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의 바질은 무럭무럭 자랐다. 

옆 화분으로 좀 옮겨 심고나서 둘다 힘없어진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그 몸살을 잘 이겨내고 쑥쑥 자라는 중이다.

옆 화분은 기존에 치커리를 키웠다 뽑아낸건데, 옮겨심는 과정에서 흙을 요케요케 한 때문인지, 지금 바질과 함께 치커리가 새로 싹트고 자라고 있어서 크게 당황중이다. 아마 이건 조만간 뽑아버려야 할 듯.


고수를 키우면서는 똠양꿍 밀키트에 고수를 넣어먹고 싶었고

바질을 키우면서는 꼭 내 손으로 바질페스토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바질페스토 요리법을 찾아보면 크게 유별난 재료가 필요하지 않고 요리 방법도 간단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베란다의 바질을 매일 들여다보았다. 이쯤되면 수확해도 되겠지?




그냥 잎을 따면 되는지, 따기전에 유튭 검색을 해보았더니 바질이 자랄 때 위에 순을 가위로 잘라줘야 옆으로 잘 자란다고 하더라. 그리고 가위로 잎들을 잘라 사용하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다. 내가 블로그로 찾아본 레서피에서는 큰잎 위주로 땄다고 하고, 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 큰잎 위주로 따냈다. 그렇게 레서피를 보면서 재료를 준비한다.


잣 35g 이 필요하다고 해 마트에 잣을 사러 갔다. 잣을 내돈주고 사 본 기억이 없네? 레서피 몇 개를 보니 꼭 잣일 필요는 없고, 아몬드나 캐슈너트, 호두로도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런데 잣이 가장 기본인 것 같아, 나는 가장 베이직하게 가고 그 후에 응용하자 싶어 잣을 사러 갔다. 그러다 잣의 가격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50g 에 만원이다.


오 

마이


나랑 함께 잣을 사러 갔던 엄마는, 바질페스토를 사먹으라 하셨다. 잣 만 원주고 어떻게 사냐고.

그도 그럴것이, 컬리에서 바질페스토 180g 울 주문하면, 4,700 원. ㅜㅜ



아아ㅏㅏㅏㅏㅏ 나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그래도 내 목표가 목표인이상 꼭 바람을 이루겠어! 나는 만 원주고 잣을 산다. 마늘도 필요해서 산다. 세 쪽 정도 들어간단다.

파마산 치즈가 필요하다는데 이것도 4천원 이상의 돈을 주고 산다.

올리브유는 집에 있고, 소금도 있고, 바질도 있고. 


그렇게 재료를 준비한다.




재료를 준비하고, 나는 일전에 사두었던 책, 《제로 웨이스트 키친》을 꺼내보았다. 거기에서도 바질페스토가 나왔던 기억이 나서 한 번 비교해보자 싶었던거다.

내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레서피들은 다 믹서에 갈라고 해놓았다. 절구 얘기도 있었고.

책에 의하면 '페스토'가 이탈리아 단어 '찧다, 빻다'에서 온거라고 하던데, 제로 웨이스트 키친에서는 믹서기 얘긴 나오지도 않고(당연하다, 제로 웨이스트 키친이다, 저자는 냉장고도 안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절구에 빻으라고 되어 있었다.


그 책을 보고나자 나도 절구에 빻고 싶었다. 그래야 오리지널이 될 것 같아서. 그런데 집에 절구가 없었다. 엄마는 보통 마늘을 다져서 냉동실에 넣어두시는데, 그건 수수료를 주고 시장 가서 잔뜩 빻아 오시는 거였다. 절구를 하나 살까, 싶었는데 엄마는 반대하셨다. 층간소음으로 그거 빻는 소리에 아래층에서 올라올 수도 있다고 그냥 믹서기를 쓰라 하시는거다.


그래서 시키는대로 프라이팬을 달궈 잣을 살짝 볶고(라지만, 태웠다), 바질은 물로 살작 헹군뒤 키친타올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여기에서 키친타올을 사용하는게 영 마음에 걸렸는데,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잣과, 마늘과, 파마산 치즈와, 올리브유를 믹서기에 넣고 갈다가 바질을 넣고 간다. 잣이 너무 작고 마늘도 어느 순간 작아지면, 믹서기에서 갈아지지가 않았다. 밑에 깔려버리는 거다. 올리브유를 수시로 넣어줘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수시로 저어줘야 했다. 아, 믹서기는 별로네, 덩어리가 너무 커졌다. 어느 정도 덩어리감이 있어야 씹는 맛도 있다지만, 나는 덩어리가 너무 크게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더는 갈아지질 않았다. 다 갈아지고나서 올리브유를 재차 넣기 전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바게트를 살까, 식빵은 바질페스토랑 딱히 어울리는 느낌은 아닌데, 하다가 일전에 치아바타 만들고 남은 블랙올리브가 있다는 걸 기억해내곤 치아바타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만든 치아바타, 내가 키운 바질로 내가 만든 바질페스토가 완성되었다.




마침 여동생도 와있던 터라 함께 먹었는데 여동생은 마늘맛과 잣향이 너무 강하다고 했다. 이것들의 양을 좀 줄여야 할 것 같은데? 하고. 결과적으로는 바질의 양이 적었던 것 같다. 레서피에서는 바질 80g 이라고 했는데, 저울이 없어 확인을 못했지만, 바질이 그보다 양이 훨씬 적었던 것 같은 거다.


바질을 늘리면 돼, 


라고 나는 말했다.


그나저나 저울을 사야 할까.


아빠는 바질페스토를 별로 안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래도 아빠 좀 드셔봐, 내가 키운 바질로 만든 소스에 내가 만든 빵이니까 한 번 잡숴봐, 하고 조금 잘라서 발라드렸는데 맛있다고 한 쪽 더 달라 하신다. 나는 한쪽 더 발라드렸다.




저장해두고 먹기 위해 유리그릇을 끓는 물에 소독해 두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먹어버렸다.

물론 기성품보다 적은 양이 나오기도 했지만, 사두고 먹으면 잘 먹지 않아 유통기한이 다 지나도록 남게 되는데,

내가 만든 바질페스토는 아주 헤펐다. 푹푹 퍼서 발라먹으니 금세 동나버려 저장이고 뭐고 없었다.


치아바타는 총 세 개가 나왔는데 앉은 자리에서 두 개를 다 먹어버리고 하나는 여동생이 집에 갈 때 여동생 손에 들려보냈다.


그리고 베란다의 바질은 앙상해졌다.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다.

일요일 오전이 치아바타와 바질페스토 만드느라 훅 지나가버렸지만, 

내가 결국 목표했던 걸 해냈다는 뿌듯함이 가득찼다. 후훗.

나는 바질을 심고, 키워내고, 수확하고, 페스토를 만들고, 빵도 만드는 사람이다! 멋짐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나뽕에 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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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6-19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함 글 금지라고 했었는데 또 한 편 쓰셨군요?
잣 비싸죠?ㅋㅋㅋ
저도 예전에 바질 화분을 키웠던 적 있었어요. 바질 페스토를 해 먹으려구요^^
바질도 잣처럼 만만찮케 비싸더라구요.
전 바질이 다락방 님댁처럼 저렇게 무성하게 안자라주어 딱 두 번 해먹어 봤어요.
그러다 사먹는 게 더 싸겠다! 싶어서 그리곤 사먹고 있는데 확실히 내 손으로 해먹었던 그 향이 잘 안나더군요.
미니 절구는 쿵쿵 두드릴 때 절구 아래에 수건 같은 걸 깔고 사용하면 되긴한데 그래도 그 소리가 조심스러워서 사용하는 게 정말...ㅜㅜ
어머님 말씀이 맞을지도 몰라요.
예전에 편스토랑에서 트롯가수 장민호가 절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절구공이를 쿵쿵 찧더군요. 층간소음 걱정된다구요.
인상 깊었네요.
암튼 다락방 님표 바질 페스토에 치아바타 맛났겠습니다.^^

다락방 2023-06-19 11:10   좋아요 1 | URL
저 바질이 저렇게 잘 자랄줄 몰라서 너무 신나고 예뻐요. 아주 그냥 예뻐 죽겠어, 하면서 베란다에 수시로 나가 들여다본답니다. 제가 들여다보는만큼 더 잘 자라는 것 같기도 하고요.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데 그저 예뻐해주는 걸로 이렇게 잘 자라는가 싶어 기특해요. 그리고 이렇게 저에게 페스토를 하게끔 해줍니다. 내가 키운 바질로 페스토 해보는 건 저의 오랜 목표였어요. 그걸 해냈습니다. 아 너무 좋아요. 나중에라도 혹여 손님이 방문한다고 하면, 반죽해서 치아바타도 만들고 바질잎 따서 페스토도 할 수 있겠구나 싶으면서 그런 저 자신의 멋짐에 취했답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절구는 그래서 사진 않을 것 같고, 아흔 넘으신 외할머니 댁에 있다고 해 그걸 일단 가져와볼까 합니다. 층간소음 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야겠지요. ㅠㅠ

햇살과함께 2023-06-1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강원도 오일장에서 바질을 샀는데 바질을 시금치처럼 한 봉지 담아주셔서
그걸로 바질 페스토 만들어서 빵에도 발라먹고 파스타도 해먹었어요~
(마트에서는 플라스틱 통에 가지런히 몇 가닥 담아주는 가격으로 엄청 주시더라고요^^)
저는 잣 없어서 냉동실에 있던 땅콩으로^^ 견과류면 되겠지 뭐 하며,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 2023-06-19 20:37   좋아요 1 | URL
아아 장에서 사는 바질은 풍성하군요! 그러면 정말 양껏 페스토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저도 다음엔 남은 잣 캐슈너트 도전할 겁니다. 불끈!!

독서괭 2023-06-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멋짐에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닙니까? 바질 기르고 수확해서 심지어 직접 만든 치아바타에 발라.. 우왕.. 전 따라할 엄두는 안 나고 동생분이 부럽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3-06-19 20:38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너무 멋져서 감당이 안됩니다. 빵 만드는 것도 멋지고 페스토 만드는 것도 멋진데 그 둘을 같이 하다니!! 무슨 신인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

은하수 2023-06-23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새 만드셨는데 전 왜 이거를 지금 알았을까요
바질 꽤 컸을텐데 언제 만드시나 했죠! 잣 비싼거 보고 놀라실거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저 작년에 잣 가격보고 깜놀했잖아요.
맛있게 만들어드셨다니 제가 다 기분이 좋아지네요~~
마당에서 뽀득뽀득 자라는 바질보니 저도 빨리 만들고 싶네요~~
그나저나 바질 페스토 색감이 진짜 초록초록 예술이네요^^
근데... 다른 견과류랑 섞어서 잣은 꼭 들어가는게 확실히 풍미가 살아나더라구요!

다락방 2023-06-23 08:52   좋아요 1 | URL
오오, 잣은 꼭 들어가는게 좋다고요? 메모메모.
잣이 조금 남았어요. 대략 15g 정도 될텐데, 다음에 만들때는 여기에 다른 견과류 섞어서 만들어봐야겠어요.
바질 위에 순 잘라줬는데 그 뒤로 그 사이로 새롭게 작은 잎들이 비져 나와서 너무 예뻐요.
요즘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베란다로 가서 얼마나 컸나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으하하하하.
이렇게 예뻐하면서 따서 먹다니, 어쩐지 모순되는 것 같지만요.. 아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