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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지음 / 한길사 / 2014년 12월
평점 :
떫고 밍밍한 맛. 홍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홍차는 늘 메뉴판에 구색 맞추기처럼 오르지만, 커피·녹차를 제치고 선택받는 일은 많지 않다. 해외로 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홍차는 영국을 대표하는 음료이다. 미국인들이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맞는다면 영국인들은 홍차 한 모금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원래 차는 중국과 아시아 지역에서 마시던 것인데 유럽에 전해지면서 찻잎을 발효시킨 홍차가 탄생하고 영국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영국인들은 하루에 7잔 정도의 차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을 쫓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을 시작해서 아침 식사, 오전 일과, 간식을 먹는 오후, 저녁 식사 그리고 식사를 다 하고 나서도 차 한 잔. 마지막으로 잠을 자기 전에도 차를 마신다. 유럽대륙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차가 영국인의 일상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7∼19세기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상당 지역을 포함한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했다. 수완 좋은 장사꾼이었던 영국인들은 제국 안에서 전 세계의 음식재료를 사고팔았다. 중국에서 전수받은 차를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대대적으로 재배한 후 고향에 팔았고, 전 세계에 중국과는 또 다른 차 문화를 수출했다. 이런 과정으로 중국 찻잎이 전래 내려온 이래 영국인들은 얼리 티, 브렉퍼스트 티, 애프터눈 티, 하이 티, 애프터디너 티 등으로 시간대별 이름을 붙여 홍차를 마셨다. 특히 애프터눈 티타임은 사교와 휴식을 위한 중요한 일과였다. 영국에서는 귀부인들과 말쑥한 신사들이 모여앉아 평온한 오후 4시쯤 티타임을 갖는 풍경이 흔했다.
만약 영국에 찻잎이 상륙하지 않았으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품위 있는 주인공들은 아침 식사로 고기를 뜯으면서 맥주를 마셨을 것이다. 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영국인들의 식수는 물이 아니라 술이었다. 어린아이도 술을 마셨다. 그 당시 영국의 하수도 시설은 엉망이라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살균 효과가 있으며 알코올 도수를 낮춘 맥주는 식수대용으로 적절했으나 술을 지나치게 마신 탓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영국인들이 점차 늘어났다. 서민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진(gin)을 마셨다. 그래서 차는 술독에 빠진 영국을 구원해줄 성수(聖水)였다. 차 문화는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파되어 서민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오스틴이 살았던 18세기 영국의 상류층들 사이엔 차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홍차와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 차를 홀짝이며 편지를 쓰고 사람을 사귀는 일이 중요한 일상의 하나였다. 홍차와 함께하는 영국인들의 일상은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오스틴의 소설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홍차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사실 오스틴도 홍차를 사랑했던 영국 여성 중 한 사람이다.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의 지은이는 차를 끔찍이 사랑했던 오스틴이 소설 곳곳에 숨겨둔 18세기 영국의 차 문화를 꼼꼼히 짚어나간다. 차를 준비하고 티포트를 닦는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사랑했던 그녀가 평생을 혼자 살았어도 외롭지 않았을 만큼 풍성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영국인 특유의 차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영국은 일조량이 적고 습하기 때문에 체감기온이 낮다. 영국의 겨울 날씨는 지독하기로 유명하다. 축축하고, 음산하고,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많다. 전반적으로 변덕스러운 날씨가 몇 개월 동안 이어진다. 이러한 날씨는 영국인들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인들은 매우 내성적이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홍차를 마실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선호한다. 그래서 과묵한 영국인들에게 홍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평온한 일상과 함께할 수 있는 절친한 벗이다. 또 습한 날씨로 인해 푹 젖어버려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마르게 해주는 ‘기적의 약’이기도 하다. 카페의 원조 격인 커피하우스의 차 광고를 보면 건강에 좋은 약처럼 소개하면서 판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홍차 한 모금 입안에 1초 동안 혀를 가볍게 적시는 동안, 홍차와 관련된 영국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홍차 마니아다. 홍차는 영국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생기면서 모여서 토론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민주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차에 붙는 관세 때문에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편전쟁도 홍차로 인한 무역 불균형에서 싹 텄다. 이 정도면 작가 시드니 스미스가 홍차를 격하게 예찬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차를 우리에게 내려주신 신께 감사하라! 차가 없었다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홍차가 영국인의 음료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위로해주는 깊이 있는 맛과 화사함 때문이다. 현실은 힘들어도 홍차를 통해 ‘나는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다’는 느낌을 준달까. 또 누군가 ‘너 힐링해!’ 하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차를 마시면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어서 좋다. 홍차를 데우고 기다리는 게 번거로운 작업인데, 안 좋은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 느리게 차를 우리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