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미켈란젤로는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여 체계적으로 한 줄기로 정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가 로마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성기 르네상스가 한창 꽃피던 상태의 양식을 보여주지만 사망하기 전인 1564년 그는 매너리즘 양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과 이론을 정확하게 구획지어 나누기란 가능하지 않지만 대략 나누면 다음과 같다.

1530년경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예술관은 성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Pieta> 그리고 초기에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은 이런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회화의 과학적 전통을 고수했지만 네오플라톤주의에 접하면서부터 그 영향권하에서 성장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 바로 미 자체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묘사된 인물상들의 웅대함은 자연현상의 단순한 모방 이상을 지니는데
그의 인체 이상화는 자연 형상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얻은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인체미에 대한 숭배의 요소가 깊게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성기 르네상스는 사상면에서는 기독교와 이교라는 상반된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는 도상학적 면에서 보면 가장 박식한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인물상들의 외양은 이교 신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네오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켈란젤로에게는 기독교와 이교 둘 다 소중했다.
그는 처음부터 말년의 신앙생활을 물들인 열정적인 자기 포기의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보나롤라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아주 신실한 가톨릭 교도가 되었다.
물질계의 미에 대한 그의 믿음은 대단했는데 초기에 그가 쓴 사랑을 주제로 한 시에는 네오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미와 가시적 미를 향한 진한 열정이 종종 육체적인 정열과 어우러진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그의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바자리와 콘디비 두 사람 모두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인체를 해부해가면서 매우 열심히 해부학을 공부했음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믿지 않았다.
바자리에 의하면 그는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의 연필 소묘를 한 번 했을 뿐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한 살아있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초상화라는 것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홀란다는 미켈란젤로가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폴랑드르 회화를 경멸한 것으로 보았다.
콘디비는 제우시스가 그린 크로톤의 <비너스>에 관해 언급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방법을 서술했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좋아한다.
...
회화 세계에서 자국을 남긴 모든 예술가가 그렇게 한 것과 같이 벌꿀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자연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골라내 작품에 나타나게 했다.
저 나이든 스승은 비너스를 그리는 데 있어 한 처녀만을 보고 그리는 데 만족해 하지 않고 많은 처녀를 보고 다각도로 연구하여 각각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특징들을 골라내어 자신의 비너스로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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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수천 가지의 형상을 그렸지만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중세에 예술론이나 비평은 거의 부재한 상태였다.
그래서 예술적 자의식과 기술의 성취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의 확고한 직업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성기 르네상스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게 했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이론가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말은 "나는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모순됨이 없다",
"나는 나의 본래의 의견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등이었다.
이런 태도가 그로 하여금 1555년 율리우스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선출된 마르첼로 2세Marcellus II(Marcello Cervini)와 불화하게 했다.

가톨릭 그리고 피치노가 소개한 플라톤주의에 평생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늘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전념했으며 따라서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정신에 내재한 형상을 두드러지게 구현할 완벽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미술사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가장 잘 실현시킨 예술가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미켈란젤로라 할 것이다.
회화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 미켈란젤로에 관해 콘디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가 보듯 미켈란젤로는 수천 가지의 형상을 그렸지만 그것들 가운데 서로 비슷한 모습이나 움직임을 보여주는 건 하나도 없다.
반대로 그는 선을 하나 그을 때도 전에 사용한 적이 있는가를 반드시 확인하며 남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릴 때 만약 그런 선이 발견되면 지워버린다고 말하는 걸 나는 들은 적이 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는 뒤늦게 훌륭한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예술 전반에 걸친 그의 사고는 갖가지 출처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편지 495편이 1623년에 발견되었고 대부분 가족이나 후원자에게 보낸 개인적인 내용이거나 작업에 관한 것들로서 예술론을 알아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쓴 시들은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거의 없더라도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므로 미에 대한 그의 사고를 추론하게 해준다.

미켈란젤로 자신이 직접 쓴 글 외에도 3명의 당대인이 그에 관해 써놓은 자료가 남아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포르투칼 화가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는 1538년 로마로 와서 미켈란젤로 주변에서 한동안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1548년에 <대화편 Tractato de Pintura Antigua>을 출간했는데
자신이 미켈란젤로라는 대가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어 자기 자신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저서는 그의 자만심의 결과물이지만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전기작가들이 소흘히 다룬 시기에 관련된 것이므로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당대에 출간된 두 번째 저술로는 바자리가 <미술가 열전>에 기록한 미켈란젤로의 전기이다.
이것은 1550년에 첫 출간되었으며 1568년의 두 번째 개정판에서는 거의 다시 썼다 싶을 정도로 수정 증보되었다.
이 책은 자료 제공면에서는 기대에 훨씬 못미치지만 미켈란젤로의 제작방법을 기술해놓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견해를 약간이나마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A. Condivi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1553년에 출간되었으며 셋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다룬 이 책은 바자리가 잘못해놓은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씌어진 듯하다.
콘디비는 다소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한 말과 사고를 기록하는 데 있어 바자리나 홀란다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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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클레멘트 7세가 사망하기 이틀 전 1534년 9월 23일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새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3세가 그를 바티칸의 공식 조각가,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1536년 5월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단테의 저서를 읽고 영감을 받은 그는 부활에 자신도 심판받게 될 것이란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시를 보면 죽음이 고딕 냉혹한 수확자가 인간을 낫으로 건초를 잘라내듯 잘라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를 더 사는 것을 구원에 덜 이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산 자는 좀더 용서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 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최후의 심판>은 분명히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1541년 10월 31일 '성자들의 밤 All Saints Eve'에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원래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1545년 2월에 완성함으로써 젊은 시절 그것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율리우스 2세의 무덤> 기단 위에는 <모세>를 포함해 4점의 조각이 있는데
이것들은 노예의 상과 승리의 상이 있는 지상의 영역과 교황의 운구를 나르는 두 천사의 천상의 영역 사이에 있다.
이것들은 천상적인 영역과 지상적인 영역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의 의미로서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네오플라톤주의 철학의 의미로서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제단 위 네 조각들 중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의 의인상이 의미하는 활동과 관조의 원리,
즉 '정의 institia'와 '종교의 덕 religio'은 영혼을 천상으로 나르는 두 날개에 비유되고,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 매개체로 작용함으로써 불사성을 보증하는 능력을 상징하며
맨아래 장식은 교황의 인격적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지상에서의 그의 생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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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쏜 화살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을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오게 해서 자신을 위해 거대한 크기의 무덤을 제작할 것을 의뢰했는데
이는 40개 이상의 실재 사람 크기 조상들이 장식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율리우스가 1513년 사망하고 재정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그 밖의 이유로 해서 그 무덤은 완성되지 못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이를 한동안 비극으로 여기고 몹시 부끄러워했다.

한편 율리우스는 1508년 그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의뢰했으며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조각이 아니라 그림을 의뢰받은 일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율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가 율리우스의 무덤에 관해 미켈란젤로와 다시 협상하는 가운데 그로 하여금 <모세 Moses>와 두 점의 <노예 Slaves>를 제작하게 했다.

메디치 가문이 1512년에 다시 피렌체를 집권하자 미켈란젤로는 1514년부터 1534년까지 피렌체에 거주했으며 그후로부터 사망한 1564년까지 로마에 거주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무덤 장식을 막 마친 후였다.
메디치 가문의 두 교황, 레오 10세(로렌초의 둘째 아들로 1513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와 클레멘트 7세가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자신들이 의뢰한 작업에 전념케 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후계자와의 계약을 곧 실행할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1518년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성 로렌초 성당의 외관을 위한 모델을 디자인했으며 1520년 성 로렌초 성당 내의 영안실 예배당에 메디치 가문을 위한 무덤을 만들기로 계약했다.
미켈란젤로의 미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상주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만만했는데
다음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천 년 후 누구도 그것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그렇다는 것 외에 달리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쏜 화살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을 대리석으로 비스듬히 기댄 누드로 의인화하여 묘사했는데
그것들이 <새벽 Dawn>, <낮 Day>, <황혼 Dusk(혹은 Twilight)>, <밤 Night>이다.
그는 <낮>과 <밤>을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의 무덤에 장식했으며 <새벽>과 <황혼>을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무덤에 장식했다.
<밤>의 경우 그는 자신이 정녕 만든 것이 아니라 돌 속에 이미 내재한 형상을 자신이 자유롭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고매한 정신에 내재한 추상적 형상을 질료로 탁월하게 구현시킬 줄 알았고 관람자로 하여금 플라톤이 말한 순수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했다.

두 무덤은 모두 성 로렌조 성당의 메디치 영안실 예배당 내에 있다.
네 점의 조각은 인간을 구속하는 자연의 영역인 시간을 육체에 종속된 인간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억누르는 지상에서의 실질적인 고통의 상태를 상징한 것들이다.
로드비코가 1531년 죽었을 때 미켈란젤로가 아버지의 사망에 관해 쓴 애정어린 찬양의 시에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된 까닭으로 하늘에 있는 영혼들은 해방되었고, 근심과 압박들로부터 자유로우며, 부러울 정도로 고충들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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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조각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불멸하는 지고의 선 혹은 미에 대한 사랑으로 질료는 사랑의 대상으로 임시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인체의 미적 형체에 전념했는데 인체는 그에게 우주와 다름이 없었으며 아름다운 인체는 창조주로 하여금 관조를 용이하게 해주는 작업이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를 제작하면서 그는 삼십 중반에 가까운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이십대 후반의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다.
실재로는 오십도 더 되었을 마리아를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까닭은 불멸의 젊음으로 마리아의 온전한 순결을 상징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최소한 천박한 생각이라도 환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육체를 문제가 되게 한 것 같다.

<피에타>를 완성한 이듬해 로마로부터 피렌체로 돌아온 후 1504년 4월에 <다비드>를 완성했고 이 시기에 그는 피렌체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지방자치회가 <다비드>를 가리켜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호평하면서 <다비드>를 청동으로 제작할 것을 의뢰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실세 통치자 마레살 드 기에Marechal de Gie에게 외교적 제스추어를 취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지방자치회는 그에게 1364년 피렌체와 파사 사이에 벌어진 '카시나의 전투 Battle of Cascina'를 주제로 팔라조 베치오Palazzo Vecchio에 있는 오백the Five Hundred 복도에 벽화를 그릴 것을 의뢰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연장자이며 예술에 있어 위대한 적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와 대결하게 했는데
레오나르도가 그때 복도 반대편에 '앙기아리의 전투 Battle of Anghiari'를 그리고 있었다.
복도는 나중에 파괴되었지만 커다란 벽에 그린 경험이 그로 하여금 이그러진 남자 누드를 그리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나중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수 있게 했다.

미켈란젤로가 남자의 누드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해부학에 전념해온 데 기인하기도 했지만 정신에 내재하는 형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창조주로 하여금 스스로를 관조하는 데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상이 신적 광기의 황홀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는 영혼이 개별적인 사물 속에서 지상으로의 하강 이전에 누린, 피치노의 말로 하면,
"형언할 수 없는 신적 광휘"를 일시적으로 목격한 흥분을 반영시키는 것이었다.
플라톤적 사랑의 광기에 의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상승을 조각상에서 나타내려고 했고 형상이 질료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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