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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로맹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1975년 공쿠르 상을 받은 <자기 앞의 생>을 드디어 읽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거 아닐까 내심 걱정하며 첫 책장을 넘겼는데, 웬걸, 장을 거듭할수록 도저히 내가 다 먹어치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잔치상이 차려졌고 나는 크게 감동하여 허겁저겁 감탄하며 주워 먹었더랬다. 밑줄을 좍좍 그어대지 않고 3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을 정도.
이 책은 생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있는 유태인 노파 로자 아줌마와 어린 시절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아랍인 창녀/성노동자 엄마를 둔 모하메드(모모)가 다른 창녀의 아이들, 고아들과 함께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겠지만, 작품에는 그 보다 훨씬 복잡한 60, 70년대 당대의 사회정치적 역사와 풍자가 빼곡하게 박혀 있다.
몇 세기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과 20세기 중반에 촉발된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심화된 이슬람-유태인의 대립구도 속에서, 어떤 인간이든 생물이든 하나의 '생'을 부여받고 신과, 종교가, 인간이 세운 법 체제 안에서 살아간다는, 아니 죽어간다는 '자연 법칙'을 (기존의 '정상적인' 방법이나 규범에 의지하지 않고) 거슬러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의, 그리고 다른 다양한 종교/인종/민족/젠더/세대 간의 가족애를 상상해낸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는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문학작품 중에서 낮은 곳에서의 세계시민주의적(코스모폴리탄) 정신, 유토피아를 가장 완벽하게 체화한 캐릭터인 것 같다.
나는 항상 개를 품에 안고 다녔는데 그때껏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타잔`이나 `조로`같은 게 생각나기도 했지만, 어딘가에 아무도 갖지 않았던 좋은 이름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쉬페르(최고라는 뜻--옮긴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는데, 언제든지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면 바꿔줄 생각이었다....나는 녀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남에게 줘버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 나이 벌써 아홉 살쯤이었는데, 그 나이면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색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법이다. 뭐 누구를 모욕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로자 아줌마의 집은 아무리 익숙해진다 해도 역시 우울한 곳이었다. 그래서 쉬페르가 감정적으로 내게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자, 나는 녀석에게 멋진 삶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나는 오백 프랑을 받고 쉬페르를 그녀에게 넘겼는데, 그것은 정말 잘 받은 가격이었다....내가 이 말을 하면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접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로자 아줌마 집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로자 아줌마의 얘기로는,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했다. 포주들이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그런 여자들에게는 삶의 의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종종 시간 여유가 생기거나 몸이 아플 때면 돌아와서 자기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떠나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데 왜 창녀로 등록된 여자들이 자녀를 키울 수 없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철학자다. 카츠 선생님의 뒤쪽 벽난로 위에는 새하얀 돛이 여럿 달린 돗배가 한 척 놓여 있었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 배를 허공에 띄워 몸을 싣고는 대양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탄 채 난생 처음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원하기만 하면 나는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타고 혼자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아무에게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그냥 얌전히 그 자리에 있는 척 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물론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로자 아줌마가 내게 조국이 있다고 확신했으니까 어딘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아줌마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나를 아랍인으로 키우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녀는 또, 어쩌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도 했는데, 사람이 돈 한푼 없이 궁지에 빠지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랍인들과 유태인들이 서로 싸운다고 해서 그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에게 동포애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유태인과 독인인들과의 관계만은 좀 다르다고 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녀에게 덜 먹으려면 살을 빼는 수 밖에 없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혼자뿐인 노친네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그녀는 정해진 법 때문에 자기 뜻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할 적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법이란 지켜야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갚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쉽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겉으로 불로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봐줄만 하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어쨌든 더빙하는 남자가 적절한 말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녹음을 다시 하기 위해 화면을 앞으로 돌려야만 했다....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어졌는데 모든 것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남자는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하느님이 더 쓸 데가 있어서 손을 잡아 일으켜세우는 것처럼.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모하메드야, 오십 년 전에 내가 로자 부인을 만났더라면 결혼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때 결혼했으면 오십 년 동안 서로 미워하게 됐을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 결혼하면 좋아하게 될 거예요. 미워하고 할 시간이 없잖아요."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부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롤라 아줌마만큼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세네갈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일을 조물주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건 불공평한 일일뿐더러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녀에게는 입양할 권리조차도 없었다. 여장 남자들은 너무 특이한 존재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저도 불쌍한 사람들(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임--옮긴이)에 관한 이야기를 쓸 거예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대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 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마랗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하밀 할아버지가 오줌을 누러 가는데 부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슬픔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을 테니까.
로자 아줌마는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북아프리카인이건 아랍인이건, 말리 공화국인이건 유태인이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원칙이 없었다. 그녀는 종종, 어느 국민이든 다 장점이 있으므로 그걸 특별히 연구하고 배우는 역사학자란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어디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위조 서류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보장연금도 받지 못했다.
"내가 신원 파악을 잘못했던 거지요. 신원이란 게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까. 세 살짜리 아이에 대해 확실한 게 뭐가 있겠어요....그래요, 저 애는 아랍인이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약간 유태인 애가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당신의 아들이에요!"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아랍인이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최초의 일이구나."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그래, 그래, 우리 모하메드야.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어. 한 여자를 사랑했지. 그 여자 이름이........" 그는 입을 다물었다.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기억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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