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미학 +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 비극에 대하여 외 - 전3권
알렉산더 고틀리프 바움가르텐 외 지음, 김동훈 옮김 / 마티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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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더 무기력해지기 전에, 마음을 움직여 몸을 일으키는,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읽고 싶었는데, 그 기대가 충족되길 바라며 구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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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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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슐러 귄이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중에서 어떤 것들을 선택하여 보여주었고, 그것이 에세이로 출간되었다.

그의 시민으로서의 자아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의 자아, 나이든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자아와, 독자로서의, 작가로서의 자아들이 여기 나뉘어 실려있다. 특히 그가 판타지 소설의 작가이기 때문에 느끼는 판타지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서술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어슐러 귄을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했다. 그는 힘을 잘못 사용하여 쫓기는 주인공을 그렸고, 설정이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하여 이삼일 내에 여섯권의 책을 거의 읽었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하여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나는 그가 모든 이야기를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읽고 판타지 소설이 어떤 힘을 갖는지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판타지 소설은 허무주의를 그리지 않는다는 . 그리고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기에체제 전복적이라는 지적한 점도 흥미로웠다


물리법칙은 무시해도 인과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 세계의 지도에서 특정한 위치를 가지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지도와 관련성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모순의 바다를 표류하거나 설상가상으로 작가의 희망적 관측이라는 얕은 물웅덩이에 익사하게 된다. p129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이 판타지 문학을 여타 문학에 비해 훨씬 많이 폄하하거나 악마화하고 묵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본성은 이미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판타지 문학이 세기에 걸쳐 증명해 있다. p133


  귄의 작품은 서사가 인물들을 이끈다. 그러면서 명시적인 잠언들이 서사와 인물에 힘을 더하며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가 소설에 등장하는 규칙들은 우리 세계의 규칙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뭔가가 뒤틀려있다. 내가 읽은 서사에서는 힘을 많이 가진 마법사가 등장하고, 그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다가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신분이 있고, 편견이 있고, 힘이 있다. 그것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고 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은 부분을 일부로 교조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고, 중간 중간에 삶에 관한 통찰들이 실려 있어서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멸시해온 무의식적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고, 그의 작품 <어둠의 왼손> 성역할에 관한 고민을 뒤집어서 성별을 선택할 있도록 하는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들었다. 확실히 <어스시의 마법사>시리즈도 그가 말한 대로, 체제 전복적인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처럼 보였다힘이 마구 승리하는 서사를 끌어내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작가가 보여줄 있는 이야기 세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준다. 밥을 하고, 빨래하는 일을 일상을 유지하는 힘으로 생각하고, 몸의 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속 관계를 재정의하는 그의 태도가 에세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는 게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계속 읽어나가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언어로 명확히 지적해준 부분도 있었고, 그의 취향도 엿볼 수 있었던 게 재미있었다.  



*황금가지 서평단에서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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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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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처음과 끝, 서사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에는 처음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한다고 그랬던가요? 그런데 이 각각의 소설에는, 이 책 전체에 서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었어요. 악몽의 구조대로 수미상관으로 끝나야 했던 몇편의 단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집을 단편집이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모든 '꿈'들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단편집을 단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꿈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꿈을 파편으로 꿉니다. 누군가가 죽인 사람 없이 죽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끝없이 쫓기고, 말없이 걸어가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영영 헤어집니다. 꿈에는 서사가 없고 일어나면 대부분 잊어버립니다. 어떤 장면만을 남기고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남은 하나의 장면은 너무 강렬해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 소설도 그랬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의식으로 꾼 꿈이 어린시절을 연상시켰어요. 제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세계는 잔혹하고, 그러나 저 역시도 세계에게 잔혹하게 구는 존재인 그런 어린아이요. 제가 최근에 힘든 일을 겪고 어린시절로 자꾸 회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둔지는 꽤 되었지만 그 사건 이전에는 책을 펼쳐서 읽는 게 힘이 들어서 엄두가 안났거든요.
저는 서사가 있는 글을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요, 서사가 있으면 이야기가 너무 뻔해지는 것 같아서요. 이야기가 종결되고도 삶은 남아있는데, 이야기는 종결되어버리니까요. 저는 서사가 명확하게 가리키는 바가 분명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뭔가 말하려고 하지만 실패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요.  제가 사는 삶도 서사적이지 않구요. 누구나 겪기에 말을 내뱉을 수는 없지만 제게는 잔혹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대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자폐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최근인데요. 한가지에 끊임없이 몰두하여 사람들과의 교류를 스스로 차단하고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는 경험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경험은 사실 외부와 자신과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았을 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충격파로 내부에서 정리가 필요할 때 필요한 거잖아요. 내부로 침잠하고 계속 내게 말을 거는 건 외부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죠. 그러니까 자폐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자꾸 내게 말을 거는 건 사실은 바깥으로 말을 하고 싶은 데 그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 방법은 정해져있지 않고 제가 이미지화해야 하는 일이구요. 배수아 작가가 낭송하면서 뭔가를 발견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을 때, 저는 두가지가 생각났어요. 소설을 이미지화하는 방식에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과, 목소리로만 구전되던 구전설화에 관한 것이요. 소설을 낭송한다는 방식은 이 소설에 갇혀 있는 목소리를 꺼내려는 시도라고 생각했어요. 악몽은 닫힌 구조인데, 닫힌 구조를 사랑하는 줄도 모르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목소리로 변환시켜서 같은 시공간에 있게 만들면 다른사람에게도 닫힌 구조가 현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닫힌 구조라서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에게 소리로 귀에 들어가면서 초대하는 거죠. 목소리로 구체화된 이미지인 거에요.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도 어딘가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에 등장하는 낱말들이 굉장히 원초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원초적이라는 것은 인간문명 이전의 것, 아니면 인간문명이 최초로 탄생할 무렵의 것이라는 느낌도 들거든요. 다시 옛날로 회귀하려 하는, 구전문학의 시대로 돌아가는 그런 잔인함이요. 그림형제의 각색된 동화나, 이솝우화, 우리나라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들이라든가. 뭔가 잔인하고 무서운 이야기들인데, 어렸을 때는 도덕관념없이 그런 것들을 함부로 말하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삼가는 이야기들에 관해서 떠올렸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지는 이야기가 충격적인 건 그 이야기에 진실이 담겨있기 때문인거잖아요. 
저는 작가가 제게 제가 납득할만한 진실의 말을 몇마디 숨기고서 침투해들어오는 것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어요 그 진실은 꿈으로 묘사할 수 있는데 꿈은 현실을 기반으로 쓰여지잖아요. 그러니 꿈은 현실을 반영하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은 일어났었던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스스로 겁을 먹잖아요. 소문이 우리를 헤칠 수 없다면 왜 우리는 소문에, 무의식에, 꿈에 지배당한다고 느낄까요? 
확실히 이 소설을 '소문'이라 한다면, 소설이 저를 해칠 수는 없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에게 제 무의식을 내어준 기분이었는걸요. 마구잡이로 헤집어진 기분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목소리는 있었는데, 제게 남은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는 못하겠어요. 제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이유를 일일히 나열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럴때 무의식의 힘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서 무의식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지구요. 무의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식을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구요. 다시 '현실'이라 불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요. 그 시도중 하나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되돌아가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여기 표현된 꿈들이 다시 그 잔혹함을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비한데, 세계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어서 모든 것에 휩쓸리고 마는 시절이요.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뭔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느끼기에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대부분의 일상에서 느끼고요. 그런 두려움을 느꼈어요. 소설속의 구절처럼, 어린 시절의 감각으로 살아가는 도중에는 어린시절이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없는 그런 …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생각이 망상인 건 그때를 경험할 수 있는 건 지금일뿐이니까요. 
그런 꿈들을 저는 이 소설을 통해 꾸었어요. 아주 구체적인 이름들, 풍경들이 추상적인 단어들보다 더 정확하게 저를 꿈꾸게 했어요. 제 몸에 붙박혀있는 제 삶이 이야기와 뒤섞여 공중으로 흩어져버린 것 같았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고, 두려워하고 있고, 거대한 에너지에 둘러싸인 감각만 남아 있어요. 때문에 무의식을 이해하지도, 지배하지도 못한 채로 다시 헤집어졌을 뿐이었어요. 소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요. 그러니 이 소설에 관해 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저는 잊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떤 감정만 남고, 장면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처럼요. 무엇이 해소되었는지조차 아직은 말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을 잃었어요. 그러나 저는 아직 비서사적인 형태로 살아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매력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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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바리데기> 황석영,286p


황석영이 바라보는 생명수는 사랑이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건,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사랑하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러 나선다.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라면, 바리공주가 찾던 생명수이기도 한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고, 그 물이 생명수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바리공주가 겪은 고행이라는 맥락으로 <바리데기>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그 자신이 초래한 고통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주어진 고통을 당한다. 바리공주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버림받는 게 아니라 일곱째 공주로 태어났기 때문에 버림받는다. 그때 자신을 탓하면서 자신을 수정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덜어지는 게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듯 매번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개체는 종족 및 집단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개체가 모여서 종족이 되기 때문에 종족의 삶은 개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종족의 삶을 판단할 때도, 개체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방법 이외에 뾰족한 수를 찾기 어려웠다. 개인이 왜 고통받았는지 질문하고, 그 고통이 왜 종족이나 집단 차원에서 주어졌는지 고민하고, 개인이 더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집단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방식으로, 그게 아직 누군가를 제외하는 방식이 될지라도 그런 식으로 고민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왜 바리와 바리공주는 고통받아야 했는가? 왜 바리의 국가는, 바리공주의 부모는 그들을 제외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는가? 왜 한사람과 사회는 어떤 것들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가? 제외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서는 왜 아무 일도 진행할 수 없게 되는 걸까. 80년대, 사람들은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들을 소외시켰다. 2000년대, 사람들은 소외를 소외시키기 위해 혼자가 되어 SNS로 사람들과 정치적 의견을 공유한다. 과격한 선언은 세세한 내용을 소외시킨다.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인류는 진화의 과정을 거쳤고,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소외되었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을 소외시켰고, 자연은 파괴되었다. 자연이 파괴되면서 인간은 다시 자연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소외시켰다. 한 집단은 그중 소수를 소외시켰고,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지된 집단은 소외된 자들이 일으킨 전복에 의해 전복당하고. 생으로서 죽음을 소외시키려는 자는 죽음에 의해 소외당하고. 이런 지경에서 누군가가 이 버티기 어려운 생을 뚫고 나도, 세상도 사랑해준다면, 그래 죽은듯이 숨을 쉬다가도, 온 몸으로 살아있으려 할 힘이 생기겠다. 이 사랑은 생명수와 같겠다. 버림받은 이가 다시 회귀하여 우리를 구원하러 돌아온다. 복수가 아니라 구원이라면, 더더욱 그게 더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염치없게도 그만이 구원이 가능하단 생각을 하며 간절하게 믿겠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이가 가장 순도 높은 사랑을, 순도높은 생명수를 가슴에 품고 있을 테니까. 자기보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테니까. 그걸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바리데기를 전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무당을 불러 그것을 수없이 말해달라 청할 수 있겠다. 죽음의 신이 무당에게 깃들어 죽음으로서 생을 감싸주겠다 말해주는데, 한치앞을 모르는 삶이라도 다시금 잘못되었다 여기는 것에는 맞서싸우면서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겠다. 사랑하며 살겠다. 생은 제외하고서야 생일 수 있는데, 죽음은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그러니 누구라도 구원할 수 있다. 사랑이 제외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죽음만 할 수 있는 일 처럼 보이는 일조차 능히 해내는 데, 어찌 사랑이 생명수가 아닐 수 있을까. 생명수를 전한 사람이 신이 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의 신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죽는 설화에서의 바리데기도, 구원을 행한 자로서의 면모가 있을 것이다. 다만 예수처럼 ‘인간’으로서 죽는 자, 우리와 같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된 설화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신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죽는 것도 친근하다. 그런 죽음이라면 바리데기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크기 때문에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불평등하기에, 여성 혹은 인간이 우상시될 우려도 있겠다. 예수가 그렇게 신이 되었던 것처럼. 이를 신화적 비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바리데기에서의 바리의 역할이 미소지니(misogyny)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인간에게 이상이 필요하지만 이상때문에 인간을 혹사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 “misogyny”, “philogyny”등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이상은 이상이 되지 못한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에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상향을 만들지만 이상향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더는 이상향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제노사이드도 자국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자국민을 이상화함으로서 해결하고 나머지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도 몇몇 무가처럼 바리를 신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시대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겪는 인물로 그린다. 만약 바리가 신이 되었다면, 그가 겪었던 고통들이 더는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렸다고 해서 그 문제가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보통 문제상황을 신화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끝내서 문제를 문제로 둔다. 문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볼 힘이 생겼기 때문일까. 많은 것들이 인간의 통제하에 있으니 이 역시도 인간의 통제하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주된 사상이기에 가능해진 일이기도 하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생아’소설과 닮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나를 낳은 존재라 믿을 수 있으니, 아버지를 의심하는 서사가 사생아 소설이지만, 세계 내에 믿을 구석이 있는 존재를 두고, 믿을 수 없는 존재를 규명해나가는 일, 혹은 믿을 수 없는 것을 제거해가는 일, 그것이 큰 틀에서 사생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기에 더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거라면, 소설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을 걸러 보는 훈련도 필요하겠다. 소설가 역시 시대의 사람이고, 시대가 말하지 않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거나, 현실이 그러하기에 그렇게 서술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바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신분이 분명하지 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민자 남성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민자 성인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성매매밖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밀입국한 성인 여성은 전부 성매매업소에 가게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이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이민자들에 대한 규칙이 바뀌어야 할 것이고, 이민자를 만들어내는 국가에 외부적 압력과 내부적 노력이 필요하다 판단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이었다면, 바리데기 무가에서 바리공주가 겪었던 고통을 따라가기 위해서일까. 사실 소설 바리데기에서는 초반부를 지나면 여성으로서 부모로부터 차별받는 게 아니라, 인간 개인으로서 세계사의 흐름에 휩쓸려서 고통받는다. 소설에서는 가족으로부터 고통받는 것과 사회에서 고통받는 것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끼는 강아지가 죽는 동시에 바리는 생명수를 찾는 과정을 함께 겪는다. 작가는 이를 ‘생명수를 찾는 바리의 여정’으로 엮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황석영은 소설 바리데기에서, 씽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돈을 훔쳐 달아나기 때문에 아이가 죽는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바리가 은혜를 입고서 씽을 돌보지 않은 까닭에 바리의 아이를 잃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하는데, 사실 이 사건들 간에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없다. 그게 바리의 책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인과관계를 불어넣는 것은 사랑하는 인간일 뿐이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조차도 자신의 책임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런 맥락에서 작가가 소설에 너무 개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스스로 납득하기 이전에 작가가 그 결말을 주입하려는 것 같았다. 씽의 죽음이 필연적인지도 솔직히 잘 납득이 되지도 않았다. 바리의 남편이 이슬람전쟁과 연결된 것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매끄러움과는 별개로, 그런 일이 실재로 일어나기 때문에 소설가로서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상황에서는 바리가 ‘버림받는’ 정황을 납득할 수 있으나, 왜 신화에서는 바리가 버림받는가? 바리데기가 태어나고 일곱째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신화적 비방이라 본다면, 이때부터 여성에 대한 두려움 공포 등의 미소지니가 실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소지니의 세상이 병들었을때, 다시 바리의 힘으로 병을 치유한다는 건, 지나치게 바리에게 많은 것을 걸고 유지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미소지니의 극복이기보다는 필로지니가 되면서 다시 미소지니가 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도 버리는 자보다, 버림받은 자의 힘이 더 강하다는 걸까. 일반적으로는 반대로 생각하기 쉬운데, 버리는 자는 사실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할 수 없기에 힘을 휘두르는 측면도 있다. 무조신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리공주 무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퍼져 있던 것이라 그런 이야기로서 일상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미였을지 분명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세부적인 내용이 전국적으로 다르더라도 전체적인 골격이 비슷한 건 그만큼 변화된 서사보다 계속 유지되는 서사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채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조신화에 가까운 서사일수록 더 오래된 무가라고 짐작했어도, 어떤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는 모른다.

신화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언가 역할이 있었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라면, 이 작품들은 어디까지 해냈어야 했을까? 실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화나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왜 이것들을 지속할까.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내면화하여 가르치기 위함일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문구를 읽지만,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부터 배워나간다. 다르기 때문에 같게 대해서는 안되는데 평등이라는 건 어떤 방식으로 지켜지는건가? 나는 과연 타인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것을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내가 사는 방식에도 의문이 들고, 어떻게 포장해도 스스로의 삶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왜 살아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제외하는가. 어떤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어떤 사람을 제외하기 때문이라면, 왜 그 사람과 사회는 어떤 사람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가?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눈이 먼 사람, 자기 몸을 자기 뜻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등 신체적 조건이 다른 사람과 다를 경우, 많은 경우 사회적 조건이 다르게 된다. 인종에 따라 차별받는 지역에서 태어난 유색인종은,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과 무관하게 차별받는 경우도 있다.  화폐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 화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 일곱째 공주로 태어난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바리공주는 고귀한 집안의 일곱째 딸로 태어난다. 바리는 북한에서 태어난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조건을 가졌는지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크게 영향을 주는 세상에서 살면 사람들이 정의로워지고 배려가 넘쳐날까.

 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지만, 개인은 ‘모든 것’을 고려한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일단 의문이 든다. 게다가 그 개인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공부하여, 그것을 토대로 파급효과를 예측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더라도 더는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 예측이 가능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소원을 마주하게 되면, 가능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소원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고 어떤 소설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다. 한치 앞을 살아갈 뿐이 아닌가. 어떻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오늘날 읽어도 사람을 그렇게 치졸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지금 인간이 읽어도 적용되니, 인간이 변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하게 되는데. 이 탐구와 공부가 바르게 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2016.12.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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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9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끼님의 글을 오랜만에 봅니다. 잘 지내셨죠? ^^

경제적 ᆞ계층적 ᆞ 인종 차별을 지적하는 페미니즘이 있어요. 제3세계 페미니즘, 마르크시즘 페미니즘이 그렇습니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우끼 2017-01-10 14:13   좋아요 2 | URL
cyrus 님도 잘 지내셨나요? 종종 cyrus님 글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번에 올려주신 페미니즘에 관한 글도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했지만.. 지인들이 읽은 소감을 들려주지 않아 아쉽네요 ㅠ
페미니즘에 관해 공부하고 토론하다 보면, 계층적 문제까지 아울러서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의 고통이라는 것도 결국 소수자라는 맥락에서 고통인 것이고, 그 소수자를 생산하는 사회를 비판하게 되더라구요.. 소수자를 만드는 사람도, 소수자가 된 사람도 고통받는 세상인 거죠 ㅠㅠ .. 박근혜 최순실 문제가 사회 전반의 문제와 얽혀 있으니 쉽게 끝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이젠 분노만 하기엔 지칩니다. 갈 길이 멀고 벌써 지치면 안될텐데...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자가 되어 서로 토론하고 실천하면서 불안을 감당해야 사회가 겉만 바뀌지 않고 뿌리까지 튼튼할 테지요.. 그러려면 저부터도, 가부장적인 습관들을 버려야 하는데. 지치면 쉽게 그런 태도로 상대를 대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건강한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을 함께 해갔으면 좋겠는데... 잘 의사소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만, 꾸준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AgalmA 2017-02-10 16: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우끼님! 글 올리신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소식 좀 주시지ㅜㅜ;;;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알라딘이 알려줘서 고마워해야 할 판 ㅎㅎ;;
여전히 치열하시네요^^!
씽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달아나는 대목... 이냐리투 영화 <비우티풀> 생각이 납니다. 불법적인 일로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았지만 아버지는 죽음을 맞고, 그 돈을 유모가 가지고 달아날까, 아닐까 그렇게 보여주고 영화를 끝내던 이냐리투를 원망스럽게 생각해야 하나, 너무나 사실적이다 생각해야 하나...했던.

우끼 2017-02-11 22:23   좋아요 1 | URL
ㅎㅎ.. Agalma님 댓글알림받고 기뻐서 와봤더니 ㅠㅠ 저도 모르게 .. 이런 ... ㅠㅠ 처음 당선작이 되어 기뻐요 ㅎㅎ ... 치열하다는 말씀, 정말 행복한 말씀입니다 ㅠㅠ 치열하게 살고 싶었어요.. 저의 꿈인데, 저는 좀 덜 치열하게 사는 듯 합니다. ㅠㅠ 그래서인지, 그 말씀이 너무 기쁩니다..
Agalma님 글 때때로 읽으면서 하트 달고 있었어요 ㅎㅎ 댓글 하나 다는 것도 좀 정성껏 달고 싶어서, 좀체 시간이 안난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중으로 미루고 했던게 이제와서 후회가 되기도 ㅠㅠ.. 감사합니다.
Agalma님 댓글 읽고 소설의 줄거리를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며 서술할 껄 하고, 후회가 되었습니다. 바리가 두번 자신의 터전을 떠나는데, 첫번째 터전에서 만나서 도움 받은 사람이 씽입니다. 나중에 바리가 씽과 두번째 터전을 찾아서 떠나고 그 이후에 연락이 안되었다가, 바리가 우연한 기회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을 때 씽이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어찌 집에 씽을 두고 외출했더니 씽은 비상금을 어떻게 찾아서 도망치고, 아이는 계단때문에 다쳐서 죽어 있고.. 그래서 바리는 씽이 이토록 어렵기 이전에, 바리가 자리잡았을 때 바로 찾아서 서로 도왔으면 하고 후회하도록, 서사가 바리를 이끕니다... 저는 이 부분서술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긴 했지만, ㅠㅠ 실재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라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라서.... 뭐랄까 제가 어떤 특정 소설문법에 익숙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작가가 신경을 덜 쓴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도 <비우티풀>영화를 다음에 챙겨보겠습니다. ㅎㅎ 감독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었을지 궁금합니다..

AgalmA 2017-02-11 22:40   좋아요 1 | URL
이상 수필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인데, 이 게으른 자의 생각은 어찌나 치열한지... 그런 의미에서 우키님께 치열을 쓴 것^^ 저도 일상의 여러 부분은 놓치며 사는 게 많아서 남 지적질할 위인이 못 됩니다ㅎ;;
댓글에 너무 완벽성을 기하려 하면 지쳐요. 그 맘 저도 잘 알아서 이해합니다만^^;
아, 우끼님 이번이 첫 당선입니까@@! 세상에...몰랐습니다. 저보다 알라딘에 오래 계셔서 이전에 당연히 되어 보셨겠지 싶어서 굳이 축하 인사를 안했습니다. 그장소님도 이번에 처음 당선되셔서 기뻐 축하드리러 달려 갔었는데! 우끼님도 정말 축하드려요^^! 당선되실 만한 글입니다!
아, 바리와 씽 얘기가 그런 결이 또 있었군요. 그렇담 우끼님 <비우티풀> 꼭 보셔야겠습니다. 이냐리투 감독이 그런 걸 정말 잘 다루거든요. 그가, 사람들이 이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인과를 고민하게 하는 부분들이 많아요...
다시 한 번 더 축하드려요, 우끼님. 좋은 글로 더 자주 뵈었으면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가 문장에서 절절히 느껴져서 글 자주 올리시라 말씀드리기가 참ㅜㅜ...

2017-03-2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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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무의미, 무의미의 세계.


김엄지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를 가는 지 모르게 어디를 가고, 아무런 목표의식도 없이 부유하다가 결말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끝난다. 이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존의 서사방식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소설이든, 인물의 욕망을 파헤쳐 지난하게 풀어내든, 볶아먹든, 좌절시키든, 기승전결이 있는데, 김엄지의 소설에서는, 뭔가 기승전결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소설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뭔가 모를 재미와 긴장감이 있다. 인물들이 아무것도 제대로 원하지 않고, 뒤엉켜도 뒤엉키는가보다 하고 자신들의 삶을 방관하는데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이루어진다. 누구나 ‘목표’를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들을 그게 왜 목표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달려가고 있는 그 상황이, 맛깔나는 문체와 결합하여 이야기가 되었다.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 시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불려내진 새로운 소설형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돼지우리」, 「영철이」,「어느 겨울날」 에는, 인물들에게 목표같지 않은 목표가 있다. 하지만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목표가 이루어진 이후, 그 목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난다.

인간이 목표 없이 무의미한 건, 단지 신이 없다 믿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런 무의미를 조장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본디, 목표가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사회 안에서 함께 감당하지 않기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까. 김엄지가 보여준 무의미한 세계가, 지금 이 시점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들린다.


표제작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제목은, 미래가 없어보여서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 산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도발적인 이름이다. ‘소설’로 어울리는 제목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무수히 돌아다니는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래를 꿈꾸는 행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높히고, 사람답게 어울려 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 생각해왔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미래’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 없어서 독특하지도 않고, ‘그’라고 지칭되는 것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보인다. 원자화된 개인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이름이 불리워질 일이 없고, 그는 그이든 다른 이름이든 딱히 특별하지 않다. 이런 개인이 ‘도모하는 미래’라는 건, 딱히 거대한 목적이 없다. 한치 앞만을 보고 가는 것 뿐이다. 

 ‘그’ 역시 딱히 특별한 목적 없이 등산을 간다. 건강에 좋아서라든가, 그런 이유같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딱히 연락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도 없다. 그와 헤어진 전 여자친구는, 미래가 없는 그라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한 가지 계획이 있다. 산에 가면 다이빙을 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다이빙을 딱히 하지 않아도 좋고, 해도 좋은 그런 정도의 계획이다. 그렇게 등산을 가서, 숙소를 찾아 가고, 서로간에 의미를 주고받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목적은 이루지만,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처럼 보인다. 문장들도 뭔가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근처에 숙소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여러 특징없는 사람들에게 반복되고, ‘좀더 어두워지기 전에’라는 말도 반복된다. 반복되지만 의미는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처럼. 반복을 위해 반복되는 것처럼.


 ‘그의 기대에는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제보다 더, 계곡과 다이빙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기대와 확신으로 그는 간밤에 꾸었던 악몽을 잊었다.’ (p167,「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그’는 그가 처한 모든 상황에 곧 ‘익숙해지고’, ‘기대와 확신’만으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지만, 그를 뒷받침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이불빨래, 세금’같은, 목표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는 생각뿐이다. 다이빙이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지만, 그것은 마치 ‘죽음’을 향해 목표없는 그의 삶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처럼 암시된다. 소설 안에서 내내 반복했던 무의미만 계속 그 끝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반복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끝나지 않아야만 할 것 같다. 삶이 이렇게 끝나기를 누구도 진심으로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돼지우리」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이 등장한다. 「돼지우리」는 김엄지의 등단작인데, 이 소설에서도 ‘삶’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도 주인공들에게서 딱히 ‘목표’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라라는 면접을 매번 ‘떡’같이 본다. 그것은 우라라에게 ‘개’, ‘좆’과 같은 말로서,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취직이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외설적인 단어들에 압축해서 표출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외설적인 단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데도 외설적으로 들리지도 않고, 거북하지도 않다. 화자가 그것을 지나치게 분노를 담아 이야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일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지는 우라라가 취직한 곳은 ‘돼지우리’라는 식당인데, 채용 계약서가 재미있다. 돼지를 마음껏 먹게 하고, 최소 세 번만 출근하면 되고, 한달 급여는 백만원이고,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으면 된다. 뭔가 수상한 곳이다. 이윤을 내기 위하여 우라라를 고용한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게다가 ‘돼지우리’ 안의 ‘돼지’라니. 사실 우라라가 돼지가 되어 잡아먹힌다고 해도, 이 직장이 이득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요즘은 공장식 축산을 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인 인간을 돼지로 만들어서, 키워 잡아먹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돼지고기를 먹는 돼지는, 동족을 잡아먹어 스스로를 먹여살리는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처럼.

그런데 만약 이 계약이 동화에서처럼 ‘돼지’가 되어 잡아먹히거나 하는 최후를 맞는 게 아니라면, 이 직장만큼 꿈처럼 들리는 직장도 없다. 이 직장에서 일하면 돼지가 되고, 사장이 말하는 음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고는 해도, 고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하는 일도 없는데 돈도 주는 곳이라니, 선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에 비교하면 현실의 직장은, 하고 싶지 않은 일만 잔뜩 하고, 밥값도 대체로 스스로 지불해야 하고, 자기 삶 없이 노동력, 시간을 전부 투자하여 겨우 돈을 받는다. 이것도 좋은 직장의 경우이지, 대부분의 취준생들을 그 삶 없는 삶을 위해서 삶 없이 취업을 준비한다. 스스로의 복지같은 것은 신경쓸 겨를도 없다. 그걸 생각하면, ‘돼지우리’라는 직장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처럼 들려서 이상하다. 

화자인 ‘나’는 그런 직장을 수상쩍어 하면서도, 스스로가 돼지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돼지우리’의 사장은, ‘나’를 가리켜 사람도 아닌 것이 돼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나’가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를 돼지라 확신하고, 어느 부위가 돼지인지 질문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에게는 아직 이상한 곳을 이상한 곳이라 자각하는 능력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영철이」 에서도 삶의 단면이 나온다.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꼈다. 밥, 사람과 개에 어떤 상징성을 두고, 그것들을 비교를 통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그닥 삶의 의욕이 없어보인다. 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취득하여 삶을 살아가려고 먹는 음식과 동치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밥맛이 없다. 이는 곧 삶의 의욕이 없다는 말로 치환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딱히 삶의 목표도 의욕도 없는 영철은 그냥 습관적으로 밥을 먹는다. 그의 아내는 그런 영철이 불만스럽다. 밥을 저렇게 맛없게 먹으니,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따로 소통하지 않는다. 영철은 아내의 말에 특별히 신경써서 대답하지 않고, 아내는 영철에게서 온기를 느끼는 데 포기한다. 그래서 개를 데려와 그와 똑같은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개는 영철과 아내 모두에게서 더 사랑받고, 집 안에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과는 소통하지 못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개와는 소통한다. ‘언어’가 부재하는 순간이, 이들에게 더 따뜻함을 가져다 준다. 왜 소통이 부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지만, 사람보다 동물을 더 편안하게 여기고, 함께 사는 것이 버거운 현대인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철이 아무 별다른 이유 없이 실직 후, 잠시간의 화목한 시간을 주던 개 역시도 잃어버린 이후엔, 영철은 아내에게서 이혼 통보를 받는다. 그들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끈마저도 사라져버린 까닭이다.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다. 

아내가 밥맛이 없어 밥맛을 되찾으려던 신혼 초의 시기에 친정엄마는 딸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철과 아내가 이혼 후, 영철이 밥맛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무신경하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아내의 엄마가 추천했던 것과 동등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서, 서로간에 진정한 소통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또 다시 삶의 무의미로 치환된다. 요즘 사람들은, 이미 의미가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 그냥 태어나 주어진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소통으로 사람들은 의미를 함께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소통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소설은 ‘소통’에 초점을 맞추어 무의미해진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겨울날」의 Y는 김수동에게 사기를 당해서 김수동을 쫓아다닌다. 김수동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말하면서도, 김수동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사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김수동을 쫓는 것이 더 중요해보인다. Y는 햄버거, 섹스, 김수동을 통해서 삶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인물들은 계속 이야기한다. 계속 자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것, 삶의 의지가 없어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기억하는 일도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허무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둥 대화를 나누지만, 별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나 역시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피곤하고 우울한 삶의 면면들을 발견하지만 무언가를 딱히 시도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아득함’을 느끼고, ‘꽃’을 사고 싶어하지만 소망은 소망으로 그친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김수동을 쫓아간 Y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사기친 김수동을 붙잡아 벌을 주어도 Y의 허무와 외로움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식으로 끝난다. 이 소설에서의 ‘나’와 Y역시도, 과연 그들이 잘 소통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김엄지 소설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김엄지가 사용한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이다. 인생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김엄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가령 「삼뻑의 즐거움」에 나오는 ‘팔광’은 세상을 테트리스에 비유한다.


그냥 쌓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에요. (p42,「삼뻑의 즐거움」,『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작가가 나서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돼지우리」라는 작품에서처럼, 가게 하나가 통째로 우화적인 성격으로 현실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적당히 리듬감이 있어서, 읽는 데 술술 넘어가는데도 마음이 움직여서,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엄지는 ‘삶’의 필수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다룬다. 먹는 것, 성관계,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활동, 일상에서 벗어난 자극적인 활동, 인간적인 상처, 사람과의 소통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소설을 이어간다. ‘무의미’하게 채워진 일상을, 어떻게 ‘무의미’하게 이끌어가는지 보여주면서 ‘무의미’ 자체로 보여준다. 밀란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에서, 우리는 무의미를 무의미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무의미’ 자체가 부정적인 메시지를 준다고 바로 단정짓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김엄지도 무의미를 딱히 비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좌절하는 것 같지도 않다. 비관적으로 좌절하면서 썼더라면, 이렇게 가볍게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우리는 이 소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질문이 남았다.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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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4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우끼 님의 이 리뷰를 읽었다면 냉큼 별 하나를 더 추가했을 겁니다..
취향 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전 소설은 좀 클랙식하게 읽는 편이라, 별로 였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의 문제일 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실천문학주의자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8-25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이 소설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주변에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별로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서.. 저는 정말 좋아했던 축에 속했습니다만..
이 소설집은 김엄지가 발표한 소설 순서대로 실려있는데요. 어떤 분은 김엄지의 소설 중 `돼지우리`가 가장 전통적 서사방식에 머무른 작품이고 점차 다음 소설을 읽을 수록 김엄지만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더라구요. 그 중간지점에 있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작품이 그분께는 가장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김엄지의 스타일도 볼 수 있으면서, 형식을 너무 어그러뜨리지 않은, 너무 멀리 나가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었어요.
저도 곰발님이 올리신 리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