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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영혜는 돌연 채식을 선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식을 하지 않기로 선언한다. 같은말인 것 같지만, '채식을 하겠어'와 '육식을 하지 않겠어'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이 책의 제목이 채식주의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육식을 금하는 것에 더 방점을 둔 제목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제목은 생각이 안난다. 비육식주의자, 로는 영혜의 선언과 태도를 온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적합하지 않다. 결국 영혜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곧게 서있는 나무가 되고자 했던걸 보면, 육식을 금하는 것에서 나무가 되고 싶어한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를 채식주의자,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영혜의 남편은 애초에 영혜를 특별히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은 직장에 나가서 점심과 대부분의 저녁을 해결하고 오니 영혜의 비육식 선언이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아침 한끼 식사를 채식으로 한다한들 크게 불만을 가질 것이 무언가. 그러나 다른 채식주의자들과 영혜는 다르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가끔 상반신을 노출하고 사람들앞에 선다. 거기에 어떤 거리낌이 없다. 회사에서 부부동반 간부모임이 있었을 때, 그녀의 이상함은 부끄러울 정도다. 차려진 좋은 음식들을 거부하기,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섞이지 못하기. 이건 사회인으로서의 영혜 남편을 난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삶의 방식을 그리고 태도를 선택한 영혜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영혜 남편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내를 자신과 같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만들 수가 없어 처갓댁 식구들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영혜의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벌려 강제로 고기를 입에 넣고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영혜의 뺨을 세차게 날린다. 영혜는 제 입에 강제로 고기가 들어가자 뱉어내고 칼로 손목을 긋는다. 남편과의 이혼은 당연한 수순이다.
인혜는 화장품가게를 운영하며 경제적 책임을 지고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아이에 대한 돌봄도 모두 제몫으로 갖고 있다. 일요일만이라도, 자기가 부탁한 때만이라도 남편이 아이와 시간을 좀 보내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예술을 한답시고 아내의 바람을 무시한다. 돈도 안벌고 아이도 돌보지 않으면서 해내는 예술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그런 그가 처제인 영혜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침체되어있던 예술적 영감을 받아 처제의 벗은 몸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비디오로 촬영하며 작품을 완성해나간다. 옷 벗기를 더 편하게 생각했던 영혜는 이 일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잘못된건지에 대한 인식 같은건 없이 벗으라면 벗고 누우라면 눕고 외려 자신의 벗은 몸에 그려진 꽃 그림을 좋아한다. 그런 처제를 촬영하며 처제에 대한 성욕을 품고 인혜의 남편은 '오늘은 아이를 좀 봐달라'는 말에도 안된다 바쁘다를 연발한다. 밤 아홉시에 돌아와 옆집에서 아이를 찾아온 남편은 아내가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다섯살 아이 잠들었으니 자신은 또 나갔다 오겠다고 말을 한다. 인혜는 하는수없이 가게문을 닫고 아이가 잇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한숨, 체념.. 그런 인혜가 통 연락없는 영혜의 집에 음식을 들고 찾아갔을 때, 그때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영혜가 온 몸에 꽃으로 페인팅을 하고 격렬한 섹스를 하는 비디오테입을 보게 된다. 몇차례의 섹스 후 인혜의 남편은, 처제인 영혜의 옆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인혜는 정신병동에 신고한다. 여기 환자가 두 명 있어요.
그러나 남편은 정상인으로 판명되어 병원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영혜는 오랜 입원을 하게된다. 병원에 있는 영혜를 들여다보고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언니 인혜의 몫이다. 정신병자인 딸을 더이상 부모는 들여다보지 않고 남동생 부부도 외면하며 애초에 영혜의 남편은 영혜를 떠나버리지 않았는가. 인혜의 남편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알 수 없다. 인혜는 돈을 벌어 생활비도 해야 하고 동생의 병원비도 감당해야 하고 아버지 없이 혼자 자신의 아이를 돌봐야하며 가끔 동생을 보러 병원에 반찬을 싸들고 대중교통을 타고 찾아가기도 해야한다.
영어로 번역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외국인들이 읽고, 첫문장에서부터 영혜의 남편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맞다. 영혜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인혜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 아내의 동생에게 욕정을 품는 것도 그렇지만, 그전에 이미 아내에게 경제적 책임을 지우고 노동 없이 예술한답시고 한량처럼 사는 것도 꼴보기 싫은데, 그런 주제에 아이 돌봄노동까지 나몰라라 하는 것은 그가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혜의 남편도 영혜의 남편도 둘 모두, 아내에 대한 특별한 사랑은 없었다. 영혜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처형같았으면 좋았을거라 생각하고 인혜의 남편은 처제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이 좋지 않은 남자들인 둘 모두 장인어른에 대해서라면 더 안좋은 남자라고 생각을 한다.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강압적인 남자. 영혜의 고기에 대한 혐오는 영혜 본인이 꿈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에 앞서 그 꿈을 꾸게 만든 그보다 더 오래된 기억들이 있다. 자신을 물었던 개를 학대하며 잡아 먹었던 일, 그 후로 계속 가슴 안에 뭔가 막힌 것 같아 도저히 브래지어도 할 수 없는 채로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그 답답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영혜의 아버지는 영혜를 학대했고, 영혜 앞에서 영혜보다 더 약한 짐승을 학대햇고 또 그 학대를 보여주었으며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학대에 참여하게 했다. 결혼후 만난 남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아내를 못마땅해 한다. 언니의 남편은 그녀에게 예술을 하자고 해놓고 섹스를 한다. 그녀가 정신병동에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빼빼 마르게 되기까지, 거기에는 가부장적인 문화와 남성들의 폭력이 있었다. 그 폭력이 직접적인 그녀를 향한 것이든 혹은 다른 존재를 향한 것이든. 그런 환경에서 사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아주 많은 여성들이 그 삶을 버티어냈다. 인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아버지와 그런 남편을 삶에서 계속 가지고 나가면서도 돈을 벌고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대부분의 여성들은 미치지 않고서 버티어낸다. 그러니 내가 욕할 것은 가부장제이며 폭력이며 권력이며 억압일것이다. 그런데,
나는 영혜를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괴로웠다. 그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가장 괴로워한점이다. 읽는 내내 내가 괴로운것은, 이 자매의 남편들도 한심하고 특히나 아버지는 정말 죽일놈인데, 그런데 영혜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되는거다. 이런 세상에서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린 영혜를, 아니, 뭐 어때, 내가 내 벗은 가슴에 햇볕좀 쬐겠다는데, 그게 뭐 그렇게 미친 일이야, 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그녀가 내 가까운 사람일까봐 무섭다. 내가 언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그래 네가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지, 라며 그녀를 그냥 놔둘 수 있을까? 나 역시도 정신병원에 그녀를 입원시키지 않았을까? 고기를 안먹겠다는 영혜에게 억지로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넣는 아버지는 분명 폭력적이고 잘못되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말릴 사람이다. 그러나 영혜가 될 순 없을 뿐더러 영혜를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을 것 같은거다. 왜 안되나, 왜 영혜처럼 살면 안되나, 라고 생각을 하려다가도 영혜야 그러면 안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내가 현실에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것일까, 하면서도 나 역시 아주 많은 부분에서 이미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것이다. 나는 아시아에서 태어난 중년의 여성인데, 나의 이 정체성은 어떤 지점에서 분명한 약자이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또 약자가 아니기도 하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모두 나랑 같은 방식으로 사는건 아니라고 아무리 수없이 되뇌어도, 그런데 영혜는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를 '비정상' 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괜찮은 것인가? 이게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영혜를 비정상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되는거야? 이 지점이 괴로웠다. 결국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있었을텐데, 그런데 그걸 버티어내지 못한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나는, 온당한가? 옳은가? 괜찮은가? 라는 생각이 수도없이 드니까 미치겠는거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영혜로부터 튕겨져나오고, 이제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인혜에게로 옮겨진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p.208
인혜의 삶도 힘들다. 혼자 아이를 돌보고 경제적인 것도 해결해야 하는 삶이 무겁다. 남편은 처제랑 섹스하고 도망가서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물론 볼 생각도 없지만, 아이가 앞으로 자라서 제 아비가 한 일에 듣게 될텐데, 그걸 생각해도 무섭다. 이 삶이 버거워서 죽고 싶기도 하다. 죽으려고 산에 들어갔다가 죽지 못하고 나왔는데, 어린 아들을 보노라면 내가 어떻게 이 어린 것을 두고 죽을 생각을 했나 싶다. 어쩌면, 어쩌면 죽는게 삶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일텐데. 아이 아빠는 어차피 책임 지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잖아. 예술 하고 싶다고 예술하고 욕정 느낀다고 처제랑 섹스하고 아이 돌보기는 남일이었고. 그런데 왜 인혜는 그렇게 할 수 없나. 게다가 부모도 남편도 모두 외면한 영혜를 놓을 수도 없다. 영혜조차도 영혜를 놓았는데, 그런데 왜 언니는 영혜를 놓지 못해 삶이 더 괴로운가. 죽음은 정말 답일지도 모르는데. 모든 음식을 끊고 나무가 되고자 했던 영혜를 어쩌면 그냥 두는 것이 영혜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니었을까. 고기를 안먹는 것도 제뜻대로 실천하기 어려운데, 옷을 벗고 다니는 것도 자기 뜻대로 안되는데, 죽는것만큼은 자기 뜻대로 하게 두어야 하는게 아니었을까, 인혜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 인혜는, 영혜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보고 있기 힘들고, 영혜가 시들어가는 것을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영혜를 이 삶에 붙들어봤자 그것이 영혜를 행복하게 하는게 아닌데도 인혜는 영혜를 붙들고 있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데도 기어코 붙들고서, 그런데 너 혼자 그렇게 경계를 넘어 가버리면 그 뒷수습은 누가 지냐며 원망한다. 나는 영혜를 원망한다.
나는 영혜를 원망하고
나는 영혜를 원망해서, 괴롭다.
작가는 이 작품을 다 쓴 후에 이 연작들에 대해 '고통 3부작'이란 파일명으로 저장해두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나는 작가가 말하는 고통이 무얼까 생각했다. 죽음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일까, 남들과 다르게 살면 혐오를 받는 삶에 대한 고통일까, 현실에서 버텨내기 힘든데에서 오는 고통일까, 이 모든것일까. 그런데 나는, 나 스스로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영혜를 , 이 책의 영혜 아닌 사람들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고통스럽다. 나 역시도 정상성에 기대어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점이 고통스럽다. 누군가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괴롭다. 작가가 지정한 파일명처럼, 이 책은 그래서 내게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