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죽음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개인전이 성과가 없어 마네가 실의에 잠겼을 때 보들레르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일 년 전 중풍에 걸려 파리로 돌아온 후 보들레르는 오른쪽에 마비가 오고 거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겨우 한 마디씩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건 눈의 움직임, 얼굴 표정, 왼손을 사용한 제스처였습니다. 그가 수치료를 받는 사립 요양소의 그의 방에는 2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마네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는 마네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마네는 종종 요양소로 그를 방문했고, 수잔은 보들레르가 좋아하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요양소의 피아노로 연주해주곤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8월 31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틀 후 몽파르나스의 묘지에 묻혔는데, 너무 더워서 시신을 이틀 이상 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이틀 동안의 장례식이라서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평론가 아서 스티븐스는 동생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교회 장례식 때는 백 명 가량 참석했지만 묘지에 시신을 묻을 때는 불과 몇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너무 더워 사람들이 묘지까지 동행하지는 못했단다. 묘지에 들어서는 순간 벼락이 치자 사람들이 뛰어 가버렸단다.


148-14

마네의 <장례식 L'Enterrement>, 1867, 유화, 72.7-90.5cm.

언덕 높은 지평선에 천문대의 돔, 병원, 성당의 종탑이 실루엣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름이 있는 하늘과 눈 덮인 땅, 그 아래의 장례행렬이 습작처럼 거친 붓질로 단번에 그려졌습니다. 심한 명암의 대비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보들레르의 죽음으로 비참했던 마네의 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인물을 주로 그린 마네가 풍경을 이처럼 크게 그린 건 두문 일입니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되는 장면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보들레르의 사망은 마네에게 미학적으로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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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가 파동/입자 이중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물체의 구성요소들이 양자물리학의 법칙들을 따른다는 것과 뉴턴의 법칙들은 그 양자 요소들로 이뤄진 거시적인 물체의 행동을 기술하는 훌륭한 근사이론approximation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뉴턴 이론의 예측들은 우리 모두가 우리 주위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터득하는 실재관과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우리의 일상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양자물리학은 그 이상한 원자와 분자들의 우주를 표현하는 새로운 실재 모형입니다. 우리의 직관적 실재 이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많은 개념들은 양자물리학에서는 무의미합니다.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가 파동/입자 이중성입니다. 빛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은 없지만, 물질 입자가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개념은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1901-76)가 1926년에 정식화한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이 영국과 캐나다의 협조 하에 수행한 인류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암호명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대비되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련되었으나 나치즘에 반대한 그는 전후에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에 주력했습니다. 불확정성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비롯한 데이터들을 동시에 측정하는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입자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측정할수록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위치가 그만큼 더 부정확해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입자 위치의 불확정성을 반으로 줄이면 속도의 불확정성은 두 배로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대략 원자의 크기만큼의 오차 이내로 정확하게 측정한다면, 불학정성원리에 따라서 우리는 그 전자의 속도를 대략 초속 1,000km 정도의 오차 이내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확한 속도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한 이유는 입자들이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어떤 시스템의 초기 상태가 주어졌을 때, 그 시스템의 미래 상태를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인 과정을 통해 결정한다. 즉 자연은 가장 단순한 상황들에서도 과정이나 실험의 결과를 명령하지 않는다. 자연은 제각각 실현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는 다양한 경우들을 허용한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과는 정반대로 신은 모든 물리적 과정 각각의 결과를 결정하기 전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같다.


양자물리학이 자연이 법칙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생각을 위태롭게 할 수 있지만, 호킹은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양자물리학이 새로운 형태의 결정론을 향해 우리를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 결정론에 따르면 어떤 시스템의 특정 시점에서의 상태가 주어질 경우 자연법칙들은 그 시스템의 미래와 과거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미래와 과거들의 확률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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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쿼크가 우리의 관찰에 부합하는 모형 안에서만 존재한다


오늘날 모든 물리학자는 전자electron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존재를 믿습니다. 전자의 탐구는 1897년 영국 물리학자 톰슨Joseph John Thomson(1856-1940)이 텅 빈 유리관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의 흐름, 즉 음극선cathode이란 현상을 실험하던 중 미지의 선이 아주 작은 미립자들corpuscles로 이뤄지자, 그것들이 물질의 궁극적인 기본 단위로 당시에 여겨온 원자의 구성 성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톰슨은 전자를 보지 못했고, 그의 추측은 그의 실험에 의해서 직접 혹은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형은 기초과학에서부터 공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례들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함이 밝혀졌으며, 오늘날의 모든 물리학자는 전자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재의 존재를 믿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쿼크quark는 원자핵 속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속성들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입니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원자핵을 이루는 것과 같이 양성자proton(전하를 띠는 종)와 중성자neutron(전하를 띠지 않는 종) 그 자체도 쿼크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호킹은 우리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쿼크들로 이뤄졌다고 말하지만, 영원히 쿼크를 관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쿼크들 사이의 결합력이 거리에 비례해 증가하기 때문에 고립된 외톨이 쿼크는 자연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쿼크들은 항상 세 개의 집단인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거나 쿼크 두 개와 反(반)쿼크 한 개가 집단 파이중간자pi meson를 이루어 나타나며, 고무 밴드로 묶여 그런 집단들을 이룬 것처럼 행동합니다.

쿼크 하나를 고립시키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데도 쿼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느냐는 질문은 쿼크 모형이 처음 제시된 후 몇 년 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쿼크 모형이 옳은 예측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하자, 그 모형에 대한 반발이 잦아들었습니다. 호킹은 정확히 말해서 쿼크가 아원자입자들의 행동에 관한 우리의 관찰에 부합하는 어떤 모형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호킹은 좋은 모형은 다음의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우아할 것.

2. 자의적이거나 조정 가능한 요소들을 거의 포함하지 않을 것.

3. 기존의 모든 관찰들에 부합하고 그것들을 설명할 것.

4. 만약 틀렸을 경우, 모형을 반증할 수 있는 미래 관찰에 관한 상세한 예측들을 내놓을 것.


호킹이 말하는 우아할 것이란 최대한 단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잡성을 증가시키면 모형이 더 정확해질 수 있겠지만, 과학자들은 특정한 관찰들에 부합하기 위한 복잡하게 뒤틀린 모형을 마뜩치 않아 합니다. 그런 모형은 이론이라기보다는 데이터 목록에 더 가깝습니다.

호킹은 새로운 관찰들을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수정이 너무 기괴해진다면, 그것은 새 모형이 필요하다는 신호라고 말합니다.

호킹은 하나의 대상을 입자로 기술할 수도 있고 파동으로 기술할 수도 있다는 파동/입자 이중성의 개념은 돌덩어리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일상경험을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전혀 다른 두 이론이 동일한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상황들, 즉 이중성들은 모형 의존적 실재론과 조화를 이룹니다. 호킹은 각각의 이론이 특정한 속성들을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떤 이론도 다른 이론보다 더 낫거나 실재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과 관련해서 우주의 모든 면을 기술할 수 있는 단일한 수학적 모형 혹은 이론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연의 모든 힘, 그 힘을 느끼는 입자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무대인 시간과 공간을 빠짐없이 기술할 수 있는 단일 이론은 없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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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이론은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과 M이론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이 실재의 본성을 논해왔습니다. 고전과학은 외부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의 속성은 관찰자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모든 관찰자가 똑같은 속성을 측정하게 된다는 것으로 철학에서 이런 믿음을 실재론realism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실재론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양자물리학의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나 속도는 관찰자에 의해서 측정될 때까지 확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별 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앙상블의 부분으로서만 존재합니다. 홀로그래피 원리holographic principle를 지지하는 사람에 따르면 우리와 우리의 4차원 세계는 더 큰 5차원 시공space-time의 경계에 드리운 그림자인 것입니다. 홀로그래피 원리란 양자 중력과 끈 이론string theory에서 공간의 부피에 대한 정보가 구역의 중력 지평선과 같은 빛 꼴 경계에 직접되어 있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네덜란드 물리학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Hooft(1946-)에 의해 처음 제창되고, 끈 이론을 통한 정밀한 해석은 스탠포드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1940-)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끈 이론이란 만물의 기본 단위를 점 입자 대신 공간을 점유하는 끈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끈 이론은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과 M이론을 아울러 일컫는 말입니다. 초끈 이론은 1970-80년대 이후 미국 칼텍Caltech(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의 이론물리학자 존 슈바르츠John Henry Schwarz(1941-)와 영국 퀸 메리 대학의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원명은 Edward Michael Bankes Green, 1930-) 등이 발전시킨 이론으로 우리가 사는 시공간은 11차원이 있어야 하며, 만물이 끈으로 이뤄졌다는 주장입니다. 호킹은 홀로그래피 원리에 의하면 우주 안의 우리의 지위가 곡면 어항 속의 금붕어의 지위와 비슷합니다.완강한 실재론자들은 과학이론이 실재를 반영한다는 것은 그 이론의 성공에 의해 증명된다고 주장하지만, 호킹은 다양한 이론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의 틀들을 통해 동일한 현상을 성공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반박합니다.

실재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실재론자들은 경험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을 구분합니다. 그들은 관찰과 실험은 의미가 있으나 이론은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며, 관찰된 현상의 바탕에 있는 심오한 진리의 표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반실재론자들은 과학을 관찰 가능한 것들에 국한시키기를 원해 19세기에 우리가 원자를 영원히 못 볼 것이란 이유로 원자의 개념을 배척했습니다.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성직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1685-1753)는 정신과 관념들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버클리 철학의 근본명제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 Esse est percipi’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능동적인 힘, 작용으로서의 정신실체 등과 그것에 지각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관념idea만을 인정했습니다. 반면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76)은 우리가 비록 객관적 실재를 믿을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믿음이 참인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A Treatise of Human Nature』 서문에서 흄은 “인간 과학은 유일하게 다른 모든 과학을 뒷받침하는 과학”으로 “체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는 과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흄의 이러한 견해가 정확하게 어떤 것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학자 간의 의견이 엇갈려 왔습니다. 흄은 인간의 오성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고, 감성이 대상에 대한 직관적이며 강렬한 인식이라면, 이성은 감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대상을 반추하여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은 실재론과 반실재론이 벌여온 모든 논쟁과 토론을 우회합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 따르면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오직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느냐는 질문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보는 풍경과 우리가 보는 풍경을 예로 들면 둘 모두 관찰에 부합하는 모형으로서 한 모형이 다른 모형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호킹은 해당 상황에서 더 편리하다면 어떤 모형을 써도 무방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 과학적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창조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적 모형들에도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 그리고 추론을 통해 창조된 우리의 세계 지각에서 관찰자를 떼어낼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지각이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렌즈를 통한 뇌의 해석 구조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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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작품을 Daum의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국박람회에서 탄성을 지르며 즐기는 동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파리에 알려진 것은 1867년 7월 1일이었고, 『르 피가로』가 7월 8일자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요제프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Joseph Ferdinand Maximilian(1832-67)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입니다. 나폴레옹 3세의 강요로 1864년 4월에 합스부르크(1276-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왕가)의 왕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독립군에게 맞설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채 멕시코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1867년 2월, 막시밀리안이 집권한 지 3년도 채 안 되어 나폴레옹 3세는 10년 이상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과의 약속을 깨고 그를 구출하지 않았으므로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베니토 후아레즈가 주도한 과격한 멕시코 게릴라들이 막시밀리안과 휘하의 장군들 미구엘 미라몽, 토마스 메지아를 체포했습니다. 후아레즈는 1867년 6월 19일에 맥시코 시티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쿠에레타로 근처에서 그들 모두를 처형했습니다.

인디언 고아 출신의 후아레즈는 동란 후 1861년부터 대통령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대통령에 선출된 인물입니다. 1867년 3월 모든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서 철수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아내를 파리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5월 15일 쿠에레타로가 점령당하자 항복했슴니다. 후아레즈는 집권 당시 법을 제정했는데, 외국 군대를 멕시코로 끌어들이는 어떤 행위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총살형 집행장에서 여섯 명의 군인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충분한 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를 멕시코로 추방한 결과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희곡 작가 루도빅 알레비는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즈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유혈이 낭자한 미친 멕시코 전쟁은 이처럼 슬픈 결말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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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The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 of Mexico>, 1867-68, 유화, 252-305cm.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대에 비해 마네의 작품에는 그런 점이 전혀 없어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고야는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 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합니다.


179

고야의 <1808년 5월 3일 The Third of May, 1808>, 1814, 유화, 260-345cm


공화주의자인 마네는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란 제목으로 캔버스에 가득 채웠는데, 이런 구성방법은 고야의 영향이었습니다. 마네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1808년 5월 3일>과 마찬가지로 총구를 겨누며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을 오른쪽에 그리고 사형당하는 사람들은 왼쪽에 구성했습니다.

마네 그림의 특이한 점은 무엇보다도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했는데, 마네는 황제의 처사에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는 그림에 처형된 날자 6월 19일을 적어 넣었습니다. 마네는 이 그림을 이듬해 살롱에는 출품하지 않았는데 정치적 물의를 염려한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1879년 뉴욕의 호텔에서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훗날 피카소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1937년에 <게르니카>로 조국의 동란을 기소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알렸는데, 한국에서 동란이 일어나자 고야와 마네의 전례를 따라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습니다.


182

마네의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중에서 <군인 Soldier>, 유화, 99-59cm.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친구들이 나폴레옹 3세의 위신을 손상시키므로 발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배우 에밀 앙브르가 1878년 뉴욕으로 갈 때 이 작품을 가지고 가서 이듬해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했습니다.


마네는 1867년 9월 늦게 막시밀리안의 처형장면을 다시 그렸는데, 그림을 구성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습작한 네 점은 현재 런던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두 장군들 사이에 선 채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실재 처형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네의 의도대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네는 고야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과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평행으로 구성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 르누아르는 훗날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은 완전히 고야다. 하지만 마네는 마네가 아닌 적이 없었다.” 마네는 1년 반 동안이나 유화와 석판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폭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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