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야."모로 누워 마주 보면서 수미는 서하를 불렀다. 아홉살, 어쩌면 열살인 서하가 불안한 눈으로 수미를 보았다. 수미는 그런 서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나는 니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확인사살을 하듯 수미는 말했다."엄마 아빠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그 말을 듣자마자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홉살, 어쩌면 열살이었던 서하는 어떤 질문도, 소리도 없이 바로 눈앞에 누운 엄마의 말을 그대로 받으며 울었다. - P303
내가 그랬어, 나리야. 내가 서하한테 그랬어.수미가 공방에 찾아와 그런 일화들을 하나씩 쏟아놓으면 어떤 날에는 마음이 아팠고 어떤 날에는 화가 났다. 그만 좀 하라고, 자책 말고 이젠 다른 걸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자기혐오의 연장선에서 니 딸을 혐오해왔던 시간에서 이제 벗어나라고, 너의 혐오와 자책에서 이제 니 아이를 보내주라고, 다른 아이를 구한 것처럼 너의 아이도 구하라고.하지만 나는 수미의 그 토로들이 수미가 겪고 넘어가야하는 시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난 봄처럼 그 시간을 부서뜨리기만 하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P304
마음이 수없이 헤집어지더라도 나는 수미와 서하가 겨우내 서로를 충분히 겪길 바랐다.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마주 보길 바랐다. 수미가 실감할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내 공방 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 P304
보라고, 서하는 해변에 가려 한다고. 마음을 접어버리지 않았다고. 너한테 계속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다고.너한테 순응하지 않았다고.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 P304
맨발인 채로 얼음 위로 올라서자마자였다. 수미와 나는 뜨거운 불을 딛고 선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양 발을 번갈아 들어올리다 신발을 벗어놓은 바위 위로 뛰어올라갔다.참을성이 조금도 없는 서로가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다시 맨발로 얼음 위를 디뎠고, 몇걸음을 걷다가 또 비명을 지르며 언 강과 바위를 뛰어다녔다. - P312
그러다 우리는 누가 더 오래 서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 얼음 위에 맨발을 고정하고 섰다. 일초가 지나고 이초가 지나고 삼초가 지나고, 발이 얼얼해지고 얼얼해지다가 감각이 사라진다 싶은 찰나였다. 발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금이 핏줄처럼 번져오르며 몸을 쪼개는 느낌이 찾아왔다.그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몸을 관통해 정수리를 터뜨리듯 사라져버렸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온몸의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깨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P312
발을 먼저 뗀 것은 나였다. 수미는 겨울 협곡의 주술에 걸린 듯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나는 수미가 깰세라 소리없이 뒤를 돌았고, 신발을 벗어놓은 바위로 걸어갔다. 나란히 놓인 수미와 내 신발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고, 수미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았다.오로라와 나비가 있는 언 발을. 고스란히. - P313
협곡에서 돌아온 뒤 나는 수미와 내가 낯설고 추운 북쪽 소읍에서 사과를 사 먹었던 날을 자주 떠올렸다. 그날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았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모자를 써보거나 다른 사람의 장갑을 껴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실감된다는 것을 나는 그 협곡에서 알게 됐지만, 내가 나를 온전히 감각해본 순간을 거치고서야 수미의 신발에 발을 넣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은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 P314
보고 싶은 이들이 공방으로 소식을 보내올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나는 여전히 두 손이 아닌 얼굴로 커튼을 가르고 들어간다. 커튼 안엔 내 연료들이 있다. 눈꽃 같은 왁스와 불꽃을 품은 심지가 있다. 포장 끈과 시약통. 시나몬스틱과 석고가루. 꼬질꼬질한 지우개 하나와 고릿한 호리병도 하나 있다. 까슬까슬한 광목천을 이마로 가를 때마다 나는 그게 꽤 좋다고 생각한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게 좋다. 오늘도 지나가던 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보는 이곳은 나리공방, 기정로 349번길 25에있다. - P315
‘살림‘이라는 이름은 자원활동가와 상근활동가들이 합심해서 지었다. 나는 완월동 아웃리치(Outreach, ‘손을 뻗는다,나가서 닿는다‘의 뜻으로 외부 사람이 업소에 방문하거나 업소 입구에서 언니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는 행위, 간단한 목레, 눈인사, 안부를 묻는 등의행동을 뜻한다) 이후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구청에 단체 이름을성매매피해상담소라고 신고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성매매피해상담소 뒤에 우리가 ‘언니‘ (여성들의 자매애를 상징하고 친밀감을 표현하는 단어로 우린 성매매 당사자를 ‘언니‘라고 불렀다)에게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는지를 드러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있는단어를 붙이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 P17
우리들은 "어떤 이름이 좋겠냐? 마음껏 상상하고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 보자"라고 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한마디씩 했다. ‘언니들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지?‘, ‘우린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있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를 소개하지?‘ 등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침묵과 아이디어 내기를 반복하면서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P17
쏟아내는 말들의 성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들 지쳐갈 무렵 누군가 ‘살림‘이 어떻겠냐고 했다. 처음 ‘살림‘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는 집에서 ‘살림 사는 것 같은‘ 여성만의 무엇처럼 느껴졌다. "너무 ‘여성‘이지 않나? ‘여성성‘이 너무 두드러진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반대했다. 이 사회의 강한 성별 고정관념을 생각하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영어 survivors는 생존자,살아남은 사람,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했고, 그러자 우린 모두 "뜻이 괜찮다", "너무 멋지다"라며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이렇게 우리의 이름이 된 ‘survivors‘와 ‘살림sallim‘은 ‘살린다‘와 ‘살림을 산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살린다‘는성매매 여성을 성산업 구조의 고리와 폭력으로부터 구조해 살리고, 성매매 여성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하자는 바람을 담은 말이다. - P18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그때 난 겨울이 2월의 마지막 날에 끝난다고 믿었다.2월 28일. 가끔은 2월 29일.아무리 춥거나 눈이 와도 2월이 지나면 그건 겨울이 아니지.아닌 거야.그렇게 생각했다. - P8
나는 얼음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니가 말했다.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바위 아래를, 물이 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얼음 위를 걸어서.나는 너의 신발에 발을 넣어볼 것을 모른 채, 너를 따라언 강 위로 올라갔다. - P8
사라는 말했다. "난 안돼, 실은 루디에게 할 말이 있었어. 강 너머 카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가서 기다릴 필요 없다는 말 좀 전해 주지 않을래?"루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서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자크는 말했다. "그 친구에게 예의는 지켜."루디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 P305
자크는 말했다. "가봐, 난 호텔에서 기다릴게."사라는 말했다. "난 집에 갈 거야."자크는 호텔의 캐노피로 갔다. 사라는 루디와 둘이 남았다."정말 내가 가길 바라?""네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내가 가서 뭘 어떻게 설명을 해.""설명하고 말 것도 없어. 널 보면 바로 이해할 테니까.""만나러 가고 싶었잖아. 그것도 아주 많이.""이젠 상관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걸."루디는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그는 부교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사라에게 다가왔다. - P306
그는 말했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사공은 끈덕지게 기다렸다. 루디가 유일한 손님이었다.루디는 말을 이었다. "타키니아에 들르면, 아니다. 나도 같이 가야겠다." 그는 부정적으로 덧붙였다. "가이드들이 게을러서 아무래도 작은 말들을 안보여 줄 것 같거든. 가이드가 보여주지 않아서 그걸 못 보면, 거긴 가나마나야." - P306
<초록은 어디에나>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임선우 작가의 단편집이다. 진짜 짧은 3편의 단편과 작가의 말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 ‘초록은 어디에나‘까지 단숨에 휘리릭 읽을 수 있다.책도 ‘작고 소중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손 안에 쏘옥 들어오는 핸디북 사이즈이다.3편의 단편은 전작인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었을 때와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된다.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지 몰라도 ㅇㅣ 책을 읽으며 그때의 분위기, 포근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등장인물들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은근히 유머가 느껴진다. 슬픔은 타인의 다정함으로 어느 새 스르르 극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주는 듯 해서 좋았다.슬픔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낙타로 나타나기도 하고 푸른 돌을 뱉어내기도 하고... 이런 설정이 우스우면서 억지스럽지 않게 풀려나가는 과정들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포근히 감싸안는 느낌... 그런 느낌을 표지에도 나타내고 싶었나보다.스카이 블루에 초록 잎 하나, 그리고 낙타 한 마리까지... 그리고 오키나와 하늘에 내리는 하얀 눈 같은 글씨까지... (오키나와에 눈은 자주 내리는건 아니겠지? 너무 자주면... 희망이 아닌거 같잖아?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