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북서쪽 이오니아해에 있는 케팔로니아 섬에 갔다.
처음 가보는 그리스. 밑도 끝도 없이 그리스에 가겠노라고 생각하고 마침 커플심리치료사가 그리스계 프랑스인이라 우리의 계획을 얘기하니 케팔로니아섬을 강력 추천해 주셔서 그 길로 바로 여행지를 결정해버렸다. (알고 보니 케팔로니아섬이 심리치료사의 고향 섬이었다.) 상담쌤이 가 볼 만한 곳을 메세지로 보내주겠다 하여 당연히 구글 링크가 올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온 메세지에는 텍스트만 빼곡히 적혀 있었다. "타티아네에서 케팔로니아 고기 파이를 먹을 것. 드란드리아네에서는 초코 수플레(최고의 수플레, 식전 주문 필수. 양 많음. 2인), 알렉산드라네에서 바닷가를 보며 커피" 이런 식으로 누구누구 네에서 뭘 먹으라는 내용 뿐이었다. 아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아니야?? 하고 지도에 우리가 묵을 장소 근처로 해서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식당과 카페가 떴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케팔로니아로 가는 비행기편에서 나와 S는 따로 앉게 되었는데 내 옆에 앉은 그리스계미국인 아주머니께서 (조카의 결혼식으로 고향 땅에 오는 거라고 한다) 웬 아시안 여자애가 그리스가 처음인데 자기네 고향으로 온다고 하니 너무 반가우셨는지 나에게 핸드폰 노트를 켜라고 하며 비행 시간 내내 나에게 추천 해변가, 맛집 등을 또 알려주셨다... 결국 11박12일 동안 내 상담사와 이 그리스계 미국인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곳만 거의 돌아다녔고, 심지어 너무 많이 알려주셔서 다 가 보지도 못했다.
내 파트너는 (S라 쓰겠다) 이 여행을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음 좋겠다는 마음을 비췄고 나는 그런 고립된 지상낙원에서 S와 또 격하게 싸우진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곳은 정말이지 지상낙원이었고 현세의 근심과 걱정 따위가 무색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좋음이었다. 마치 깨달음을 얻어 출가한 수도승처럼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고민들이 깃털의 무게조차도 지니지 않은 무가치한 일로 느껴졌고 지금 내가 이 곳에 있고, 이 곳에 내가 있어 이렇게 좋은데 그런 고민을 하는게 인생을 심각하게 낭비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현세의 고민을 이 좋은 곳까지 가져오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 게 아니라, 정말 마법처럼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휴양을 한 여행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이다. 11박 12일을 대중교통도 없는 그리스 섬의 산 속에 처박혀 오롯이 '오늘은 어느 바닷가에서 수영을 할까, 오늘은 뭘 먹을까'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 근처에 있는 고양이들 (약 10마리 정도가 있었다.) 사료를 챙겨주고 그 중 사람을 무지 따르는 고양이 두 마리 (치즈냥은 미몰렛, 회색고등어는 그리그리 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와 놀고 쓰다듬으며 인간도 아침 식사를 하고. 끝내 주는 산 경치를 보며 다 먹은 아침을 치우는 것을 미루면서 늘어지게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다가 수영복과 파라솔, 비치 타올을 차에 싣고 바닷가에 가서 수영을 하다 집으로 돌아오고. 점심을 만들어 먹고 또 책을 읽다 낮잠을 자다 저녁 바닷가 산책을 나가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고 저녁을 해 먹고. 쏟아지는 별을 구경하다 일찍 잠에 들고. 이렇게 11번 잠을 자고 파리로 돌아왔다. 처음 해보는 것 투성이었다. 열마리가 넘는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것도, 그 중 두 마리가 숙소 안으로 들어와 같이 비를 피하고 낮잠을 잔 것도, 스노쿨링 마스크를 쓰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구경한 것도, 바닥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을 유유히 헤엄친 것도, 야생 성게를 본 것도, 바닷물에 다이빙을 한 것도, 해외에서 차를 렌트해서 운전을 한 것도, 관광을 일절 하지 않고 한량처럼 쉬기만 한 여행을 한 것도, 한 장소에 그렇게 오래 머물면서 여행을 한 것도, 그리스에 간 것도, 그렇게나 쏟아지는 별을 바라본 것도. 다 처음 투성이인 여행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다. 그리스에 가는 표를 끊고 이주동안 듀오링고로 그리스어를 끄적였다. 그리스의 시골 섬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삶은 지금쯤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마 나는 답답해서 도시나 해외로 도망갔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이런 공기와 자연을 품고 태어난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산 길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불과 2년 전 까지 운행을 했던 케팔로니아 섬의 낡은 대중교통 버스를 보았다.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고, 2년 전까지는 운행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낡은 구식 버스였다. 그리스의 붕괴하는 지방 공공 서비스난을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실제로 나는 귀여운 엽서들을 사서 편지를 쓰고 친구들과 가족 집에 부치려고 우표를 사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를 했다. 그 커다란 섬에 (섬 크기가 제주도 반 정도 되는 나름 큰 섬이었음) 우체국이 달랑 두개라는 점이... 그 두 곳 마저도 상시 운행은 아니었다.... 결국 우표를 사지 못해 그 엽서들은 프랑스로 가지고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부쳐야 하나... 나는 여행지에서 기념으로 항상 우리집으로 가는 엽서를 써서 보내곤 하는데 그 엽서를 가지고 집 앞 우체국에 가서 우리집으로 부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언젠가 그리스에 가면 현지에서 꼭 다시 읽고 싶었던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었고 그리스에 왔으니 조르바를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그리스인 조르바>에 다시 한 번 도전했으나... 한 30프로 정도 읽다가 그 남성우월주위에 신물이 나서... 중도 하차를 했다. 그리고는 친구의 추천으로 <수확자> 시리즈 중 2권을 여행 중에 읽었다.
아무튼. 그리스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나는 케팔로니아를 극 강추를 하며, 정말 가실 계획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제가 추천 해변과 식당 등 정보를 다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