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마당
하나님의 응답 │ 38장
<욥 이야기>(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8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 찌니라 하였노라
12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13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일이 있었느냐
14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 같이 나타나되
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16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느냐
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18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 찌니라
19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20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21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
22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23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24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25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28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29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30 물이 돌 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31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였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32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33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4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6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37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38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39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41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공동번역 성경에는 37절부터 41절까지 순서가 조금 바뀌었는데 다음과 같다.
37ㄱ 누가 구름을 셀만한 천재이냐?
38 먼지가 덩이와 덩이로 굳어졌다가
하나로 뭉쳐지게 되도록
37ㄴ 하늘에서 독을 기울여 물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39ㄱ 네가 사자에게 먹이를 잡아 줄 수 있느냐?
40 굴 속에 웅크리고
떨기 속에 숨어 노리고 있는
39ㄴ 허기진 새끼 사자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느냐?
41 새끼들이 먹이가 없어 허둥대며
하느님께 아우성칠 때에,
누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장만해 주느냐?
좲 해설 좳
38장 마지막 네 절은 문장의 순서가 혼동되어 있으므로 바꾸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응답은 욥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자 세 친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욥의 요망에 부응하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다(31:35-37).
하나님께서는 욥의 거룩한 마음이 다하게 한 후, 의미도 없는 거룩하지 못한 말을 지껄이게 한 후, 또 당시 지혜롭다고 하는 신학에 상반되는 혁신적 신학을 갖도록 한 후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은 거짓말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순전함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듣고자 한 욥의 모든 요구가 하나님의 출현 자체로 죄다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욥 자신이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판정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도 아니었으며 당시 문화적인 환경에서 예언자들이 할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욥의 문제가 명료하게 해결된 것도 아니고 욥이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친구들과 한창 논쟁을 벌일 때 즉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이겠느냐 하는 논란이 한창일 때 스스로 논란 속에 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도전적으로 하신 말씀은 욥이 첫 인간인 아담처럼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창조에 참여한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칼하게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설계하시고 섭리하시는 지혜의 근원과 우주를 보살피시는 신비한 마음을 욥이 어떻게 경험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욥이 알고자 했던 하나님의 공정하심에 대한 응답이 아주 광대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우주의 창조, 혼돈을 다스리는 힘, 하늘나라의 법,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공정하심과 인간이 체험하는 고난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응답되었으며, 전장에 일어난 욥의 번민과 그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간접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욥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지성적 응답보다는 욥 스스로 하나님을 뵙는 체험을 한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첫 인간인 아담으로 상기시켜서 자신이 우주를 창조하던 당시를 통하여 그분이 수고하여 이룩하신 우주를 상기시킴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당신의 수고를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우주가 창조될 때를 체험하게 하려고 하셨다.
욥을 달래서 그의 문제를 응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혼돈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새 인간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런 응답은 욥으로 하여금 그분의 의와 진리를 깨닫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신학 그 이상이었다.
욥은 보다 거칠고 실재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시는 하나님을 뵌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로부터 재창조될 수 있으며 흙에서 다시 일어나 재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중심이었던 욥은 하나님을 뵙고 음성을 들은 후 하나님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이 장에서 욥기 저자가 천문지리에 아주 밝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묘성, 삼성, 북두칠성 등 별들을 관찰하였다.
그는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힘과 지혜를 보았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그분이 창조한 우주와 삼라만상 그리고 무생물과 생물의 질서정연한 운행, 즉 자연의 원리를 관찰하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저자는 하나님을 보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 대자연을 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바다를 보고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을 보며 무생물까지도 보노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그는 독자들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폭풍 속에서 들었는데 격노한 감정 섞인 말이었다(1절).
전장 2-5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폭풍으로 들린다고 예견했다.
격렬한 회오리바람은 폭풍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푹풍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폭풍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 리로다 (시편 50:3)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출현은 보통 사회를 위하여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출애굽기 3:1-12, 19:9-20).
욥은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뵙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격노한 감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드라마에서의 표현 같은 방법의 묘사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불투명한 말로 욥의 정신적 투쟁에 응할 수 없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셨는데 욥기 저자가 더 이상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면하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기소하거나 인정 심문하는 태도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논고처럼 말씀하셨다(2절).
오랜 옛날부터 알려진 우주를 섭리하심을(이사야 46:10) 도대체 욥이 누구라서 혼돈하고 있느냐는 힐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창조 때 지혜가 자문으로 참여한 당시로 욥을 데리고 가셨다(잠언 8:22-31).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문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이사야 40:13) 욥이 누구라서 감히 자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에게 간청하느냐는 말이다.
욥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구원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3절).
하나님의 도전은 욥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을 영광되게 했다.
욥은 영광스럽게도 신비한 우주의 섭리에 관해 하나님과 의논할 수 있는 초대를 받았다.
욥은 창조 당시 자문이 되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다.
4절은 하나님께서 지혜에 의해 우주에 기초를 놓을 때를 말한다(잠언 3:19, 예레미야 10:12).
우주의 기초란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서와 세상이 존재하는 의미도 뜻한다(시편 93:1-5, 사무엘상 2:8).
이사야가 주장한 대로(이사야 40:21-23) 하나님께서 우주를 운행하시는 섭리가 이미 알려졌음을 욥이 알아야 했다.
우주의 창조가 마치 땅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처럼 설명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몇 사람들로 하여금 몇 가지 일을 맡게 하셨을 가능성도 전통으로 알려져 왔을 것이다(5-6절).
전설에 의하면 어떤 천사가 창조의 일부를 책임졌다고 한다.
땅에 세워진 기둥은 유대인에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데 하나님께서 혼돈한 물 위에 우주를 기초하셨다면 무엇에 기초해서 땅 기둥이 서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의구심이 있다(시편 24:2).
지혜의 역할처럼(잠언 8:30-31) 우주창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며 새벽별은 그래서 가나안 지역 신화에 등장하는지 모른다(7절).
새벽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천사들을 상징한다.
욥의 친구들은 별들의 역할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음을 역설한 바 있다.
욥이 하나님을 바다 또는 바다 속의 거대한 괴물로(7:12) 몰아부친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자신이 혼돈한 바다를 다스림을 보여주시려고 하며, 그분은 우주를 설계하고 건하셨을 뿐만 아니라 혼돈의 힘을 또한 항상 지켜보시며 억압하고 계심을 알렸다(8-11절).
바다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욥기 외에 구약성경에는 없다.
신화에서는 태어난다는 말을 보통 세상에 처음 생겨난다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8절).
시편의 저자는 산과 대륙이 태어난 것으로 묘사하였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0:2)
9절에 어린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있는 것처럼 바다의 괴물은 구름과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어린 아이와 같은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정복하셨다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바빌로니아 창조신화에는 신 마덕(Marduk)이 혼돈의 괴물을 사살하고 기둥을 바다 변경에 세워 바다의 크기를 정하였다.
10절의 ‘문’과 ‘기둥’은 바다가 유한한 존재임을 뜻한다.
바다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둥에 의해서 변경을 서로 넘어가지 못하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11절).
옷으로 덮음 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04:6-9)
혼돈은 창조 당시 하나님의 법령에 의해서 복종되었으며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복종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권능의 하나님을 욥은 자신의 혼돈으로부터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욥은 자신의 난 날을 저주했고 그날이 창조를 의미하는 ‘조광(dawn)’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3:4-8).
빛으로 인한 출생은 인생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새벽에 자신이 우주를 존재하도록 하신 것이며 악은 항상 하나님의 감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조광 또는 새벽(dawn, 새벽의 여명)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던 첫날 말씀하신 그 빛이다(12절).
태초의 그분 말씀이 하늘을 다스린다(이사야 40:26).
조광 또는 새벽은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그가 속한 신비한 장소가 있다.
‘불량배들(the wicked)’은 히브리어 개별(Dog-star)에 대한 번역인데 개별이란 시리우스(Sirius)로서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다(15절).
뱃사람들에 의하면 시리우스는 몇 별들과 함께 나타나서 항해를 인도하여 준다고 한다.
이 별이 조광 또는 새벽과 함께 비추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다.
불량배들이 빛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말로 미루어 조광은 불의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상징되고 있다.
세상이 바다 깊은 혼돈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창세기 1:2) 깊은 곳은 아직도 바다 아래에 존재한다(16절).
가나안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 엘은 바다 깊은 곳에 거주한다.
이스라엘 동쪽 지역의 신화에는 영웅이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살아서 세상에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지만 구약시대 유대인에게는 지하, 즉 죽음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인식되었다(17절, 7:9, 10:21).
신화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문지기나 괴물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빛이 제 나라로 돌아간다는 또 다른 신비한 설이 19-20절에 소개되었다.
빛과 어둠은 권능에 있어서 하나님만 못하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지평선 너머로 운행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한된 능력 안에서 운행되며 우주 전체의 질서를 거스르지 못한다.
전장에서 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어둠이 지워주기를 소원한 적이 있다(3:4-6).
21절의 한 옛날이란 혼돈을 질서 있게 하고 빛을 어둠으로부터 가른 하나님의 창조 첫 날을 말한다(창세기 1:3-4).
욥이 만일 하늘의 첫 인간이라면 창조의 과정을 관찰하여 세상이 생겨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절은 아이러니컬한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욥으로 하여금 세상이 목적을 지니고 생겨났으며, 하나님의 수고로 생겨났음을 보여줌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대에는 일기가 보통 폭풍의 신이나 이와 유사한 신이 일으키는 조화라고 전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일기는 사람이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곳에서 신비스러운 운행을 자행한다고 알려졌다(22-30절).
고대 사람들은 우박과 눈이 하늘의 저장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신명기 28:12)
과거 유대 민족이 전쟁에서 불리해지면 하나님께서 일기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셨다(여호수아 10:11, 팔관기 5:20-21).
그러므로 일기는 계절을 위해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정하심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4절의 바람이 갈라지는 목이란 번개를 의미하는 것 같다.
소나기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창을 열고 물을 쏟아 붓는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였다(창세기 7:11).
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길이 있으며 먹구름이 천둥치며 쏟아지는 폭우도 이런 길을 따라서 온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26-27절, 하나님의 일기에 대한 섭리는 땅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룩한 복지보다도 더욱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다.
전장에서 욥은 피조물인 야수마저도 하나님의 공정하지 못하심을 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12:7-9).
자연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보고도 욥이 풀 수 없는 회의가 있다면 9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다가 태어난 신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28-30절).
가나안 신화에 등장하는 폭풍의 신 바알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때 몇 명의 딸들을 데리고 나타나는데 그들 중 하나가 이슬의 여신이다.
하나님의 저의는 욥을 창조 당시로 데리고 가서 인생이 궁극적으로 직면해야 할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을 별들의 운행과 관련해서 이해하였다.
욥은 별들의 운행을 정할 능력이 없다(31-32절).
하늘나라의 법칙은 영원하며 우주가 설계될 때 이미 정하여진 것이다(33절).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런 법칙을 만들 능력이라도 있어 법칙으로 지상의 세계를 다스리겠느냐고 물었다.
히브리어로 법(law)은 그분의 글(his writing)을 뜻한다.
폭풍을 다스릴 수 있는 명령권한이 욥에게 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셨다(34-35절).
“알았습니다” 라는 대답은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과는 다르다(이사야 6:9).
일기가 이루는 기후는 하늘나라로부터 지상에 전해지는 메시지로 이해되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없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편 104:3-4)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굶주린 사자 새끼들을 먹일 능력이 있느냐고 물으셨다(39-40절).
시편 저자는 사자 새끼들이 먹이를 창조주 엘로부터 공급받았다고 기록하였다(시편 104:21).
비록 새와 동물을 사람이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그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보살피시고 계신다(4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