물에 기분은 좋았는데, 애석하게도 공짜로 받은 책이 제가 선호하지 않는 주제라서 그냥 책장에 꽂혀 있어요. 이걸 다시 알라딘 중고매장에 팔려고 해도 매입불가 판정을 받은 책이라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보관해야 될 것 같습니다. ^^;;

만병통치약 2015-04-02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책도 돌아다니는군요. 수요예측일까요? 아니면 안 팔리는 책 일단 매장 바꿔보는걸까요? 재미있네요.

cyrus 2015-04-03 11:15   좋아요 0 | URL
중고매장 유통 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습니다. 분당점에 꽤 오랫동안 진열되어 있어서 안 팔리다가 대구점으로 옮겨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비밀을품어요 2015-04-03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오 이렇게 꼼꼼하게 살피시다니! 저도 거끔 스티ㅓ 잘 안 떼어지면 애먹기도 하고 책이 찢어지는 일마저 발생하기도 하는데 ㅠㅠ 이런 꿀팁 주셔서 그조 감사를 ㅠㅠ늘 cyrus 님에게배우는 게 많습니다!

cyrus 2015-04-03 11:17   좋아요 0 | URL
스티커 제거할 때가 신중하게 됩니다. 저도 너무 급한 마음에 스티커를 떼어내다가 찢어지는 일이 많아요. ㅎㅎㅎ

AgalmA 2015-04-0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티커 매장들 다 확인해 보는데...ㅎ.
오자마자 스티커부터 떼요. 깜빡 잊고 오래 두면 안되니까^^
가끔 커버가 달아난 중고책일 때는 아, 정말 속상합니다. 스티커 뗄 때 보풀 생겨서!

cyrus 2015-04-03 11:19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커버가 없는 양장본에 붙어있는 스티커는 정말 조심해서 떼야합니다. 워낙 스티커가 양장본 표지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티커 자국 안 남기고 깨끗하게 제거했던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커버가 없는 책을 살 때 망설여집니다. ^^;;

transient-guest 2015-04-03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스티커는 녹아붙어서 떼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죠. 저는 구곤이라고 오래된 상점 스티커나 유리스티커 자국녹이는 녀석을 천에 살짝 바르고 닦아냅니다.

cyrus 2015-04-03 11:21   좋아요 0 | URL
그런 방법도 있군요. 팁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헌책방이나 중고매장에 자주 드나들게 되니까 스티커 자국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어요.

붉은돼지 2015-04-03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테의 프랑스기행이라는 책도 있군요
이탈리아기행만 있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

cyrus 2015-04-03 11:33   좋아요 0 | URL
기행문이라기보다 종군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괴테가 프랑스 혁명에 참전했던 경험을 쓴 글이거든요. <이탈리아 기행>이 출간되어서 인기가 끌었을 때 출판사에서 이와 비슷한 제목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

해피북 2015-04-03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낫 ㅋ 저두 중고책 구입하면 스티커 떼어내는게 일이구 잘 안떼어질땐 아세톤으로 문질러 닦아내는데 문제는
아세톤 냄새가 상당히 오래간다는거예요ㅋ

그리구 저두 그게 궁금했어요.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 에서 책을 사면 가끔 중고샵 광주나 청주점이란 스티커보면 어떻게 저희집까지 왔나 싶더라구요ㅋ

cyrus 2015-04-03 11: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냄새 때문에 아세톤을 천에 조금 묻혀서 닦습니다. 아세톤이 없으면 선크림으로 닦아요. 냄새가 없고, 문지르면 금방 제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선크림을 너무 많이 바르면 기름기가 남아 있어서 번질번질해져요.

saint236 2015-04-0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을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매입을 안해줬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매입이 되나요?

cyrus 2015-04-03 11:39   좋아요 0 | URL
제가 착각했어요. 야무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중고매장에서 산 책을 다시 파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도서관이나 서점 바코드 스티커가 붙어 있는 책을 매입이 안 되고, 알라딘 스티커가 있는 책은 매입이 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

yamoo 2015-04-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은 알라딘이 다시 재구매를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알라딘에 파느니 회원간에 파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걸 나중에야 안 1인~^^;;

그나저나 알라딘 바코드의 비밀은 사이러스님 때문에 새롭게 알아갑니다~

cyrus 2015-04-03 11:40   좋아요 0 | URL
야무님 덕분에 알라딘 중고로 산 책이 매장에서 매입이 안 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

yamoo 2015-04-03 12:01   좋아요 0 | URL
케바케이지만 대체로 90년대~2000년대 초반 책을 알라딘에서 샀다면 100퍼 알라딘에서 재구매하지 않습니다. 그외 신간은 상관 없어요. 스티커 띠어 가자고 가면 됩니다..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5-04-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사면 새책이든 헌책이든 바코드부터 떼어냅니다. 기분 나쁨.. ㅋㅋㅋㅋㅋ.
전 옛날에 내가 판 책을 알라딘 중고서적 코너에서 만난 적 있습니다.
암매장했는데 살아서 돌아다니는 시체를 목격한 것처럼 충격적이고 민망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죄인 같고... 그렇더군요....

cyrus 2015-04-03 22: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매장에 무조건 사야할 책이 있으면 안 읽는 책은 팔아서 받은 돈으로 사요. 며칠 뒤에 매장에 가면 제가 팔았던 책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면 죄책감이 들어요... ㅎㅎㅎ

만병통치약 2015-04-03 22:30   좋아요 1 | URL
여기도 이모티콘이 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 하면 되집어지도록 웃어다라고 표현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빵터졌습니다.

맥거핀 2015-04-0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요즘에 정책이 바뀌었나요...최근은 아니고 작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 몇 번 다시 되판 경험이 있긴 한데.. 스티커도 떼지 않았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저도 그런 책 꽤 봤어요. 스티커 2개 붙어 있는 책. 이유를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저도 이력이 궁금하신 하군요.

cyrus 2015-04-07 19:34   좋아요 0 | URL
알라딘 중고 책을 되팔아본 적이 없어서 저는 스티커 붙어있어도 파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Jeanette 2015-04-0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촌점을 종종 들르는데 책을 사고 스티커를 뗀 적이 없어 전혀 생각도 못해봤던 점을 알게됐어요! 집에 가면 책 뒷표지의 스티커들을 살펴봐야겠어요

cyrus 2015-04-07 19:35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들보디 중고매장에 자주 찾다보니 별 것 아닌 스티커에도 눈길이 가게 되네요. ^^

간서치 2015-04-0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은 책을 중고로 만났을때의 감격이란... 그리고 한꺼번에 읽지 못하는 것도.. 전에는 몰랐는데 알라딘.덕분에 책을 자주 사고나니까 읽어야할 책들이 많아지고.. 읽어야지 하면사 쳐다만 보는 책들도 많아지고 있어요.. 전 일부러 스티커를 떼지 않는 편... 그 책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서요..

cyrus 2015-04-07 19:36   좋아요 0 | URL
저도 중고책을 맨처음 샀을 때 스티커를 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스티커가 붙어있는 상태가 지저분하게 보여서 사자마자 스티커를 떼어냅니다.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지음 / 한길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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떫고 밍밍한 맛. 홍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홍차는 늘 메뉴판에 구색 맞추기처럼 오르지만, 커피·녹차를 제치고 선택받는 일은 많지 않다. 해외로 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홍차는 영국을 대표하는 음료이다. 미국인들이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맞는다면 영국인들은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원래 차는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서 마시던 것인데 유럽에 전해지면서 찻잎을 발효시킨 홍차가 탄생하고 영국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영국인들은 하루에 7잔 정도의 차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을 쫓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을 시작해서 아침 식사, 오전 일과, 간식을 먹는 오후, 저녁 식사 그리고 식사를 다 하고 나서도 차 한 잔. 마지막으로 잠을 자기 전에도 차를 마신다. 유럽대륙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차가 영국인의 일상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7∼19세기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상당 지역을 포함한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수완 좋은 장사꾼이었던 영국인들은 제국 안에서 전 세계의 음식재료를 사고팔았다. 중국에서 전수받은 차를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대대적으로 재배한 후 고향에 팔았고, 전 세계에 중국과는 또 다른 차 문화를 수출했다. 이런 과정으로 중국 찻잎이 전래 내려온 이래 영국인들은 얼리 티, 브렉퍼스트 티, 애프터눈 티, 하이 티, 애프터디너 티 등으로 시간대별 이름을 붙여 홍차를 마셨다. 특히 애프터눈 티타임은 사교와 휴식을 위한 중요한 일과였다. 영국에서는 귀부인들과 말쑥한 신사들이 모여앉아 평온한 오후 4시쯤 티타임을 갖는 풍경이 흔했다.

 

만약 영국에 찻잎이 상륙하지 않았으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품위 있는 주인공들은 아침 식사로 고기를 뜯으면서 맥주를 마셨을 것이다. 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영국인들의 식수는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어린아이도 술을 마셨다. 그 당시 영국의 하수도 시설은 엉망이라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살균 효과가 있으며 알코올 도수를 낮춘 맥주는 식수대용으로 적절했으나 술을 지나치게 마신 탓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영국인들이 점차 늘어났다. 서민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진(gin)을 마셨다. 그래서 차는 술독에 빠진 영국을 구원해줄 성수(聖水)였다. 차 문화는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파되어 서민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영국의 상류층들 사이엔 차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홍차와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 차를 홀짝이며 편지를 쓰고 사람을 사귀는 일이 중요한 일상의 하나였다. 홍차와 함께하는 영국인들의 일상은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오스틴의 소설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홍차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실 오스틴도 홍차를 사랑했던 영국 여성 중 한 사람이다.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의 지은이는 차를 끔찍이 사랑했던 오스틴이 소설 곳곳에 숨겨둔 18세기 영국의 차 문화를 꼼꼼히 짚어나간다. 차를 준비하고 티포트를 닦는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사랑했던 그녀가 평생을 혼자 살았어도 외롭지 않았을 만큼 풍성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영국인 특유의 차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영국은 일조량이 적고 습하기 때문에 체감기온이 낮다. 영국의 겨울 날씨는 지독하기로 유명하다. 축축하고, 음산하고,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많다. 전반적으로 변덕스러운 날씨가 몇 개월 동안 이어진다. 이러한 날씨는 영국인들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인들은 매우 내성적이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홍차를 마실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선호한다. 그래서 과묵한 영국인들에게 홍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평온한 일상과 함께할 수 있는 절친한 벗이다. 또 습한 날씨로 인해 푹 젖어버려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마르게 해주는 ‘기적의 약’이기도 하다. 카페의 원조 격인 커피하우스의 차 광고를 보면 건강에 좋은 약처럼 소개하면서 판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차 한 모금 입안에 1초 동안 혀를 가볍게 적시는 동안, 홍차와 관련된 영국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홍차 마니아다. 홍차는 영국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생기면서 모여서 토론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민주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차에 붙는 관세 때문에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편전쟁도 홍차로 인한 무역 불균형에서 싹 텄다. 이 정도면 작가 시드니 스미스가 홍차를 격하게 예찬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차를 우리에게 내려주신 신께 감사하라! 차가 없었다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홍차가 영국인의 음료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위로해주는 깊이 있는 맛과 화사함 때문이다. 현실은 힘들어도 홍차를 통해 ‘나는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다’는 느낌을 준달까. 또 누군가 ‘너 힐링해!’ 하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어서 좋다. 홍차를 데우고 기다리는 게 번거로운 작업인데, 안 좋은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 느리게 차를 우리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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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4-0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참 그래요. 서양인들 대체로 커피 문화던데, 영국인들의 그 홍차사랑은...역시 날씨...
이 글 보다가 홍차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인도식 짜이면 더 좋겠지만, 이도 저도 없어 망연;_;)...

cyrus 2015-04-02 17:43   좋아요 1 | URL
오늘같이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따뜻한 차를 마셔야 합니다. ^^

에이바 2015-04-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차는 힐링에 도움을 준다는 말씀 백번 동감합니다.

cyrus 2015-04-02 17:46   좋아요 0 | URL
모든 영국인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차를 끊이는 과정에서부터 차를 음미하면서 마시기까지 이 시간만큼은 영국인들은 내면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었을 겁니다.

해피북 2015-04-0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틴의 홍차 사랑에 대한 글귀가 인상적이였어요^~^
일본 영국 중국등 차 문화가 발달해서 간간히 차마시는 모습 책으로보면 저두 그런 시간과 마음을 가지고 싶은데 차에대해 모르니 어떤 차를골라야할지 고민스럽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티백이아니라 진짜 차를 우려내마시고 싶은데 혹시 추천해주실만한 차있으심 추천 해주세요^~^

cyrus 2015-04-02 17:49   좋아요 0 | URL
오스틴도 천상 여자라서 귀부인처럼 홍차를 즐겨 마셨어요. 홍차를 마실 줄 아는 영국 여자들은 휴대용 도기 세트를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오스틴도 도기 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외출할 때 홍차를 마셨어요. 그런데 제가 홍차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고른 것이라서 홍차의 종류를 잘 몰라요. 사실 이 책 덕분에 홍차가 종류별로 다양하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

cocomi 2015-04-0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제목이 너무 영국/서구 중심적이어서 의심스러웠는데 <초목전쟁>처럼 차와 관련된 아편전쟁과 제국의 식민 역사도 다루어지나 보네요. 자세한 리뷰 감사합니다!^^

cyrus 2015-04-02 17:51   좋아요 0 | URL
차와 관련된 영국의 역사는 잠깐 언급됩니다. 나머진 영국의 차 문화와 음식 문화에 관한 내용이 전반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영국 중심적이에요. 동양의 차 문화와 비교하면서 소개했더라면 책 내용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transient-guest 2015-04-02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그레이슬 즐겨 마십니다.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에 공동부엌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커피와 다양한 차가 구비되어 있어요. 가끔 티백이지만 차를 우려서 우유를 살짝 부어마시면서 나름대로 영국신사의 오후 티타임을 그려봅니다.ㅎㅎ

cyrus 2015-04-02 17:54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홍차를 즐겨 마시는 분이 의외로 많군요. 저는 이제 홍차 입문자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홍차의 종류와 영국 차 문화를 알게 됐어요. 저도 홍차를 마실 수 있는 저만의 티타임을 갖고 싶습니다. ^^

수이 2015-04-0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차는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고 하던데_ 그래서 녹차보다는 역시 홍차가 좋더라구_ 홍차를 땡기게 하는 글이다. 책도 궁금하고_ :)

cyrus 2015-04-02 17:55   좋아요 0 | URL
저는 홍차보다 녹차를 마신 횟수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녹차가 좋아졌어요. 그래서 녹차라떼도 좋아해요.. ㅎㅎㅎ

:Dora 2015-04-03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후기 감사해요!여기북플에 글올리면 알라딘에 자동등록되는 건가요..궁금해서

cyrus 2015-04-03 11:41   좋아요 1 | URL
네, 북플과 알라딘 서재 기능이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북플은 스마트폰 버전의 알라딘 서재인거죠. ^^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5 Vol.1 스켑틱 SKEPTIC 1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힘에서 찾았다면 버트런드 러셀은 ‘회의’에서 출발한다. 러셀이 생각하는 회의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를 말한다. 회의주의(skepticism)는 의심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 용어로도 쓰이지만, 좀 더 엄밀하게는 과학적 회의주의는 엄격한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켑틱(skeptic)은 바로 후자를 말한다. 스켑틱의 범위를 더 좁히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체의학, UFO, 초자연적 현상, 오컬트, 초심리학, 뉴에이지 사상 그리고 사이비과학 등을 부정한다.

 

과학의 세기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상한 것’을 믿는다. 점(占), 기적, 예언, 귀신. 누구나 이것이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생, UFO, 초능력 같은 것은 어떤가. 쉽게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다. 미신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귀신 소동이나 상공에 비행하는 UFO를 목격한 사건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주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믿음이 지나치면 자신과 남의 생활을 변형시켜 고통을 안겨주니까 문제가 된다. 오늘날의 과학은 신비주의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왜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추론과 지식은 무시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각종 초현상과 신비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사실인 양 믿고 있는 것인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합리적인 검증에 여과되지 않은 그릇된 대중의 믿음은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적 근거 없는 특정집단차별 그리고 사이비 종교단체들, 의학적 근거 없는 각종 사이비 의료시술을 받는 행위 따위이다. 선진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러한 비과학적 행위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진실을 왜곡하게 하는 사비이과학과 미신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드디어 국내에도 ‘스켑틱’이 상륙했다. 스켑틱은 미국에서 출발해 영미권에서 수만 명의 독자를 확보한 과학적 회의주의를 표방하는 잡지다. 심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마이클 셔머가 사이비과학과 미신을 검증하기 위해 1997년에 ‘회의주의 협회(The skeptics society)’를 설립했고, 이 단체에서 발행하는 스켑틱의 발행인 겸 편집장을 맡고 있다. 잡지 필진으로는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제레드 다이아몬드 등 이름 있는 석학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 첫 창간호는 커버스토리로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논한다. 또 특집 지면으로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우주론 논쟁을 소개했다.

 

하지만 창간호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면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 바로 마이클 셔머가 쓴 '회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이다. 글의 부제는 '회의주의 선언'. 잘못 알려진 회의주의의 정의를 점검하고, 과학적 회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고대의 회의주의 철학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절대적인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으며, 그러한 지식을 추구하지도 않는 것이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기존의 과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양립할 수 없는 이론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를 신중히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회의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회의주의는 하나의 철학사조라기 보다는 어떤 현상이나 정보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은 과학 지식을 형성하거나, 그 진위나 타당성을 검증하는 원리다. 또한,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절차와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 과학철학에서는 과학을 합리적인 학문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과학적 방법으로 귀납법, 연역법, 가설-연역법 등을 사용했다. 이런 과학적 방법은 객관적인 자료나 절대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논리적 추리인데, 전통적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이 이런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발달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을 주관적이고 이념적인 학문으로 간주한다. 과학적 이론은 당시 사회적 환경이나 가치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만이 살아남고, 과학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발달한다는 논리를 편다. 또한, 과학은 당시에 제기된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법칙과 이론 등이 계속 나타남으로써 발달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과학은 부단히 변화하고 발달한다. 결국, 과학적 회의주의는 진리의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사용할 수 있는 메스다. 사이비 과학으로 병든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 꺼내 들 수 있고, 과학의 오류 가능성을 검증할 때도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제안한 이론과 법칙이 기존의 법칙에 어긋나는지 전개 과정에 오류는 없는지 엄격한 잣대로 비판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교정을 거쳐서 살아남은 지식들만이 학계의 주류 의견으로 인정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과학으로 형성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과학 전체가 올바른 진리의 방향을 향해 진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믿음직한, 체계적인, 참된' 등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침대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과학이 우리 사회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지식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지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토머스 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과학은 패러다임이라는 일종의 '틀' 안에서 정밀성이 향상되고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기디 때문이다. 기존 패러다임이 오류로 판명되었으면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회의주의자라고 해서 상대방이 옹호하는 입장이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에게 향할 비판과 의문 제기에 편견 없이 수렴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식마저도 회의적 태도를 보이고, 오류를 인정하는 철저한 정직성이 요구된다. 과학자도 틀릴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은 자신을 의심과 불확실성, 그리고 무지를 품고 살 수 있다고 고백했다. 특정 신념을 거부하는 회의주의자는 교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폐해가 지속될수록 회의주의를 향한 오해의 인식이 형성된다. 건강한 회의주의자가 되려면 칼 세이건의 충고를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여러분은 여러분만큼 사물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모두 비웃는 사고 습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마이클 셔머 「회의주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194쪽)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다소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진실과 거짓이 제멋대로 섞인 거대한 카오스다. 카오스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이성이다. 끊임없이 회의해야 한다. 스켑틱의 어원은 '생각이 깊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건강한 회의주의자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만들어 나간다. 관련 사실을 확인하면서 모든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이 반대인 사람들과도 대화를 통해 편향된 주장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마이클 셔머는 이성을 사용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한다. 이성이 사라진 인간은 특정 체제에 순응하는 사회의 부속품밖에 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회의주의는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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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3-3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 엄청 궁금했는데, 뭔가 서문 소개만 듣고 끝난 기분입니다; 창간호라서 그런가 기압주는 기분.

cyrus 2015-03-31 22:32   좋아요 1 | URL
원래 창간호 메인 글이 타임머신과 다중우주론을 논하는 내용인데 서평은 회의주의에 관한 내용을 중점으로 썼습니다. 어린이 독자를 위한 글도 따로 있는데 주제가 심령사진에 관한 것인데 읽어볼 만합니다. 벌써 2호도 기대됩니다. ^^
 

 

 

작년 3월 초에 민음사가 직원 6명을 해고했다가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되자 사흘 만에 해고를 철회한 소동이 있었다. 민음사 소동에 대한 논란이 커지게 되면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열악한 출판계 노동 현실의 고질적 문제 또한 수면 위에 떠올랐다. 민음사 같은 대형 출판사에서부터 중소형 출판사까지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일을 일종의 관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이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최근 자음과모음 출판사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고용을 강행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소식을 최초로 알린 유일한 언론 매체는 한국일보다. 그래서인지 작년 민음사 논란에 비하면 잠잠하다. 해당 출판사 직원이 회사의 부당한 고용을 폭로했는데 사실 이 내용만 가지고 자음과모음 출판사가 근로기준법을 어기면서까지 직원들에게 갑질 행세를 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양측 입장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본 뒤에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내어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만 자음과모음 사장과 주자음 대표의 진술이 엇갈린 점으로 보아서 자음과모음에 대한 의혹을 쉽사리 지울 수 없다. 특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계약이 법을 어기는 행위임에도 이를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주자음 대표의 발언은 놀랍다. 작년 민음사 소동으로 출판계 전체가 발칵 뒤집었던 적을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지금도 일부 출판사 안에선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주자음 대표가 저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과 근로기준법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출판사 대표를 맡는다 하더라도 책을 만드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출판사는 좋은 책을 만들지 못한다. 또 출판사가 제대로 운영될 리 만무하다. 출판계 노동에 무지하고 외면하는 출판업계 종사자들이 우리나라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책을 만드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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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5-03-29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자모 그런걸로 유명한 회사예요. 전 왠만하면 안사요.

cyrus 2015-03-30 18:08   좋아요 0 | URL
예전에 있었던 사재기 사건도 기억하고 있어서, 아마도 그때부터 자음과모음 출판사에 나온 책을 사지 않거나 읽지 않았어요.

수이 2015-03-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더 이상 자모 책 안 봐_

cyrus 2015-03-30 18:09   좋아요 0 | URL
독자들이 기피하는 출판사로 쌤앤파커스와 자모가 가장 많을 것 같아요.

만병통치약 2015-03-29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은 이래 저래 엉망이고, 책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는 3D네요. 극히 일부라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cyrus 2015-03-30 18:1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안 좋은 소식만 들리면 정작 좋은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까지 손해를 입게 됩니다. 앞으로도 이런 소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잠자자 2015-03-2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책이 만들어질 환경이 못 되는 군요 ㅠㅠ

cyrus 2015-03-30 18:13   좋아요 0 | URL
네, 책 만드는 환경이 열악하면 책 만드는 사람도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책 안 읽는 사회인데 책 만드는 회사 내부가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책을 만들어도 독서 문화의 기반을 절대로 마련할 수 없습니다.

2015-03-30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5-03-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관행이란 미명하에 모든것이 용서되진 않지요.

cyrus 2015-03-30 18:19   좋아요 0 | URL
자모 이외에도 법을 어기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출판사가 더 있을 거예요. 그런데 주자모 대표의 발언은 나도 죽었으니 너희들도 죽자는 식의 경솔한 발언입니다.

해피북 2015-03-3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꿈이 출판사에서 일해보는거 였는데 ㅠㅜ 이런 글 읽으면 속상하네요 무엇보다도 좋은 책을 만든다고 자부하는 곳들에서 이런 모습 좋지 않네요ㅠㅜ

cyrus 2015-03-30 18:22   좋아요 0 | URL
책 좋아하는 사람이 출판사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고 봅니다. 오래된 문제점을 제대로 바로 잡지 않고, 언론의 도마에 오른다면 책 만드는 일마저 기피할 겁니다.

에이바 2015-03-3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격적이네요. 근로계약서마저도 쓰질 않다니요. 말문이 막힙니다.

cyrus 2015-03-30 21:23   좋아요 0 | URL
언론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출판사 내부에 비상식적인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양물감 2015-03-3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일이 있군요. 책 내용만큼이나 책 만드는 곳도 건강했으면 합니다.

transient-guest 2015-04-02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도 그렇고, 출판업계에 횡횡한 일들 중 하나가 직원이 쓴 글을 버젓이 다른 윗대가리의 글로 둔갑시킨다죠? 예전에 먼 친척이 종교계 출판사에서 일할 때 겪었다고 하네요.
 
인비저블 - 자기 홍보의 시대, 과시적 성공 문화를 거스르는 조용한 영웅들
데이비드 즈와이그 지음, 박슬라 옮김 / 민음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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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네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말하는 것이

도리어 성가시다.
언덕으로 들어가,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들을 것이다,

듣고,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울라브 H. 하우게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무리와 사용하지 않는 무리. 스마트폰이 열어젖힌 광대한 대륙인 소셜 네크워크에는 새로운 정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대륙에 정착한 소셜 네크워크 접속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애플리케이션들을 갈아타면서 정보와 네트워킹의 세계를 탐험한다. 와이파이의 전파를 온몸에 적실 수 있는 곳이라면 그들을 막을 장벽은 아무것도 없다. 인터넷이 소통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 대륙에서 연줄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라는 걸 인증이라도 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고, 시공간 제약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사람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타인의 능력이나 의견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도 쉽게 알 수 없었던 예전에 비해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온갖 SNS를 통해 알릴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상대방에게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는 이른바 ‘홍보 과잉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홍보 과잉 시대 속 소셜 네크워크 접속자는 언덕 꼭대기 위에 올라가 외치는 사람과 같다. 자신에 관한 모든 내용을 상대방이 알아주고 귀 기울여 들어주길 원한다. 페이스북 접속자는 보이지 않는 확성기를 들면서 ‘소통’을 명분으로 업적을 과시한다. 만인에게 공개되는 SNS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더 멋있게 감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수단을 찾게 된다. 이런 반복되는 환경에 절대다수는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자괴감에 시달린다. 마케팅 목적이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친구를 거느리면 읽고, 응대하고, 사진을 올리는 등 홍보와 관리는 상당히 시간을 잡아먹는 피곤한 노동이 된다. 본인 이야기만 있는 ‘페이스북 친구’의 게시물이 성가시게 느껴진다.

 

한때 소셜 네크워크는 다양한 정보 콘텐츠를 공유하면서 인맥을 형성할 수 있는 최적의 블루오션으로 각광받았지만, 지금은 허세스럽고 선동적인 게시물이 넘쳐나는 레드오션이 되었다. 홍보에 눈이 멀어 과도하게 게시물을 올리는 ‘관종’(관심병 종자의 줄임말)이 소셜 네크워크를 지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에 대해 “관심을 바라는 마음의 병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리기도 한다.

 

거기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노르웨이의 시인 하우게는 언덕 꼭대기에 소리치지 말고, 대장간을 짓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데이비드 즈와이그가 강조하는 ‘인비저블(Invisible)’의 정의와 일맥상통하다. 인비저블은 자기 홍보의 소음이 가득한 레드오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안다. 이들은 타인의 인정이나 관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일에 있어서도 지독할 정도로 꼼꼼해 사소한 부분까지 집중해 완벽하게 처리한다. 업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남는 것을 즐길 만큼, 일 자체에서 얻는 만족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정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탁월한 기량을 유지하면서 남들의 시선에 띄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의 결과만을 누리려고 하고 거기까지 가는데 필요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기피하는 반면 인비저블은 막중한 책임을 지며 그것을 즐기는 경향을 가진다.

 

자기 과시와 명성의 시대 속에 조용히 자기 일과 삶을 즐기는 인비저블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기본자세가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기관리를 하지 않은 채 홍보에 집착하면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자기 일에 집중해야 한다. 직업적인 성공과 내적 성취감을 지향하는 인비저블의 모습은 장인 정신과 비슷하다. 하지만 저자가 소개하는 인비저블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소박한 장인으로서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캘빈 클라인의 남성용 제조한 조향사, 124층 높이의 상하이타워를 짓고 있는 수석 구조 공학자, 유엔 최고 동시통역사 등은 모두 대중들로부터 크게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중견·고위급 직업에 해당한다.

 

미국의 빈곤층이나 개발도상국에서 힘겹게 일하는 무명의 노동자들과 달리 인비저블은 대부분 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탁월한 전문성과 실적에 힘입어 관련업계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와 인정,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 (18쪽)

 

저자는 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고위직 전문직 종사자에 국한해서 인비저블의 정의를 규정하여 빈곤층 노동자와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면 빈곤층이나 힘겹게 일하는 무명의 노동자들은 인비저블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고위직 전문직 종사자에 비하면 빈곤층 노동자는 경제적 보상 같은 외적 요인을 누릴 경험이 적다. 경제적 보상에 따른 동기 부여가 이루어져야 업무 성취를 높일 수 있다. 책 속에 나오는 인비저블들도 경제적 보상을 충분하게 받은 상태에서 작업을 수행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타인의 인정을 받는 데 성공했다. 칭찬, 보상 같은 외적 요인을 배제하면서 일을 하는 과정에 내면적 만족감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일을 수행하는 열정을 구실로 더 낮은 급여를 주는 '열정페이'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노동자들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지금, 이 사회에 과연 내면적 만족과 외면적 풍요를 조화시키는 삶, 일을 통해 지속적인 행복과 성취를 얻는 삶이 가능한 지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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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2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개발서를 너무 질색하는..저는 어쩌나요?!^^ 이 편견부터..어째야할텐데...앞에있음 읽으면서..찾아서 사서 부러 보게는 안되는...

붉은돼지 2015-03-29 13:09   좋아요 1 | URL
저도 예전엔 자기개발서 종류는 질색을 했는데 어쩌다 몇 권 읽어보니 괜찮은 것도 있더라구요.
요즘은 자기개발서에 대한 편견은 없어진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한두권 빌려보세요~~^^

cyrus 2015-03-29 16:02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말씀이 맞아요. 저도 자기개발서를 안 읽는 편인데 책의 목차를 직접 확인해서 내용이 마음에 들면 읽어봅니다. 읽다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그냥 읽지 않습니다. 저자의 메시지는 주로 서문이나 책 맨 끝장에 나오는데 자기개발서만큼은 정독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핵심내용만 발췌해서 읽습니다.

[그장소] 2015-03-2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안보는건 아니랍니다.어쩌다 넘겨봐서 맘에들면 읽어요. 편식이 편견보다..더 한 지도...ㅎㅎㅎ

낭만인생 2015-03-2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진짜 인비저블이죠.

cyrus 2015-03-29 18:0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인비저블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인비저블의 정의를 설명하는 과정에 ‘빈곤층’을 언급하면서까지 계층이라는 기준을 내세우는 저자의 발언이 불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