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작품 중 마지막으로 읽게 되었다.
<바닷가의 루시>에서 먼저 밥 버지스를 만났었다.
유니테리언교 목사와 두 번째 결혼을 한 밥 버지스와 검찰청에서 살인 사건을 맡다가 갑자기 메인 주를 떠난 짐 버지스 형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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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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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작가 폴 오스터가 보내준 마지막 편지 같은 작품. 사랑하는 아내인 애나를 떠나보내고 그녀의 유작을 검토하다 덧없이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해낸다. 생각의 방향은 여러 각도로 뻗어나가고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기억들의 풍부하고 다양함 덕분에 많은 일을 겪은 듯 느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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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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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받았을 땐 생각보다 너무 작고 아담해서 약간 아쉬웠지만(책 크기가 '흰'보다 작다. '흰'을 처음 구입했을 때도 작은 크기에 다소 실망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다행인 건 표지가 양장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은 책인데다 시詩와 짧은 에세이들이 여럿이라 호다닥 금방 읽을 수 있었는데 표지와 함께 휘리릭 휘리릭 넘기며 아무데나 펼쳐서 읽기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난 책 표지가 양장본인 것도 좋긴 하지만 이렇게 작고 얇아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의 책은 양장본이 아닌 것이 백 번 더 좋다.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여 등단을 하고 단편을 발표하다가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을 때의 매혹에 대해 적은 문장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12쪽) 


<채식주의자>에 이어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발표하는 동안 폭력에 노출된 개인과 시민들의 고통의 소리들을 듣고 읽고 쓰면서 가졌던 의문들과 스스로 찾아낸 '사랑'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기까지의 과정들은 아름답고(?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사실들이지만 문장들에는 공감하게 되고 그것을 돌아보는 시간은 결국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소중하다. 한강 작가의 고통과 글을 읽는 독자들의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일지 찾아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작년 12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책에서 만났다. 그때처럼 다시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고 다시 읽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사랑이 왜 존재하는지,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에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래서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서 질문하는,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문장들... 이 문장들로 이루어진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 폭력의 반대편에 우리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문장들...




하지만 이렇게 폭력에 항거하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현재를 자꾸 들여다보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거기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눈만 들면 창 밖으로 보이는 우리 동네의, 온통 연두와 여린 초록의 잎이 무성해진 낮은 언덕과 산, 심지어 우리 집 정원에도 초록이 무성한데 말이다. 그래서 작가가 마흔여덟에 처음 갖게 된 집에서 북향정원을 가꾸는 일상을 보여준 문장들이 더없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아! 북향정원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조마조마하다. 빛이 들지 않는데 식물이 잘 자랄 수 있으려나 싶어서 말이다. 북쪽 벽에 붙여 만들어야 했던 가로 백팔십, 폭 사십 센티미터의 긴 직사각형 땅에 흙을 채우고 벽돌로 반 뼘 높이의 벽을 쌓아 만든 공간에 조경사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미스 김라일락, 청단풍, 불두화, 옥잠화와 호스타와 맥문동을 심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조량은 거울을 이용하여 보충한다.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반사시켜 보내 준다니. 이 방법도 너무 신박해서 오호... 역시 전문가다운 조언이군! 했다^^

글을 쓰는 중에도 매일매일 바뀌는 해의 높이와 위치와 시간과 각도 등을 가늠하며 거울을 조정해주고 나중엔 햇빛을 더 주기 위해 거울을 계속 들인다^^  "햇빛이 드는 정원은......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무지근할 때도 있다."(108쪽, 4월 1일의 일기 중에서)

왜 안 그렇겠어요. 요즘 책 읽기보다 정원과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진 나도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잦아진 요즘 날씨 때문에 정원을 바라보기 좋은 현관 데크에 나가지 못해 아주 몸이 달아있다. 가만히 앉아 바라만 봐도 정말 가슴이 꽉 차오르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데크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심지어 혼자 있는 시간엔 식사도 거기서 할 정도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만 3 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숱하게 심었던 나무와 꽃과 식물들이 지난 겨울 눈 속에서 모두 살아남아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최소한으로만 심었는데도 3 년이 넘은 지금 확장세가 무서울 정도인 화초들도 있다. 그런데 한 강 작가의 글에서 이런 일상을 접하게 되었고 거기다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호스타, 맥문동, 불두화, 옥잠화,  그리고 미스김라일락, 불두화는 우리집 마당에도 있다. 

잎이 무성했던 불두화에 응애가 끼고 살충제를 뿌리고 그 많던 잎이 우수수 떨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힘에 겹다. 식물이라도 안타깝다. 제발 살아줘!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잎을 피워내고 꽃송이를 달아준다. 청단풍과 라일락도 제법 키가 자랐다. 벌레에 더위에 고생하던 나무들이 해쓱해진 채로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봄이 왔을 때 잎이 나고 꽃송이를 올린다. 


"북쪽 벽을 초록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해주고 있다."(3월 30일 일기, 160쪽)


"경이롭다, 불두화. 내 키보다 높게 자랐다."(4월 15일 일기, 161쪽)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앞에서 읽었던 압도적으로 고통스러운 문장들은 잊혀지고, 그런 힘든 시간들에 보상을 받은 듯 마음이 편안해지는 식물 일기에 커다란 위안을 받게 된다. 식물들이 주는 희망의 메세지에 감동하게 된다.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했던 공책에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자꾸 생각하게 된다. 생명, 사랑, 순환, 연결... 이런 아름다운 단어들이 마음에 남을 거 같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24쪽)


"바람과 해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 우리는 연결되어 잇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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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4-26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오늘 책 받았어요. 정말 양장이 아니라서 좋아요. 저는 정원이 없지만 언젠가 가꾸고 싶어요. 이 책은 천천히 오래도록 읽고 싶습니다^^

은하수 2025-04-26 17:27   좋아요 1 | URL
그냥 스윽 펼쳐 읽기 너무 좋아요~~~
아무때나 펼쳐보고 싶은 책입니다.
고통과 사랑이 공존하는 좋은 글들입니다.
오래 같이 읽어요^^
 

<출간 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의 심정을 적었다.










8
2020년 9월과 10월에 집중적으로 이 소설의 2부를 쓰면서, 집이 떠나가도록 크게 음악을 틀어놓을 때가 있었다. 김광석이 기타 하나, 하모니카 한 대와 함께 콘서트에서 부른 「나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가사 속 한 문장이 언제나 마음을 흔들었다.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

음악을 들으며, 내가 김연아라고 생각하면서 스파이럴 동작을 흉내 내기도 했다. 온몸을 써서 춤도 췄다. 빙글빙글 돌고 있으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 P53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54

9
그보다 앞서 『소년이 온다』를 썼던 일 년 육 개월을 기억하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압도적인 고통이다.
그걸 일종의 ‘들림‘이었다고 말한다면 손쉬운 일일 거다.
내가 작가로서 영매의 시간을 건너갔다고 근사하게 말한다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때 나는 ‘들리지‘ 않았다.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 P54

고통이 나를 부수고 또 부수는 걸 견디면서. 작업실에서,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부엌에서, 이불 속에서 이를 물고 울고 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 - P55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소년이 온다』를 쓰고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 - P55

11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날마다 정심의 마음으로 눈을 뜨던 아침들이.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끓던 그의 하루하루가.

날개처럼, 불꽃처럼 펼쳐지던 순간들의 맥박이.
촛불을 넘겨주고 다시 넘겨기를 반복하던 인선과 
경하의 손들이.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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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을 출간하고 나서,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2012년 봄, 1980년 5월의 학살이 있었던 아홉살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단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 희생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그 훼손된 얼굴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도 하는가. 양립할 수 없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16 참조)



이후 광주의 학살에 희생된 고 박용진 군의 일기를 읽고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쿠데타 군이 다시 올 것을 알면서도 희생자들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피하지 않고 있던 마지막 밤에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다른 글에서 읽어 이미 알고 있던 문장이었지만 다시 읽어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에서 보았던 두 문장도 깊은 울림을 준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광주의 학살 이후 이어진 계엄 선포는 우리 국민들을 각성하게 하였고 그 트라우마는 현재로도 이어지고 있다. 12.3 계엄 선포가 그래서 더 말도 안되게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었고 그 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국회의원들, 소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군인들에 의해 계엄 해제를 가결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광주에서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 고문으로 희생된 무고한 시민들, 학생들... 이름조차 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은 자들이 오늘 우리를 구한 것이 아니고 뭐였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 책의 첫 번째 에세이인 '빛과 실'을 읽어 나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년이 온다>를 집필한 2014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2021년 출간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읽고 자료를 공부하고,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고통을 겪으며 최대한 절제하여 써내려 갔다. 그러면서 작가는 줄곧 자신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핵심이자 글쓰기의 동력은 다음의 두 질문으로 모아진다고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믿음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4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 우리를 연결하는 고통에 대해 - 질문했던 것 아닐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결국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은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나의 심장에 있다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The Nobel Foundation 2024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서도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나'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지난해 1월, 이사를 위해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 하나가 나왔다. 열어 보니 유년 시절에 쓴 일기장 여남은 권이 담겨 있었다. 표지에 ‘시집‘이라는 단어가 연필로 적힌 얇은 중철 제본을 발견한 것은 그 포개어진 일기장들 사이에서였다. A5 크기의 갱지 다섯 장을 절반으로 접고 스테이플러로 중철한 조그만 책자. - P9

그렇게 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P18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우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누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P19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 P19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동호가 어머니의 손을 힘껏 끌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었던 것처럼. - P20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흔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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