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엔 주위 사람들 덕에 가보지 않았던 장소에 가게 되는 일이 많이 생긴다. 마음도 소란하고 돈도 가장 궁한 시기지만 그래도 이 때 아니면 또 언제 가보나 싶은 마음에 몸과 마음 그리고 지갑까지 무리하고 있다. 돈과 마음이 쪼달리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무리해서 움직여야 돌파구가 생기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그렇다. 저번주 목요일부터 스위스의 산골짜기의 작은 오두막에 놀러 와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파트너의 대모님 가족이 대대로 부자인데, 그 가족 별장의 열쇠를 파트너와 우리에게 놀러가라고 친히 나눠주셨다. 물론 숙소비는 대모님 덕분에 아낄 수 있지만 교통비와 물가가 어마어마...해서 가뜩이나 계획에 없던 지출이 많고 수입이 없는 시기에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마치 아울렛 파격 세일을 누리려고 계획에도 없던 천만원짜리 명품백을 얼떨결에 사야되서 300만원 지출이 생겨버린 느낌이랄까. 그치만 다시는 올 수 없는 기회인 건 맞다. 천만원짜리 명품 가방도 삼백만원짜리 가방도 관심이 없지만 스위스 오두막은 다르니까. 무리했지만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천만원으로도 살 수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곳에선 생활을 위한 모든 것에 품이 많이 든다. 그래서 부지런해야 한다. 밤에 춥지 않으려면 낮에 미리 장작을 패 두어야 하고, 밤 이슬에 장작이 젖지 않게 자기 전에 장작을 창고에 넣어두어야 하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주말이 되기 전에 장을 보러 기차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난로에 불을 피우는 거 자체도 보통 어려운게 아닌데 한번 일어난 불길을 유지하기 위해선 수시로 불길을 주시하며 바삐 움직여야 한다. 십분에 한번씩 불난로 철망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불쏘시개로 불길을 터주어야하고, 중간 중간 숯불도 충전해 주어야 한다. 수시로 부채질도 해 주어야 한다. 불을 피우는 거 자체도 보통 어려운게 아닌데 한번 일어난 불길을 유지하기 위해선 계속 불길을 주시하며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자연의 흐름에 일상을 맞추고 오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몸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그게 바로 삼시세끼 예능 현실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사치다. 나는 지금 오로지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있는 게 사치가 아니고 무엇일 수 있을까?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날까지 하루 종일 폭설이 내려 오두막에 하루 종일 갇혀 있었다. 삶이 레몬을 준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길래 나는 하늘이 준 깨끗한 내리는 눈을 퍼다 녹여 안성탕면을 끓였다. 계란을 깨니 쌍알이 들어 있었다. 후식으로 또 깨끗한 눈을 퍼다 시럽을 뿌려 빙수를 만들어 먹었다. 내일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 기억과 감각을 잊지 말고 오랫동안 간직했음 좋겠다.

(p.s. 챗지피티에 물어보니 내가 묵고 있는 지역은 스위스에서도 워낙 깨끗한 지역의 산골마을이라 가끔가다가 내리는 눈을 먹는 건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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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3-1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바쁘면 마음이 덜 바쁘더라고요. 좋은 시간 보내시는 것 같아 괜히 저도 좋네요.

눈 내린 산 속 오두막 안의 라넌큘러스라니! 이것도 진정한 사치.. :)

다락방 2026-03-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근사한 거 아니에요? 이런 사치라면 인생에서 꼭 누려볼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와 눈으로 안성탕면이라니, 세상 한 번 살아볼만 하네요. 너무 근사해요!! 삶이 레몬을 준다면 레몬에이드를 만들어라!! 캬 명문입니다.
즐기세요, 달자 님. 분명 훗날의 삶에 두고두고 도움이 될거라고 봅니다. 지금의 정신적 안정, 마음의 여유는 물론이고요.

단발머리 2026-03-17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무리하셨어도 그 곳에 가기 너무 잘하신 것 같아요. 불 피우는 일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군요. 할머니댁에서 아궁이 본 뒤로 불 피우는 일은 가까이서도 본 적이 없어서 설명 따라 읽는데도 너무 신기해요~~
장작 타는 소리 깔고 라이브 부탁드리려 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려오신다니 아쉬워요!
 
[전자책] 홍학의 자리
정해연 / 엘릭시르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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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반전이라 하는 두 가지(1. 죽은 피해자에 대한 2. 피해자의 죽음 방식이나 과정에 대한) 모두… 고작 이 반전을 위해 여기까지 멈출 수 없는 열차를 타고 달려온 것이었나? 이 반전은 무엇을 위한 반전이었나 굉장히 허망해짐… 2점을 주고 싶지만 그래도 여행 중 페이지터너로 톡톡한 몫을 했기 때문에 3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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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에 겨운 사람들을 경멸했다. 복에 겨워 자기가 가진 특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이 반복될 수록 내 안의 무기력함을 악에 받친 타인을 향한 증오의 땔감으로 태웠다. 하물며 인간이란 원래 남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인데 여태까지 박혔던 가시 중에서도 기똥차게 굵고 뾰족한 가시가 박혔으니 세상에서 내가 가장 억울했더랬다. 작년의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잠겨 수장당했다. 그리고 새해가 밝았다. 작년 말 쯤에 빼꼼히 얼굴을 가까스로 물에서 꺼내든 나는 이젠 악에 받쳐 모든 저주를 2025년에 쏟아붙고 소위 '퉁치기'작전에 돌입했다. 또 불행이 찾아온다고? '또 악운이 겹친다고? 괜찮다, 어차피 아직 2025년이고 2025년은 원래 나한테 저주의 해였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연말에도 찾아오는 불운을 그때그때 하나씩 집어 2025년이라는 쓰레기처리장으로 던져 버렸다. 찾아오는 는 그 반동을 이용해 차례 차례 집어 던져 버리는 움직임에 리듬감까지 더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2026년이 찾아왔다.

모든 불행은 2025년이라는 상자에 넣었으니 2026년은 달라져야만 한다. 2026이라는 숫자가 마치 신인 것 처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매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새해 관련 절기를 챙겼다. 새해에 둥근 달을 보며 소원을 빌며 1차로 2026년을 맞으며 2025년의 일부를 떠나 보냈고, 음력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으며 2차로 2026년을 맞고 아직 남아있을 새해의 불운을 음력 새해라는 이름으로 2025년에 마지막으로 퉁 쳐 떠나보냈다. 그 다음엔 정월대보름날 커다란 보름달을 보며 집에서 부럼을 까고 잣도 태우며 2025년 떠나 보내기 최종_최종_최종 느낌으로 혹여나 아직이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2025년의 나쁜 기운을 와그작 와그작 박살내었다. 그리고 3월 첫째날인 내 생일에 이제 만으로도 한살 더 먹으며 비로소 2025년의 나는 소멸하였음을, 그리고 새로태어났음을, 진짜 이제 새로운 시작_최종_최종_최종_최종 이라는 걸 (혼자서) 공식 선언했다.


2026년에 달라진 게 있다면 아무래도 이제 물 밖으로 빼꼼히 코 정도는 밖으로 내밀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똥누러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역시 나도 이제 코 좀 들이밀고 숨 좀 쉬게 되자마자 이전에는 절대적인 고통에 짓눌려 빠져나오지 못했던 다른 못난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불행 배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재수가 없고 내가 제일 힘든 것 같은 착각이 열렬한 맹신으로 바뀌면서 주위 사람들의 크고 작은 애로사항들이 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든간에 그에겐 있지만 나에겐 없는 것을 기필코 찾아내서 치환해냈다. '흥칫뿡 너한텐 그래도 A는 있잖아!'는 정말이지 마법의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눈물 겨운 자기 연민으로 불행 배틀에서 승리하면 질투심이 뒤를 잇는다. '쟤는 A가 있어도 B때문에 저렇다는데 나는 왜 A도 없고 B도 없어'는 두번째로 훌륭한 마법의 문장이다. 이게 반복되다보면 이제 세번째로 신세한탄과 자기 혐오가 문을 두드린다. 하필이면 나만 되는 일이 없는 거 같고 나만 재수가 없는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이런 내 꼴이 우습고 지긋지긋하다. 자기연민-질투-신세한탄-자기혐오로 이뤄진 굴렁쇠를 굴려 2026년 3월 중순까지 달려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제대로 거울 앞에 서서 발가벗고 눈을 부릅 치켜뜨고 내 자신을 적나라하게 처음부터 다시 봐야한다. 불행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대신에 내가 가진 복과 행운과 특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자마자 복에 겨워 뒹굴고 있는 나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복에 겨운 인간 군상인데 그게 바로 나였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렵고 잣이고 간에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나에겐 다른 선택권은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글을 쓰는 내 모습에 취하지 말고 실제로 글을 써야 한다. 일하는 내 모습에 취하지 말고 실제로 일을 해야 한다. 두려워서 하는 '척'을 하던 버릇을 이젠 그만둬야 한다. 아프지만 인정하고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핑계될 2025년도 없기 때문이다. 2025년이 지옥이었다고 모든 불행을 2025년에 몰빵한다고해서 (애초에 몰빵할 수도 없거니와) 2026년에서 불행을 거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잔인한 낙관주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난이란 역경을 이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이, 갈망이 자신의 불우한 상황과 얽히게 되면, 문화 비평가 로렌 벌랜트가 말한 "잔인한 낙관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물직적 성공을 거두고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안정적인 일상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면 결국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잔인한 낙관주의다.


어떤 사람이 가난이란 역경을 이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이, 갈망이 자신의 불우한 상황과 얽히게 되면, 문화 비평가 로렌 벌랜트가 말한 "잔인한 낙관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물직적 성공을 거두고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안정적인 일상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면 결국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잔인한 낙관주의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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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3-16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자님, 우리 여기서 계속 더 자주 만나요. 그리고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달자 2026-03-17 08: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앞으론 자주 놀러오고 소식도 캐치업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 반드시 하나의 모습만을 받아들일 필요 없이 거의 무한대로 자신의 모습을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상당히 독특한 존재다. - P64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한 과거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를 이루는 핵심 요소들을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에 녹여 냄으로써 그 과거 전체를 "소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과거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구성 요소로 바꾸어 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해야 한다. 과거를 없애 버릴 수는 없기에, 우리는 과거를 자신만의 독특함을 실현해 내는 데 꼭 "필요한" 무언가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고통을 특별하고개인적인 의미로 바꾸어 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분명 이 과정은 항상 성공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삶이라는 조직의 일부로 통합해 내는 데 실패한 고통이 닿지 않는 곳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발전할 수 있다. 고통을사라지게 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주도권을 고통에게 내어 주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모습을 결정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항상 현재의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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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버거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 - 광활한 우주를 살아가는 나와 뇌의 작은 연대기
레이첼 바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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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버거운데 마침 트위터에서 김명남 번역가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을 받기엔 내 삶은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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