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를 잘 모르겠다. 왜 고단한 삶을 기어코 살아가려고 하는 것인지.
얼마전에 우연히 체리파이 만들었다는 이웃 블로거의 글을 보고 어? 파이를 너무 뚝딱 만드는데? 싶어 검색해보니, 이 파이 만들기가 별로 어려워보이질 않는 거다. 오, 구래? 그러면 나도 한 번?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게 목요일이었나 금요일이엇나, 당장 주말에 만들고 싶었지만 내겐 파이팬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다음주에 올테니, 그렇다면 다음주로 미루자, 하였었는데,
토요일인 어제 여동생네 집에 가서 얘기 했더니 언니, 파이팬 내가 줄게, 저울도 줄게, 해가지고 내가 파이팬과 저울을 가지고 오늘 아침 집에 온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가만 있으면 되는데, 왜 기어코 오늘 만들고 싶어지는지. 그건 냉장고에 먹다 남은 체리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좋았어, 이거 먹지 말고 파이로 만들자! 하다가, 레서피 찾아보니 이정도의 체리로는 어림도 없는거라. 그래서 저녁 먹고 시장에 가서 체리를 한 바구니 사왔다. 아, 나여.. 왜..
이런 나를 보고 엄마와 아빠는 계속 말리셨다. 제발 하지마, 쉬어, 왜 그러는거야.. 그렇지만 나는 '해볼거야, 해보고 싶어!' 이렇게 되어버렸고, 나는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걸 하기 전까지 좀 사로잡히는 사람이라, 그렇게 체리파이 만들기에 도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체리의 씨를 빼야 한다. 칼로 반 갈라서 씨를 빼는게 아니라, 체리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씨를 빼줘야 한다. 내가 참고한 유튭 영상에서는 젓가락으로 체리 뒤를 쏙 밀어주니 앞으로 쏙 씨가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래서 좋아쒀! 하고 따라하는데 왜때문에 나는 빨간 체릿물이 뚝뚞 떨어져서 피를 흘리는지.. 피흘리는 체리를 씨 빼고 또 씨 빼고.. 엄마가 부엌을 도대체 왜 그렇게 난장판으로 만드는 거냐고.. 엄마, 다 하고 내가 치울게, 하였는데, 씽크대도 난리 난리
내 팔도 난리 난리
신이시여, 저에게 베이킹은 허락되지 않은거예염? 왜염?
자, 어쨌든 체리의 씨를 빼놓고 쉐킷쉐킷 반죽을 한다.
저울도 있으니 제법 그람수를 잘 맞출 수 있었는데, 앗, 물이 초큼 더 들어갔네? 뭐 별 상관없겠지, 하다가 반죽하다보니 질어서 다시 밀가루를 더 넣고, 더 넣고.. 저울 왜땜시 필요한 부분?
이제 반죽을 휴지 시켜놓고 그동안 체리 필링을 만들기 위해 체리를 볶볶 설탕 넣고 볶볶
레서피에서 필링에 레몬즙을 넣으라고 했지만, 다른 레서피 보니 레몬즙 혹은 계피가루 라고 되어있어서 나는 계피가루를 넣었다. 그런데 계피 가루는 얼만큼을 넣어야 할까? 걍 때려넣었다.
휴지된 반죽을 꺼내 파이팬에 깔고 필링을 넣는다.
오오 제법 그럴싸하쥬?
이 위에 반죽으로 뚜껑을 덮고 구멍을 뚫어주고 계란 노른자를 촵촵 발라준다.
이렇게 오븐안에 넣어두고 180도씨, 35분간 구워준다. 쨔잔~
자, 그럴듯해 보이지만 일단 실패의 결과물로 진행됐다. 사이드 마무리를 잘 해줘야 되는거구나, 영상 속에서 꾹꾹 눌러가며 했던 일들이 다 이유가 있는 거였어. 나는 사이드가 잘 마무리되어 있질 못해 필링이 겉으로 다 새어나오더라. 그래서 오븐의 유리판이 필링으로 끈적해졌다.
파이를 어느 정도 식히고난 후 먹으라고 했지만, 그 어느정도는 어느 정도 일까? 나는 엄마랑 잘라서 맛을 보기로 한다.
빵부분은 너무 적고 필링은 엄청나게 많은 너무나 고퀄의 체리파이 되시겠다.
이게 처음 잘라 먹으면 이렇게 필링이 쥬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걸쭉해지는가 보더라.
캐나다의 한 유튜버는 블루베리 파이를 만들어서는 '내일 먹으면 더 맛있다'고 했다. 나도 내일 먹으면 더 맛있으려나. 남은 건 그릇에 담아두기로 한다.
엄마의 총평은 '치아바타가 더 맛있다' 이고 아빠는 '너무 달다'고 했다.
나는 일단 이것을 딱히 성공이라고 보지 않는게,
사이드 마무리가 안돼 필링이 다 샜고
시나몬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래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만들어봤기에 후회는 없는데, 엄마가 '만족하니?' 이래서 '응, 꼭 해보고 싶었어' 라고 할만큼 한 게 좋긴 했지만, 너무나 피곤하고 ㅋㅋ 아니, 오븐의 유리 쟁반..에 필링이 다 넘쳤으니까 씻으려고 뜨거울 때 물에 넣으면 필링 굳지 않고 잘 씻기겠지, 하고 싱크대로 가져와 찬물 틀어두는 순간, 유리 쟁반 쩍- 하고 여러갈래로 갈라져버렸...
네?
하아.
깨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만족스럽지 못한 맛의 체리파이로도 살짝 고단했는데, 오븐 안 유리 쟁반(이거 이름 있을 것 같은데) 깨져버렷.. 나는 이걸 다시 구입하기 전까지 이제 아무것도 못하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이제 그만 하라고 깨진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게 쩍- 하는 소리 내며 깨지는 순간 갑자기 나에게 고단함이 쓰나미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입밖으로
아 고단하다
아 고단해
하고 연달아 내뱉자 엄마도 '너 고단할까봐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다'고 했고, 아빠도 '고단하겠다 끝에 그렇게 돼서' 라고 하셨다. 나는 갑자기 피로가 넘나 몰려와버려... 하 쉬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내가 반골기질이 있어서 운명에 자꾸 맞서는 사람인 것 같다.
내 운명은 베이킹 하지 않을 운명, 요리 하지 않을 운명인데, 자꾸만 싫은데? 해볼건데? 너랑 싸울건데? 이러면서 베이킹 도전하니까,
아니 진짜 다락방 이 건방진 게 말을 안들어! 하고 나의 운명이 오븐의 유리 쟁반을 깨버린 게 아닌가.
흑흑.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깨진 쟁반 앞에 두고 망연자실 서있자 엄마가 '들어가, 엄마가 치울게. 들어가서 누워' 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 나 눕고 싶어 이러고 들어와버렸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하아-
아 중간 중간 설거지는 다 해뒀다. 남은 건 깨진 유리 쟁반 뿐.. 하아-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흥, 내가 포기할 줄 아냐?
다음엔 블루베리 파이에 도전하게쒀!!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반항아닷!!!!
아 고단하다.
나에게 고단함을 안겨주는 건 바로 누구?
나다.
나, 바로 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