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겠다고 할 때까지 끝없이 칭찬을 늘어놓을 그에게 에쓰코는 아낌없이 줘버리고 야키치 앞으로 도착한 전보를 챙겨 돌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부로에게 겨우 두 켤레의 양말을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졸라대는 배달부에게 볼펜을 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그럴 수밖에 없지.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는 일 따위는쉽게 할 수 있어.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 P97

사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쓰코는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대답이 없다. 침묵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면 의미를 띠게 된다. 의미를 띠게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에쓰코에게는 버거웠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오히려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 쪽이 아니었을까…? 에쓰코는 밀짚모자 밑에서 고집스럽게 그림자놀이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부로의 옆모습을 가만히 엿보았다.
"너니?"
"그런 것 같아요." - P162

에쓰코의 정신적 고통은 범람한 강물이 논과밭을 적시듯 서서히 육체의 영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통증은 정신이 행하는 역할극을 더 이상 감당할 수없을 때 발신되는 위험 신호에 다름 아니었다.
‘괜찮나요? 배가 침몰 직전이에요. 아직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건가요? 당신은 정신의 배를 너무 혹사시켰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을 스스로 상실한 채이 지경에 이른 거예요. 이젠 육체의 힘으로만 바다를헤엄쳐 나가야 합니다. 그때 당신 앞에 놓인 것은 죽음뿐일 거예요. 그래도 괜찮나요?‘ - P176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온 집안이 에쓰코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 녀석만 모르고있는 것이다.‘ - P205

사부로와 나란히 걷다가 인적 없는 자동차 도로에 닿았을 때 에쓰코가 상상했던 오사카 한복판을 지금 야키치와 나란히 걷고 있다. 인생은 어떠한 엇갈림으로 인해종종 이런 기묘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 P211

에쓰코는 이 마지막 하룻밤 동안 형식상의 것일지라도 비밀을 갖고 싶었다. 사부로와의 사이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비밀을 갖고 싶었다. 사부로와 비밀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 P221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또! 또 시작이다.
얼핏 유용해 보이는 이 단어는 여전히 그에겐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평온한 삶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불필요한 틀을 끼우는, 잉여의 개념으로만 느껴졌다. 이 단어가 생활필수품으로 존재하고,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이 단어에 생사를 걸수있는, 그런 삶이 영위되는 공간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지고 있기는커녕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 P230

사부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따라 행동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 P231

여태까지 귀찮고 성가신 응대에 지쳐 있는 동안 사부로가 가끔씩 눈을 치뜨고 바라본 에쓰코는 여자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인 괴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신의 살덩어리,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고, 기뻐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 노골적인 신경조직의 덩어리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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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7-16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는 일 따위는 쉽게 할 수 있어‘라니 ... 무릎을 또 탁 치고 갑니다 이거 잠자냥님이 쓰신 글 보고 장바구니에 넣어놨었는데 다락방님도 읽고 계시는 군요! 불나방같은 사랑 이야기 달자는 또 읽지 않을 수가 없어..!

다락방 2024-07-17 07:55   좋아요 2 | URL
에쓰코라는 여주인공이 집에서 일하는 하인을 짝사랑하는데 그 남자가 양말 없이 다녀서 양말을 사거든요. 그런데 주기까지 엄청 망설여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줄 수 있을까, 하고요. 간신히 주는데 성공했는데 집에 찾아오는 귀찮게 이것저것 졸라대는 우체부에게 볼펜을 쉽게 주면서 생각하는 장면이에요. 정말 그렇지요. 감정 없으면 말이나 행동이 고민 없이 나오잖아요. 그렇지만 사랑을 하면, 특히나 짝사랑.. 을 하면 모든 말과 행동에 의미 부여가 되어서 힘이 들지요. 하아- 달자 님이 이 책을 읽게 되신다면 또 얼마나 근사한 감상을 적어주실 지 기대됩니다!!

blanca 2024-07-17 0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문장 너무 좋아서 줄 그었어요.

다락방 2024-07-17 10:10   좋아요 1 | URL
네,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갈등을 너무 잘 잡아준 것 같아요!!

잠자냥 2024-07-17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양말 주고 싶은데 못 준 사람 있나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7-17 12:41   좋아요 0 | URL
저도 짝사랑을 좀 알지요. 지금은 안한 지 오래되었지만..(먼 산)

구름모모 2024-07-18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문장이 많네요. 눈길이 가네요.

다락방 2024-07-18 07:56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문장이 많더라고요.
 

이런 일을 벌이게 된 이유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멜린다는 자신의 사랑에 고무되어 사랑과 행복을 하사하려 했지만, 그 대상이 유니스 파치먼이었다는 사실은 비극이었다. - P170

그 일이 끝나자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커버데일 가족이라면 오후 한 시에 먹는 식사를 점심 식사라고 불렀을 테지만. 그들은 자신의 가정부가 대낮에 속을 든든하게 해 주는 뜨거운 음식을 얼마나 절실하게 먹고 싶어 했는지 절대로 알지 못했으리라. 유니스는 냉동실에서 커다란 스테이크 한 조각을 꺼내 기름에 구웠다(석쇠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깍지콩과 당근, 파스닙(배추 뿌리같이 생긴 채소)을 삶는 동안 감자도 튀겼다. 뒤이어 애플 커스터드 크림을 얹은 애플 푸딩에 비스킷과 치즈, 진한 홍차도 곁들였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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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진단을 받기 전 84kg이던 수현씨의 몸무게는 현재69kg으로 줄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몸 컨디션을 달력에 매일꼼꼼히 기록한다.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삼성 휴대폰만 생각하지,
만드는 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자들의 환경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아들의 사례로 이 일이 위험할 수 있는 작업이고, 일·학습병행제도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 P45

지난 3개월 동안 일어난 교제살인 사건만8건, 숨진 피해자는 9명(위 <그림> 참조)이다. 열흘에 한 명씩 죽은 셈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추려도 이 정도다. 16년 전인 2009년부터 해마다 언론에 보도된 교제살인을 집계해온 여성 인권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로부터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38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11명이다. 최소 2.6일마다 여성이 살해당하고, 1.2일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는 셈이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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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7-0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로부터 살해라니..... 진짜 친밀한 적이네요... 으휴...

다락방 2024-07-02 14:33   좋아요 0 | URL
2.6일마다 살해당하고 1.2일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대요. 아 진짜 미치겠네요. ㅠㅠ

청아 2024-07-0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들이 전 연령에 걸쳐서 이렇게 살해당하고 죽을 위기를 넘기고 또 강간당하는데 손가락으로 남성 혐오했다고 가끔 뉴스에 올라오는 거 보면 참...이제 분노를 넘어 웃음 밖에 안나옵니다. 그리고 무고는 모든 범죄에 있는건데 왜 성범죄에서만 그렇게 크게 이슈화 하는지도요.

다락방 2024-07-05 10: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참 남자들 약합니다. 손가락으로 남성 혐오했다고 광광거리는 거 보면 그 정신으로 세상 어떻게 살아가나 몰라요. 여성들은 매일 살해당하는 다른 여성들을 보고 있는데요. 저도 손가락으로 혐오한 것에 분노할 만큼 팔자 편했으면 좋겠네요. 몇해전에는 자기도 성차별 당했다는 남자가 그 예로 ‘초등학교때 우유급식 당번을 했다‘를 가져오는 걸 봤어요. 어떤 사람에게 성차별은 그저 우유급식당번.. 일뿐이라는게, 어떤 사람들에게 성차별은 그저 정수기 물통 갈아야 하는 거라는 게.. 참........
 

"지난 일은 지난 일이에요." 걸으면서 비자즈가 중얼거렸다. "지난 일이 제 갈 길을 가게 두세요. 오늘은 더러운 날이었어요."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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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기본적으로 가정주부라는 이데올로기는 이 계급(중산층 여성)에 의해 유지되고 전파된다. 가정경제학은 이 계급의 소녀에게 이런 이데올로기를 과학적 시각이라고 전수한다. 모든 미디어, 특히 영화는 이런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여성의 이미지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런 이미지의 일부에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발상도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다른 어떤것보다 서구 여성을 감정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남녀관계에 묶어 둔다! 이상적인 중산층 여성상은 부양자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다. 이런 사실을 비롯해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면, 중산층 여성 혹은 가정주부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다. - P423

남성-사냥꾼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패러다임이 우리 현실을구성하고 있다. 이 패러다임은 모든 수준에서 이중적이고 서열로 구조화된 구분을 제시한다. 이 구분은 전체의 부분들을 착취적으로 양극화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다양한 계급들, 다양한 국민들 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머리‘와 ‘그 나머지‘와 같은 인체의 다양한 부분 사이에서도 이런 구분이 나타난다. 사고의 수준에서보면,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자연과 문화, 마음과 물질, 진보와 퇴보, 여가와 노동 등 개념에 대한 서열적인 평가와 양극화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식민주의적 구분이라고 부른다. - P429

사치품에 대한 보이콧과는 별개로,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진실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인이미지나 반여성적 경향을 강요하는 모든 품목에 대해 보이콧해야 한다. 의류와 화장품 산업이 만들어낸 ‘여성을 아름답게‘ 한다는 새로운흐름은,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성이라는 규격화된 모델에 맞추어 자신의 몸과 외모를 만드는 것을 거부한 페미니스트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기도 하다. 이는 여성이 화장품과 새로운 섹시한 패션 유행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한다면 성공적으로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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