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미의 변종을 다음과 같이 목록을 만들었다

심오함profoundity, 창안invention, 조형성plasticity, 숭고sublimity, 개별성individuality, 정신성spirituality, 고귀함nobility, 감수성sensitivity, 취미taste, 적합성aptness, 어울림suitability, 잠재력potency, 고상미elegance, 품격courtliness, 완벽성completeness, 풍부richness, 따뜻함warmth, 매력charm, 우미grace, 매혹glamour, 기술skill, 가벼움lightness, 활력vitality, 미묘함delicacy, 광휘splendour, 세련sophistication, 맵시stylishness, 리듬성rhythmicity, 조화harmony, 순수성purity, 올바름correctness, 완전perfection.

타타르키비츠는 이런 광대한 목록도 부족해서 괴테가 간과한 여섯 가지를 더 추가할 것을 주장했다.
그것들은 위엄dignity, 구별성distinctiveness, 기념비적 성격monumentality, 다산성luxuriance, 시poetry, 자연스러움naturalness이다.

이런 식으로 미의 특질들을 나열한다면 그 누구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느낌과 표현이 생길 때마다 목록을 늘여야 할 것이다.
이런 특질들은 미를 설명하겠지만 미를 보증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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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1960년대 성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경향을 지칭한 명칭으로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 Witten(1935~)이 1971년 11월호 <아트 포럼>에 기고한 글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1980년대 후반까지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현상들 모두 다뤘다.
이러한 현상들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이란 말로 한 데 묶어지게 된 점은 미술계를 장악해 온 상업주의,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물질적 특성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예술이 상업화된 데 대한 반성으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니멀리스트들은 콜렉터들의 수집품이 되는 오브제를 가능한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핑커스 위튼은 다양한 미술 경향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는 막연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닌 창조와 관련된 과정 그리고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 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보인다.
프로세스 아트 예술가들은 재료를 선택할 때 소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시간의 경과를 주용 방법으로 삼는다.
그들의 행위는 얼음, 풀, 흙, 펠트, 눈, 톱밥, 기름, 물감, 심지어 콘플레이크와 같은 물질을 작품의 재료로 선택하며 이런 재료를 뿌리거나, 쌓고, 바르는 등 임의적이고 구조가 없는 방법으로 한 장소에 놓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나머지는 중력, 온도, 공기 등과 같은 자연의 힘과 시간에 맡긴다.
프로세스 아트의 예로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벽 아랫쪽에 녹은 납을 뿌리는 리처드 세라의 <뿌리기>(1968), 수증기 구름으로 만들어진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1967~73) 등이 있다.
어떤 프로세스 아트 작품은 좀더 영속적인 수명을 가지지만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 부드러운 물질로 만들어지는 조각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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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라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1939- )는 1966-67년 <벨트 Belts>를 제작했는데 벨트처럼 생긴 고무가 뒤엉킨 다발 11개를벽에 건 작품이었다.
11다발 중 한 다발에 네온 현광등을 달았고 이는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했다.
이 작품은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을 알리는 작품이며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의 시작을 고지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모더니즘은 예술이 소수 지성인들을 위한 지적 진지함에 머물자 절충적인 방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된 광범위한 문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영국계 미국인 건축사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1939~)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What is Post-Modernism?>(1986)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통과 그 바로 이전 전통간의 절충주의적인 혼합이다. 즉 모더니즘의 계승인 동시에 초월이다."
이 용어는 1970년대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학문적으로 그리고 신문 잡지에서 동시대 미술 담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빈번히 사용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나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의 경우에는 양식적 용어로 사용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때는 시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등 이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문제와 사용의 유무에 관해 많은 의견 대립이 있다.
모더니즘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모더니즘으로부터 진전된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짓기 어려우며 일부 이론가들은 복수로 포스트모더니즘스Postmodernism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정의를 내리기 어려우나 크리스 발딕은 <간추린 옥스퍼드 문학 용어 사전>(1990)에 다음과 같이 적절한 말로 정의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키며, 특히 TV, 광고, 상업디자인, 팝비디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와 양식들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고 이런 의미에서 ... 포스트모더니티는 파편적인 감각, 절충주의적 향수,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a(모조품), 뒤죽박죽인 피상성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가치를 지녔던 깊이, 일관성, 의미, 독창성, 진본성과 같은 특성들이 공허한 신호들의 무작위적인 혼돈 가운데 사라지거나 용해된다. ...
모더니스트 미술가나 작가가 신화, 상징, 혹은 복잡한 형식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얻고자 애썼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경박한 냉담성을 지닌 현대적 실존의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혼돈을 환영하며 의식적으로 '깊이 없는' 작업을 선호한다.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을 '고급'과 '저급' 문화들 간의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으로 여기며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경멸조로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들을 '포스티posties'라고 부르는 회의론자들은 이 용어를 상업 자본주의의 화려함과 도덕적 결핍에 대한 학문의 무책임한 도취증상으로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찰스 젱크스로 <포스트 모던 건축의 언어 The Languge of Post-Modernism>(1975)와 유사한 여러 권의 저서에서 금욕적, 합리적,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국제 현대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경솔한 절충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하나의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명확한 의미이다.
포스트모던 건축가들은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며 종종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색채와 장식을 도입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미국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1925~)는 "순수함보다 잡종적인 요소"를 좋아하고 "뚜렷한 단일체"보다 "복잡한 활력"을 선호한다고 했다.
건축 이외의 분야에서 어떤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고 분류하는 것은 더욱 어렵지만 공통점이 없는 양식들을 비슷하게 혼합하거나 역설적 방법으로 의식적인 문화적 참조들을 나타내는 회화와 조각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팝아트는 양식과 평면을 강조하고 고급미술과 대중문화간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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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명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플루타르크는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사비니 여인들에 관한 역사적 사건을 전래했다.
이 사건은 회화의 주제로는 드물게 나타났는데 니콜라 푸생(1593/4~1665),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세 사람이 각자의 독특한 양식으로 묘사했다.
고대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데서 세 사람은 고전을 규범으로 삼는 고전주의라는 이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푸생과 피카소는 로마인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장면을 묘사한 데 비해 다비드는 약탈이 발생한 지 3년 후 여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사비니 부족의 반격을 묘사했다.
푸생과 피카소가 약탈의 비극적 장면을 모티프로 삼은 데 반해 다비드는 여인들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 부족 사이에 중재의 역할을 하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의 의도는 당시 프랑스의 혁명적 상황에서의 좌파와 우파의 첨예한 대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평화의 제스처를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푸생과 피카소의 작품은 순수 고전주의에 속하는 데 반해 다비드의 작품에는 고전주의 양식은 취했으나 정치에 이용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내재해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화화의 창시자인 푸생은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 양식을 취했지만, 고대 로마의 조각상, 부조 등 고전적 작품에 관심이 많았고 1624년부터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한 뒤 매너리즘 양식에서 벗어나 고전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표현을 절제하게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독자적인 창조성으로 평가받게 된 양식을 진전시키면서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했다.
이때 그린 것이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이다.
그는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 심리적 묘사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감정 표현은 나중에 미술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우월성을 믿었던 푸생주의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존 러스킨이 푸생을 가리켜서 감수성이 결여되었으며 지적으로 부패한 “진실에서 벗어난 화가”라고 비난했지만, 세잔을 비롯한 근대 프랑스 예술가들은 푸생이 창시한 고전주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비드가 1799년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릴 때 그는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1790년 9월에 쟈코뱅 당원이 된 이래 다비드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동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존경하며 추종했다.
1793년 9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10개월 이상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기에 3,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공화당 내 우파와 좌파의 충돌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도 실각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테르미도르 9일, 즉 7월 27일의 반동으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던 날 그는 국민공회 전당대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날 병중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비겁하게도 로베스피에르의 강렬한 개성과 혁명적 열정에 자신이 속았던 것이라고 변명한 후 처형을 면하고 약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자유로운 몸이 된 다비드는 평화를 위한 제스처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그렸다.

플루타르크가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고대 로마에 남자의 인구는 많지만 여자의 수가 부족하자 이런 불균형을 해결하여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로물루스는 이웃나라 부족들을 페스티발에 초대한 후 자신의 신호를 따라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을 유괴하고 약탈하게 했다.
다비드가 묘사한 장면은 여인들이 강탈되어간 지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이 타티우스의 주도 하에 반격에 나서 대치하는 순간이다.
당시에는 두 리더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투의 관례였으므로 화면 중앙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헤르실리아가 오른쪽의 남편 로물루스와 왼쪽의 아버지 타티우스 사이에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헤르실리아는 사비니인으로 로마의 로물루스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로마인도 되고 사비니인도 되는 여인들은 적으로 맞서 싸우는 아버지, 오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전투를 중단하라고 호소한다.
헤르실리아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 타티우스에게 말한다.
“아버님이 부모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구해낼 딸들이 더이상 없으며 아버님이 벌을 가해야 할 강탈자 역시 없습니다. … 아버님은 이제 남편에게서 아내를, 아이들에게서 어미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덤벼들려다 창을 뒤로 제끼며 물러났고 타티우스 또한 방패를 위로 올리고 칼을 아래로 내리며 머뭇거린다.
뒤에 군인들은 자신들의 헬멧을 벗어 위로 던졌는데 평화를 원하는 제스처이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서로 껴안고 그 후 한 민족이 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고대 그리스 미술을 닮게 하려고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몸을 매끈하게 묘사했는데 그리스 조각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려고 했다.
배경에 타르펠리 바위를 그려넣었는데 로마의 캐피톨린 언덕(옛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 남서쪽에 있는 바위와 닮았다.
역사적 사건이 발발할 때 이 언덕은 사비니에 속했다. 사비니가 이 언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로마 여인의 어리석은 반역 때문이었는데, 캐피톨의 사령관 딸 타르페이아가 사비니인이 차는 금팔찌를 자기에게 주면 성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해서 그녀의 반역으로 사비니인이 성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사비니인은 성채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죽였다. 바위는 반역을 상징해 그녀의 이름을 따 부르게 되었고 훗날 살인자와 배신자들을 바위 위에서 아래로 던져 죽이는 처형지로 사용되었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반역자 여인을 상징하는 바위를 배경으로 비교가 되게 구성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전사들은 다비드의 제자와 친구들이고 중앙의 검은 머리를 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비니 여인의 모델은 다비드의 아이들을 돌보던 아델레이다.
그녀는 그림에 모델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그림에서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비드는 로마의 주제를 그리스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로마 미술보다는 그리스 미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전사들이 누드로 묘사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완전한 도덕성을 나타내기 위해 육체적으로 온전한 누드로 상징한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다.
실제에 있어 누드로 전투를 벌이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미학적 설명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미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린 것들과는 달리 그는 여인을 중앙에 구성하면서 남자들을 누드로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그는 영웅적 누드로 고대의 신·영웅·보편적 남성을 나타내려고 했다.
또한 영국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는데 존 플랙스맨이 『일이아드』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위한 전투>와 <아레스를 향해 창을 던지는 디오메데스>, 그리고 제임스 길레이의 <죄, 죽음과 마귀>를 참조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존 플랙스맨은 영국 조각가, 제도가, 디자이너로 신고전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고, 제임스 길레이는 당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캐리커처였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작품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루브르에 위치한 과거 건축아카데미로 사용된 강당을 빌려 전시한 후 입장료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관람하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카데미가 그런 행위를 금해온 터라서 이는 새로운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는 전시에 대해 비난이 거세었다.
입장료 1프랑 80센팀은 적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전시회는 결국 상류층 인사와 외국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당시 숙련공 일당이 1프랑 미만이었으므로 입장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보기 위한 입장료는 당시 고급 음식물인 버터 450g의 값이었고,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 혹은 햄을 700g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작품은 1799년 12월 21일부터 5년 동안 전시되었고 약 5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다비드는 제자들에게 입장료가 2만 4천 프랑에 이를 때마다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식사를 제공했다.
다비드는 입장료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값에 이르게 되면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막상 입장료가 원하는 액수에 이르렀을 때는 악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시회가 계속되던 1801년 10월 그는 파리로부터 남동쪽으로 48km 떨어진 퐁텐블로 근처 오조우에 르 불지에 별장을 구입했다.
이 전시회는 개인전의 효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여전히 활기차고 다채로운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변형하는 작품을 연작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들라크루아와 벨라스케스의 걸작을 변형시켜 무려 58점을 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변형시켜 <식사> 연작을 제작했고,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는 <약탈> 연작, 푸생의 <유아 대학살>과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모델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뛰어난 기초 소묘능력, 시각적 독창성, 그리고 구상능력에서 인정받은 피카소는 고전적 주제도 새로운 양식으로 소화해냈다.
그가 20세기 회화에 끼친 영향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미술의 개념을 강화한 것이며 형식적, 추상적 완성도보다는 역동적인 힘과 활기를 강조한 것이다.

도판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캔버스에 유채, 154-206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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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The Great Couples 7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화제의출판: 『The Great Couples』 시리즈(1~7권) | 김광우 지음| 미술문화 刊| 각권 550쪽 내외
다양한 사연의 커플들...미술사의 新풍광 연출
2005년 03월 29일 이은혜 기자, 교수신문 


보다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미술사를 위해 집필하기 시작한 김광우 씨의 ‘위대한 커플’ 시리즈가 벌써 7권째 나왔다.
지난 2002년부터 현재까지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 1, 2’,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2’가 나왔고,
‘미술사와 미술’,
‘루벤스와 렘브란트’도 뒤따라 나올 예정이다.

이 시리즈의 독특함은 무엇보다 위대한 화가들을 둘씩, 혹은 셋씩 묶어서 커플로 다룬다는데 있다.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파헤친다는 건 기존의 일대기식 계보 접근과는 달리 역동적인 미술사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가 한쌍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둘을 엮을 수밖에 없는 건 이들에 의해 회화의 역사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뭉크, 쉴레, 클림트, 이들 셋은 쉴레가 클림트에게 영향을 받은 것 외엔 연결시킬만한 역사적 사건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그림은 판이하다.
어떻게 이 셋을 묶으려 했을까.
저자는 이들을 함께 보려는 건 동시대를 살다간 세 화가가 누구보다 죽음, 불안, 성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작품은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는 표현주의의 참맛을 보게 해준다.
또 셋은 누구보다 내면세계에 집착했었다는 점에서 묶일 수 있다.
뭉크는 “죽음은 내 안에 있다”라고 고백하며 평생동안 죽음을 표현했고,
쉴레는 스승으로부터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 놓았구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간의 동물성을 강조했다.
그의 그림은 매우 자극적인 표현을 띄어 외설혐의로 수감될 정도였다.
자신에 대한 글이나 자화상을 한점도 남기지 않은 클림트의 그림들은 신화와 애욕주의, 이상주의로 일관된다.
세 화가는 모두 외부세계를 등에 지고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빠져들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혹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하나로 묶일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몇몇 인물들을 연결시켜 접근하는 방식은 사실 서구 미술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작 ‘모네와 마네’, ‘고갱과 고흐’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김광우 씨가 대상으로 삼는 커플시리즈는 무한대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새롭게 쓸 계획이고,
‘클레와 칸딘스키’ 커플을 다룸으로써 당시 바우하우스 주변의 미술사적 이야기들, 그리고 응용미술까지 다뤄나가고자 한다.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뉴욕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일찍부터 뉴욕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실감했던 차에 한국에 들어와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집팔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관점에서 접근한 미술사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주변인물들 관계 속에서 화가의 작품을 드러내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위대한 커플’ 시리즈도 기획하게 됐다.

이 시리즈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시리즈를 통해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보다 깊이 있고 재밌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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