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32
마지 피어시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2주동안 틈틈히 ‘접속’했던 페미니즘 유토피아의 세계. 가부장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 역시 힘을 잃은 2137년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던 독서경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컷 읽겠노라 벼르면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바가지 타놓고 책상에 앉은 밤인데, 사실은 실컷 쓰고 싶은 날 인가보다.

오늘, 아니 어제는 이별했다 믿었던 어떤 과거들이 발목을 잡았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뿌리치는 다른 종류의 사건이 연달아 두 번 일어났다. 두 사건 다 마음 속 상처와 무관하지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눈물이 나지 않고 화가 났다. 책을 읽다 말고 일기장에 왜 때문에 어이가 없고 화가났는지 적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모든 진실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만 보이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왜 이제서야 쓸 수 있는 것인지.
아니 어쩌자고 난,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종료되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만 겨우겨우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며, 차라리 적지않고 그냥 덮어버려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을 사건들을 헤집어 파고, 시간내어 곱씹는 지. 그래야만 괜찮아지는 건지.

누군가들이 ‘넌 너무 과거에 매여사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하나같이 나를 잘 안다는 사람들이 나를 위한답시고 해준 말이었지만 이 밤, 콕콕 찔리는 느낌으로 되살아나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나를 의심하게 하는 그때의 나에게 해가 되었던 말들’이었지 싶다.

‘과거에 매여있다’라...
여전히 그 혐의를 벗을 수는 없지만, 조금씩 그 과거들이 아주 멀었던 과거에서 꽤 가까운 과거로 당겨지고 있는 느낌.
여전히 비슷한 실수와 잘못들을 반복하긴 하지만, 상처를 인식하는 시간과 아픔을 깨닫는 시점이 조금씩 당겨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오늘의 일기를 적으면서는 조금 안도했다. 그만큼 나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무언가들을 예전보다는 빨리 캐치해내고 있다는 것이겠지. 여전히 더딘 편이지만.

과거에 매여있는 미련한 나를 좋아해보려고 한다.
과거와 재빨리 단절하고 냉큼 내딛는 미래만큼 위험한 것도 없거니와,
과거에 산다(?)는 내가 과거를 떠올리며 위로받는 것은 명확히 현재이기도 해서. (그 말을 한참 들을 때는 현재를 긍정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야 옛날의 일들을 겨우 꺼내서 생각하고 적어내리는 것은
그 시절을 낭만화하기 위함도 마냥 자책하며 진저리 치기 위함도 아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해석해 내야만 나는 지금의 삶을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뚜벅뚜벅 살아가보려고.

요즘 내가 공들이도 있는 것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 정도다. 열심히해도 별로 지치지 않고 내키면 언제고 그만할 수 있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내가 연마(?)하고 있는 이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는 데 맞춤한 문장이 생각나서, 이름붙여 보았다.

“삶을 해석하는 능력”
난 그 능력을 키우고 싶은 거였다.

언젠가는 과거가 아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잘 해석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혹은 지금처럼 사후에라도 해석하는 것을 주저않는 사람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6-12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쟝쟝 2019-06-12 19:55   좋아요 1 | URL
붕붕툐툐님 안녕하세요, 정말 왜 우리 친구가 아닌거죠? ㅋㅋㅋ !!!!! (저도 이렇게 익숙한데..) ㅋㅋ 먼저 친구 신청 고맙습니다!
 
미루다가 영영 못 읽을까봐 - 강연으로 쉽게 시작하는 노벨문학상 읽기
심원섭 외 지음, 한국근대문학관 기획 / 홍시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일단, 책의 만듬새가 예뻤다.

연보라색도 예쁘지만, 작가들의 일러스트와 인스타그램이 떠올려지는 정성스런 내지 편집.. 빌려봐서 몰랐는 데, 검색해보니 겉싸바리에는 노벨문학상 연보가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한다. (센스+정성 돋고요) 무엇보다 넘나 뼈때리는 책의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다지. 생각보다 내용도 알차서 읽고나니 교양이 막 쌓인 것 같은 기분.


2. 최진석_ ‘알렉시예비치 목소리 소설’

여전히 소설에 무지몽매한 내가 이 책에 언급된 작품들 중에 완독한 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데미안>정도. 그래도 좀 읽었다고, 알렉시예비치 편은 특별히 잘읽혔다. 작년에 그녀의 ‘목소리 소설’을 읽으며 어찌나 마음이 복잡했던지 (방금 찾아보니) 당시 알라딘 독후감에 “결론내지 않음을 견디는 연습”을 하겠다고 적어놨었다.

소설을 읽는 내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였는데, 뭔가 그 생각이 왜 떠오르는지도 설명이 안됐었다.🤯 이 책을 읽으니까 좀 정리되는 기분이다. 최진석님이 그 혼란함의 정체를 아주 장황하고 간결하게(?!) 설명해주셨다!!! (ㅠㅠ소설 다 읽고 독후감을 쓰고도 정리못한 부분을, 소설을 정리한 책을 읽어야 정리되는 나의 뇌는 참 나답다🤷🏻‍♀️🤷🏻‍♀️🤷🏻‍♀️)

“(125) 작품을 읽다보면 당혹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인터뷰한 증인들의 상당수는 물론 여성들이에요. 그들이 호소하는 삶의 비극은 전쟁으로 인해 빼앗기고 훼손된 여성의 삶과 권리로부터 연유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박탈당한 여성성이 전통적인 가부장제 하에서 형성된 여성의 이미지에 굉장히 가깝다는 데 있습니다. 증언자들은 여성으로서 ‘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 자기들의 일생을 한탄하고 슬퍼하며,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을 원망합니다. 그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남자들의 일’이기 때문이에요.”

“(131)그럼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요? 그녀의 문학이 갖는 진정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도덕인가요, 윤리인가요? 저는 방금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에 나오는 여성 등장인물 들이 도덕적 경계 안에 머무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 작가의 문학은 단지 우리의 통념에만 복무할 뿐, 별다른 새로운 의미를 갖지 않는 걸까요? 하지만 우리는 알렉시예비치의 문학에서 모종의 파토스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는 것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작가의 진정성이란 게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했는지 캐물을 필요가 있어요. 달리 말해 그녀의 글쓰기가 어떤 진정성을 일깨우고 문학의 윤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있다면, 내용이 아니라 형식(표현방식)으로부터, 사실의 형식이 아니나 허구의 형식이라는 이중의 시점에서 이야기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147)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이런 유령적인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도덕을 말하지만 도덕을 빠져나가고, 사실을 추종하지만 늘 사실과 배치되거나 반하는 비남성적인 흐름이랄까요. .. 우리가 사실과 동치시키고 싶어하는 실재the real는 손에 잡을 수 있는 현실을 빠져나가 단지 흩뿌려지기만 하는 목소리로 실존하고, 그 목소리는 발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듣기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소리 소설은 본래 허구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의 윤리는 병리적일 수 밖에 없는 게죠.”

“(149) 역사에 기입되지 않은 비가시적 실존으로서의 증언들, 그들의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들리지만 입증할 수 없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기에 허구적이지요. 건전하고 승리에 찬 도덕이 아니라 우울증적 충동으로만 표현되기에 병리적이라고 할 만해요. 우리가 증인들의 이야기에서 남성의 도덕과 권위, 질서의 각인을 필연적으로 찾아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와 같은 병리성의 일면일 겁니다. 요점은 여성 증언자들의 목소리에 포함된 남성 도덕을 발견해 그들을 힐난하거나 절하시키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여성의 목소리에 실린 남성과 도덕의 파열점, 그 좁은 틈새로부터 흘러나와 이리저리 유동하는 비일관적이고 망가진 목소리를 포착하여 끝까지 듣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유령적 대상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 역시 유령적이라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겠어요? ‘사실의 문학’이 아니라 ‘유령적 글쓰기’로 알렉시예비치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듯 합니다.”


음하하! 기억해 둘 만한 문장들을 가져와 보았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제가 그래서 혼란스러웠던 것이로군요? 책을 읽으면서 가려웠던 부분이 잘 긁힌 느낌이었습니다.
최진석님 그대, 배우신 분.


3. 니논한테 물어봤어?

“(258) 1931년 11월 54세의 헤세는 36세의 젊은 니논과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특이한 점은 성생활을 배제한 결혼생활을 약속했다는 것이지요. 결혼식 후 부인은 이탈리아로 혼자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같이 있으나 따로인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은 평생을 헤세에게 헌신합니다. 그녀는 가사를 도맡고, 책을 읽어주고, 편지를 대신 써주고, 방문객을 통제하면서 거의 부모와 같은 돌봄으로 헤세를 지켜줍니다. 영리하고 이해심 많은 니논의 애정과 그녀 스스로 자처한 봉사를 헤세도 좋아했습니다. 그는 스위스 남쪽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에 침잠하여, 시와 소설을 쓰고 수채화를 그리면서 만년의 안정을 찾습니다.”

얼마 전에 이외수의 (전)부인 인터뷰를 읽었던터라, 절대로 곱게보이지 않았던 문장. 정말로 그녀가 평생 스스로 ‘자처한 봉사’를 행복하게 했을지도 미지수이지만, 이런 이야기(큰 인물 뒤에 현모양처)가 너무 흔해서 싫다. 이런 서사가 당연해지면 ‘엄마가 잘못해서, 부인이 악처여서 내가 성공을 못해’ 류의 대환장 주장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여성의 돌봄없이 알아서 혼자서도 잘해내며 대작 쓰는 남성 작가 찾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로구나. 반면에 몰래 쓰고, 쓰다가 쫓겨나고, 애키우며 쓰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혼자 살며 쓰는 여성 작가는 너무 흔하다.

모든 것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언설대로 문학이 끝났니 어쩌니 한다면, 그건 남자들이 쓴 문학이 끝난 것이라는 생각.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었으나 '여백으로만 남아있던 돌봄'을 다시 텍스트로 적어 내리는 것이 문학과 (어쩌면)여성들에게 남은 몫 일 것이다. (난 오래오래 살아서 그 적히지 않은 것들을 실컷 읽을것이다!!💪)

저 단락을 읽으면서 작품에 대해서는 찬탄하더라도, 작가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지말자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자기를 돌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작가들의 곁에서 끝까지 여백이 되어버린 그네들의 돌봄에 대한 나름의 의리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남자 저자들 연보 뒤져서 지 빨래 지가 돌렸는 지, 싱크대 개수대 비우고 나서 남은 음식물 낀거 수세미로 뽀득뽀득 닦았는지 확인해보고ㅋㅋㅋ 아닌 상태에서 삶과 세계를 고뇌하고 있으면 별을 반개씩 깎겠습니다!!!!


4. 제목 good👍

이번 주 책 읽을 시간이 통 안나서, 버스타고 오가는 동안만 독서시간으로 사용했는 데, 제목 탓인가 금새 읽어버렸다. 조근조근 구어체의 강연해주는 느낌의 책들도 대중교통에서 잘 읽히는 것 같다. (점점 대중교통에서 책읽기 마니아가 되어가는 듯)

유튜브로 영화 소개영상 보고 난 후 막상 그 영화는 안보고 다 본 것 처럼 느껴버리는 문화생활 가성비(?)주의자인 나같은 사람에.. 이처럼 책을 소개해주는 책이란... 네, 참 잘읽었고요, 노벨문학상 받은 작품들 덕분에 다 읽었으니.. 다른 책 볼 시간이 늘어났네요. 감사합니다? 🤣
미루다 영영 못 읽을 노벨문학상 작품들을 대강이나마 훑었고 영영 미루게되었으며 (ㅋㅋㅋ) 그래도 오르한 파묵 소설과 에세이, 언제나 읽다 포기했던 <유리알 유희>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끗_!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zinu 2019-06-0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게 읽기좋게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덕분에 이 책에 관심을 가져 봅니다

사소한 오타 : 금새 -> 금세

^^
신나는 하루 보내세요!

쟝쟝 2019-06-07 09:18   좋아요 0 | URL
앗!! 고맙습니다! 사소한 오타가 아니라 정말로 잘못알고 있었어요 ~ㅋㅋㅋ 금세! 기억하겠습니다 ^_^

붕붕툐툐 2019-06-13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페이퍼 읽으니 저도 관심이 확 생기네요~ 읽고 싶은 책에 살포시 담겠습니다:)
 


#여자는인질이다 읽고 있는데 #마지피어시 소설이 나오는 데 너무 보고 싶은 거라... #시간의경계에선여자 빌려오고.. #자기만의방 다읽고 영화 디아워스 봤는 데, 원작도 읽고 싶고 그거 재밌게 읽으려면 #댈러웨이부인 도 안 볼수 없어서 빌려오고... 그렇게 또 도서관털이를... #혼자서본영화 너무 재밌게 읽었는 데, 정희진 머모님이 정성일 평론가 언급하셔서, 아 안볼 수 없자나... #언젠가세상은영화가될것이다 는 중고구매.... 그러니까 읽고 있는 것이 좋을 수록 읽고 싶은 것이 늘어나며 읽는 중인데도 읽을 것들이 줄어들지않는 ... 아, 제가 도착한 이곳은 #독서연옥 뭐 그런 곳 입니까?...
_
_
가난뱅이와 게으름뱅이에겐 가장 어울리는 여가활동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취미 잘못 선택한 거 같다...ㅋㅋㅋ 일 안해서 더 가난해지고 뭔가 더 게을러지고 있엌ㅋㅋ 실컷 책 읽고 싶은 데 실컷 읽어도 실컷이 아니야...이상해....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의 방

그에겐 ‘자기만의 방‘이 있다. 땅콩을 떼긴 했지만 (ㅜㅜ) 어쨌든 수컷이고, 이름이 있긴 하지만 묘권침해의 우려가 있으므로, 편의상 ‘H군‘이라고 부르겠다.

H군에게는 자신의 방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철제 바스켓으로 구성된 수납함. 집사자매들이 원룸 살때 부터 사용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자주 입는 옷들을 쌓아두는 가구(?)이다. 매우 실용적이긴 하나 미관상 좋지는 않은... 철제 바스켓은 4단이었고, H는 아깽이 시절부터 세번째 칸에 들어가 있기를 즐겨했다. 물론(!) 거기에 쌓인 옷들을 다 배아래 깔고 말이다..

˝H야, 거기가 좋아?˝ 도통 안에서 나오지를 않아, 셋째 칸의 옷을 비우고 방석과 천 등을 깔아주었다. H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가 뿜어내는 검은 털들도 무성해졌다. 나머지 칸들이 털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스켓에는 옷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3층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책을 쌓아두고 잡동사니들을 수납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귀여운 쿠션 하우스와 들어갈 수 있는 캣타워 등을 사줬지만, H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아름답지 않은 철제 수납함.. 이사하면서 조금은 더 단정한 방을 위해 두고 올까도 싶었지만, 하루 종일 누워있던 H군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결국 가져왔지.

이번엔 책상 옆에 두고 (컴퓨터 하다가 마음이 내키면 바로 손을 뻗어 H를 쓰다듬을 수 있다. 방금도 쓰다듬었지롱~🤤) 쿠션을 깔아드렸다. 여전히 그는 3층만을 사용한다. 내가 있건 없건, 잘때건 놀때건, 거기서 지내는 편이고, 보통은 드러누워있으며, 때때로 네칸 전체를 흔들며 그루밍을 하신다. (H, 이젠 거기가 좁아보이는 데...) 지금도 자신만의 방에서 턱을 괴고 눈만 꿈뻑꿈뻑 사색 모드인데,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니가 거기를 좋아하는 건 알겠따😸!!
*
그래도 나는 종종 상상하곤 해.
좁은 방안에서도 가장 어두운 수납칸에서 웅크리고 있는 네가 아닌,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잔디밭에 누워있는 너. 넓은 들판을 달리는 너, 나비를 잡으려 버둥거리는 너, 민들레 홀씨로 장난 치는 너를.




2. 나의 방

어릴 때는 대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내 책상도 없이 자랐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기숙사에서 지냈고, 고시원 생활을 1년 반 정도 했는데 그땐 관계중독이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술마셔 줄 사람들을 찾아다녔지. 좁아터진 고시원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느꼈을 때 쯤 대학생이 된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매님들과 함께 살았다. 원룸에서 투룸에서 쓰리룸으로.. 하지만 ‘나만의 방’이 생기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진짜로 ‘자기만의 방’을 가진 것은 석달이 조금 안된 셈이다.
*
약 3년에 걸쳐 인맥의 90%정도를 다이어트했다. (나는 관계에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둔다는 가능성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거절공포증이 심한 인간이었다.) 한번 정리하기 시작하니 정리들이 절실해졌다. 올해 들어 다니던 일도 그만두고, 오랜 연인과도 헤어지고, 마지막으로는 자매들과 살던 집에서도 독립한 상태다.

여기까지 적고나니 히키코모리 같아 보이지만, 인생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 난생 처음 혼자 사는 기분은... 외로울 줄 알았는 데, 왜 이렇게 가뿐한 느낌이 들지? 허허...

겨우 월세 낼 만큼만 돈을 벌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고, 일주일에 두번씩 요가도 가고, 날이 좋을 때는 산책도 한다. 집에 들어와 청소하고, 고양이 밥주고 똥치우고 털 빗어준뒤, 나를 위한 한끼를 열심히 차려내서 먹고 설거지하면 밤이 오고, 그러면 책 읽다가 잔다. 으어~ 하루가 너무 빠르다.
*
언젠가 이동진 작가가 팟캐스트에서 책을 본인처럼 많이 읽으려면 사람을 안만나면 된다고 했었다. 일을 때려치울 때는 분명히 실컷 책이나 보겠다고 별렀는데, 책만 보기엔 난 잠이 너무 많고(수면시간 만큼은 풍부히.. 확실히 피부가 좋아졌다), 분명히 인맥 다이어트를 했는데도 친구가 많..다.

거르고 걸렀는데도- 중고딩친구, 대학친구, 직장친구, 동네친구, 여타의 친구 친구 등등을 일주일에 한번씩만 만나도 일년이 금방 가네?🤔 이놈의 결혼식은 왜 이렇게 많은거며, 현대문명의 수혜로 인스타 친구와 서재 친구들에게도 좋아요 꼭꼭 눌러줘야 하는 바쁜인생..... ㅋㅋㅋ




3. 자기만의 방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진짜 ‘나만의 방’이 생기기도 해서 기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기 시작했다.

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현시가 연봉 4500으로 추정.. 넘나 아득하고요😰 이제 겨우 제 방이 생기긴 했는 데 본질은 건물주의 방이겠지요?.)
이미 백 여년 전 그것을 가져 본 여성의 글은 매우 진-했다.

*

“사색의 낚싯대”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물이 그 자체로” 보일 때 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리며 자신의 마음에 집중한 흔적이 역력한 책. 그래서 나도 집중해서 아주 천천히 몇번이고 되짚어가며 읽었고, 많은 문장에 두번 세번 밑줄을 그었다.

오래 전에 이 책에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너무 의식의 흐름같고, 글이 종횡무진 정신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몇 페이지 못가서 읽지 못하고 덮었고, 고전은 역시 어렵나보다 단념했던 기억.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기도 한다고 했던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고,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있으며, 읽고 쓰는 습관이 조금씩 들어가고, 이제서야 ‘겨우’ 혼자있을 수 있게 된(객관적 조건으로도, 정신적 상태로도) ‘2019년 5월의 나’를 책이 읽었다라고 하면 이것은 비약일까.

허풍을 조금 더 보태 ‘운명처럼’ 읽었다. 버지니아울프가 마치 백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되는 것 처럼 느꼈다. 그녀가 조근조근 말해주었다.

*

#자기만의방 ,
어떻게든 너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라고.
쉽게 감정이입하고 더 쉽게 의존해버리곤 하는 너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때때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누구도 침범 못하게 방문을 잠그고, 깊이 충분히 스스로에 대해 사색하라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28)
다만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155)
그러기 위해서

#500파운드 ,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경제생활에서 절대 물러나지 말라고. 다른 어떤 조언과 도움보다 현실에서 물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먼저라고.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하는 네가
언젠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가 습성이 될때 까지
“준비해야한다”고.
진짜를, 리얼리티를 쓸 수 있는, 그런 ‘그녀’들이 세상에 출현해야 한다고. (165)

*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갖출 때 까지.
충분히 벌고, 충분히 혼자 있으며, 충분히 읽고, 충분히 사색하고, 충분히 쓰는 것.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또 그런 여성을 우리 사회는 환대할 준비가 되었는 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5-28 1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달 저희 독서 모임 책이라 그런지
더 반갑네요.

솔출판사에서 요즘 버지니아 울프 전집
을 새로 내고 있던데... 아마 그 전에
나오진 않겠지요. 아쉽네요.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쉽지 않은 명제네요.

쟝쟝 2019-05-28 16:49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다니 고거참 좋은 독서모임이로군요.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시길..!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기껏 마련하고도 스마트 폰을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블랙겟타 2019-05-28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를 키우고 계셨군요 ㅎㅎ
쟝쟝님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ღゝ◡╹)ノ♡

저 같은 경우도 다행히 친구는 많지는 않지만(응?) 책만 보기엔 잠을 너무 좋아하구요... 그러는와중에 ‘성의 변증법’은 오구 있구요.. 방 안의 책은 쌓여만 가구요..이 글에서 소개해주신 ‘자기만의 방’ 장바구니에 넣어놨구요...
(*´⌓`*)..

쟝쟝 2019-05-28 16:51   좋아요 2 | URL
으키키! 저 그거 알아요! 영원히 되풀이 되는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데.. 읽고 있는데.. 다른 책 읽고 싶어지는 독서연옥 ㅋㅋㅋ

독서괭 2019-05-2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들은 참 희한한 장소를 좋아하죠^^; 저 수납장 계속 끼고 사셔야겠네요 ㅎㅎ H군 넘 잘생겼습니다😍

쟝쟝 2019-05-28 19:48   좋아요 0 | URL
집사에겐 고양님 칭찬보다 행복한 건 없죠!! 잘생겼다는 말에 배시시 웃고 있답니다 ^_^

붕붕툐툐 2019-06-13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집사님이시네용!! H군 넘 멋져요~(묘권을 지키기 위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지만, 얼굴은 당당히 공개하겠다!! 잘생겼으니까!!ㅋㅋ)
쟝쟝님의 독립(?)을 축하드려요~ 책 좋아하는 사람 중에 친구 많은 사람 없다고 생각했는데, 쟝쟝님 말씀 들으니 그것도 편견인가봐요~~

쟝쟝 2019-06-13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는 책을 안읽던 시절에 사귀어 두었어요 ㅋㅋㅋㅋ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