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 주어와 동사가 온전히 갖추어진 문장으로 말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언어는 성장할 수 없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장인데 조금 더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낑낑거리는 사람에게는 "쉽게 생각하세요. 쉬운 문장들이 바로바로 나올 수 있는 실력이 돼야 복잡한 문장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자주 이처럼 말했다.
"이 수업에서는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실수의 권리는 초보에게만 있습니다. 그 권리를 마음껏 누리세요. 언어에는 왕도가 없어요. 최대한 많이 실수하며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실수의 권리를 누리라니, 왕초보의 설움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탈리아어에 있어서 3세 미만의 어린이인 것이다. 무엇을 해도 내 잘못이 아닌 시기, 조금 있으면 훅 지나갈, 미숙해도 좋은 잠깐의 시기. - P92

"인텐시브 수업을 들으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같은 내용이라도 너무 짧은 시간에 진도를 빼면 절대 오래 남지 않습니다. 그게 언어예요. 언어는 시간을 들여야만 실력이 늘어요. 내가 본 인텐시브 학생들이 대부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빨리 배우면 빨리 잊어버릴 수밖에 없어요."
순간 머릿속에 불이 하나 켜지는 기분이었다. 랑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 지난 학기 도무지내 이탈리아어가 늘지 않던 이유와 이제 조금씩 편해진이유가 그 안에 있었다. 시간이었다. 20대 내내 프랑스어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해 온 나는 잘 알고 있다. 언어는 운전면허 시험처럼 속성 마스터가 가능한 공부가 아니다. 하나의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헤엄쳐가는 일과 같다. 지속해서 이탈리아어를 감각하고 생각하 - P99

며 지낸 지난여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느리고 지루하게 흐르던 그 시간 동안 조금씩 이탈리아어가 내 몸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 P100

지난 2주간 들리지 않는 소리와 쉽게 나오지 않는 단어들에 절망하며 보냈는데,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니 사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말들을 잘 듣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해서 될까?‘ 하며 깊은 한숨을 쉬던 볼로냐의 새벽들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아 한없이 작아지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시간에도 노력의 흔적들은 소복소복 쌓여 갔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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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3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료나 스파게피 먹고 싶네요. 저자분은 이탈리아어를 배우셨던가 봐요. 이탈리아어 멋지죠~~ 오페라의 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1-31 10:02   좋아요 1 | URL
이 분은 한국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미친듯이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프랑스 남자 만나 결혼해 일하면서 사는데 그러다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싶어지는 바람에 일주일(?) 볼료나 어학연수도 다녀오십니다. ㅎㅎ 그러면서 당연히 오페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요. ㅋ ㅑ ~ 취미는 있어야 하는것 같습니다.
 

십자군전쟁은 교황의 주도하에 서유럽 기독교세력이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이슬람세계를 공격한 종교전쟁이므로 당연히 왕성한 교세와 강력한 교권을 전제로 했다. 말하자면 십자군전쟁을 위해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힘도 요구되었지만 ‘십자군‘ 전쟁을 발의하고 추진하는 데 요청되는 광범위한 ‘종교적‘ 열정과 강력한 ‘종교적‘ 지도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 P8

교권(權)과 속권(俗權)의 보편적 제휴 또한 교권이 승리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중세 유럽의 한 특징은 게르만국가와 기독교의 제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세를 ‘로마적 요소와 게르만족 요소의 결합‘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중세사회는 기독교 성직자와 게르만족 전사(戰士)들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사회였다. 중세의 지배계급은 고위 성직자와 귀족이었다. - P13

그레고리우스 7세는 부르군드의 윌리엄백(伯)에게 "로마교회의 자유를 방어할 군사적 힘과 필요하다면 성베드로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리로 보내주려는 그대의 사려와 열망을 요망합니다"라는 편지를 썼다(1074. 2). 교황은 같은 해 3월의 한 연설에서도 이교도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제국을 구원할 것을 호소했다. 동년 12월에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교황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들에 의해 전에 없이 매일 죽어가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기독교도와 성지를 구하기 위해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 P15

이슬람 측이 소아시아, 시칠리아, 이베리아반도 등 지중해세계를 장악하고 기독교세계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그레고리우스7세는 성지탈환을 위한 성전이야말로 기독교계의 숙원인 동.서교회 재통합을 구현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 P16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1099)가 십자군운동을 발의한데에는 그의 야망도 한 몫을 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상을 계승했다고 자부한 우르바누스는 십자군운동을 통해 기독교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특히 교황청의 과세권을기독교세계 전체로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그것을 로마교회와 결별한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가톨릭교회 아래로 통합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 P16

특히 기독교세계의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은 교황의 십자군운동 발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지하듯이 로마제국의 동·서 로마제국으로의 분열(395), 서로마제국의 멸망(476), 동로마(비잔틴제국의 로마 계승권 주장 등과 함께 로마교회와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교회 사이의 기독교세계 주도권 다툼이 격렬해지고 거기에 필리오케논쟁과 성상(聖像)파괴문제 등 신학상의 문제까지 겹쳐 로마교회와 비잔티움교회는 1054년에 서로 상대 교회를 파문하고 갈라섰다. 그레고리우스 7세도 기독교세계의 재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우르바누스 또한 동·서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하나의 기독교세계를 만들려 했다. - P17

결국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투르크족은 니케이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이슬람제국을 창건했다. 그리고 1092년에 투르크족 토후들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도 자신들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타의 아바스조 영역 - P20

에도 진출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셀주크 투르크족은 유럽 기독교도들의 성지순례와 동방무역을 방해하는가 하면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을박해했다. 투르크족의 진출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 기독교세계 전체를 움직이게 할 일을 벌여 자신의 웅지를 펴려던우르바누스 2세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 P21

교황의 설교에 감동한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외쳤다. 많은 지원자들은 엄숙하고 자랑스럽게 서약하고 십자가를 자신들의 옷에 붙였다.11) 교황은 이어 프랑스 각지를 순회하면서 십자군전쟁의 당위성을 설파했고, 많은 열성적 설교자들도 곳곳을 누비면서 십자군으로 출전할 것을 독려했다. - P22

십자군전쟁에 나선 유럽인들은 물론 때와 장소를 가리지않고 신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기독교도들이었다. - P23

십자군은 위로는 군주와 영주로부터 아래로는 농민과 걸식부랑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고, 남성은 물론 여성도 원정대에 참가했다. 광의로 볼 때 십자군전사(戰士)는 어깨나 가슴에 ‘십자장‘을 단 사람들을 의미했지만- 십자군은 싸우려나갈 때에는 십자장(十章)을 가슴에 붙이고 귀향길에는 두어깨 중간의 등에 십자장을 붙인다고 했는데 이는 「누가복음」14:27의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는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를 연상케 한다- 전사들만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 P26

그처럼 가난과 압박의 일상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실제의 예루살렘과 천상의 예루살렘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피에르같은 인사들의 달콤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꿀과 젖이 흐르는 팔레스타인‘이란 환상에 젖어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실상 풍요와는 먼 거리에 있었지만 민중십자군은 동방을 꿈의 땅으로, 나아가 자신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신천지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민중십자군의 과도한 기대는 환멸로 끝났다. 제2회 십자군 이후 유럽 농촌사회에서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 P29

제4회 이후의 십자군은 후기 십자군으로 불리는데, 후기 십자군은 몇 가지 점에서 전기 십자군과 달랐다. 즉,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가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었고, 이전에 비해 세속적, 경제적 동기가 더 강하게 작용했으며, 교황청이 보다 적극적으로 십자군을 주도했던 것이다.
사실 12세기말 이후 십자군정신은 크게 약화되었다. 십자군의 연이은 실패는 일부 유럽인들로 하여금 "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P43

몽골족에게 결정적 패배를 안겨준 1260년의 나불루스전투는 마메루크조와 이슬람교에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마메루크조는 생존할 수 있었고, 이슬람교또한 계속하여 동지중해세계에서 번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서유럽이 바라던 대로 몽골이 기독교세계로 개종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기독교보다 이슬람교를 더 강력한 종교로 여긴 몽골족은 오히려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 P54

한편 루이 9세가 병사한 사실을 인지한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아크레를 점령했다. 그에 앞서 교황 그레고리 10세가 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호소했지만 그는 자신의 호소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타계했다. 뒤이어 티레, 베이루트, 하이파, 아틀리트 등도 이슬람 측에 함락되었다. 그때 이슬람교도들의 보복으로 6만여 명의 기독교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후에도 지역 차원의 소규모 원정군이 조직되기는 했지만 제8회 십자군을 끝으로 중세의 십자군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 P55

사실 십자군전쟁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사가들은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했던 것(오합지졸의 농민십자군이 더욱 심했다),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의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것, 중동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데다 십자군의 성격마저 변화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는다. - P57

은자(隱)피에르가 십자군을 모병한 모습은 십자군이 성공하지 못한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십자군운동이 발의된 클레르몽 종교회의 후 십자군전사들을 모으는 데 적지 않게 이바지한 사람은 피에르였는데, 맨발에 헙수룩한 옷차림을 한그 노인은 프랑스와 독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지한 농노들과 그들의 아들 등 기율 없는 군중을 모았다.
대부분 기아선상을 넘나들던 농민십자군들은 피에르가 우유와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해줄 것으로 믿었다. - P57

요컨대 로마교회나 십자군전사들은 중동에 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중동에 대해 심각한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사실상 외부와 단절된 세계였다. 기독교 또한 유럽의 폐쇄성에 이바지했다. - P62

유럽 기독교도들의 십자군운동은 성지회복이라는 당초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업적 성격의 전쟁으로 변질되어 십자군이란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었지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서히 작용했지만 그것의 영향은 결국 중세의 문을 닫고 근대의 문을 열게 했다. 사가들이 십자군운동을 정점에 도달한 중세 유럽의 소산물이었으되 중세를 붕괴의 길로 이끈 운동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 P65

십자군운동은 참전한 봉건귀족들로 하여금 장기간 영지를 떠나 있게 함으로써 왕권의 강화와 정치적 안정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우리는 국왕들이 십자군원정 전비(戰) 마련을 위해 직접 세금을 징수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국왕들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중산층은 물론 귀족에게도 세금을 징수하는 선례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한 것은 십자군전쟁이었다. - P69

하지만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군주들이 제한적이나마 귀족에게도 과세할 수 있게 된 것, 상업의 부활로 화폐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 봉건귀족의 경제적·정치적 지위가 동요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민족주의적 의식이 보다 강화된 것 등을 고려할 때 십자군운동이 중세 말의 정치적 발전에 끼친 영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70

무엇보다도 십자군의 연이은 실패가 교황의 권위에 악영향을 끼쳤다. 교황이 신의 가호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십자군전사들은 줄곧 가혹한 시련과 죽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십자군의 동기도 종교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위에서 지적했지만 유럽인들은 점차 성지와 동방세계에 대한 환상에서도 깨어났다. 시야가 넓어진 일부 십자군전사들은 교회가 강조한것과 달리 아랍 무슬림들이 야만적이고 야수적인 사람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패가 거듭되면서 교황과 성직자들의 무능과 허상은 보다 명확히 드러난 반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보다 현실적으로 사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 P71

이슬람교도에 대한 십자군의 필요 이상의 만행은 그들의 기독교와 기독교세계에 대한 적대의식과 중오감을 크게 증대시켰다. - P73

둘째, 십자군은 투르크족 무슬림들로 하여금 결국 성전의식으로 무장하게 했고,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도에 대한 관용을 포기하게 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랍 무슬림들은 지중해세계 도처에서 오랫동안 기독교세계와 싸웠지만 기독교도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하지만 아랍과 투르크족 무슬림들은 십자군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거기다 아랍과 투르크족 무슬림 모두 십자군의 지나친 만행에 분노했다. 십자군전쟁을 겪으면서 무슬림들은 기독교도에 대한 이전의 관용적 태도를 버렸다. 그리하여 십자군전쟁 이후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는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동지중해세계는 두 세계의 첨예한 대립의 무대로 변했다. - P77

봉건적 질서와 기독교정신의 결합물로 평가받는 십자군운동이야말로 기독교정신이 낳은 것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꿀과 젖이 흐르는‘ 팔레스타인이란 환상에 자극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십자군은 본질적으로 신앙심이 불러온 원정이었다. 십자군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농민십자군과 소년소녀십자군은 종교적 열정이 십자군운동의 추진력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세월과 더불어 십자군에도 물질주의의 때가 끼어갔지만 적어도 초기의 십자군에는 상업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십자군은 또한 기사도(道)의 소산물이기도 했다. 십자군의 지휘부를 구성한 기사들 및 성묘기사단과 병원기사단 기사들이 입증해주지만,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들은 신앙심에서나 용맹성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비잔티움을 약탈한 제4회 십자군전사 등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기사들은 중세의 기사도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90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원정은, 유럽 기독교세계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지중해를 되찾게 했지만, 기독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증오심을 증대시켰다. 전술했듯이 원래 무슬림은 그들이 정복한 땅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에게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전쟁 동안 무슬림의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 두 종교는 화해는 커녕 서로 상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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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헤더 더글러스 멜버른 대학)교수님은 특히 수년간 비치명적 목졸림에대해서 연구해왔다.

비치명적 목졸림은 피해자가 미래에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는매우 위험한 요소다. 특히 가정폭력 및 친밀한 관계 폭력에서 이 부분을 눈여겨볼필요가 있다. 학대받는 여성들이 이러한 피해에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이것이 얼 - P49

마나 많은 피해를 초래하는지 피해자 스스로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목을 조르는 행위는 산소의 흐름을 방해하여 신경손상을 일으킨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정기적으로 목이 졸리거나 압박을 받는 경우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경 손상이 축적된다. 신체적 후유증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심리적·정서적 상해를 동반한다. 따라서 피해자뿐 아니라, 수사 당국, 경찰, 의료진 등 관련기관 모두가 이러한 행동의 위험성을 간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P49

국가 차원에서 가정폭력, 친밀한 관계폭력을 심각하게 다뤄야 할 이유는무엇인가?

너무나 명백하다. 국민이 죽어가고 있지 않나. 국민이 죽는 일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하게 국가 책임이다.
테러 공격에 국가는 늘 대비하고 이에 대해 엄중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데가정 내 혹은 친밀한 관계 폭력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더라도 일생을 거의 감옥에 갇힌 듯한 상태에 놓인 채 학대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응하는 것은 국민의 생존을 지키고 안전한 삶을 보장해야 하는, 매우 기본적이고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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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헐의 회화는 비밍중적이라는 점에서도 다른 매너리즘 예술과 공통된다. 이 점 역시, 우리가 그의 양식 전체를 건강하고 소박하며 분열되지 않은 자연주의로 간주하는 것이 그렇듯 잘못 이해되어온 점이다. 사람들은 이 화가를 ‘농민 브뤼헐’이라고 불렀고,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그의 예술이 곧 서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실제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예술에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모사한다든가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묘사하는 것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사회계층, 말하자면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억압되어 있거나 상승하려는 계층은 그들이 목적으로 설정한 생활상태의 묘사를 보기 원하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오려하는 현재 생활상태의 묘사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소박한 생활에 대해 감상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런 생활을 넘어서 있는 사람들이기 쉽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에도 그러하고 16세기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의 노동자나 소시민이 영화관에서 그들 자신의 협소한 생활환경이 아닌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싶어하고, 19세기의 노동자연극이 민중극장이 아닌 대도시의 상류층이 애용하던 극장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듯이, 브뤼헐의 예술 역시 농민들을위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계층, 아무튼 농민이 아닌 도시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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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돼. 세상 모든 일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 류타. 넌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행동할 거야. 그리고 거기서 뭔가가 만들어질 테고. 물론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도 받아들이는 힘을 길러야 한단다. 안다는 건 그런 거야. 모르고 있으면 배울 수 없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어."
히로키 씨는 "지식은 인생 최고의 무기란다"라고 강조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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