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MIR-5
고대 도시에서 살아난 역사적 상상력
-에페수스 유적지-

에페수스 유적지
에페수스Ephesus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로 여행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탁월한 위치 덕분에 아테네의 이오니아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시아 내륙으로 물품을 운송하기 
위한 무역의 거점 도시로 삼았다.

에페수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시대에 크게 부흥했지만 최고의 전성기는 로마제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200년대까지였다. 이때 로마제국은 공화정에서 황제시대로 바뀌었고 오현제의 시대를 통해 팍스로마나를 구가하고 있었다. - P113

당시 에페수스는 로마속주의 수도였고 인구 25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소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카이스트로스kaysition 강 하구의 충적작용은 인공수로를 건설해 항구를 보존하려던 에페수스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늪으로 변했다. 이후 항구는 폐쇄되었고 대규모 지진과 말라리아로 인한 전염병의 창궐로 도시는 그대로 버려졌다. 그 덕분에 오히려 도시의 유적은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 P113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하고 싶은 마음은 여행자라면누구나 갖고 있는 로망이다. 하지만 막상 방문한 뒤 역사적인 유적지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그것은 아마도 방문했던 유적지의 보존 노력에 따른 것 같은데,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상당하다. 특히 유적인지 잔해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면 어렵게 찾아온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지난번 바스바네 지역의 아고라 유적을 보고 아쉬움이 많았다. - P114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공간이나 유적들을 찾아볼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공간의 가치는 남아 있는 유적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물길이 바뀌어 폐허가 된 도시도 있고 기후변화로 젖과 꿀이 흐르던 곳이 황무지가 된 곳도 있다. 그런 곳을 보고 오늘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을 굳이 찾아가는 건 그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역사적 공간감‘이다. 이 역사적 공감감이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비록 오늘날의 모습이 전혀 다른 곳으로 변모했다 하더라도 그곳 주변의 풍경과 공기를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 P115

그렇다고 모든 역사적 공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폐허가 된 유적 근처의 작은 나무 그늘에서 쉴 때 잠시 불어 온 미풍에 불현듯 과거 속 이미지가 그려져 감흥을 돋울 수도 있고, 폐허가 된 도시를 보며 인류 문명과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에 닿을 수도 있다. 이 모두는 역사적 공간을 방문해야만 가 닿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먼 길을 돌아 힘들지만 역사적 공간을 찾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 P115

ANTALYA-1
지중해를 품은 안탈리아
-칼레이치-

지중해 연안의 안탈리아

새로운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나 
낯설다. 안탈리아에서 머물 숙소는 버스터미널과 
역사지구의 중간쯤 안탈리아 주민들이 사는거리에 있었다. 어제 도착해 짐을 풀고 있는데 숙소 직원이 근처에 맛있는 빵집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다. 짐을 정리하고 나가 찾아가 보니 튀르키예 빵들이 가득한 동네 빵집이었다. 빵을 고르자 주인은 낯선 여행자에게 홍차를 한 잔 대접해 주었다. 안탈리아의 첫인상이 푸근해졌다. - P142

안탈리아는 아나톨리아의 남서부 해안에 위치하여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안탈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50년경에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Attalus 2세가 도시를 창건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탈레이아Attaleia‘라고 불렀다. - P142

오랫동안 그리스어로 불리던 도시의 이름은 이후 튀르키예어인 ‘안탈리아Antaya 로 바뀌었다. 도시는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했지만 역사의 굴곡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1207년엔 셀주크 튀르크로, 1391년에는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으로 바뀌는 등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3년 동안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지만 튀르키예 독립전쟁 때 탈환되었다. - P143

안탈리아는 기독교 역사 초기에도 등장한다. 1세기에 사도 바울로와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할 때 안탈리아를 방문했다. 또한 위대한 여행가들의 여행기에도 등장하는데, 14세기에는 중세 아랍인 여행자 이븐 바투타Ion Battute가, 17세기 후반에는 오스만 제국의 여행자인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Celebi가 방문해 기록을 남겼다. 물론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중해의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안탈리아 주변에는 유명한 고대도시들이 많이 있지만 이번 안탈리아 여행은 구시가지인 칼레이치를 중심으로 역사적 지구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튀르키예를 살펴볼 예정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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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OLIA-3
KONYA

2주 후로 다가온 튀르키예 여행 때문에 그렇겠지만
뭔가 모르게 마음이 바쁘다. 여행 가기 전부터 폭풍 쇼핑을 거의 끝내고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매일 이스탄불과 안탈리아 지방 즐겨찾기 해놓고 날씨를 보고 있는데 튀르키예와 우리나라는 거의 같은 위도여서 기온이 비슷하지만 약간 낮은 듯하다. 얇은 긴팔과 블라우스, 바람막이 점퍼, 반소매, 아이스블루 진, 진청, 그레이진, 스커트, 베이지 면바지 등등을 준비해 놓고 이렇게 저렇게 코디해보고 있다. 여행 일정이 9일이나 되기 때문에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다. 이스탄불과 지중해에 면한 안탈리아 지방은 기온이 약간 차이난다.
나의 여행일정과는 반대로, 그리고 계절도 겨울인지라 아예 책을 거의 거꾸로 읽고 있는데
그게 맞는 거 같다.
콘야에서는 메블라나박물관만 책과 겹쳐서 좀 아쉽다...


메블라나 루미의 도시
-메블라나 박물관-

콘야의 역사
콘야에 도착한 날 아침 창문의 커튼을 걷자 바로 앞에 커다란 모스크가 보였다. 어젯밤에 자는 동안 큰소리에 놀라 깼는데 아마도 무에진Müezzin이 새벽기도를 알리는 에잔Ezan 소리였나 보다. 이렇게 가까이에 모스크가 있었으니 크게 들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넘게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에잔 소리를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새벽의 에잔 소리는 메아리가 울리듯 계속 이어져 좀 특별하게 들렸다.
그 울림이 에잔의 도시, 모스크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해주는 것 같았다. - P172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의 남서쪽에 위치한 콘야konya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면적을 가진 주(州)이면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신석기 유적지 차탈회위크 Cerealhoyak 가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왕국을 거쳐 리디아,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을 차례로 받다가 끝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때는 ‘이코니움‘conium‘이라고 불렸다. - P173

메블라나 박물관

모스크를 나와 메블라나 박물관으로 향했다. 두 모스크 사이에 있는 긴 담을 한참 돌아 박물관 입구로 갔다. 당연히 입장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간단히 소지품 검색만 하고 입장했다. 박물관 앞에는 아담한 크기의 정원이 있었다. 원래 셀주크조 술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루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묘지가 되었다. 그리고 루미도 사망 후에 아버지 곁에 함께 묻혔다. 계절이 겨울이니만큼 정원의 꽃과 나무들은 한껏 움츠려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추위를 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손이 시리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한 지중해에 있었는데 내륙 분지인 콘야의 추위가 이렇게 매서울 줄은 몰랐다. - P176

메블라나 박물관 Mevlana Müzesi은 원래 메블라나의 영묘와 함께 메블레비교단의 테케가 있던 곳이었다. 1273년 메블라나가 죽은 후 그의 절친한친구이자 후계자인 후사멧딘 첼레비 Hüsameddin Celebi는 메블라나를 따르는 ‘메블레비‘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메블라나의 영묘를 지었다. 후사멧딘 첼레비가 사망한 후에는 메블라나의 장남인 술탄 왈라드Sultan Walad가 유지를 이어받아 교단을 조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P176

메블라나의 묘를 직접 보니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소박한 묘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영묘가 좀 화려해 보였다. 물론 후대가 꾸민 묘소이겠지만 평소 그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메블라나도 생전에 아버지의 영묘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하늘 돔보다 더 웅장한 것을 지을 수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묘소에 의미를89두지 않았다. 하지만 메블라나의 아들 술탄 왈라드는 메블라나의 무덤위에 영묘를 지으려는 사람들의 소원을 받아들였다. - P177

흥미롭게도 박물관의 상징물인 초록색 돔은 메블라나 관 바로 위에 설치되었다. 메블라나가 세상을 떠난 후 120여년이 지난 1397년에 녹색타일로 덮인 16면의 원뿔형 돔이 만들어졌다. 그후 영묘는 초록색 돔을 의미하는 ‘쿱베이 하드라 Kubbe-i Hadra‘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쿱베이하드라는 오늘날 콘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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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들
번역가들은 왜 배신자일까? 신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살지 못하게 언어를 흩어놓았는데도 갈라진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해서, 니므롯처럼 신의 뜻에 반한 배신자가 되었나?
서로 다른 언어 사이를 오갈 때는 손실이 불가피하므로 원저자든 독자든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바벨 이전에는 정말 언어로 인한 혼란이나 소통 과정의 손실이 없었느냐는 것이다. - P45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이 만든각종 들짐승과 새에 아담이 이름을 붙인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사물과 이름이 명징하게 일치하는 행복한 나날이다. 여기에는 혼란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 P46

그런데 문제는 나무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신다. 그런데 뱀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런데 하나님도 나중에 뱀의 말을 인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필멸의 존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이 사실이 되었지만, 뱀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데도 태초에는 말이 뜻하는 바가 자명했다고 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가 헷갈릴 만도 하지 않았나? - P46

그렇다면 우리가 언어를 서로 주고받으며 일어나는 혼란과 어긋남과 손실은 언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혼란이다. 사물과 이름 사이에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결속도 없다. - P46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를 한순간이라도 고정하려고 애쓰는 덧없지만 불가피한 시도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대부분 저버리는 일이다. 누구나 알듯이 어떤 번역도 원문을 있는 그대로 거울에 비추듯 재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보코프가 쌓아 올린 무한한 주석의 탑은 번역이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비다(나보코프가 열거한 것만 들자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문법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주석의 탑이 뻗으며 여백도 손실되었다. 상상의 여지도, 모호함의 가능성도). 나보코프는 축어역 (word-for-word)만이 진정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 텍스트의 축어적 의미가 아닌 텍스트의 정신을 번역한다는 자유로운 번역은 작가를 ‘중상하는(traduce)‘ 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 P47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해
 "직역(直譯)이냐 의역(意譯)이냐의 논쟁, 번역학계 용어로는 충실성과 가독성의 논쟁이다.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하느냐, 아니면 독자가 최대한 편하게 읽을수 있도록 옮기느냐의 차이다."
직역과 의역, 축어역과 의미역 대립 항에 충실성과 가독성 개념이 연결되었다. 담론상 스펙트럼에서 직역에 가까운 글은 부정적으로는 ‘번역 투‘라거나 ‘어색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으로는 ‘표현이 새롭고 신선하다‘거나 ‘원문에 충실하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의역에 가까운 글은 긍정적으로는 ‘한국어로 쓴 글처럼 읽힌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했다‘ 등의 평을 받는 한편 부정적으로 말하면 ‘밋밋하고 진부하다‘, ‘충실하지 못하고 번역가가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와 별개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면 오역이라고 본다.

... 간단한 문장이지만 문맥에 따라, 글의 종류와 어조에 따라,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성격이나 태도, 말투에 따라, 수십 가지 다른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수십 가지 번역을 해놓은 다음에 다시 영어로 역번역 (back-translation)을 하면 결과물이 그만큼 다양하지 않고 대략 서너 가지 정도의 표현으로 수렴된다.
한국어는 어미와 조사가 발달해서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어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좋은 번역이 될 수 없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어조와 뉘앙스를 선택하지 못한다면 분명한 오역은 아닐지라도 뭔가 흐름이 원활하지 않거나 삐걱거린다거나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번역이 될 수 있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다루는 번역은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 P75

실제로 번역을 할 때는 ‘단어‘를 번역(직역)하거나 ‘단어의 의미‘를 번역(의역)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제3의 무언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What do you think?‘ 같은 간단한 문장이 수십 가지로 번역되는 것이다. 행간을, 침묵을, 여백을 번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간에는 참 많은 것이 있다. 맥락, 어조, 정서, 분위기, 성격, 암시, 어감, 문화적 인유, 의도.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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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의 인공자궁은 인큐베이터를 말한다.
한 세기 전의 코니 아일랜드와 만국박람회 등에서 자행되었던 일명 ‘아기쇼‘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아무런 법적 규제도 없이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던 엄마와 아기들의 사례를 보면서 미혼모와 그 아기들을 입양했던 미국이 떠올랐다. 마틴 쿠니는 아기 쇼를 완전히 다른 경지에 올려놓은 인물이다.그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1901년 '버팔로 범미박람회',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놀이동산 전시를 거쳐 마침내 상설전시를 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1943년까지 계속해서 전시를 열었던 코니 아일랜드 루나 파크에서였다. 아기들은 입원비를 지불하지 못해서 대신 쿠니를 찾아온 엄마, 아빠에게 안겨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기 쇼에 전시되고 제대로 돌봄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방치한 인간 이하의 사실들을 읽느라 지친다.
1904년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에서는 백인 연구자들이 필리핀 토착민들을 전시했다. 토착민과 미숙아를 구경거리로 삼는 일은 제국주의 지배를 과시하는 행위였는데, 말하자면 정복을 당해 상품화된 사람들을 연구할 수 있고 그냥 놔두면 결국 죽게 될 아기들을 대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백인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사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해서 예를 들어 말하는 것도 의미 없게 느껴진다.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 당시 경험이 없는 의사를 고용하여 자신을 보조하게 했던 사기꾼이자 기회주의자 에드워드 베일리스는 인큐베이터를 무덥고 불결하게 관리하였고, 미숙아들에게 우유와 시리얼, 달걀을 먹여 결국 장염으로 45명 중 39명의 아기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 아기들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살았을지 알 수 없지만 이 아기들의 죽음은 티켓을 판매하기 위한 미끼로만 이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마틴 쿠니도 의사 자격을 취득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기들의 안전을 뒤로 미루었던 베일리스와 달리, 자신의 아기 환자들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탁월한 수준의 치료에 전념했고 숙련된 간호사들을 고용했다. 두 사람 모두 공식적인 의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한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는 미숙아들의 생명을 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본인에게 맡겨진 미숙아들을 소홀히 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사례를 놓고 볼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서 관리, 감독이 윤리적인 면에서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를 시사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마틴 쿠니의 만국박람회는 알량한 권력을 남용하고 행사하는 수단으로, 또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봐야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아주 극단적인 사례지만, 1900년대 초 의료계의 다른 사람들도 일찍 태어나거나 힘들게 태어난 아기들은 본래부터 튼튼하게 태어난 아이들만큼 가치 있는 생명이 아니라는 견해를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어 전시하는 일이 부수적인 여흥거리가 됐다며 몇몇 언론에서도 비판기사를 냈다. 하지만 이 아기들을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교대근무를 하며 그들의 수 많은 동료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 - P42

오늘날에는 조산아를 살리는 치료가 근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이런 의미에서 신생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인공자궁은 널리 환영받아 왔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걸렸다. 다운 라펠Dawn Raffel이 자신의 책에서 쿠니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가 조산아들을 데려간 많은 축제장에서는 우생학 전시도 함께 열렸다. - P43

그곳에서는 결혼에도 ‘적합‘한 결혼과 ‘부적합‘한결혼이 있고,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결혼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고취시켰다. 3장에서는 이런 우생학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불가피하게 인공자궁 기술에 대한 논의와 엮이는 양상을 살펴본다. 
작고, 연약하며, 계속 돌봐주어야 하는 인큐베이터아기들은 부모들이 잘 맞지 않아 건강하지 못하다거나, 작다거나, 장애가 있는 아기로 태어난다는 선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랐다. 코니아일랜드의 기적 《Miracle at Coney Island》을 쓴 클레어 프렌티스Claire Prentice에 따르면 쿠니와 그의 팀은 수년간 8천 명의 아기를
받아들여 6천5백 명을 살려냈다.
- P43

이르게는 6주나 일찍 태어난 미숙아들을 맡아 생존율이 81퍼센트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영국의 수준 높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받는 27주의 신생아 생존율은 89퍼센트이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안고 달려가려면 전시장에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겠지만, 쿠니는 모든 인종 및 사회계층과 무관하게 아기들을 받아들이고 부모들에게서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쿠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언제까지나 박람회의 소재로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1903년 루나 파크에 상설 전시장을 설치한 후에도 병원들에게 인큐베이터를 도입하라고 계속해서 촉구했다. 그럼에도 1930년대까지 갈 곳이 없던 뉴욕시의 미숙아 부모들은 쿠니를 찾아갈 수 있었다. - P43

한 세기가 지나 2020년대가 된 지금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관리하기 위한 책임 절차를 갖추고 있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절박하고 다른 선택지가 없어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를적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동물실험에서 21주에서 22주 사이에 태어난 태아의 건강을 인공자궁이 유의미하게 개선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연구진들이 출산 직후 부모들에게 이 치료법을 제안하면서 다른 선택지와 위험성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여전히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쿠니는 아기들을 무료로 치료했지만, 아무런 규제가 없는 실험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행위를 저지하는 법이나 윤리위원회도 없었다. 하지만 1890년대 아기 쇼 전성기에도 이 전시에 기괴한 면이 있다고 주장하는 의료계와 언론들은 있었다. 1911년 엄청난 화재가 쿠니의 전시장을 휩쓸고 지나갈 때 아기들은 겨우 구했지만, 그 이후에서야 뉴욕주의 아동학대방지협회는 쿠니가하던 일을 병원으로 이관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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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여성주의‘ 도서인 클레어 혼의 <재생산 유토피아>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5월을 마지막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프로젝트는 잠시(?) 잠정 중단이라시는 다락방 님 글 읽었을 때 참 많이 아쉬웠다. 매월 참여하지는 못했고 느즈막히 참여하기 시작한 터라 꽤 오랜시간 동안 계속하고 있었단 걸 알았을 때 부러웠다. 이미 오래 전에 참여해서 꾸준히 책을 읽어오신 그분들이...
혼자서 계속 읽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거란 걸 안다~~~헤~~
언제 돌아오시려나...

1장
온실,화초, 인공자궁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여러분이 한 사람이 될 때까지 몸 안에 품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낳아 주었다.

*온실: ‘화초‘ 비유와 관련성을 드러내고자 ‘인큐베이터‘를 ‘온실‘로 옮김. - P8

이 문장을 쓰는 지금, 내 자궁 안에서는 아기가 움직인다. 여러분을 임신했던 사람이 지금의 어머니든 아니든, 틀림없이 여러분의 어머니도 자신의 살갗 아래에서 여러분의 팔다리가 움직이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분을 임신했던 어머니의 몸은 여러분이 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지어 아기의 모습을 갖추기도 전에 여러분의 고향이었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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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5-1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하시대요~~
내년 기약 댓글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

은하수 2025-05-12 07:16   좋아요 1 | URL
내년에 꼭 다시 시작해 주세요. 기다리고 있어요. 그동안 계속 시동걸고 기다리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