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밀양 - 서울 -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
김영희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죄책감은 우리를 움츠리게 만들고 때론 나의 죄와 연결된 참혹하고 남루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빚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죄책감이 만들어 내는 마음의 고단함을 벗어던지고자 우리는 그 빚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친다. 그래서 내 몫을 대신해 위험을 부담한 이들과 내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거나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작 위험을 떠안고 어디론가 떠밀린 이들이 잡아 달라 손을 내미는 순간, 혹은 들어 달라 목소리를 드러내는 순간 그 중요한 만남의 순간을 외면하고 도망친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쳐도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 가정용 전력보다 산업용 전력이 소비량이 월등히 높다는 사실만으로는 마음의 빚을 모두 감당하기 어렵다. 전기를 사용한 모든 산업 생산물을 하루하루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더 많은 물건을 쓰고 더 오래 전기를 사용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자본은 애써 이 연결을 은폐한다. 우리가 이토록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루하루 정신없이 우리를 몰아세우고 우리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겨우 해치우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고 못한 채 가장 큰 책임의 한 부분을 지우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그러다 문득 이 연결이 우리의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불현듯 솟아난 출현은 고개를 돌리는 작은 움직임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우리를 꽁꽁 묶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 후 이 연결을 직시하게 만든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지 못할 떄 우리는 마음껏 쓰고 버릴 수 있다. 이 연결을 덮고 외면하고 있을 때 산업 재해나 부당 노동은 타인의 일일뿐 나의 일이 아니다. ... 하지만 내가 쓰는 전기를 실어 나르는 송전선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매일같이 송전탑 아래에서 웅웅거리는 소음과 번쩍거리는 거대한 불빛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나면 이것을 더 이상 생떼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거기'서 살고 있는 '누군가'가 이름을 가진 존재가 되고, '여기'서 살고 있는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순간 '그'와 '나'사이에 연결된 끈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나'는 더이상 이 끈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그'가 경험하는 고통과 위험이 '나'의 문제가 되는 순간 비로소 '연대'가 시작된다. 
'그'의 일이 '나'의 일이 되는 순간 이 갑작스런 깨달음은 '나'를 실천으로 이끈다.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일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중장비 기계를 사이에 두고 건장한 용역들에 맞서는 '밀양 할매'들 옆에 서 있을 떄 누군가 영상 촬영 카메라를 그의 손에 쥐어 주며 '찍지 않아도 좋으니 들고만 있으라'고 말했다. 그때 카메라는 그에게 용역들이 할머니들에게 험한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지키는 도구였다. 그렇게 영상 촬영 장비를 손에 처음 쥐게 되었던 그는 결국 몇년 뒤에 밀양에서의 싸움을 내용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의 감독이 되었다.  "p18-p22
-------------
보는 것, 혹은 보여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폭력을 막거나 폭력의 수위를 낮출 수 있다는 것. 그에 더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고 말하게 된다. 그럼에도 죄책감때문에, 나도 그렇고 종종 함께하는 다른 사람도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곤 한다. 개인적인 계기때문에,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 말하기 시작하면서 삶을 건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누구도 모르고, 함께 찾아가야 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중단해도 된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되지만, 나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건 의미가 있다. 

전국적으로 신규 재생에너지 설비가 생산할 전기를 송전하려고 신규 송전선로가 세워질 예정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입지선정위원회가 열리고 있고, 사람이 아닌 비인간존재만 사는 곳에는 그조차도 없을 것이다. 신규송전선로를 계획에서부터 거부할 수 있는가? 그를 시도하려 제11차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에 찾아가 발언한 사람들이 있다. 이미 몇 십년을, 주민에게는 제대로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세워진 전력수급기본계획때문에 고통받아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대로 계획을 통과시켜서는 안된다고 작년 하반기에 단상에서 외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중 일부에게 약식 재판으로 벌금형이 나왔다. 그들은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정식 재판을 청구해 재판을 이어가려고 한다.

---------------------------------------------------------------------------

<11차 전기본 공청회 연행 사건 관련 재판> 기자회견 참여 요청


작년 9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하 ‘전기본’) 공청회가 세종시 정부종합청사에서 있었습니다. 그날 전국에서 기후 위기와 탈핵을 요구하는 많은 시민과 주민들이 공청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20명의 활동가와 주민들이 연행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 ‘11차 전기본 폐기’를 외쳤었는데, 주최 측의 퇴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후 법원은 10명에 대해서 ‘기소유예’, 나머지 10명은 벌금 100만 원씩의 약식 처분을 내렸습니다. 


약식 처분을 받은 6명의 활동가와 주민들은 정식 재판을 받기로 했습니다. 11차 전기본은 기후위기의 대응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후 위기를 더 가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핵폭주 정책을 담고 있어 수많은 지역에서의 폭력과 고통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청회는 전기본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기보다 이들을 모두 연행하고, 벌금까지 부과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 공청회에서 연행되고, 처벌받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위태로운데 말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처벌받는 것은 옳지 못하며, 경종을 울려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오는 8월 19일, 첫 재판이 예정되어있습니다. 기후 및 탈핵을 지지하는 많은 시민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재판을 방청하고 싶습니다. 


많은 관심과 지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11차 전기본 공청회 폭력연행 사건 형사재판 기자회견 ; 처벌 받야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일시 : 2025. 8. 19.(화) 10:30

-장소 : 대전지방법원 정문 앞

-----------


한편 송전선로 입지선정위원회는 주민에게 위치조정권한만을 이야기하는 비폭력대화전문가가 회의를 주재할 뿐, 송전탑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결정권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 몇몇에게는 보상금이 돌아갈 수 있지만, 돈으로는 비인간존재의 죽음을 막을 수 없고, 인근주민이 계속 살기로 결정할 때 그 피해는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함께 이 학살에 반대하자고 하고 싶은데, 전기를 사용하고 있는 개개인에 관하여 이야기하면 다시 물러선다. 전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산업은 가정에서 쓰는 전자제품을 만들고, 그걸 가정에서 사용하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산업이 어마어마한 전기를 사용하는 건 맞지만, 산업만 비판할 수도, 가정만 비판할 수도 없다. AI 개발 이후에는 AI사용을 위한 순수한 물이 필요하여 신규 댐을 두자리수로 짓고, 전력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필요를 다시 인식하고 함께 사는 삶들을 돌보는 관계들도 있다. 외지인에게도 열려 있는 관계라 고이지 않는다. 만약 전기를 줄여 살아야 한다면,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늠할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전기 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돌아가시거나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노하우가 필요없어져 잊었을 것이다.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고립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게 전기라는 다른 폭력을 매개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있고, 살아가는 동안 필요를 다시 인식할 답을 찾아나가고 싶다.


이 책은 송전선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송전선로 부지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송전선로가 세워졌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그 여파를 알리지 않고 송전설로 건설을 시작하였던 그때를 기록한다, 계획이 세워질 때 주민이 개입하지 못한 채로 확정된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보상금명목의 돈을 몇몇의 대표자 아닌 대표자에게 지급하고,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반대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 인간성을 말살하려 하는 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주민들을 제압한 밀양의 기록이다. 이때의 일을 국가폭력이라 표현하는 것을 우아한 말이라고 말하는 주민들이 있다. 한편 함께 싸우다가 최근에 돌아가신 구미현님은, 탈핵,탈송전탑운동할 때가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최근에 제정된 전력망 특별법은 기존의 입지선정을 위한 절차마저도 생략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신규송전선로에서 벌어질 일들, 세워진 이후에 벌어질 일들. 이 반복을 막을 수 있을까? 착취와 폭력을 막고서도, 함께 잘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찾아야 할까?


"밀양에서 벌어진 일들은 밀양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탈과 약탈의 폭력은 밀양 이전에도 있었고 밀양 이후에도 있다.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하여 보고하는 발표회장에 온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예정지인 자신들의 마을에서 곧 벌어질 일들을 들으면서 두려워했다. 서울로 오는 전기는, 도시로 오는 전기는 지금도 누군가의 두려움과 불안, 구체적인 위험과 폭력을 지우며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리고 두려움과 위험에 직면한 이들은 그 땅의 주인들이 자신들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인가.' 밀양 탈송전탑 탈핵 운동의 이야기를 듣는 청취의 연대는 이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멸종
애슐리 도슨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본주의 사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여 멸종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은 정도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 아예 불가능하다. 환경운동 덕분에 기업과 국가가 1960년대 말부터 제기되어 온 지역 위기 해결에 나서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후변화와 멸종이라는 문제를 살펴보면, 자본주의 체제가 여전히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생태적 기초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주기적인 체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가 제시했던 해결책은 축적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자본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조차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멸종 위기는 규제받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장의 산물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자본주의가 보존을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붕대를 감아야 할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유발한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숲을 파괴하고 그 밖의 자원을 과도하게 추출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글로벌 남반구의 부채는 계속 증가했다.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는 더 많은 나무를 베고 더 많은 광물을 추출하며 더 많은 석유를 퍼올려서 부채를 갚으라고 부추긴다. 그 과정에서 글로벌 남반구의 자연 자원은 빛의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멸종률이 대폭 상승했고 전 세계 생태계가 빠르게 황폐화되었다. 


전세계 생태계가 극적으로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기후 변화 위기는 축적의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녹색 경제가 열어 줄 투자 기회에 대한 낙관적인 언급이 위기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녹색 경제에서 대부분의 사람, 동물, 식물은 지구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태 파괴의 부수적인 피해자로 전락할 것이다. p63-65


[더이상 성장은 불가능하며, 탈성장을 계획해야 한다는 말은 왜 아직 주요한 논의로 자리잡지 못했을까? 탈성장을 계획하지 않으면 예기치 못하게 어느날 갑자기 추락을 감당해야 하기에 준비하자고 하는 것인데도.인간이든 비인간존재든, 한계치를 넘어서 혹사시켰으면 망가지는게 당연한건데, 언제까지 주어진 선물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5-08-16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장 신화는 너무 강고해요. 성장하지 않으면 모두들 죽는다고 생각하는거 같은데 사실은 그 성장이 우리를 점점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모두 외면하고 있네요.

우끼 2025-08-18 23:31   좋아요 1 | URL
그만큼 각자도생의 사회로 변한 까닭도 있는 것 같아요. 한 개인에게 무한의 축적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공동으로 돌보고 관리해오던 것들을 무너뜨려야 가능하니까요. 한편으론 공동으로 뭔가 돌보고 관리하는 건 서로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허술할 수밖에 없고, 허술해야 가능하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 틈새에서 소외되거나 착취당하거나 하면 그것엔 문제제기를 해야겠지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성장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자본의 권력‘을 계속 인정하는 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공간을 공동으로 돌보고 관리해야한다는 논의 자체가 시작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장사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다른 계획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시 필요를 충족하는 관계를 다르게 맺는 방도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비인간존재와의 관계도요.
뭔가 아는 척 말을 덧붙였지만, 어쩌면 뻔한 이야기인 것도 같아요. 돈으로 맺는 교환관계가 줄어들고, 상호 겸사겸사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불특정다수와의 관계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각자의 삶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내가 뭔가 돈으로 모든 것을 대비하지 않아도 나도 타존재도 지킬 수 있을까요? 누구나 모순된 삶에서밖에 출발할 수밖에 없다면, 무엇부터 시작할지는 각자가 결정하고 해나가야겠지만 우선적으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한된 지구 안에서 필요로부터의 탈출이란 있을 수 없다. 자유란 '필요의 영역'을 정복하거나 초월함으로써가 아니라 필요의 제약, 즉 자연의 제약 안에서 자유, 행복, '좋은 삶(good life)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켜나가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비전을 자급적 관점이라 부른다. 자연을 '초월'한다는 것은 더이상 정당화될 수 없으며 대신 자연의 생존잠재력이 모든 차원과 모든 발현양태에서 가꿔지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보편화될 수 있지만 필요로부터의 자유는 소수에게만 돌아갈 수 있다. p58


[자본은 자본을 벌어들이기 위해 비강제적으로 욕망을 재배치하여 필요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여 한계를 넘어선 파괴가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닌가? 근대서양철학은 그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아렌트는 필요의 영역 내에서의 자유를 책 인간의 조건에서 언급하고 있긴 하다.)

자연의 제약안에서의 자유, 좋은 삶에 관한 비전을 갖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자신의 몸이라는 제약에 맞는, 그로서 자신의 몸과 삶을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좋은 삶'이라는 비전을 '자급적 관점'에서 고민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가?]


대개의 개발담론에서 이들 욕구는 이른바 '기본욕구'(의식주 등)와 자유나 지식의 추구 같은 이른바 '고상한 욕구'로 나뉜다. 여성활동가들이 표현하듯,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은 그러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화는 생계유지와 생명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큰 부분이다. 그들에게 자유란 어머니 대지와의 애정어린 상호관계와 협조적인 생산활동을 뜻하며 지식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생존지식을 말한다. 부유한 북의 여성들이나 남의 부유층에 속한 여성들이 이러한 보편주의 개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생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진부한 것으로, 당연히 주어지는 사실로 여겨진다. 생존-생명을 위한 일상의 노동의 가치, 바로 그것이 소위 '고상한' 가치라는 미명하에 침식당해온 것이다.p66


[좋은 문학의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 존재, 우리를 둘러싼 존재를 존중하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매개가 될 때 좋은 문학이라고 하지 않나?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좋은 문학이 아니라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고통스럽기만 하면 또 그를 좋은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소위 '고상한'욕구 조차도, 우리 생존에 기여하고 있어야,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사실은 왜 종종 잊혀지는가 싶었다. 생존은 늘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문학의 목표도 그랬다. 생존이 목표가 아니게 될 때, 문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곧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핵확산과 호전적 남성문화 사이의 연관, 전쟁의 폭력과 강간의 폭력 간의 연관을 뚜렷이 알아본다. 실상 이런 것들이 여성들이 전쟁에 갖는 역사적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기도 하다. 남성들 대다수가 즐기는 것 같은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놀이가 공격-정복-소유-통제라는 남녀관계의 전통적 경로와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상이 땅이건 여성이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p70


'영적'이라는 용어는 기성 종교인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같은 가부장적이고 일신론적인 종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은 여성적인 것이지만 물질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사실상 연결원리이다. 이처럼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영성은 흔히 생각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주술에 더 가깝다. 인간이 다시금 모든 생명체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존중할 때에만 지구상의 생명은 보존될 수 있다. 이러한 자질은 내세의 신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우리의 노동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우리의 내재성에 있다. 그리고 때로 제례의식으로, 춤과 노래로 이 신성함을 찬양해야 한다.p72-74


이어지는 장들은 에코페미니즘을 삶의 기본욕구로부터 출발한 시각이라 보는 우리의 기본적인 견해를 담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자급적 관점이라 부른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보다 이 시각에 더 근접해 있으며, 남에서 자신들의 직접적인 생존을 위해 싸우고 노동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이 북의 도시 중산층 남성과 여성보다 여기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들이 산업체제의 파괴에 직접 영향을 받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남성 또한 이 과정을 분석하고 변화시킬 '물적 토대'를 지닌다. p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월딩 : 아마존에서 배우는 세계 허물기 이동시 총서 2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 아마존에 땅과 관계맺고 지키려 싸우는 이가 있고, 한국 어느 가난한 농촌에서 흙, 땅, 씨앗과 관계맺고 생태농사를 짓는 농부가 있다. 폐기물처리장, 송전탑, 원자력발전소가 멀지않아 고립 마모되고 소멸에 가까워도 땅의 생존이 나의 생존이라 지키려 싸우는 이가 있다. 아마존이 멀리 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 - 망해가는 세계에서 더 나은 삶을 지어내기 위하여
양미 지음 / 동녘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촌에서의 삶을 결심하고 살아가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만나면 반갑다. 시혜적인 시선과 동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피지배계급으로서 저항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씨가 크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이제까지 책들이 글씨가 너무 작아서 지금 나이에는 잘 볼 수 있지만 이후 나이들면 읽기 힘들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자는 예비 독자들을 높은 연령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접근성을 고려하였는지 글씨 가독성이 정말 좋다. 

아직 읽는 중인데 책에서 긍정적인 예시로 들었던 부분이 오류가 아닌지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햇빛연금의 사례로 나온 신안군 연금은 해외자본의 투자를 받았고 배당금이라고 나오는 금액은 지자체가 세금으로 충당하는 구조라고 알고있고, 이후 외국투자자본이 수익성 없다 판단하고 철수하면 지자체가 빚을 갚아야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같은 모델이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개념으로 무슨 일을 진행할 때 겪는 폐해이다. 자본을 갖고 있고 그걸 투자라는 이름으로 빌려주는 순간, 투자수익을 보장해줘야 하는 불로소득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까? 


귀촌을 결심하기까지 심란하고 어려운 시간들을 겪었지만 결심한 후에는 ‘가능성‘이라는 것 그자체가 희망으로 이어졌다.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가능성‘뿐이다. 비록 실패가 당연하더라도 지금 나의 노력이 쌓여 다음 실패를 조금 더 줄여줄 테니 그것만으로도 좋은 선택이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 또한 저항이라고 믿는다. 위치는 괴물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선량한 권력은 없다고 믿는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가지면 피지배계급을 위한 나라가 될 것이란 실험은 실패했다. 위치를 바꾼 괴물이 새롭게 탄생할 뿐.
개발과 발전이 완성되면 다 같이 잘살 수 있을 것이란 거짓말도 믿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도 지배계급은 풍요롭게 산다. 지배계급에게는 언제나 가난한 피지배계급이 필요하다. 그러니 위치를 바꾸고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가능성을 시도하는 것이 내게는 저항이다.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