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갇힌 사람들 -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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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수치스러운 내 몸의 부분들이 있다. 수치라는 단어가 너무 강하다면 남들에게 내보이기 좀 꺼려지는 부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내가 왜 남들에게 내보일 생각을 하는걸까? 내 몸은 나이고 그 부위는 그 부위대로 존재하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그곳을 타인에게 보이기에 꺼려진다,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건, 처음부터 그랬던게 아니었다. 그 부위가 그렇다면, 그 부위의 살의 분포도가, 냄새가, 색깔이, 모양이 그렇다면 그건 문제야, 라는걸 학습해 얻게된 결과이다. 눈돌리면 닿는 모든 곳에서 그것이 문제라고 말해서, 아 문제구나, 그렇다면 해결해야지, 생각하게 되고, 마침맞게 그 때마다 나에게 문제를 지적했던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결방법을 알려줄게' 라고 하고 있었던거다. 그리고 지금은 안다. 다이어트와 성형등의 미용산업이 우리에게 부러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해야만 자기들이 돈을 벌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누군가 지적한 나의 문제 때문에 그들의 배를 불려주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소녀들의 50퍼센트 이상이 쌍커풀수술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쌍커풀 수술이 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 주변에도 쌍커풀 수술을 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런데 소녀들의 절반 이상이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왜 쌍커풀 수술을 해야했을까. 왜 그래야 했을까. 우리는 쌍커풀 있는 눈이 예쁜눈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학습'당했기' 때문이다. 쌍커풀 있고 눈이 큰게 예쁜거야, 정말 미인이야, 라고 끊임없이 주입하고, 그 후에는 '우리 병원은 쌍커풀 수술을 해' 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그러니 당연히 그것은 해결방법이 아닌데 말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식으로 세뇌를 시키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고.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고 있다면 우리의 저항은 길을 찾을 수 있다. 여성학 책을 몇년간 여러권 읽어오면서 나는 이제 그쯤은 안다. 이 자본주의 사회가 여성에게 나약하기를 강요하고 꾸미기를 강요하면서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탈코르셋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수 있다. 나는 쌍커풀 수술을 하는 절반이상의 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다이어트회사들을 비롯한 성형외과, 피부과 등의 미용산업들의 배를 불려주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자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고 다짐한 바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내 신체에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들은 어디이며 왜 그렇게 되었나, 그리고 나는 어느만큼 내 몸과 함께 자유로운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가장 좋았던 건, 내가 그동안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한 폭력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거다. 왜 자신의 몸에 칼을 대고 피를 흘릴까, 하는 것을 내 몸이 내 환경으로부터 구성된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적용시키지 못했었다. 어떤 몸은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쌓아온 경험에 의해 극한의 경험으로 자기를 몰고가야만 비로소 자기의 실재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내 욕망은 대부분 온전히 내 안에서 자연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 욕망들 중 어떤 것은 나에게 해를 가해야만 비로소 실현되기도 한다. 그간의 경험과 삶이 나를 폭력적 섹스로 몰아넣어야만 비로소 해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욕망과 행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자해에 대해 다른식의 접근과 이해가 가능했던 건,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 덕분이었다. 어릴 적에 폭력적 환경에 노출되고나서 위축되고, 성인이 된 후에 내가 나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내 몸의 주체가 나라는 걸 인지하는 주인공을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자해라는 것이 단순히 '나에게 해를 입힌다'는 생각과 행위로 구성되는건 아니라는걸 알게된거다. 그런데 이 책, 수지 오바크의 [몸에 갇힌 사람들]을 읽으면서 어떤 몸은 멀쩡한 두 다리가 걸리적거린다고 느끼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어떤 몸은 강압적 섹스가 해방을 느끼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여전히 나는 그들이 그런 욕망과 그런 행동을 갖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이 아니고 그들의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환경을 살았으며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몸은 불안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알았다. 욕망은 불안에서 출발하고 지금 미용과 성형산업이 판을 치는 자본주의 세상은 우리에게 더 불안함을 주입한다. 너의 신체는 아름답지 않아, 너의 신체는 건강하지 않아, 너의 신체는 부족해, 너의 몸은 개선할 점이 많아. 세상이 주입한 불안을 내가 끌어안고 나는 그걸 개선하기 위해 쌍커풀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 약을 먹고 내 몸에 불균형한 식사를 공급한다. 다이어트는 여지없이 실패하고 항상 대체되는 다른 다이어트가 또 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의 실패가 있어야 비로소 성장하는 산업이라는 거, 좀 기분나쁘지 않나. 그렇다면 그런 산업따위, 나에게 어떤 실패를 있게 만들고 그 실패로 인해 부자가 되는 그런 산업 따위, 없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랬듯이 사람들이 '불완전하게' 혹은 '부조리하게' 보이는 몸에 대한 욕망을 갖고 살기도 한다는 걸 인지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실패로 부자가 되는 산업에 좀 저항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입하는대로 학습하고 그래서 돈 갖다 바치고 내 몸을 개선하려고 하는거 좀, 쪽팔리잖아? 애초에 내 몸이 왜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문제라고 지적한 이 똥같은 세상이 있었다. 



아주 좋은 책이었다. 

무릇 책이라는 거, 독서라는 건 이래서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두루 살피지 못한 곳을 살피게 하는 것도 책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에 조금 더 다가가게 해주는 것도 책이 하는 일이 아닌가. 이 책은 나에게 그 일을 아주 잘해주었다. 읽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하여간 나는 다이어트 산업을 배부르게 만들 의도가1도 없으므로 지금처럼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새치 염색도 안하고 주름살도 안펴고 겨드랑이 털도 안깎으면서 살겠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402580396





개조의 유혹은 우선 몸들을 인종에 따라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인으로 분류하는데서 시작된다. 다음은 계급이다. 한때는 노동계급, 중간계급, 상류계급의 몸들이 서로 다르게 보고 움직이고 입고 말했다. - P61

차별에 도전하고, 타인과 함께 혹은 타인을 대신하여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개개인이 스스로의 발전과 위치를 책임져야 한다는 훈계만 남았다. 건강한 육체와 준수한 외모는 최우선과제가 되었지만, 개인의 몸은 조작을 동원하지 않고는 도저히 그 무게를 버틸 수 없다. - P62

사람은 어릴 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평생 배울 수 없다. 아기와 엄마가 서로 옹알거리는 것은 원시언어나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서 특정한 얼굴근육들이 다듬어지고, 혀, 입술, 뺨, 턱이 만들어내고 귀가 처리하게 될 언어의 형태가 잡혀간다. 아기는 자기가 듣는 소리를 따라한다. 아기의 혀, 입, 턱, 뺨근육이 귀로 들은 소리를 정확히 모방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조정연습이 필요하다. - P75

당신이 중국어나 코사(Xhosa,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용어 중 하나-옮긴이)어로 된 문장을 발음한다고 상상해보자. 설령 당신이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더라도, 정확히 발음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정한 나이를 넘어선 뒤에는 호된 훈련을 거쳐야만 정확한 발음이 가능하다. 아무리 성실한 학생이라도 어릴 때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않은 외국어를 잘하게 되기까지는 애를 먹는다. 우리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말하는 이딸리아 사람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턱과 얼굴, 목구멍의 근육이 그들의 모국어에 맞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다중언어 사용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여러 언어드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외국어를 발음할 때는 모음이나 억양, 강세가 아주 조금이나마 반드시 어긋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언어를 말하는 것과 듣기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 P75

젠더 불평등 때문에 여자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줄곧 양육자의 관심을 덜 받는 게 사실이라면, 여성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가 한정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육체적인 측면을 보면, 소녀들은 얌전해야 하고 소년들은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훈육방식이 분명 아이드의 신체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아이들의 경험은 생물학적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부모가 아이의 몸을 어떻게 다루는가, 아이에게 육체적으로 어떤 기대를 하는가, 부모 자식이 어떤 육체적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에도 달려 있다. - P117

우리 시대의 몸들은 전시하는 장소가 되었다. 화려함, 생식력, 정력, 민첩성, 건강이 몸의 계율이지만, 그런 목표들은 휘발적이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추구는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시도다. - P143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닮은 외모를 원하는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쌍커풀을 갖고 싶은가? 한국 소녀들의 50퍼센트가량이 쌍커풀수술을 바으니, 당신도 그 대열에 끼면 된다. 그건 일도 아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해치울 수도 있다. 음경이 너무 짧거나 가늘어서 고민인가? 길이를 늘리는 수술과 두툼하게 만드는 수술이 따로 있다. 출산을 경험한 음순과 질이 창피한가? 아니면 처녀막을 재생하는 게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가? 그런 문제를 도와주는 의사도 있다. 피부색이 너무 옅은가? 크림이나 썬탠기구를 쓰면 짙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피부색이 너무 짙은가? 유전자침묵(gene silencing, 특정한 유전다가 발현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옮긴이) 기법을 비롯해 피부를 밝고 희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키가 너무 작다고 느끼는가? 넙다리에 10센티미터짜리 막대기를 박아서 키를 늘리는 수술을 모더니티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중국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라. - P160

미용산업소과 스타일산업의 마케팅은 참으로 교묘하다. 잡지의 사설이나 신문의 스타일면 기사들은 지금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문제들을 불러낸다. 2007년 초, 영국의 가장 성공적인 일간지 중 하나인 [데일리 메일](Daily Mail)에는 무릎의 미적 과제를 집중조명하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대책은 소개하지 않았지만, 좌우간 기사가 전하려는 메씨지는 분명했다. 무릎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 무릎도 신체의 다른 부분들처럼 노력과 관심을 쏟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교묘하게도, 달리 말하면 교활하게도, 스타일산업이 문제라고 진단하는 부분들은 미용산업이 고쳐주려 나서는 부분들과 같을 때가 많다. - P176

오늘날의 패션이 얼마나 숨가쁘게 변화하는지 생각해보자. 그런 변화는 대체로 상업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강박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유기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패션산업의 시녀들인 다이어트, 식품, 약학 산업도 각자 사악한 역할을 맡아, 몸은 전쟁터라는 인식을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 - P181

다이어트식품 시장은 크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한가지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다음에 시도할 다른 방법들이 줄줄이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다이어트가 오히려 혼란스러운 식습관을 조장한다. 다이어트 때문에 몸무게가 늘 수도 있다. 다이어트는 ‘과체중‘에 대한 현명한 대응이 아니다. 정상적인 식습관을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단연코 그렇다. 요즘 소녀들 중에는 늘 다이어트를 하고 음식을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다. 엄마가 다이어트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음식에 대해 그런 접근법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이어트를 지속한다. 하지만 그 결과 수많은 아이들이 다이어트 후 폭식의 패턴으로 빠져든다. 다이어트를 하는 소녀들은 폭식할 위험이 열두배나 높고, 음식을 다루는 일상적인 방법으로서 폭식을 하기 쉽다. - P185

다이어트는 도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좋지 않다. 그저 별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반복적인 다이어트는 신체의 기본대사율, 즉 쎄트 포인트(set point)를 유지하려는 자가규제 과정을 교란시킨다. - P186

특정 식품이나 식품군을 절제하라고 권하는 이런 식단들은 사실 식사와 몸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여러 방법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뿐이다. - P187

다이어트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딱 한번만 시도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다이어트회사들은 95퍼센트라는 높은 재발률에 의지한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수치를 뇌리에 새겨둬야 할 것이다. - P188

그들(다이어트회사들)은 고객들이 몇번이고 다시 돌아와 자기 제품과 써비스를 구입해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익은 고객들의 실패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들의 프로그램은 당연히 실패를 낳도록 설계되어 있다. - P188

비만을 경멸과 혐오를 받아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경향, 뚱뚱한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를 싫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차별받아야 하는 아웃싸이더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갈수록 심해진다. 이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그러니까 뚱뚱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직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존중하지 않는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게 문제다. (*베이커-피츠는 몸을 지속적인 개선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곁들여진 은근한 도덕적 뉘앙스를 성형산업이 강화한다고 지적했다.) - P196

흥미롭게도, 과체중이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망률은 말랐지만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낮다. 그러니 어쩌다가 우리가 마른 몸을 건강의 시금석으로 간주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 P198

여성들에게 섹스란 제3자의 시각에서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되었다. 여성들이 섹스를 흥미롭게 느끼는 까닭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반응, 유혹의 몸짓, 심지어 성적 친밀감의 표현까지도 영화, 텔레비전, 뮤직비디오의 이미지들을 참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섹스는 연기가 되었다. 참가자들은 섹스라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에로틱한 감각을 느낀다. - P220

그녀는 너무나 비통하고 불행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서, 물질적인 의미에서는 자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몸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항상 엉클어져 있었다. 그녀의 자해행위는 부분적으로는 신체적 자아를 느끼고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피를 철철 쏟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해를 통해서만 그녀는 평소 늘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자기 몸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몸을 돌볼 수밖에 없었고, 자기가 몸속에 산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몸에 상해를 가함으로써 몸을 일깨웠고, 그럼으로써 잠시나마 마음속의 혼돈을 잠재웠던 것이다. - P230

제인을 진정시키는 것은 폭력과 위허이 어른거리는 섹스였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만나 관계했고, 섹스를 통해 폭력에 대한 환상을 실행하거나 시레로 폭력을 주고받았다. 그런 식으로 육체적 상처를 느껴야만 진정되었고, 그제야 육체적, 감정적 평형을 되찾았다. 그녀의 몸은 통증에 길들여져 있었다. 섹스할 때는 완력이나 강압이 있어야만 만족과 해방감을 느꼈다. - P230

오늘날 스타일산업들의 활동에는 소비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다이어트, 식품, 제약, 성형 산업들도 옆에서 거든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그 소비주의의 지령들은 사람에게 가장 결정적이고 기초적인 엄마와 아기의 관계에까지 침투하여, 발달중인 아이에게 신체적 불안을 안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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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5-04-2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저는 이 책에도 살짝 언급되었던 영화 피아니스트보고 강렬한 충격이..

다락방 2025-04-24 11:14   좋아요 2 | URL
햇실과함께 님, 저도 그 영화 보고나서 책도 읽었어요. 책을 먼저 읽었던가? 내가 살아온 환경이 내 욕망을 구성하는 대표적 케이스네요, 정말.

햇살과함께 2025-04-24 11:16   좋아요 0 | URL
오 책도 있었군요! 책도 보고 싶네요.

다락방 2025-04-24 11:17   좋아요 1 | URL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966687

이 책입니다!!

자목련 2025-04-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25-04-24 11:20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5-04-2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쌍꺼풀 수술 안 했어요! 전 제가 쌍꺼풀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제 눈을 보는 사람들이 뭔 소리냐고 너 쌍꺼풀 있잖아! 해서 아 나 있구나.. 알았다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 그리고 의사들이 수술할 때 몸에 흉터 (너무 심하게) 생각해주는 거 좀 그렇더라고요.
여기 흉터 생겨서 없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아... 징짜 괜찮다고!!!!!!!

요즘에 거리 걷다 보면... 피트니스센터 광고하는 게 부쩍 많아진 느낌인데
거기 강사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벗은 몸으로 프로필 사진 나열해놓은 거 보면...너무 싫어요.
태닝까지 한 사람은 훈제치킨 같기도 하고... 에효
이젠 하다하다 얼굴이 아니라 몸땡이까지 이 난리냐???! 싶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새치 염색도 안 하고 주름살도 안 펴고 겨드랑이 털도 안 깎으면서 살겠다.22222222222222

blanca 2025-04-2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소녀가 한 명 있는데요. 중학교 때 우리 사이에 미모로 유명했던 친구인데 쌍커풀이 없는 가느스름한 눈매였어요. 아직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우리들은 알았던 거죠. 진짜 아름다움은 그런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는 걸. 우리는 그 친구가 아주 아름답고 예쁘다고 생각했고 쌍커풀이 있어야 한다거나 눈이 커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저도 미용에 대한 다락방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참고로 저는 쌍커풀이 없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ㅋ

망고 2025-04-2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해는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요 노멀피플도 읽었는데 그저 불쾌하기만 했거든요ㅠㅠ 이 책을 보면 이해하게 될까요?ㅠㅠ

관찰자 2025-04-24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이 리뷰에서 유독 ‘Y존 필러‘가 눈에 띄어서요. 저는 진짜 처음 들어봤거든요. 그래서 옆에 있던 50세 여자 부장님과 60대 남자 국장님께 ‘Y존 필러‘에 대해 말씀 드리니 너무 잘 알고 있더라는 말씀이에요. ;;; 근데 20대 남자 직원들은 아무도 모름.
이거 왜 그런걸까요?? 그리고 대체 내가 볼 수도 없는 ‘Y존‘에 필러를 왜 맞는 걸까요?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 동남아시아문학총서 시리즈 6
미카 드 리언 지음, 허선영 옮김 / 한세예스24문화재단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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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는 출판사에 다니는 편집자이다. 그녀가 담당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이번에 로맨스랑 SFF 가 함께 있는 작품을 써내는 바람에, 그녀는 SFF 담당 '킵'과 이 작품에 대해 같이 작업하기로 했다. 평소 에마는 킵을 좋아하지 않았고 서로 만나면 으르렁대는 사이었다.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며 서로를 야유했고 사실 그렇게 미워했던 만큼 혹여라도 작가를 빼앗길까 겁이나기도 해 같이 작업하는 건 피하고 싶었지만, SFF 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 작품을 정말 잘 만들어내야 어려운 출판사를 다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그들은 같은 직장 내의 원수였다가 한 작품을 함께 작업하는 동료가 된다. 에마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로맨스에 대해 킵에게 알려주고 킵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SFF 에 대해 설명해준다. 처음에는 작품에 대한 의견차이로 으르렁대다가 그들은 서로 조율해가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나는 에마랑만 작업하겠다고 부르짖던 베스트셀러 작가조차도 킵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작품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됐음을 인정한다. 작품은 크게 성공하고 출판사는 올해를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조금 더 버텨낼 수 있게 되었으며, 출판사는 임프린트를 만들어 에마에게 편집장을 맡기고자 한다. 에마는 책을 읽는 것도 사랑했지만 책을 만드는 것도 너무너무 사랑해서 이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개인의 커리어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게 된거다.


이 과정에서 킵에게 육체적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건 자연스런 흐름이다. 툭하면 근육이 보이는 탓에 아주 미치겠다. 에마는 운동을 싫어하면서도 건강한 대표적인 사람인데, 먹을 거 다 먹으면서도 킵으로부터 '완벽한 몸매'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가끔 친구에게 이끌려 하기 싫은 크로스핏 같은걸 하긴 하지만 그건 정기적인게 아닌데, 여하튼 우리의 여자주인공 에마는 완벽한 몸매이며 우리의 남자주인공 킵도 완벽한 몸매이다.


일전에 읽었던 대표적인 '원수에서 애인되기' 설정의 [헤이팅 게임]이 그랫던 것처럼, 이 책에서 에마와 킵도 으르렁대가가 연인으로 발전한다. 나를 싫어하는 건줄 알았는데 사실 나한테 반했었다고? 


사실 이들에겐 아직 정리되지 못한 전여친 전남친이 있다. 킵은 전여친과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 에마 역시 자신도 전남친과 친구로 지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남친은 에마가 여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재결합을 요구한다. 킵으로서는 속상하지만 자신 역시 전여친과 친구로 지내는데 에마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순 없지 않나, 라고 힘들어하고. 읽는 나로서는 '나한테 끊임없이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전남친'을 '그런데 나는 친구로 생각해, 그렇게 말했어' 라면서 계속 만나는 에마가 너무 짜증이 났다. 헤어진 애인과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모두에게' 불가능한것도 아니고, '언제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섹스까지 해버렸다면 친구로 지내는 거 진짜 너무 힘들지 않나. 한 번 섹스한 사이가 두 번 하고 세 번 하고 일년 뒤에 다시 만나 또 섹스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섹스까지 하는 친구사이란, 그렇다면 친구 사이인가?


오래전 막 연애를 시작하던 참에, 아니 썸이라고 해야겠다. 썸을 타던 때에, 그러니까 나는 상대를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고, 그래서 자주 연락하던 그 때에, 하필 구남친을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같이 밥이나 먹자는 거였다. 나는 썸남에게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고 그는 내게 '남자냐'고 물었는데 나는 얼버무리며 '친구'라고 답했더랬다. 그는 나의 망설임을 눈치채고는 '남자가 무슨 친구냐, 전에 애인이었던 남자 앞으로 애인될 남자 둘 중 하나지 '라고 했는데 .. 하아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전에 애인이었던 남자였고, 그 날 구남친을 대체 왜 만났던가. 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다'고 했지만, 내 말을 들은 구남친은 다시 만나자고 하였으니 나는 이 날의 만남을 크게 후회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그를 내가 정리됐다는 이유로 손쉽게 친구로 생각했다는데에 있었고, 무엇보다 그 당시 현재 좋아하던 남자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아 화를 더 키운것이었으니.. 그는 내가 구남친을 만났다는 것을 나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알게 되었고 크게 화를 내었다. 내가 묻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너는 말하지 않았지, 라는 이유로.. 이 날의 만남은 여러가지 의미로다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바, 썸남의 마음이 돌아설까봐 얼마나 걱정했던지.. 하아,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렇게 썸남과 나는 내가 잘못하면서 혹은 그가 나를 화나게 하면서 애인 사이가 되기는 하였으니, 구남친은 정리해야 한다, 친구가 될 수 없다 는 쪽이 맞다고 본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어서 '꼭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사이에서는 친구로 지내는 것도 가능하기도 하다'는 것도 사실이 될 수 있기는 하다. 


그게 바로 킵의 경우였다.

킵은 전여친과 사이좋게 지내며 전여친이 결혼한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고 하는데, '너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 라고 에마가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에마의 구남친은 구질구질하게 자꾸 쫓아다니면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하고 킵의 구여친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정리가 됐다니까? 그 관계가 친구로 정리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정리되기까지 킵에게는 커다란 상처와 후유증이 남았다. 그건 내가 '다른 사람의 두번째 선택' 이 될지도 모른다는것. 킵이 기존의 연애에서 깨달았던 건, 그녀가 제일 좋아한건 내가 아니었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차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너무나 좋아하는 에마에게 어쩌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게 너무 가슴이 아픈거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어, 라며 에마 앞에 자꾸 구남친이 나타난다니까? 킵과 사이좋아 암수 서로 정다웁게 이케이케 하려고 하면 닉으로부터 문자가 오는 겁니다. 하아... 난 이 연애 반댈세. 그렇지만 둘의 불같은 사랑으로 결국은 해피엔딩~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현실속에 딱히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잘생기고 크도 크고 능력도 있고 근육도 있고 다정한 남자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그런데 '미카 드 리언'의 이 책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그건 킵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 그것도 로맨스 소설과 SFF 를!! 그래서 에마와 책속 등장인물이나 인용구로 티키타카가 된다. 나중에 에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에마와 대화하기 위해 로맨스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는 고백이 뒤따르긴 하지만, 와, 로맨스 소설 을 비롯해 문학을 많이 읽는 젊은 근육질의 남자라고요? 너무나 상상불가한 캐릭터로군요.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이 책의 두 주인공이 출판사에 다니는만큼 아주 많은 책이 언급되는데 그때마다 각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미 열심히 책을 읽었던 사람의 특권이자 뿌듯함이다. 아하하하하. 


자기 일에 열심이고 최선을 다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깨닫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재미있고 의미있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몇 해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쩌면, 기꺼이 별 넷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 별을 넷 까지는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샐리 쏜'의 [헤이팅 게임]을 읽은 사람인데다가, 이 작가 미카 드 리언이 [헤이팅 게임]을 읽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많은 책들이 언급될 때 거기에는 [헤이팅 게임] 이 있었다. 원수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상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이성애자들의 로맨스 정석, 헤이팅 게임. 이 책,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는 헤이팅 게임과 아주 많이 비슷하다. 성인 여남의 사랑 이야기가 비슷한거야 뭐 굳이 말할 바가 있겠느냐마는, 이 책은 그것 때문에 감점요인이 되는게, 정말이지 아주 많은 설정을 헤이팅 게임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런다고?


우선, 같은 직장에 다니며 서로 원수같이 대하다가 사랑하게 된다는 기본 설정이 같다. 그러나 이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서로 원수처럼 지내다가 사랑하게 되는건 뭐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나도 뭐 저런 놈이 다있어, 하던 놈을 좋아해서 연애했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굳이 밝히고싶지는 않으므로 패스하고. 그런데 말이다, 미카 드 리언이 좀 너무했다 싶을 만큼 많은 설정이 닮아있다.


헤이팅 게임에서 조슈아는 그냥 연애하는 상대 대신 진지한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진지한 상대를 원하고 진지한 상대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진지한 관계를 원하기 때문에 쉽게 섹스하지 않는다.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에서 킵은 자신이 상대의 두번째 선택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항상 첫번째이며 가장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자꾸만 한 반릉 뒤로 뺀 것처럼 행동하며 쉽게 섹스하지 않는다. 그래, 그것도 진지한 관계를 원하는, 세컨드 베스트가 아닌 더 베스트가 되기를 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고려하면 역시 특별한게 아니다. 그렇지만,


루시 커플이 다니는 회사도 출판사이고 에마 커플이 다니는 회사도 출판사이다.

조슈아는 형이 의사이다

킵은 형이 의사이고 동생이 변호사이다.

조슈아는 루시를 '숏케익' 이라 부른다.

킵은 에마를 '버터컵' 이라 부른다. 아니, 이건 진짜 너무 한거 아니야?

조슈아는 전여친이 자신의 형과 결혼했다.

킵은 전여친이 자신의 베프와 결혼했다.

조슈아는 회사 체육대회에서 루시랑 꼭 붙어 다닌다.

하필 킵의 회사도 체육대회가 있고 킵은 에마랑 붙어다닌다. 



헤이팅 게임을 읽지 않았다면 이 작가는 어떤 작품을 썼을까? 헤이팅 게임 읽고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이 느낌적 느낌.. 그런데 재미는 헤이팅 게임 쪽이 더 있다. 나는 너무나 비슷한 심지어 똑같다고 느껴지는 이 설정들이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헤이팅 게임 언급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책을 다 읽고 뒤에 작가의 말을 읽는데 작가는 '알리 헤이즐우드'와 '테사 베일리' 로 부터 인스타 좋아요를 받았다고 했나 팔로우가 되었다고 했나, 하여간 그래서 기쁘다고 써놨다. 흐음.. 갑자기 로맨스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여기서 한국어로 한국 로맨스를 쓴다면, 이게 영어로 번역되지 않는 이상 알리 헤이즐우드가 나를 알 리가 없잖아? 테사 베일리가 한국 로맨스에 어떻게 좋아요를 누르겠나.  미카 드 리언 의 이 책은 다른 나라에도 번역, 소개되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영어로 쓰여졌기에 더 가능성 있지 않나 싶은거다. 이 로맨스의 월드는 정말이지 내가 알 수 없는 세상인 것 같은데, 국내에서는 딱히 로맨스 소설이 읽히는 것 같지 않고(아닌가요?) 로맨스 장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작가도 없잖아? 그런데 외국만 하더래도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이 로맨스 소설 작가란 말이지. 산드라 블럭도 로맨스 소설 작가를 연기했었고 거기에서 채닝 테이텀은 로맨스 소설 단골 표지 인물이었더랬다. 브룩 실즈 역시 로맨스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리는 연기를 했었다. 이게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엄청 잘 나가는 직업인것 같은데(물론 소설이 잘 팔려야 가능한거지만), 그러니 필리핀의 미카 드 리언이 알리 헤이즐우드를 알고 테사 베일리가 미카 드 리언을 알고.. 이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뭔가 영어로 로맨스를 쓴다는 것은 한국어로 로맨스를 쓰는것과 다른것 같은거다. 접근성과 시장성에서 확 달라지는 느낌적 느낌? 그래서 나의 장래 희망 갑자기, 급 생겼다. 그것은 바로바로


영어로 로맨스 소설 쓰기!!


내가 영어 빡시게 공부해서 영어로 로맨스 소설 써가지고 세계 시장을 죄다 흡수해버리겠다!! 졸라 영어로 인터뷰해주마. 아주 어릴 때부터 '인간으로 태어나서 언젠가 한 번은 책 써서 타임지 표지모델 돼야겠어' 생각했었는데, 책은 썼지만 아직 타임지 표지 모델은 못했잖아? 내가 내 나이 예순쯤 되면, 영어로 로맨스 소설 써가지고 타임지 표지 모델 한 번 해보겠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거 한 번 해봐야지.



갑자기 이런 결론 미안합니다..


이만 총총.

물론, 그녀의 작은 아파트는 개방된 벽마다 책꽂이가 있고, 책으로 쌓은 탑이 바닥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세 마리고양이는 미로에서 길을 찾는 햄스터처럼 책으로 쌓은 탑 사이를 누비며 다녔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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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3-11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상상도 못한 결론으로?? 영어로 로맨스소설을!! 하지만 우리에겐 AI가 있으니 가능합니다!!
다락방님 로맨스소설 리뷰는, 다락방님의 다양한 연애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꼭 하나씩은 있어서 더 재미나네요 ㅎㅎ 역시 풍부한 연애경험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아무튼 다락방님이 연애소설 내시면 꼭 읽습니다!!
근데 저렇게 설정을 많이 따와도 되는 건가요. 원작을 못 뛰어넘었으니 문제 삼지 않으려나..

다락방 2025-03-12 08:06   좋아요 1 | URL
어제 이 리뷰 써놓고 로맨스 소설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야한 부분.. 인데요. 야한 부분을 과연 내가 잘 쓸 수 있을 것인가.. 흠흠. 여하튼 야한 부분까지 쓰고 설레게도 쓰고 해가지고 뉴욕에 가서 출판사에 기고하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박 한 번 터뜨려보자, 만세!!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면 더 좋고! 그 돈 벌어서 이탈리아에 집 사자!! ㅋ ㅑ ~ 멋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지켜봐주십쇼. 제가 알라딘을 계속 하면서 제가 잘나가는 흐름도 함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영어로 로맨스 소설 쓰기, 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년 로맨스.. 로 가면 안팔릴까요? 흠흠.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3-11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하~~ 진짜 너무 비슷한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완전 베끼기인가 ㅋㅋㅋ그게 로맨스소설에서 많이 차용하는 틀인가봐요.
일단 제가 발견한 거는 증오에서 사랑으로 가는 거(바로 이 책),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으로 가는 거. 직업이랑 가족관계까지 비슷해서 뭐... 그래도 책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온다고 하니 그 부분은 작가의 몫으로 남겨둬야겠네요. 저도 독서괭님이랑 비슷한 생각인데, 다락방님의 연애경험과 겹쳐지는 지점 때문에 다락방님 리뷰가 더 흥미롭고 실감나고 재미있는 것 같아요.

‘남자가 무슨 친구냐, 전에 애인이었던 남자 앞으로 애인될 남자 둘 중 하나지 ‘ 제가 땅 치며 웃은 지점입니다. 100% 동의하지 않지만, 아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25-03-12 08:10   좋아요 1 | URL
샐리 쏜이 이 책을 읽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을 자꾸 했어요. 너무 많은 걸 가져와가지고요. 진짜 베끼기 같아요. 이래도 되는걸까요? 한국의 독자가 헤이팅 게임도 읽고 이 책도 읽어서 그 점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같이 책 쓰는 사람들끼리 이러면 안되는 것 같아요. 전 버터컵 이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 싫더라고요. 그게 무슨 책에서 가져온 표현 같았는데 하여간 오글거리고 좀 별로였어요. 너무 헤이팅게임 스러웠고요.

저도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당연히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애인이었던 남자 앞으로 애인될 남자중 하나..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다고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날카로운 자식같으니라고 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저는 이제 영어로 쓰게 될 로맨스 소설을 머릿속에 구상중입니다. 제가 한 번 잘 해볼게요, 단발머리 님. 그 때가 되면 제가 쓴 영어 로맨스 소설 읽어주세요! 중년의 뜨거운 로맨스는.. 안팔릴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25-03-12 10:59   좋아요 0 | URL
그 로맨스 소설은 영어로 쓰여져야 하고요 ㅋㅋㅋㅋ 그래야 많이 팔림 ㅋㅋㅋㅋㅋ
한결같은 락방님의 열혈독자로서 로맨스 소설 독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구상 너무 길게 하지 마시고요(하찮은 독자의 하찮은 잔소리 ㅋㅋㅋㅋㅋ) 일단 쓰기 시작하세요! 전체적인 에피소드 배열은 대강 얼개가 나오고 바뀔 수도 있고 그러잖아요.
중년의 뜨거운 로맨스라니 ㅋㅋㅋㅋㅋㅋ 아, 벌써부터 더워요! 찬물 한 컵 들이켜야겠어요!

다락방 2025-03-12 12:26   좋아요 1 | URL
일단 쓰려면 영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에 본격 작업에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알라딘에 페이퍼 쓸 때 딱히 머릿속에서 뭘 구상하지 않아도 손이 알아서 쓰듯이, 영어도 잘하게 되면 로맨스 소설도 그냥 키보드에 손 가져다 대는순간 다다다닥 나오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봅니다. 영어로 로맨스 소설 써가지고 부자 되겠어요!! 단발머리 님, 조금만 기다려욧!!

단발머리 2025-03-12 15:29   좋아요 0 | URL
꼭~~ 어느 정도까지, 어느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용하고 아름다우며 부커상 후보에 빛나는 영어 소설 문장 놓고 갑니다. 암요, 저는 기다릴 거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 … let me get you out of this city. You‘re not young, and you‘re scrawny and you never exercise. You‘re at risk. So let me pick you up and we‘ll go.˝ He added, ˝Just for a few weeks.˝ (7p)

Everyone needs to feel important.

I thought again about how my mother-my real one-had said this to me one day. And she was absolutely right.
Everyone has to feel like they matter. (244p)


다락방 2025-03-12 15:24   좋아요 0 | URL
You never exercise 인데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는게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도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거라는게 너무 좋지 않나요? 너 왜 그동안 운동 안했냐며 타박하지도 않고요.

뜬금없이 생각났는데 단발머리 님, 혹시 브루노 마스랑 레이디 가가가 함께 부른 노래 <die with smile> 아시나요? 거기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If the world was ending I‘d wanna be next to you
If the party was over And our time on Earth was through
I‘d wanna hold you just for a while And die with a smile
If the world was ending I‘d wanna be next to you


아마도 윌리엄의 져스트 폴 어 퓨 윜스 에서 져스트 폴 어 와일.. 이 바로 연상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3-12 15: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그래서 제가 저 사람 좋아하기로 했나요? 운동 안 하는데, 내내 운동 안 하는데, 위험하니깐. 아예 도시를 떠나자~ 이래가지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브루노 마스와 레이디 가가 조합은 모르는 일입니다. 저 노래 들으러 갈께요. 영어로도 연상 가능하신 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 샤라랑~~~ 💘💓💕

다락방 2025-03-12 15:41   좋아요 0 | URL
저 노래 부를 때의 브루노 마스를 사랑합니다. 표정이 진짜 간절해 보이거든요. (아마도 고음을 내는 탓이겠지만). 이 노래가 이번 그래미상에서 아마 듀엣상 탔을겁니다. 단발머리 님, 들어보세요!! 꺅 >.<

단발머리 2025-03-12 16:10   좋아요 0 | URL
공식 뮤직 비디오 보고 왔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저 브루노 마스 좋아합니다. 명랑하고 쾌활하게 잘생겨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래도 물론 잘합니다. 키는 작습니다.
그래미까지 섭렵하시는 다락방님~~ 앞으로도 좋은 곡 많이 추천 부탁드려요. 오늘 브루노 노래 정주행 갑니다.

잠자냥 2025-03-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제 영미문학 카테고리에서 다락방의 책 발견하는 것인가요?! 화이팅!!!!🥳

다락방 2025-03-12 10:54   좋아요 0 | URL
과연.. 기다려봅시다! 지금은 의욕충만인데 실력이 없어서 못하고 있거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0만 부 에디션, 양장)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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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브링리는 형의 죽음으로 인해 상실감을 겪으며 <뉴요커>지의 일을 그만뒀다. 그가 다시 일을 하기로 마음 먹은 곳은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방문했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 넓은 미술관에서 매일 다른 구역에 대한 경비일을 맡으며 숱한 예술 작품들 앞에 물끄러미 서보고 한참 들여다보면서 작품들로부터 감동을 받고 그 작품의 뒷이야기들을 공부해가며 그는 매일매일을 차곡차곡 형에 대한 그리움을 쌓아가고 애도한다. 미술관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다양한 작품들과 함께 보내며 어떤 날은 그동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작품에 크게 감탄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너무 오랜 시간 작품들과 함께 해서 예술이 가치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악기관, 이집트관, 현대미술, 무기와 갑옷 전시관등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작품들과 함께 인간 문화 역사에 대한 이해를 원하는데, 그건 결국 형의 죽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실감을 받아들이며 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법인 것이다.


나는 언제나 예술에 제대로 감동받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가지고 태어나는 감각일 수도 있을테지만, 어릴 때부터 예술 작품에 노출되는 환경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 나에게는 예술적 감각이라는 것은 뒤늦게 훈련한다고 터득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내 스스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찾아가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아직도 대다수의 작품을 보며 크게 감동을 받지 못하고,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가득할 때 그림을 보고 위로받기도 한다는데, 나는 아직 그림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사람은 되지 못한다. 물론, 가끔은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나도 어떤 그림들에는 크게 감동을 받기도 하는데, 어느 여름날 예술의 전당에서 본 샤갈의 그림이 그랬고, 뉴욕의 큰 미술관들 사이에서 작게 존재하고 있던 갤러리에서 본 클림트의 그림에서 그랬다. 그것들이 준 감동이 위로인지 기쁨인지 정확하게 짚어낼 순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내게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 예술이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메트로폴리탄의 그 많은 작품들은 페트릭 브링리에게 장미였다. 


우리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장미가 필요하다.

패트릭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하며 급여를 받고 있으니 큰 돈은 아니어도 그에게 필요한 빵은 먹을 수 있었을 것이며, 위대한 예술작품들 사이를 거닐며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감탄하며 그에게 필요한 장미도 충분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패트릭 브링리에게 단순히 빵과 장미만 준 건 아니었다. 그는 짧게는 몇십년전부터 길게는 몇백년 전의 작품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박물관에서 '과거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인 박물관들(p.850)'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데, 박물관 본연의 그 일이야말로 그에게 형을 충분히 그리워해도 된다고, 애도해도 된다고 대신 말해주는 것 같지 않았을까. 박물관이 예술품들을 기억하게 해줬다면, 그런 상징적 장소에서 패트릭 브링리는 형을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박물관이 작품을 품고 오래오래 유지되듯이, 그러면서 많은 방문객들을 받았듯이, 패트릭 브링리도 형을 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그래도 된다는 위로와 격려를 받은게 아닌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패트릭 브링리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장 크게 얻은건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경비일을 하며 묵묵하게 서 있는 순간마다 말을 걸어주던 관람객들, 혹은 위대한 그림 앞에서 모사하던 예술가 지망생들, 그에게 이 모든 작품들이 정말로 진짜가 맞냐고 묻는 관광객들. 그리고 그와 함께 교대를 하거나 함께 일하던 다른 경비원들. 몇백명이나 되는 동료 경비원들의 이름을 익히며 그들 개인의 역사를 듣고 또 자신의 역사를 말하면서 친근함을 유지하면서 패트릭 브링리는 앞으로의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을 받는다. 사람에겐 빵도 필요하고 장미도 필요하지만, 빵과 장미를 건네는 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형을 잃은 상실감으로 그가 지금 이곳에 흘러왔다면, 그로부터 5년후 그는 이곳에 다니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새로 태어난 아들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세상을 떠나서 기억속에 남겨지지만 누군가는 새로이 찾아와 그의 삶을 더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애도의 시간들을 보내다가 그는 이제 누군가를 새로이 돌봐야 하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지속된다. 생은 이렇게 순환한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대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p.269



박물관에서 십년간 일을 하면서 그 사이에 패트릭 브링리에게는 딸도 생긴다. 아이 둘과 함께 활기찬 삶을 살면서 그는 십년간 일했던 박물관에 작별을 고한다. 그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그의 새로운 소식을 축하해주고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는 지금 이곳을 나간다고 해서 이들과 영영 작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곳, 각자의 역사를 가진 대단한 사람들이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곳에 그는 자주 들를 것이다. 작품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이 되어 방문할 것이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서도 방문할 것이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의 애도가 진행되는 것은 수많은 예술 작품 때문에 그리고 그의 예술을 느끼는 감각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구나, 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에게 그의 애도가 가능해지고 여전히 살아나가야 할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사람 때문에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몇백명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던 이 미술관에서 나가 새로이 선택한 직업은, 맨하튼 시내를 가이드해주는 일이다. 결국, 이 도시를 낯설어하는 사람에게 이 도시를 설명해주는 일을 그가 하고자 한다. 그는 예술 때문에 박물관에 갔을지는 모르나, 그리고 도시를 샅샅이 보고 싶어 가이드를 선택했을지 모르나, 그의 내면 저 깊은 곳에서는 이미 자신에게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8년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했었다. 책을 읽노라니 내가 방문했던 그 때 그곳에 패트릭 브링리가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전시실에서 저 전시실로 옮겨가며 나는 많은 경비원들을 보았는데, 그들중 한 명은 패트릭 이었을 수 있겠구나. 패트릭이 아닌 경비원들도 모두 저마다의 역사를 가진 사람이었겠지. 나는 일자리로써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생각한다. 박물관은 내가 작품을 보러 가는 곳 그 이상은 아니었는데, 패트릭 브링리는 그곳에서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동료 경비원들이 너무나 다양한 삶을 살아온 개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화이트칼라 직종은 비슷한 교육을 받고 관심도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료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재능과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경비원의 세계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메트가 새로운경비를 고용할 때면 기본적으로 ‘와서 면접보세요‘라는 내용의 짧고도 명료한 광고를 낸다(예전에는 《뉴욕타임스》, 요즘은 온라인에). 경비 담당 부서에서 찾는 사람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람이고 그들은 이 일에 적합한 다양하고도 방대한 인력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 P183


덕분에 나는 일자리로써의 박물관을 생각해보고 직업으로써의 경비원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곳에서 찾는 일꾼이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게 아니라면, 게다가 패트릭 브링리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출신나라도 다양한데,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그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 그곳에서 다른 동료들과 목례를 나누면서 끝나면 바에 가 맥주도 한 잔 하면서, 그리고 대부분의 낮시간은 작품들 앞을 서성거리면서 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적지 않은 시간을 패트릭 브링리처럼 어떤 그림의 역사에 대한 문헌이나 책을 찾아 읽으며 지식을 쌓고, 혹여라도 질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아는 것들을 답해주면서, 웅장한 예술작품들 앞에서 가끔은 벅차하는 그런 일을, 내가 직업으로써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애도가 일어나고 다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다지게 한 이 장소에서 일하게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갖게 되고 어떤 의욕을 다지게 될까. 그곳은 나에게 어떤 장소가 될까? 내가 받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빵과 장미를 얻게 될 것은 틀림이 없다. 물론, 사람도.



삼십년간 행복을 연구해온 서은국 교수는 자신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 우리의 원시적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음식과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행복을 따로 연구해온 건 아니지만, 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과 사람이라는 것에 적극 동의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면 거기에 더해 아름다운 작품들도 가득하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만한 곳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패트릭 브링리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형을 애도하고 삶을 계속해나가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닿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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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04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야 왜케 잘 썼어?
이 인간 왜 잘 썼지? 리뷰대회 있나?? 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2-04 11:4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리뷰대회에서 똑 떨어진 리뷰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나는 원래 좀 잘 쓰지 않았나요? 흠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5-02-04 11:51   좋아요 0 | URL
어쩐지🤣🤣🤣👏👏👏
 
기억의 몫
장성욱 지음 / 득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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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 을 보았다.

주인공은 대통령실 대변인 '백사언(유연석)' 과 대통령실 수어 통역사 '홍희주(채수빈)'인데 서로 비밀을 감추고 있다가 그것을 알게 된 후에도 사랑한다, 는 로맨스가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과 또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복수에 대한 욕망이 펼쳐진다.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는데,

백사언의 개인적인 일까지 돕는 회사 후배 중에 '박도재(최우진)' 행정관도 비밀을 숨기고 있었고 복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형을 잃은 슬픔과 상처로 가해자이며 살인자인 '그'의 옆에서 언제나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살고 있었는데,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이고자 시도까지 하고난 후에야, 자신이 알고 있는 이 가해자가 '진짜 가해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거다. 오히려 자신이 진짜 가해자를 도와 무고한 사람을 망치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그 때 그가 그런 말을 한다. "복수 하나만을 바라며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한거지?"


자, 책 얘기를 해보자.

서른한 살 '박선용'은 어느날 유튜브 방송을 통해 자신의 팔목에 난 상처들을 보이며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음을 드러낸다. 가해자에 대한 사항들을 특정함으로써 그의 구독자와 팬들은 가해자의 신상을 털어내고, 가해자의 사진까지도 공개된다. 눈을 가렸다고 해도 가해자의 지인이라면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상황. 가해자 '임영빈'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얼굴도 잘생기고 곧 교사와 결혼까지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이 일이 터지자 당황한다. 결혼식 사회를 봐주기로 했던 친구가 손절하고 회사에서는 나가라고 한다. 게다가 갑자기 집에 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얻어맞기까지 한다. 


임영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앞부분을 읽노라면 중학교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고 피해자에 대한 기억 역시 없기 때문에 '어쩌면 아닌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닐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이 사람의 일상이 천천히 파괴되어 버리는게 과연 온당한가? 라는 생각을 할무렵,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유명 배우인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엄마가 그 일을 수습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들인 영빈을 위해, 영빈의 미래를 위해, 그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빈에게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말한다. 그건 잘못한 게 아니라 실수였을 뿐이라고. 그 일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그 일을 수습하고 또 아무 영향이 없기를 바란건, 그것을 잘못이 아니라 실수라 말한 건, 그 일이 배우인 자신에 대한 타격을 우려한데에서 나온게 정녕, 아니란 말인가?



박선용은 학창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고, 가해자의 엄마가 내민 돈으로 컴퓨터를 사서 줄곧 방안에서 게임만 했다고 했다. 그게 지금 건물까지 살 정도로 유명한 프로게이머로 만들어 준거라고 말한다. 가해자는 금수저였다. 외모와 경제력 그리고 곧 결혼하게 될 예비신부까지 부족한게 하나도 없는 사람. 박선용을 응원하는 아주 많은 남자들이 이 서사에 열을 올리며 가해자 임영빈을 처단하길 원한다. 박선용에게 일어났던 일은 자신들이 지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자기들이 겪었고 또 지금도 겪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잘생기지도 못했어 돈도 없어 여자도 없어 취직도 못하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학창시절 남 때린 새끼는 모든걸 다 가졌지? 저런 새끼는 내가 응징해야 해! 라며 피해자의 편이 되어 가해자를 응징하고자 한다. 이것은 정의 구현인가? 이것은 잘못된 걸 바로잡는 길인가? 저 사람의 복수를 내가 대신 해주는 것은, 어쨌든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일이니 괜찮은것인가?


박선용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사실을 고백했던건 유튜브 방송의 구독자를 늘리기 위함도 있었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기도 해서였다. 이 일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임영빈은 박선용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이걸 제대로 수습해야 직장도 친구도 그리고 약혼자 까지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그는 박선용에게 '미안해' 라고 수없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는 뭐가 미안한지 모른다. 왜냐하면, 전혀 기억에 없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더 큰 폭력을 당했고, 손목이 담뱃불로 지져지고, 배며 정강이를 얻어맞기 수차례에 이르렀고, 정말로 나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했던 피해자의 삶은 그런 상태로 지금까지 쭉 이어졌는데, 그러니까 유명해지자고 결심해지게 된 계기가 학교폭력 피해 때문이었는데,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날 알게 되면, 가해자인 그 놈도 어딘가에서 자기 잘못을 자꾸 떠올리고 뉘우치고 있겠지, 했었는데, 막상 내 앞에 나타난 가해자 새끼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억이 없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너무도 두렵기만 했는데, 걸을 때면 뒤에서 저새끼가 따라오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웠는데, 그런데 저 새끼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괴롭지 않았다고? 양심에 찔리지 않았다고? 죄책감도 없었다고? 아예 깡그리 잊고 살았다고? 저 얼굴로, 저 스펙으로, 저런 여자친구까지 가지면서 잘 살고 있었다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뭘한거지?


내 삶은 그걸 잊기 위해 몸부림치고 여전히 무섭고 떨리고 그러니 나만큼 너도, 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온 삶인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래?



"나는 언제나 네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그러기르 더 바랐지. 어떤 이유에서건 나를 보며 불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어. 겨우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한 복수였던 거야. 그런데 너한테는 이게 다 기억조차 못 하는 일이라니." -p.229


박선용은 그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를 용서하고 그 과정을 방송하면서 분노했던 구독자들도 달래려고 했다. 그렇게 진행될거라고 생각했고 계획했다. 그러면 다 좋아지는 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 이 일은 박선용의 계획을 변경시킨다. 어떻게 기억하지 못해? 나는 평생 어쩔 수 없이 시달리며 살았는데? 박선용은 기억하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임영빈에게 그렇다면, 앞으로라도 평생 기억하도록 만들기로 한다. 가해자였던 임영빈에게 남은건 앞으로 피해자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남았지만, 박선용에게는 어떤 삶이 남게됐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책의 결말이므로 피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두 삶 모두 평온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여기에는 피해와 가해자 둘만 있었던게 아니다.

왜 귀한 집 아들에게 피해를 입혔냐며 오히려 피해자인 손자를 질책했던 할머니가 있었고, 피해자의 곁에는 없었던 부모들도 부재함으로써 영향을 미쳤다. 그 가난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함이, 그로 하여금 가해자에게는 괴롭혀도 되는 아이로 만들었다.

가해자의 엄마도 이 상황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아들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면, 아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시켰다면, 그러면 그 후에 박선용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임영빈의 삶도 마찬가지. 그러나 가해자의 엄마는 가해자에게 그 일은 단순한 '실수'라고 말함으로써 제대로 된 도덕으로부터, 교육으로부터 멀어졌다. 피해자에게는 삶 내내 지독한 기억을 주었고 가해자에게는 기억 자체를 없애주었다.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변이 있다.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건, 혹시 나에게도 내가 기억못하는 어떤 가해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이렇게 새까맣게 잊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을 때린 기억을 잊을 수 있나? 다른 사람의 손목에 담뱃불로 지진 게, 잊혀질만한 일이야?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는데,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국민학교 때는 전교에서 인기있었던 아이와 한 반이었는데, 그 아이가 왕따를 주도한 적이 있다. 왕따 당한 아이를 어떤 이유로 왕따 시키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인기있는 아이 주변엔 늘 친구들이 많았고 이 아이에겐 많지 않았다. 나는 그런데 이 친구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랑 놀았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도 놀았다. 이름도 기억한다.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 당시에 그 아이랑 노는 내 심정은 '왕따는 나쁜거야, 너의 뜻대로 되지 않겠어!' 같은 거창한 건 아니었고, 그냥 이 친구가 좋아서였다. 나는 좋은데? 이런거. 그래서 처음엔 눈에 띄지 않게 놀아야지 했다가, 그냥 나중엔 대놓고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왕따를 당하거나 하진 않았다. 전교에서 인기 있는 아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대로 또 졸라 강해가지고... 그 아이가 나를 왕따시키자고 했으면 내가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내 주변으로 무리가 형성되었을 거다. 


중학교 때도 그랬다.

친구 몇 명이 '쟤랑 놀지 말자'고 했다. 그러면서 눈에 띄게 그 아이를 따돌리려고 했다. 그 때는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눈에 띄게 다같이 한 사람을 무시하는 건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냥 걔랑 놀았다. '쟤랑 놀지 말자' 고 말했던 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아이였고 나랑 너무 친해지고 싶다고 편지를 자주 보내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나도 그 아이에게 잘해줘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그런데 다른 아이를 그렇게 무시하는 건 너무 별로지 않나.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싫어해서 일대일로 상대를 미워하고 무시할 수는 있지만, 그런데 무리들 틈에서 다같이 한 명을 무시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그래서 그냥 그 말 듣자마자 보란듯이 따돌림 당하는 아이 옆에 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도했던 아이가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를 가리키며 "락방이 때문에 따돌림도 못시켜" 라고 말했더랬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곁에 아무도 없는 건 정말 바라지 않는다. 그 사람의 주변에 그 사람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기 편은 있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약한 사람과는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 그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쪽이 더 약하다면, 그건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괴롭힘이지.


그러니까 학교폭력, 왕따 같은 단어를 접하고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이 두 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저 기억들은 오래전의 것이고 (보진 않았지만) <더 글로리>같은 폭력은 그 당시에 내 주변엔 없었다. 어쩌면 있었는데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기억속에는 피해자인 나도 없지만 가해자인 나도 없다는 것. 그런데 장성욱의 이 책을 읽다보니, 기억이란 어차피 왜곡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 역시 나에게 나쁜 걸 잊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러다가도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후회하는, 후회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게는 후회되는 일들이 많다.

그건 나라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선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그 일이 당시에 괴로웠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것들이다. 내가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 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였는데.. 같은 것들. 여전히, 아직도 나는 어떤 기억들이 불쑥 떠오를 때면 괴롭다. 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게 너무너무 괴롭다. 상대의 손목에 담뱃불을 지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분명 어느 때의 나는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했던 사람이다. 지금 기억하고자 하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지만, 이건 불쑥불쑥 예기치않게 찾아오곤 한다. 아, 그 때 그랬지, 아 씨발 왜그랬지 ㅠㅠ 막 이렇게 되어버려. 그런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고 그럴때마다 생각한다. 너무너무 괴롭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에게 발길질을 하고 담뱃불로 지진 걸 새까맣게 잊을 수가 있지? 이게 어떻게 그렇지? 말이 되나? 나였다면, 내가 가해자였다면 나는 제대로 된 직장생활도 못했을 것 같다. 상담 받으러 다녀야했을 것 같아. 아마 수시로 내 머리를 쥐어뜯었을 텐데. 아 씨발 나는 쓰레기야.. 이러면서 괴로워하면서 대인기피증 까지 생겼을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그걸 .. 잊고 잘 살 수 있지?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다 못해 박연진도 문동은에게 자신이 가해한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그걸 잊었다고 말한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인 나는 뭘 느껴야하지? 충동적으로 용서의 계획을 복수의 계획으로 바꾼 것은, 인간이라는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에게 너무나 당연한 수순 아니었나.



오늘 출근길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추워졌다. 몸이 떨릴만큼 추워졌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이들의 삶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앞으로까지 행복학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추워졌다.

이런 식의 끝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런 식의 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왜 살아온걸까? 뭐한거지? 라는 생각이 한 편에 들었다면, 다른 한 편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지? 가 마땅히 따라오는게 좋을 것 같다. 그래야한다.



사족인데,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문종필 문학 평론가의 발문은 별로였다.

무엇보다 '박선용'을 '박신용' 이라고 내내 잘못 기재했다.

한 번의 오타가 아니라 발문 끝까지 내내 그런다. 

주인공의 이름을 잘 못 기재하다니, 책을 제대로 읽은 건 맞아? 라는 의문이 들어서 발문 전체가 별로로 느껴졌고, 어떻게 편집자도 잡아내지 못한채 책에 실렸을까? 작가에게 미안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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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1-15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은 언제부터 그렇게 멋있었죠?”
“태어날 때부터…”

잠자냥 2025-01-15 11:16   좋아요 2 | URL
˝독셔괭은 언제부터 그렇게 간지러웠쬬?˝
˝태어날 때부터....˝

다락방 2025-01-15 11:16   좋아요 1 | URL
하아- 뭔 글만 쓰면 자기 잘난척이 나와버리니 이거야말로 큰일입니다. 하아-

독서괭 2025-01-15 11:39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 초등다락방… 아니 국민다락방 시절부터 너무 멋있어서 이 대사가 생각났어요. 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ㅋㅋ 말이 쉽지 그 분위기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 옆에 서는 게 쉽지 않지요. 역시 다락방님과 친구가 되는 건 복이다 복 큰복!! 잠자냥님 좋겠다!!

다락방 2025-01-15 12:00   좋아요 1 | URL
음 그런데 일진들이 왕따 시키고 그러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만약 드라마나 책에서처럼 그런 무서운 애들이 학교폭력 하는거였다면 저도 다를 바 없었겠죠. 제가 경험한 건 다 평범한 애들이 평범한 애들한테 한거라 저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진짜 멋지려면 일진한테 대들어야 멋진건데.... 저 때만 하더라도 일진은 딱히 없었어요. 고등학교때는 좀 있었지만... 그 때는 같은 학급내에 학교폭력은 없었고요. 일진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겁니다..

잠자냥 2025-01-15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은 언제부터 그렇게 잘먹었죠?”
“태어날 때부터…”

다락방 2025-01-15 11:17   좋아요 2 | URL
그래도 어릴 때는 엄마가 ˝쟤는 왜 먹어도 살이 안찌지?˝ 했었습니다.... 그랬었습니다.......(먼 산)

2025-01-20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 강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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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정찰을 위해 이곳에 머무른다지만 민간인에게도 가차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자고 서로에게 일렀다. 그들의 눈에 띄면 안돼, 우리는 숨어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그 날도 잘 숨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가, 우리와 함께 있던 개가 짖었다. 조용히 하라고 우리 모두 일렀지만 그러나 개가 짖었다. 아마도 개는 다른 이의 기척을 들은 것 같았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우리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아니라고, 살려달라고,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고, 그저 이곳에서 쉬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아들었다고 달랐을까. 그들은 총을 쐈다. 내 아버지를 향해, 내 오빠를 향해, 내 삼촌을 향해. 그리고는 나를 그들의 차로 끌고 갔다.

나는 왜 살려두는걸까. 아직 채 어른이 되지 않아서? 아니면 여자라서? 나는 내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맞딱드리고 이제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어차피 죽음은 곧 내게도 올 것 같았다. 어쩌면 죽는게 더 나은걸까. 나는 무력하게 그들의 차에 들어갔고 그들의 요새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한 후 장교로 보이는 사람은 다른 병사들 앞에서 나의 옷을 찢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남자 병사들이 가득한 곳에서 나는 옷이 찢겨진 채로 덜덜 떨어야했다. 이곳은 사막 위이고 모래들은 뜨겁게 타오르는데, 나는 떨었다. 이내 다른 병사 한 명이 호수를 연결했고 그 호수를 통해 나오는 물을, 장교는 내게 향했다. 물줄기가 내게 쏟아졌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병사들 앞에서 고스란히 내게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그들중 몇몇은 키득대며 웃었다. 이내 장교는 병사 한 명에게 뭐라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그 병사는 달려갔다 와서는 장교에게 뭔가 건넸다. 장교는 그걸 내게 던졌다. 비누였다. 장교는 자신의 몸짓으로 내게 말했다. 비누로 씻으라고, 내 가슴에, 내 다리에, 비누 거품을 내라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성들의 눈길 속에서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그가 시키는대로 비누칠을 했다. 장교와 그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거품을 냈다. 장교는 다시 손으로 막고 있던 호수의 물을 내게 쏟았다. 내 몸의 비누는 헹궈지고 있었다. 그가 옷을 찢은 이유가 강간이 아니라 몸을 씻는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을까. 씻기를 마치자 병사들이 옷을 가져왔고 나는 누구의 옷인지 모를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들이 이끄는대로 어딘가에 갇혔다. 병사 한 명이 보초를 섰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일어날 법하다고 모두가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아까 내 아버지와, 오빠와, 삼촌과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보초를 선 병사는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거였을까. 그것이 나의 안전이 아닌 것에는 틀림없다. 그가 지키는 건 나의 탈출일것이다. 병사들 몇이 차례대로 들어와 나를 강간했다. 비명을 지르고 악을 써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장교가 돌아왔고 나는 장교에게 뛰어가 당신의 부하들이 나를 강간했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그는 내 옷을 찢었지만 강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강간 만큼은, 살인을 저지를지언정, 강간만큼은 하지 않으려는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장교는 나를 끌고가 병사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했고 이내 분위기는 엄숙해졌다. 그리고 그가 끌고간 곳은 아까 내가 갇혔던 곳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이동식 침대가 설치된 곳은 장교의 숙소였다. 내 침대가 장교의 침대 조금 옆에 마련되었다. 나는 옆으로 누워 숨을 죽였다. 여전히 나는 두려웠다. 그가 병사들의 강간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가족을 잃었던 일과, 병사들 앞에서 몸을 씻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제 눈물도 마른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살 수 있을까. 이대로 사는 건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여기서 일을 시키려는 걸까. 장교가 나를 여기 재운걸 봐서는 더이상의 강간은 없는 거 아닐까. 그는 나를 여기에 두고 갈까. 그들은 나를 죽이려는걸까. 그들은 내게 일을 시키려는 걸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를 마을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아직까지 살려뒀다는 건, 앞으로도 살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내가 사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삶은 그리고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옆에 누운 장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아픈걸까. 어딘가 불편한걸까. 지금은 몇시인걸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잠을 이루지 못하던 장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가 내 침대로 왔다. 내 옆에 누웠다. 내가 크게 착각했다. 그는 나를 병사들의 강간으로부터 지키려던게 아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내 앞에서 총을 쏜 사람인데, 나에게 수치를 안겨준 사람인데. 그제야 나는 내가 살고싶어서 어떻게든 선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 말을 모르잖아, 아마도 내 가족들이 남자니까 두려웠나봐, 그는 나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 비누를 던진게 아니야, 그는 아마 더러운 걸 못참는 사람인가봐, 그는 강간은 나쁜거라고 생각하나봐, 이 모든 선해가 나의 억지였다. 다른 남자들의 강간으로부터 나를 떼놓은 장교는 자신을 위해서는 나를 떼놓지 않았다. 그는 내가 비명을 지르자 자신의 손으로 내 입을 막았고, 그 밤, 나를 몇차례나 강간했다. 내가 어느 오두막에 갇혀도 강간을 당하는구나. 희망은 없구나. 나에게 미래는 있을까. 

날이 밝았다. 내 몸도 마음도 지쳤다. 나는 다시 끌려나와 처음 갇혔던 오두막에 갇혔다. 장교는 차를 타고 나갔고, 그러자 또 병사들의 강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불쑥 이렇게 죽는걸까,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교가 돌아왔다. 나는 다시 장교에게 울며 소리쳤다. 나를 이제 그만 놔달라고, 당신의 병사들은 나를 강간한다고, 제발 나를 놔달라고 울며 소리쳤다. 장교는 병사들에게 무언가 지시했고 그러자 한 병사가 큰 삽을 들고 나왔다. 뭐지? 왜지? 장교와 병사들은 삽을 들고 나를 계속 끌고갔다. 어딘가에 멈췄을 때, 장교는 병사에게 또 무언가 지시했고, 그러자 병사는 가져온 삽으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사람 한 명 들어갈 구덩이가 파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 날 저기에 넣으려는 거구나, 날 저기에 묻으려는 거구나. 안돼. 나는 살고싶다. 나는 살고싶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를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총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기 저 구덩이에 묻히기 전에, 암흑이 찾아왔다. 나는 더이상 이곳에 없었다,



로 진행되는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

이 책의 1부를 읽으면서 그랬다.

유독 깔끔한 장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명분을 갖고자 최선을 다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자신의 몸 씻기를 멈추지 않는, 그래서 포로로 잡아온 소녀를 벗겨 비누칠을 시키는 걸 보면서, 그런데 그녀의 말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나 역시 듣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죽이고, 자신의 곪아가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몸을 씻는 장교를 보지만, 그러나 무방비하게 끌려온 소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그 소녀의 이야기를 내가 리뷰로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병사들에게도 그리고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고 독자로서 희망을 가졌던 장교에게도 강간을 당하고 이내 죽음까지 당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삶이, 그렇게 스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이야기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로 그리고 더이상의 이야기는 할 수 없는채로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써보겠다고 생각했다. 내 리뷰는 소녀의 이야기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갈등이 없는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것 하나 빼고는 그녀와 공통점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전장에 있었고, 군인들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 눈 앞에서 함께 있던 성인 남성들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봤으니까. 나는 그런결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써도 될까. 그녀는 갇혔고 수치를 느껴야했고 강간을 당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감히 내가 써도 될까, 라고 갈등했다. 그런데, 이대로 소녀를 그대로 묻어두는 건 세상이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진 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다. 이야기없이 사라지는 여자는 더이상 두고볼 수가 없다, 고.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아, 내가 오만했구나 생각했다. 

작가가 하고 있었다. 작가가 소녀의 삶을, 소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2부의 다른 화자가 사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강간 살인 사건을 알게되었고 하필 그녀가 살해당한 날이 내가 태어난 날짜와 같네, 하면서 그 사건을 면밀히 살피기로 한거다. 그 장소에 가보자, 그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 들어보자, 그녀는 자신이 가서는 안되는 위험한 지역으로 차를 끌고 간다. 몇 번의 검문을 거치면서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을 파보려고 한다. 살해당한 소녀의 사망일이 내가 태어난 날짜와 같다는 사소한 이유로 그녀는 목숨을 담보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거다. 


그러나 그녀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25년전의 상황과 지금이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25년전 소녀가 살았던 세상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것. 

25년전 소녀가 움직임마다 두려워했듯이, 지금 움직이는 그녀도 움직임마다 두려워해야 했다.

25년전 소녀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았듯이, 지금 그녀도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 책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다.

25년이라는 간극을 한 자리에서 보게 해주고, 숨겨진 이야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이미 사라진 사람을 끝없이 기린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쓰고자 했던 소녀의 이야기를,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게끔, 이 책이 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내가 왜 문학을 읽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그 기사는 그 소녀의 이야기를 안 다루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P92

그건 장애물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 공포라는 장애물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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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0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아직도 멀었나봐요.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나 봐요.
나는 그 밤에, 장교의 숙소에서 장교가 인간처럼 행동하기를 바랬나봐요ㅠㅠㅠㅠ 내가 바보네요.....

이 책 읽고 싶은데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려서 가능할까 모르겠어요.

다락방 2025-01-10 07:59   좋아요 1 | URL
이게 처음에 장교가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에 장교의 행동을 자꾸 선해하고 싶어집니다. 작가의 말을 읽다보면 가해자에 동화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정말 잘 쓰여진 소설입니다. 강간에 대한 잔인한 묘사나 이런게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심장이 그렇게 벌렁거리지는 않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읽고나면 아프기 때문에.......... 저는 문학작품으로서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지만, 그런데 아프긴 할거니까...... 선택은 단발머리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놓치기엔 너무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달자 2025-01-1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다락방님 ㅠㅠ 전 어쩌면 다락방님이 이 책을 읽고 후기를 써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러요..: 정말 딱 다락방님과 같은 페이지에 같은 생각을 하며 읽었어요.. 근데 전 마지막장을 덮고 나서 머릿 속이 하얘지더라구요. 후기를, 내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동시에 아무 글자도 못쓰겠더라구요… 다락방님은 어쩜 읽고 생각한 대로 글을 쓰시나요 멋져 넘 멋져

다락방 2025-01-14 11:35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이 책 읽고 달자 님 리뷰를 다시 읽었거든요. 그랬더니 그 리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확- 오더라고요.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달자 님. 사실 저도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지 몰라서 이정도의 글이 나왔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정말 이 책이 좋은 책이며 모두들 읽어봣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