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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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있는데 읽고 싶어요. ebook도 얼른 출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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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최선’을 다하겠단 얘길 들었다. ‘최대’한 힘쓰겠다는 말도, ‘모든 걸 동원’하겠다는 약속도 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그럴듯한 말들은 주로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부사와 형용사, 서술어와 추상명사가 많았지만 시제와 동사, 주어와 고유명사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책임’이란 말이 들려왔다. ‘적폐’라는 말, ‘엄벌’이란 말도 등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들어도 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다 ‘기다려달라’는 청보다 선명하게 들린 건 지도층의 막말과 실언이었다. 그리고 그중 어떤 말은 결국 유족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어버이날, 두 팔을 올려 벌서듯 자식들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정부가 말한 ‘최선’과 ‘최대’의 대상은 국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는 계속해서 명령을 내리고 민심을 달래는 ‘입’이길 자처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이 간절히 원한 건 권력의 ‘귀’였다.

특히 유족들의 입장에서 그랬다. 5월 8일,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에 앉아 이들이 밤새도록 요구한 게 ‘대화’였던 것만 봐도 그랬다. 이날 유족들은 자신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우리가 원하는 건 사과라고, 우리 마음을 좀 읽어달라는 것뿐이라며 영정을 안고 울었다. 이들을 막아선, 아마도 세월호 속 학생들보다 네다섯 살 많을, 고개 숙인 경찰의 팔뚝을 잡고 울었다. 하지만 만 하루도 지나도록 이들이 원했던 ‘대화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개방상태였다. 얼마 전 ‘미개(未開)’라는 말이 문제돼 그 뜻을 찾아봤다.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문화 수준이 낮은’ 이라는 뜻이 먼저 등장했지만 그 아래 ‘열리지 않은’이란 일차적인 뜻도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군가 타인의 고통을 향해 ‘귀를 열지 않을’ 때, 그리고 ‘마음을 열지 않을’ 때 그 상황을 ‘미개’하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답하지 못하다
뜨겁지 않게 이 글을 마칠 수 있을까. 차갑지 않게 지금을 말할 수 있을까. 지난달 16일,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 안에서 한 여고생은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친구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瀉)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러면 이 자리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지난 몇 년 간, 요 며칠간 내가 가까스로 발견한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어쩌면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말이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커커다란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거다. 다만 무언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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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1925년 작 <댈러웨이 부인>은 1차세계대전 이후의 런던의 중심부 웨스트민스터(버킹엄 궁전,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의 상류 지배층 사회를 배경으로 서술된다.

작가는 런던 상류층 사교계의 안주인 노릇을 하는 50대의 중년 부인 클래리싸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남편 라처드 댈러웨이, 딸 엘리자베스, 식민지 인도에 파견된 제국의 관리인 피터 월쉬, 영국 왕실가문의 신사 휘트브래드, 클래리싸가 한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인 쌜리 시튼, 의사 브래드쇼 경, 브래드쇼 경의 환자 중 한 명이자 댈러웨이의 이웃 셉티머스 등)의 복잡한 관계를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서 시점을 변화해가며 단 하루만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어떤 한 사람의 시점(그것이 작가의 시점이든 캐릭터의 시점이든)에서 일관된 내러티브로 소설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 같은 시점의 변화가 시간적, 의식적 흐름을 흐트러뜨리며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당시 대영 제국이라 불리며 세계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크게 떨치고 있던 영제국의 남성적 계급적 식민적 지배담론이 클래리싸 댈러웨이 부인이 정성스레 준비한 디너 파티에서 대화적으로 서술되고 그 속에서 지배 언술의 모순과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재밌는 점은 지배 언술의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해 파티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성적 타자인 클래리싸를 포함한 파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제국의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종전 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어느 날, 평화로워 보이는 런던 시내를 거닐며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안락함에 젖어 디너 파티를 준비하면서 클래리싸는 뭔가 이상한 불안을 감지한다.

개인적으로 그 정체불명의 불안감은 아마도 소설 도입부에서 우연히 마주친 셉타머스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제국적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했던 셉티머스(영국의 문명과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하층 계급으로서 전쟁의 참혹성과 인간 존재의 무의미, 인간성의 파멸 등을 목도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인물)는 제국의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자살은 제국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셉티머스의 자살 소식에 클래리싸는 처음에 거슬렸지만 셉티머스의 행동에 공감하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크게 동요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어떻게 초래됐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이내 안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죽음은 하나의 가십으로서 스쳐 지나갈뿐이며,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그 위기를 드러낸) 제국과 문명의 질서를 계속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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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 <디 아워스>(원작 소설은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국내에서는 <세월>로 번염됨)는 클래리싸의 불안감을 서구 사회의 젠더 규범과 중산층 사회 여성(그리고 성적 소수자)의 성적, 경제적 억압에서 오는 비극을 예감하는 것으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다 좋았지만 소설 결말에서 클래리싸의 태도, 행동에 대한 영화의 해석, 타인의 죽음을 통한 나의 삶의 긍정,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게 하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윤리적 함의도)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 점을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과 연결시킴으로써 울프가 마치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메세지 역시 내겐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명언 ˝You cannot find peace by avoiding life˝는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아니 누구나 좋아하는 명배우 메릴 스트립의 클래리싸 연기도 정말 멋지고 리처드/셉티머스로 분한 에드 해리스와 로라 역의 줄리앤 무어의 소름 돋는 섬세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여자로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영화 속 로라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의 선택 아닌 선택이 가슴 아팠다. 클래리싸의 딸이 그녀를 두고 리처드를 파멸로 몰고간 `괴물`이라고 말하지만, 끔찍하게도 평범했던 그 날, 자살 대신 가족을 떠나기로 한 것은 그래도, 모성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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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5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comi 2015-04-15 07:35   좋아요 0 | URL
ㅎㅎ클래리사라고 써야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국내 번역은 그렇게 된 것 같네요. 클래라씨 자꾸 발음하니 웃기네요.

수이 2015-04-15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댈러웨이 부인 좋아하는 소설인데_ 영화는 어릴 때 좋아하는 배우들 연기 보는 맛에 의미도 모르고 봤어요. 다시 읽고 다시 보고싶게 만드셨어요.

cocomi 2015-04-15 07:57   좋아요 0 | URL
워낙 좋은 작품이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것 같아요.^^ 저도 사실 델러웨이 부인을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뭇했어요. 엄청 아끼는 소설이라서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기억이 안나서 다시 뒤적거리며 적었네요. 전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잘 안보는데 이 영화는 또 보고 싶어요.

AgalmA 2015-04-15 1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댈러웨이 부인-세월-디 아워스 다 봤는데, 디 아워스가 제일 좋았어요. 문제에 대해 가장 이 시대 당면성으로 다가와서 그랬던 거 같아요. cocomi님 말씀처럼, 세 사람의 죽음의 기로와 그 선택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 쉬운 보편적 삶의 의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대 속 소외자로서 자신의 실존 자체(하지만 그들의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죠)를 가장 앓고 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었죠. 우리가 세월호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듯이.
<디 아워스> 필립 그래스 음악까지 완벽했지요^^

cocomi 2015-04-15 14:36   좋아요 1 | URL
음 전 영화가 세 사람의 죽음 또는 자살 시도를 (시대적 문제는 약간씩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생을 긍정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썼다는 면에서 동일선 상에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전 그런 점이 맘에 안들었고) 아갈마님 말씀 듣고 보니 제가 영화를 너무 단순화시킨 걸 수도 있겠네요. 네 세월호의 죽음 역시 우리의 생을 긍정하는 것으로 또는 잠깐 흔들어놓고 지나가는 것으로 스쳐가면 안되는 거죠.
부끄럽지만 영화 음악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영화랑 잘 어울렸다는 기억만ㅜ) 유툽으로 들어봐야겠네요~ 또 한 번 감사감사^^

cyrus 2015-04-15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은 대흥과 참빛나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는데 두 권 다 절판이에요. 솔출판사가 버지니아 울프 전집을 만들고 있어서 좋은데 <세월>을 번역 안 하는지 의문이 들어요. ^^;;

cocomi 2015-04-16 00:43   좋아요 0 | URL
울프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져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등대로>가 가장 유명하니까..민음사도 2권밖에 없더라고요. 펭귄클래식코리아는 <자기만의 방> 하나밖에 없고요. 다른 모더니즘 작품처럼 울프 소설도 유명세에 비해서 많이 안읽히는 것 같아요.

transient-guest 2015-04-16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는 관심은 계속 갖고 있지만 저에게는 좀 어려운 작가같아요. 예전에 영화 The Hours도 잘 이해못하고 봤습니다. -_-:

cocomi 2015-04-16 13:32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경험, 관심과 취향이 다르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여성 작가들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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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1975년 공쿠르 상을 받은 <자기 앞의 생>을 드디어 읽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거 아닐까 내심 걱정하며 첫 책장을 넘겼는데, 웬걸, 장을 거듭할수록 도저히 내가 다 먹어치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잔치상이 차려졌고 나는 크게 감동하여 허겁저겁 감탄하며 주워 먹었더랬다. 밑줄을 좍좍 그어대지 않고 3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을 정도.

 

이 책은 생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있는 유태인 노파 로자 아줌마와 어린 시절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아랍인 창녀/성노동자 엄마를 둔 모하메드(모모)가 다른 창녀의 아이들, 고아들과 함께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겠지만, 작품에는 그 보다 훨씬 복잡한 60, 70년대 당대의 사회정치적 역사와 풍자가 빼곡하게 박혀 있다.

 

몇 세기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20세기 중반에 촉발된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심화된 이슬람-유태인의 대립구도 속에서, 어떤 인간이든 생물이든 하나의 '생'을 부여받고 신과, 종교가, 인간이 세운 법 체제 안에서 살아간다는, 아니 죽어간다는 '자연 법칙'을 (기존의 '정상적인' 방법이나 규범에 의지하지 않고) 거슬러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의, 그리고 다른 다양한 종교/인종/민족/젠더/세대 간의 가족애를 상상해낸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문학작품 중에서 낮은 곳에서의 세계시민주의적(코스모폴리탄) 정신, 유토피아를 가장 완벽하게 체화한 캐릭터인 것 같다.

 

 

나는 항상 개를 품에 안고 다녔는데 그때껏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타잔`이나 `조로`같은 게 생각나기도 했지만, 어딘가에 아무도 갖지 않았던 좋은 이름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쉬페르(최고라는 뜻--옮긴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는데, 언제든지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면 바꿔줄 생각이었다....나는 녀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 나이 벌써 아홉 살쯤이었는데, 그 나이면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색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이다. 뭐 누구를 모욕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로자 아줌마의 집은 아무리 익숙해진다 해도 역시 우울한 곳이었다. 그래서 쉬페르가 감정적으로 내게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나는 녀석에게 멋진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나는 오백 프랑을 받고 쉬페르를 그녀에게 넘겼는데, 그것은 정말 잘 받은 가격이었다....내가 이 말을 하면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로자 아줌마 집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로자 아줌마의 얘기로는,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했다. 포주들이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그런 여자들에게는 삶의 의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종종 시간 여유가 생기거나 몸이 아플 때면 돌아와서 자기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떠나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데 왜 창녀로 등록된 여자들이 자녀를 키울 수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철학자다.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는 새하얀 돛이 여럿 달린 돗배가 한 척 놓여 있었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 배를 허공에 띄워 몸을 싣고는 대양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탄 채 난생 처음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원하기만 하면 나는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타고 혼자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그냥 얌전히 그 자리에 있는 척 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물론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로자 아줌마가 내게 조국이 있다고 확신했으니까 어딘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아줌마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나를 아랍인으로 키우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녀는 또, 어쩌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도 했는데, 사람이 돈 한푼 없이 궁지에 빠지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랍인들과 유태인들이 서로 싸운다고 해서 그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에게 동포애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유태인과 독인인들과의 관계만은 좀 다르다고 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녀에게 덜 먹으려면 살을 빼는 수 밖에 없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혼자뿐인 노친네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그녀는 정해진 법 때문에 자기 뜻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할 적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법이란 지켜야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갚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쉽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겉으로 불로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봐줄만 하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어쨌든 더빙하는 남자가 적절한 말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녹음을 다시 하기 위해 화면을 앞으로 돌려야만 했다....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어졌는데 모든 것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남자는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하느님이 더 쓸 데가 있어서 손을 잡아 일으켜세우는 것처럼.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모하메드야, 오십 년 전에 내가 로자 부인을 만났더라면 결혼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결혼했으면 오십 년 동안 서로 미워하게 됐을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 결혼하면 좋아하게 될 거예요. 미워하고 할 시간이 없잖아요."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롤라 아줌마만큼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세네갈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일을 조물주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건 불공평한 일일뿐더러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녀에게는 입양할 권리조차도 없었다. 여장 남자들은 너무 특이한 존재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저도 불쌍한 사람들(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임--옮긴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예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대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마랗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하밀 할아버지가 오줌을 누러 가는데 부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슬픔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을 테니까.

로자 아줌마는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북아프리카인이건 아랍인이건, 말리 공화국인이건 유태인이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원칙이 없었다. 그녀는 종종, 어느 국민이든 다 장점이 있으므로 그걸 특별히 연구하고 배우는 역사학자란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어디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위조 서류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보장연금도 받지 못했다.

"내가 신원 파악을 잘못했던 거지요. 신원이란 게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까. 세 살짜리 아이에 대해 확실한 게 뭐가 있겠어요....그래요, 저 애는 아랍인이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약간 유태인 애가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당신의 아들이에요!"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아랍인이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최초의 일이구나."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그래, 그래, 우리 모하메드야.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어. 한 여자를 사랑했지. 그 여자 이름이........"
그는 입을 다물었다.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기억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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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04-09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예요^^
지금 프사가 자기앞의생일만큼요!

cocomi 2015-04-09 08:06   좋아요 1 | URL
이렇게 좋은 책을 너무 늦게 알아서 속상하고 지금에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로맹가리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려고요~

고양이라디오 2015-04-09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ㅠㅠ 정말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전 지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앞부분 조금 읽었어요. 장편인줄알았는데 단편소설집이네요ㅠㅋ

cocomi 2015-04-09 08:50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ebook으로 구매했어요! 요즘 바쁜데 자꾸 즐거운 딴짓을 하게 되네요. 같이 읽고 조만간 리뷰 달아요.^^

AgalmA 2015-04-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제 눈의 붙박이장이 움찔움찔ㅜ;
작가란 무엇인가 소설가 인터뷰에 에밀 아자르(로맹가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요. 분명 있었을텐데 우리나라 판에는 안 실린 거 같고...

cocomi 2015-04-09 14:58   좋아요 0 | URL
전 개인적으로 작가 전기나 인터뷰집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작가란 무엇인가>도 들여다 볼 생각을 안했어요. <작가란 무엇인가>가 문학잡지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 모음이라고 해서 검색해보니 The Paris Review 홈페이지에 그간의 작가와의 인터뷰를 주욱 모아놓았네요.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영어로 써진 문학잡지라서 그런지 다행히 불어 인터뷰가 아니라 영어로 진행된 인터뷰라서 관심 있는 사람은 찾아서 읽어볼만 한 것 같아요. 근데 아쉽게도 로맹가리/에밀 아자르는 목록에 없네요.ㅜㅜ
근데 로맹 가리 소설은 좋은데 책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보니 소설 밖에서 작가로서의 로맹 가리는 좀 깨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의 작품만 읽는 편이 좋은 것 같아요 저는..^^

YoonSoo 2016-08-2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정보! 고마와요. 지금 북마크 해놓아야겠어요. http://www.theparisreview.org/interviews
 

이탈리아 영화제작자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1966년 작품으로서 프랑스 식민 정부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해방 운동의 일환이었던 알제리 전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한 영화로서, 국내에서는 <알제리 전투>로 소개되었다.

영화는 알제리 독립군의 편에 서서 식민군을 교묘하게 교란시키는 독립군의 전략(예를 들면 알제리 여성들의 베일을 이용한 폭탄 운반 같은)과 수도 알제리에서 벌어진 도심 속 기릴라 전투 장면과 극적인 독립의 순간을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식민 투쟁과 독립을 향한 목숨을 건 분투, 그리고 그 끝의 승리는 짜릿하지만 정의를 위한 폭력이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반식민 투쟁과 폭력의 정당성에 관해 사유한 많은 글 중에서, 프란츠 파농의 The Wretched of the Earth(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A Dying Colonialism(알제리 혁명 5년)을 같이 읽어볼만 하다.

폭력에 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발터 벤야민의 Reflections(이 중에서 ˝Critique of Violence˝<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를 더불어 읽고, 내친 김에 슬라보예 지젝의 On Violence (<폭력이란 무엇인가>)까지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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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04-08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어디서 볼수 있나요?

cocomi 2015-04-09 00:09   좋아요 0 | URL
전 예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봤는데 유툽에서도 보실 수 있어요. Battle of Algiers로 검색해보세요. 근데 영어자막이에요.

transient-guest 2015-04-09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릴라전술이나 테러가 일종의 약자의 방법론으로 이해되던 시절도 있었죠. 제 생각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거치면서 미디어를 통해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도록 퍼진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9-11이후에는 완전히 게릴라/테러 = 아랍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이 자리잡힌 듯 하네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서구의 역사는 여전히 타자에 대한 침탈과 간섭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cocomi 2015-04-09 05:12   좋아요 0 | URL
폭력과 대항폭력, 비폭력, 반폭력에 관한 문제제기는 2차대전 시기의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의 전체주의(극우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그리고 국제적으로 대규모의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제였던 것 같아요. 트랜지언트님 말씀대로 요즘엔 탈구조주의 영향도 있고 911사건 이후 폭력의 대의 여부와 상관 없이 폭력 자체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진 것 같아요. 세상엔 크고 작은 폭력이 넘쳐나는데 이런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