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단풍은 지각이라고 한다. 기후위기는 나에게서 단풍🍁과 김치(배추)와 사과🍎와의 이별을 선고하는 듯 하다. 그래선가 가을답지 않은 가을 동안 시뻘건~ 책들을 잔뜩 사들였다. 나는 나는 빨간 걸 좋아하니까. 오늘 아침의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아마도 본격 겨울이 시작되려나. 아직 안 왔나, 겨울.
책 살펴보자.
아니에르노 의 가장 빨간 책이라는🥵 #탐닉 위에 페렉과 부르디외📕의 신간을 올려놓는 이 사람의 센스를 보라. 나의 종의 복수를 위해 (중산층 가부장제 찢어발길ㅋ) 쓰기로 한 아니 성림께서 참고한 소설 작법이 #조르주페렉 이며, 사회학적 접근 방식은 #부르디외 의 계층(계급) 재생산 연구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아마 많을 것이다.
“(21)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들이 부자일 줄 안다고 믿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바라보고, 웃을 줄 알았을 것이다.” - 사물들, 조르주페렉
하지만 이들 위에 올려둔 #크리스틴델피 의 책 (한국에는 먼저 번역돼서 나오는 중이었던) #가부장제의정치경제학 이 지도 교수님 부르디외의 #상속자들 에서 빠진 젠더 분석을 겨냥한 연구라는 것은 여러분?... 아셨나요? 이걸 누가 아냐, 내가 안다ㅋㅋㅋ~!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여성들의 전유물일까? 부분적 시각으로는 그럴 수도 있고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읽을수록 점점 더 그렇게 느끼는 중이다. 나 자신이 이런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문화적, 경쟁적 조건 ‘이후’가 맞다. 그 후의 알고자 하는 열정의 과도함은 성충동이다ㅋㅋ응?) 가족 ‘안’에서의 수행(살림밑천/똑똑한/예쁜/친구같은/착한 딸)은 같고 다른 오랜 성 역할(전략)과 아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거기서부터 정치경제학이 작동한다는 소리. 원가족 내에서의 역할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이 다르고 또 같지 않을 때. 몸을 바꿔야하는 것은 지나친 피로감.
계층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가족 ‘내부’의 젠더화된 상속(유산은 교환이 아니라 증여의 형태이며... 하여 부르디외가 지적한 것이 자본뿐 아니라 문화와 취향, 교육의 불평등 재생산에 대한 관점의 도입이었다면, 델피의 주적은 그 상속 안에서도 가족 내의 자녀‘간’ 불평등을 겨냥한다. 가정 안의 교환 또한 ‘경제’ 단위로 여겨지지 않는다. 즉, 가사노동 및 가정 내의 생산양식은 교환가치가 없다. 무임금-무보수. 헌데 여기마저 찢어발겨서 교환가치로 만들어 시장화하고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언급은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어디까지 언제까지 모든 것을 시장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나는 흥미롭게🤔 바라보는 중이다)을 통해 크리스틴 델피는 *사회학 내부에 페미니즘적 관점을 도입*하고저 했다.
가치를 화폐로 바꾸자는 주장이 아닌데도, 모든 가치를 화폐로 바꿔 버린 세계는 어떤 관점자체를 그래서 돈을 달라는 건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요구하는 쪽도 차라리 돈을 내놔라 이렇게 되기가 쉬운 것 같음. 거기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말이 필요할지,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은 여성화된 노동. ‘돌봄’에 이른다.
오늘 받아본 가장 반가운 책(이 페이퍼를 쓰는 목적)은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사가 빛나는 #친밀한착취 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의 돌봄노동에 광범위하게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대로 착취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돌봄노동: 친밀한 착취》는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성별 분업으로서 돌봄노동을 다방면으로 추적한다. 또한 ‘인간의 조건’으로서 돌봄윤리와 ‘여성의 성역할’로서 돌봄노동의 부정의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최신 이론을 망라하면서, 이중 착취 구조인 “여성의 사회 진출”, “양성평등” 등의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한다. 당대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돌봄 언설만 난무하지, 그것이 어떤 노동이며 누구에 의해 수행되고 누가 혜택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정확하고 필수적이다. 돌봄 공부의 첫 번째 텍스트로 삼아야 할 최적의 책이 당도했다.” - 정희진
무려 돌봄 공부의 첫.번.째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는 말에. 부들 부들 손 떨며 구매 갈기지 않을 수 없었쥬?
펜데믹 이후에 우리 사회가 물었어야 할 것은 케어(돌봄care)를 외주화(혹은 시장화)한 1세계 복지의 허망 아니었을까? 교사 중에 제일 교사 반면교사 없이, K-방역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는 (좀 자부심 돋긴했다만) 사회는 어찌보면 무망하다. 여성이 했기에 후려쳐졌고, 자국내의 여성이 더는 하지 않기로 해서 외국의 여성을 수입해 와야 하는 (1세계를 그대로 따라가는) 돌봄 노동.에 대해서 난 잘 모른다. 아니, 안다. 아니, 모른다. 사실 모르고 싶다.
이미 온 사회가 암묵적으로 (여기엔 나포함 몸이 썽썽한 젊은 여남들이 추가된다. 그들의 성한 위치는 그것을 인식하기 심히 어렵다. 성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하고 싶어서 또 어렵다.) 돌봄의 외주화에 공모하기로 했다는 것, 받아들인다. 안 보이니까. 그리고 안 보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보이면 또 보는 거지 뭐. 나부터 처절한. 철저한 인식. 나는 여기에 배팅하며, 판돈은 없다. ㅋㅋㅋㅋㅋ (아... 소소한 책구매... 뒤메질 연대라고...) 이미 망한 세상에서, 우리라도 읽어요. 우리라도 읽읍시다. 나 아니면 누가 읽나. 뭐 그런 마음으로 책을 탑 위에 올린다. 또 얼마나 뜨끔한 공부가 될지 심히 기대되고요. 오케이. 내가 읽어주마.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최신이론 꺼몬꺼몬.
이런 #나는세계와맞지않지만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아서 좋다. #진은영 시인도 그 중 하나다. 시인의 산문이 궁금해서 함께 구매.
#자크라캉 2권은 1권에 이어 본격 쏟아지는 개념 공격에 좀 더 천천히 읽으려고 웃돈 좀 더 주고 구매했다. 하지만 구매하는 그 사이에 관심이....... 딴 데로 새가지고? 는 아니고. 사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 대부분이 라캉의 연장선에 있다. (저의 난잡하고 게걸스러운 독서는 제 안에서는 어떤 형체를 이루고 있답니다, 훗- 나만 안다.)
충동으로 점철된 인간은 팔루스를 향해 뛴다. 쓰잘데 없이 언어를 가진 종족으로 태어난 덕에 그렇게 생겨먹게 되었다. 같은 언어 범위 테두리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다른 언어(사람, 집단)로 교체하지 않는 한. 자본은 세계는, 그 충동(과 향락)이 소비로 흘러가게끔 스스로의 설계를 마친듯 하다. 거의 완벽하게.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조건이다.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뿜뿜. 욕망하는 주체와 소비하는 주체의 간극. 생산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의 간극. 배우는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의 간극. 틈은 아주 얇고 착각하기 쉬우며. 미끄러지는 방식은 더 쉽고, 더 쉬워서, 더 쉬운 게. 더 쉬운 해결이. 결국 더 어려운 해결이 되어버린다. 욕망의 물신화. 그리고 간극. 그 간극에서 언제나 갈등하는 미련 많은 아니 게으른 주체가 나다.
팬심을 배반하는 창작자들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다루는 책 #괴물들 은 정말 재밌게 읽고 있다. 나의 문제에서 시작되는 글을 좋아하고. 감사하게도 친구는 #클레어데더러 의 문체에서 나를 떠올려주었다. 과연? 책의 95페이지에서 나 역시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독자로서 나는 내 감정을 믿는다. 그건 몸의 반응이고, 어쩔땐 묻지 않은 대답을 해보고 싶어져서 언제나 거칠고 충동적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쓰고나면. 어떤 것들은 사라져버리고. 그럼 좀 더 편해진다.
그러니까, 내게는 데더러처럼 독서를 통해 불러일으켜진 내 감정을 쓰고 싶어라 하는 욕구가 있다. 감정. 우리는 뼈와 살이 있고, 그것을 초과하는 언어가 있고, 선언, 따로노는 이성의 이름으로 자기를 기만하며, 도그마에 빠지며, 알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든다. 어떤 감정은 압도하고. 겪을래 겪지 않을래. 갚은 치러야해. 어떤 식으로든. 어차피 뇌가 사후 합리화를 위한 작용이라면 무엇을 합리화하는 글을 읽을 것인가, 로 정리되는 나의 합리화. 나의 책탑이 아직 좀 더 남았다. 길군.
#비비언고닉 은 #미국공산주의라는로맨스 에서 마치 로맨스처럼, 팬심처럼, 정치적 감정을 다루고 있다. 어디를 읽을 건가. 무엇을 볼 건가? ‘정치적 감정’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인정을, 공감을, 요구하는 고닉의 이 책을 나는 읽을 준비가 아직은 되어 있지 않다고 고백해야겠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사실은 조금 더 미워하고 싶고, 나 자신과 분리하고 싶다. 하지만 그 “분별력 없는 열정”을 다시금 훑어내서 쓰려하는 고닉에게서 나는 진짜 어른을 본다. 그게, 그.... 받아들임이. 어른, 같다.
“(58)이성이 ㅡ궁극적으로는ㅡ감정을 지배하지 못하는 현상은 분명 공산당원들의 경험에서 자주 확인된다. 그리고 열정이 억압된 욕구와 동일한 특징을 갖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에는 이 사실 하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감정을 중심으로 이성을 배치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모든 구성체 ㅡ종교적, 철학적, 정치적ㅡ가 무의식적인 두려움과 대책 없는 갈망과의 불공평한 전투에 갇혀 발버둥 치는 지성이라는 이 뭉클한 스펙터클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가? 이 스펙터클은 경멸하고 따돌리며 분노할 게 아니라 공감하며 인정해 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공산당원들의 경험은 찬란했을 때도 타락했을 때도 모두 인간다움을 향한 경이로운 몸부림이었다. ”
경험을 말하는. 먼저 살며 사유한. 어른의 글.
어른하면 역시 우치다 타츠루지. (요즘 무지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이퀄리스트 할배 딱지 붙이고 흥칫뿡한 거 거둬드리는 중. 내 편협이 깊다. 우치다 선생 쏴리~) 아직 마르크스를 읽은 적이 없는 고등학생으로 독자가 설정된 선생의 이 빨갛고 작은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11)‘언젠가 읽어야지’에서 ‘자, 그러면 읽어볼까’까지의 틈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하는 말을 빌려보면)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합니다.”
아직 목숨이 아까워서 수월하게 도약하고 있지 못한데…. 그러면 읽어볼까?까지의 틈새에 목숨까지 걸고 싶지는 않다면 같이 읽는 친구를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같이 읽을 파티원 구합니다. 대상은 마르크스를 읽은 적 없는 고등학생 수준 독자ㅋㅋㅋㅋ 컴윗미~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빨갱이는 #알튀세르 다. #비철학자들을위한철학입문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다.
“(41)‘비철학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다른 이 : 실은 철학이 내겐 아주 재미있었어요. 우리 선생님이 매력적이었다는 걸 말해야겠군요. 그 선생님 덕분에 철학을 이해했죠. 하지만, 그 후엔,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어요. 어쩌겠습니까. 하루는 24시간뿐이고, 결국 나는 철학과의 연결이 끊겼어요. 유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 알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인터뷰하셨나요?ㅋㅋㅋ 하지만 이래놓고. 도입을 이렇게 써놓고. 음청. 어마무시 어려울 책임을 나는 이미 안 읽어도 알고 있지렁~.
오로지 일하기 싫어서 충동적으로 갈겨대고 있는 이 글을 혹시 여기까지 읽어주신 고마운 이가 있다면, 마무리는 내가 꼽는 올해의 띵문 중 하나인(자기 분석으로는 정말 치열했다...) 알튀세르의 글을 공유해드리겠사옵니다. 음. 좀 아름답다.
“(360) 그 뒤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는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욕망과 리듬을 존중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을, 하나하나의 선물을 인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줄 아는 것, 그리고 전혀 자만하지 않고 전혀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방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단순한 자유다. 세잔느는 무엇 대문에 생트-빅투와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미래는오래지속된다
-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아침엔 똑같은 이야기를 사천삼백 번쯤 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으면서 일어났고, 열 다섯 번째 모금째의 모닝 커피를 불어 마시면서 창밖에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하기를. 나는 사랑하고 있구나. 언젠가부터. 혹은 오래전부터. 아니 원래부터 그랬던 것 처럼. 그걸 잊지 않고 싶었다.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라는 거. 오조오억 번을 듣고도 또 다르게 생각해보는 거.
#기쁨
그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올해의 나는. 좀 성장한 걸로 쳐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