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걸 대충 알려주고 때려 맞추라고 하면서, 얼렁뚱땅 다른 관계자들의 핑계를 들어 제 맘을 읽어내라고 하는 클라이언트 즉,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가끔은 그걸 해야 한다. 아니, 언제나 그걸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돈이 나오니까.

서로 만족하는 거래는 거의 환상에 가깝다. 그러나 2024년의 서울에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거래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어떤 (자급의) 능력을 잃었으니까. 이 상황을 삶의 조건의 기본 값으로 놓더라도 지나친 능력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실은 다른 능력을 발달시키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하는—을 자주 본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나를 잘 책임지고 싶고, 기꺼이 내가 기쁜 돌봄을 나누고 싶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싶지가 않다.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고 싶지 않다” 즉, 교환가치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향유하고 싶다. —대체로 그건 돌봄이고, 노동이고, 작업이고. 즉 기쁨이고 공부인데—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일과 사랑, 목적 자체인. 하지만 사회적 분업의 결과로 우리는 점점 무능하게 되어버렸으니. 화폐로 떼우는 거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자립적이고자 하는 내 나름의 실험(?)들이 오만한 건 아닐까. 고민했었다. 대세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에게 기대는 것을 너무 두려워(싫어) 하는 무의식의 발현 아닌가. 문득 오늘. 어떤 능력을 좀 덜어내서라도 외려 다른 능력들을 발달시키는 데에 더 적극적이고 싶었던 거란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실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고 하는 그런 실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렌트 입문서를 읽다가.)




(아렌트의 '사이')


상호의존(관계)을 화폐로 대체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편감이었구나. (만나고 떠나보내온 숱한 가족❤️기업들이 생각나벌임.) 경제공동체인 그들 ‘사이’에서 정치란 가능했을까.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사이’를 좁히는 일이고. 그게 정말로 ‘필요’해지면. 사이.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절박하게 되면 집착하게 되는.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타인과 나눠질 수 없는 영역이 분명있으니. 나의 다른 능력을 발달시켜야지. 그렇지만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는 잘 모른다. 어디까지 내어주고 어디까지 좁히고 어느 만큼 멀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고독을 “구매했어야”했다.

‘사이in-between’의 거리와 공간을 (정치뿐 아니라 삶에서도. 우정에서도. 그녀는 그것을 이론화하고 그것을 지켜보려한 진정한 철학자다!) 강조하는 아렌트가 옳다고 느끼면서도… 어쩜 나는 매번 그 어려움에 (어려움의 이상적임에) 어딘가가 긁힌다. 

착취적인 관계 말고는 자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악귀처럼 들러붙는 어떤 계선 없음은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으며… 혼자보단 하나같은 둘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좋고 기실 고독은… 비싸니까. —‘사이’를 구축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특권 계층이 아닌가— 고독 혹은 사이, 어쩌면 사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개념은 원래 그랬다. (public/private의 구분, 통상적인 구분과는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그걸 설명할 순 없고. 쉽게 읽는 한나 아렌트 부제를 달고 나온 나카마사의 이 책을 읽으세염ㅋㅋㅋ) 그리고 그러한 public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든 ‘사이 없음’이 근대의 폐해고.

생각을 좀 더 벼리고 싶다. 그러려면 ‘사이’(생존과는 상관없는 시간과 공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도 ‘사이’가 중요해졌고. 매번 긁히면서도 아렌트를 닮고 싶은 까닭이겠지만. 



“(32)이 여성 작가들의 거리 두기―연대보다 고독을 선호하는 성향―는 감동·감정·정서(비록 기술적으로 감정과 정서는 감동과 다르지만)의 사이성을 소거하고자 하는데, 그 여러 다른 이유가 앞으로 각 장에서 기술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영역에 머무르면서도 이처럼 감정에 저항하는 태도는 20세기 중반 부상한 각종 진보적 사회운동과도 선을 긋는다. 진보적 사회운동들은 하나같이 정서적 유대와 집단과의 동질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론적으로도 거부한 이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지지를 기대했던 집단 내부에서 ‘파리아pariah’(배척당한 사람)로 낙인찍혔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반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On Revolution》은 시민인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출간되었고 정치적 삶에서 동정의 “파괴적” 효과를 신중하게 해부했다. (중략) 20세기 후반 사회운동이 공감능력이 갖는 치유의 힘을 연대를 공고하게 만드는 접착제이자 진보 정치학의 목적으로 권장하자, 이 여성 작가들은 반감으로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사회정의라는 목표가 아니라 그리로 가는 길이 문제였다. 독자들로서는 이런 구분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부연하자면, 아렌트 특유의 ‘거리두기=사이’는 ‘공감’을 정치의 원리로 두지 않고자 한다) 

아렌트의 ‘복수성plurality’은 사람들 사이에 ‘사이in-between’라는 공간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중략) 한나 아렌트의 ‘사이’는 사람과 사람을 심적으로 결부시키는 끈인 동시에 거리를 설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거리를 설정한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나 동물적 충동 따위에 의해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매개로 인격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뜻이다. 언어에 의해 생겨나는 이 ‘사이’가 사람들의 사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다양성을 낳는 기초를 이룬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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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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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QIA+… 끝내 닿을 수 없는 구체성의 정체화라니… ) 초자아의 규제가 아닌 ‘자아이상’에 몰두하는 나르시시즘적 ‘도덕’으로 작동하는 후기자본주의에서 사회적 권위나 규정은 거부되고, ‘타자’란 그저 관객or동의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진보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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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18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덧, 이 책은 쌩 철학책이다. 유행하는 유튜브들에 이끌려 성격장애 유형의 나르시시스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ㅋㅋㅋ 선택한다면 기대와 다른… 진한 맛의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개념들과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순살뼈 발라진 알튀세르의 호명과 후기 푸코와 책의 논지를 보강하는 수준에서 적절한 참조점을 주는 스피노자, 헤겔(띠용ㅋㅋ)을 만나볼 수 있다. … (즐거웠지만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를 반사하는 거울로만 타자를 판단, 평가, 규정하고 경쟁/혐오/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일을 중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대 사회라는 조건에서 나르시시즘이나 ‘자아’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고통이니까. 반면교사, 타산지석 좋은 말 이지만. 그렇게 조심조심 가꿔야하는 ‘자아 중심성’은 결국 인간을 (불가능한) 고립에 닿게 만든다. 스스로가 준거가 되지만, 준거의 형식으로서 타자라는 관객이 필요한 나르시시즘의 사회에서도 타자와 관계는 (오직 그 용도일지라도…) 필요한 법. 그리하여 책의 결론은 어딘가의 폐색에 닿아버렸고, 그것이 내가 사는 민낯의 현실임을 마주 보게 되었다.

저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전반적 호명을 ‘우리는’으로 한다는 것이 인상적였다. ‘자아’이기가 버거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 우리는.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늘 잘못 이해되기 일쑤인 호명 ‘우리는’. 나는 어떤 긴장 속에서 ‘나는’을 사용하도록 한다. 아직은 ‘나는’이라는 셀프 규정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다만 피할 수 없다면… 관객의 시선이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은 좀 있다. 나도 그런 관객이길 바라고.
 


3. 
자본주의의 ‘축적’을 인간 존재의 무능력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고 싶어짐. 전능한 화폐는 결국 돈이라는 환원론으로 삶을 다루는 어떤 방식들을 무능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레버리지라는 원리가 정말 싫지만. 그것이 편하다는 걸 알아 갈망한다.) 그러니까… ‘축적’해보고 싶다는 거다. (ㅅㅂㅋㅋㅋㅋ) 생긴 돈을 쓸 줄 몰라하는 소설 #교환가치 속의 (가난뱅이) 형제들은 바보들이다. 중요한 건 부자의 마인드라니깐요? (각종 자기계발서를 통해 마인드를 의식적으로 학습했으므로) 나는 잘 쓸 펑펑 쓸 그리고 요긴하게 쓸 자신이 있다. 그러니… 축적! 내게 축적할 돈을 주세요. 라고 말해봤자 나한텐 안 줄 걸 알아… 로또 되면 그때 가서 고민해 보려했건만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미련하게 축적안할테니 미리미리 상상으로라도 준비를 (로또나 사 인마). 



4.
끝장난 관계, 잘못한 투자, 파탄난 신념, 망해버린 상황 같은 것.을 부여잡는. 사람들의 낙관, 희망, 혹은 애착은 (나는 미련이라고 표현한다) 정말로 그게 간절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와해”시키는 것 보다는 그것들을 유지하는 것이 일상을 견디기에 유효하기 때문이다. 

“환상이 맺어준 그 결속 관계”를 끊어내는 대신 “하루하루 스트레스받으면서”사는 삶을 택하는 근거에는 ‘인생 원래 다 그래’라는 다른 형태의 환상이 껴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원래 그런 게 있다면… 실은 다 다르다는 건데. 그렇지요? 

가까운 이들에게서 100년 다 산 뭔가 다 포기한 노인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건. 사실이다. 포기해야 가까스로 이걸 유지한다. 그러나 책은 말한다. “일상화된 위기 속에서는 익숙한 세계의 현상 유지가 그 자체만으로도 애착의 대상이 된다”고. 나는 간파당하고 말았다!) 정말 그래?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으로 현실을 견디는 방식을 찾아냈다고 믿었는데. 매일 조금씩의 와해를 수용하는 게 나은 것이라고 혼자 씩씩했는데. 하지만. 하지만. 

실은 이 책은 내게 맞다. 그저 빨리 빨리 읽는 것이 어려울 뿐. 
규범이 제안하는 낙관을 좇느니 자기 감각의 구멍을 파고 들어 앉아 뭔가를 읽고 쓰기. 들뢰즈를 읽고 싶어졌다. 

“(85) *소비*는 대리물을 통해 만족을 약속하면서도 만족을 주지 않는데, 그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인 불만족 상태가 지속 되는 가운데서, 즉 욕망의 담보 상태 안에서, 모든 사물이 그저 잠시 쉬어 가는 정거장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축적이 무언가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질 수 있다. *축적[쟁여 두기]*은 순전한 잠재력을 가지는 끝 없는 현재를 향유할 수 있게 하면서, 가치가 해주는 약속이 소진되지 않도록 통제한다. 그러다가 작품의 결말은 두 주인공을 뒤흔들어 망연자실 마비시키는 구조적 모순을 형상화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순환[유통] 된다는 것은 삶 속에 존재함을 가리키는 반면, *소진 불가능할 정도로 축장해 둔 물건 더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환상 속에 존재함*을 가리킨다.
이 환상은 그 자체로 위협적인 실재에 대항하는 축장의 창고이고, 그러므로 더 나은 갈망의 리얼리즘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축적한다. 사 놓고 안 읽을 책 축적… 안 볼 영화 목록 업데이트. 

자본주의하에서, 순환[유통] 된다는 것은 삶 속에 존재함을 가리키는 반면, 소진 불가능할 정도로 축장해 둔 물건 더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환상 속에 존재함을 가리킨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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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24-07-17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 귀여워요~~

공쟝쟝 2024-07-17 1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ㅋㅋㅋ
 


어떤 책들은 그 어려움과 난해함이 충분히 설득되기도 한다. (물론 정말 좀 심하다. 나를 향해서 쓰지 않았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의 소외감은 뭐 앞으로의 읽기로 계속 지적 갱신해야 할 몫일 테지만) 어렵게 쓰려고 한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의 습관적 구조(벌랜트 식으로 말하면 이해의 감각중추…? 그것은 개개인의 위치성마다 또 다르고 비슷하게 만들어져 왔을 테다)를 바꾸기 위해서 이기도 할 테니까. 물론. 그 구조를 바꿔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의 대상 독자는 아마도 동료 연구자들일 테니, 나는 아니다. (이래갖고 신자유주의한테 이기겠어? 이러니까 발리지 이 사람들아! 하는 불만은 과연 잦아들 것인가.) 그러나. 내게 읽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2차적 글로 몇 번 접했지만 아직 정동 이론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에 대해 예전처럼 짜증을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읽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불편한 편안함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텍스트(말 그대로의 문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심상을 포함한 일종의 유동적인 무언가로서 일련의 표현들…이라는 의미로의 텍스트)를 추적하고 하나하나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 의해서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을 완전히 모르게 되어버리고… 그 밀도 높은 과정을 간접 체험하는 (이건 독자가 누리는 특권이다ㅋㅋㅋ) 사유의 그 두꺼움. 그 무게. 그 부피가. “(31) 삶에 매여있다는 것의 복잡한 의미”와 공명할 때.


정말 잘 읽어내고 싶다. 정말로 잘 읽어내고 싶다. 인간이 미련한 존재라는 것. 인간이 하염없이 미련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연민이 끓어넘치다가도. 그 미련이. 그 미련 때문에 결국 미련을 가차 없이 힐난하고 비난해서라도 상황을 해체해버리고 싶을 때. 불쑥. 그 싶음.의 두터움.을 파고들고 헤집어본 사람들에 의해서. 실은 안 해도 되는걸. 그걸 해야만 하겠던 그 또 다른 의미의 미련함. 


그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미련한 흔적의 글씨들이 내 안에 있는 신산한 공격성을 겸허한 고요함으로 바꿔 놓는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너무너무나 무력한 나는. 글씨라도. 

어쩔 수 없이. 기도하듯이. 읽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삶을 견뎌야 하니까. 낙관… 하고 싶은 것일까나.

지구상에 환상 없이 제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그것은 껴든다. 그러니 누군가의 환상을 비웃을 수가 없다. 패배. 착각. 시련. 암담. 환상. 뭐 다른 거 다 끌어당겨서. 엉망진창이라도 삶은 삶이다. 나는 허우적댄다. 잊기 위해 읽을 수 있다는 환상에 몰두한다. 이다음의 환상과 이다음의 낙관으로 안내받고 싶다. 낙관이 잔인한 게 아니라 삶이 잔인하다는 걸 우리 모두는 사실 안다. 



#로랜벌랜트 #정동이론 #잔인한낙관 #서론 #어렵습니다 


27 환상의 마모
이 책은 어떤 환상의 마모, 즉 집단적으로 이해관계가 투자된 삶, 좋은 삶의 마모에 관한 책이다. 어떻게 살 수 있는가와는 점점 더 무관하게 그런 환상이 —청사진이 바래면서— 더욱 판타즘적인 것이 되었기에, 생존의 리듬, 체화된 그 정동적 리듬에서 도출된 정동의 리얼리즘을 활용하면서 새로이 등장하는 일단의 미학적 관습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의 마모가 드러난다. 나는, 답보 상태 혹은 과도기적 순간들을 열심히 아카이브로 구성해 삶의 유지[지속이]라는 환상의 상실에 적응하는 표본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우연성의 느낌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 잘 산다는 것이 어떤 조건을 수반하는지를 탐구한다. - P27

31 낙관
내 책에서 낙관이란 병리학의 지도가 아니라, 현재를 조직하는 여러 애착심을 수반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낙관은 세계-구축이라는 행위에 결부된 쾌락을 지향하지만, 그 행위는 미래에 몰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포타미아누와 마찬가지로 나는 삶에 매여 있다는 것의 복잡한 의미를 살펴본다. 잔인한 관계를 수반한다고 판명될 때조차도, 낙관의 부정적 특성을 어떤 도착, 상해, 실수의 증상이나 어두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낙관은, 양가적으로, 불균등하게, 앞뒤가 맞지 않게 펼쳐지면서도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교섭으로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장면이다. - P31

33 신자유주의라는 교수법적 용어
이 책은 구조적 인과관계와 얽힌 주체성의 힘을 관찰하지만, 잔인한 낙관의 대상을 나쁘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잔인한 낙관의 주체들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불평등의 상징적 증상으로 만드는 징후적 독서의 폐쇄성은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가령, 여러 구조적 세력이 어떻게 국지적으로 구체화되는지에 관심을 갖는 비평가들이 종종 교수법적 용어 "신자유주의"를 사용할 때, 마치 그것이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신자유주의 이해관계에 봉사한 주체들을 생산하는 개념, 세계를 동질화하는 주권적 개념인 것처럼 만들어버린다는 점을, 그래서 그렇게 볼 경우 주체의 단독적 행위는 개인적이고 효과적이고 자유롭게 의도된 것으로 보이기만 할 뿐, 실제로는 강력하고 비개인적인 여러 세력들의 효과에 불과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 P33

그러나 동시에 그런 비평가들이 상정하는 단독성이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개인은 온전히 주권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을 완전히 포화시킬 수는 없는 세계를 항해하면서 그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변증법적인 설명은, 현재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의 물질적 장면들인 애착심, 자기 지속, 삶의 재생산 사이의 매끈하지 않은 역학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정동성affectivity’의 개념화가 빛을 발할 수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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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7-12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쉬운 길로만 가고자 하는 (가성비와 빨리빨리의 나라) 이 시대, 이 나라의 현실에서, 어려운 책을 읽고자 하는, 거기에 닿고 싶어하는 쟝쟝님의 마음이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어려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겸허함, 위로가 모든 이에게 필요하지만 이걸 인정하기는 혹은 그걸 끝까지 붙잡는 일은 매우 어려우니까요.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이고, 찬찬히 읽어봅시다.

안타까운 말씀 올리자면, 저는 유시민님 만나고 이제 푸코 만나는 중이며, 주말에는 다른 사람 만나기로 해가지고, 쩜쩜쩜.

공쟝쟝 2024-07-17 10:38   좋아요 1 | URL
벌랜트 안 만날거면! 주말에 만난 그 사람 누군지라도 알려줄 페이퍼를 쓰라!! (촤라라라락!) 여러사람 바꿔만나는 바람둥이~단발머리~
 

어제 밤에 #잔인한낙관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 비교적 맑은 아침 정신으로도 읽어보기위해 도서관 오픈런을 해보았으나…. (😔 이 책 못읽을 것 같은뎈ㅋㅋㅋㅋㅋ)
관념적 사유 지양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지각(?) 관념 도입하시는 중인데 모든 단어의 개념이 마다마다 생소해서… 일단 꾸역꾸역 읽은 다음에 계속 이 상태(?)인지를 ㅋㅋㅋㅋ 보고 하겠사옵니다..

“(25) 비일상적인 것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탈이 아니라, 진행 중에 있는 무언가가 증폭되는 현상, 기껏해야 불안정한 경계임이 언제나 사실로 드러난다. 위기에서 유래한 답보 상태에서 존재는 간신히 버틴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에 빠져 죽지는 않는다. *패배했다고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도 삶 속에서 어떻게 삶에 매달려 있을지, 최소한 삶에 매달려 있을 수 있다는 낙관을 어떻게 유지할지 궁리하면서 살아내는 존재들이다.* 전후 미국 사회를 예언적으로 설명했던 마르쿠제가 이를 기록한 바 있다. 사람들은 체제를 극복한 이야기나 체제에 굴복한 이야기로 위안을 삼으면서도 ‘고통스럽고 많은 비용이 드는 한물간 형식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계속 몸부림친다.’”

패배한 우리는 삶 속에 빠져죽지는 않는다. 답보된 채로 허우적대며 낡은 환상에 애착을 가진다. 저자는 트라우마 담론에서 벗어나기를 주장할 예정이다.

신자유주의 내파에 말 얹기 어렵고만 ㅉㅉ



위기에서 유래한 답보 상태에서 존재는 간신히 버틴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에 빠져 죽지는 않는다. *패배했다고 볼 수 있을 법한 사람들도 삶 속에서 어떻게 삶에 매달려 있을지, 최소한 삶에 매달려 있을 수 있다는 낙관을 어떻게 유지할지 궁리하면서 살아내는 존재들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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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7-09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렵습니다. 누가 골랐냐. -_-

공쟝쟝 2024-07-09 11:29   좋아요 1 | URL
누가 찬동했는가 ㅋㅋㅋㅋ!!

수이 2024-07-09 11:38   좋아요 0 | URL
🤔

단발머리 2024-07-09 1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심한 사죄의 말씀으로 갈음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나는, 진짜 모르겠어요,의 형국입니다.

공쟝쟝 2024-07-09 12:55   좋아요 2 | URL
역대급… 오전 두뇌 다 짜내서 오후 일 할 기운 없다요…

단발머리 2024-07-09 13:39   좋아요 2 | URL
이를 어쩌나...... 심심한 위로의 말씀..... 🥲

공쟝쟝 2024-07-09 13:20   좋아요 2 | URL
여자가 책을 뽑았응께 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좀 심합니다!!!! 이건 아니지않나요? 마리 루티 선생님? (여기서 왜 찾나)

수이 2024-07-09 13:52   좋아요 2 | URL
우리 마리 루티 언니는 잘못이 없습니다. 읽어봅시다 암튼 ㅋㅋㅋ

cyrus 2024-07-09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이 어렵다고 하시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궁금하군요.. ㅎㅎㅎ

공쟝쟝 2024-07-10 09:28   좋아요 0 | URL
네 사이러스님, 정동이론이라는 게... (저는 잘 모르지만…) 담론에 의거해서 사람들의 감정( action-reaction)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포착하는 거니까. 그 과정을 추적하는 도전을.. 하는 거 같은데..... 요지는....... 단어 하나 하나를 다 해체하고 조립하는 게... 너무 밀도가 높아여... 그래서 서론 한페이지씩 넘기기가… 어려운데… 그래서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꼭 잘 읽어내고 싶습니다!!

2024-07-12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