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예수가 태어난 해는 0년일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마태는 예수가 태어난 시기를 헤롯 대왕 재임시라고 했다.
헤롯이 B.C. 4년에 사망했으니까 예수가 태어난 해는 B.C. 4년이거나 그 이전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그리스도 이전(Before Christ)’이란 뜻의 B.C.와 ‘우리 주의 해〔年〕에서(Anno Domini)’란 뜻의 A.D.의 기준이 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제로(zero) 해는 그러니까 잘못 계산된 것이다.


예수보다 약 500년 후에 태어난 로마의 역사학자이자 사제 디오니시오스 엑시구스는 525년에 예수의 출생 연대를 로마 시 건국 후 753년 12월 25일로 계산하고 754년을 새로운 해, 즉 A.D. 1년으로 삼았다.
디오니시오스는 예수의 출생일을 별 근거 없이 12월 25일이라고 정했을 뿐 아니라 출생 연도에 관한 계산에 5년의 오차를 범했다.
그가 산술한 연대에 의하면 헤롯 대왕은 749년에 사망했다.
헤롯 대왕이 사망한 해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디오니시오스의 연대에 의하면 그것은 B.C. 4년에 해당한다.
만일 예수가 헤롯이 사망하기 수년 전에 태어났다면 예수의 출생은 그만큼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학자들은 안전한 방법으로 예수가 태어난 해를 B.C. 7년과 B.C. 4년 사이라고 추측한다.


누가는 복음서에 기록하기를,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재임할 때 유대인들에게 호적등록을 하라고 명령했고 다윗의 후손 요셉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약혼자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적었다.
그러나 헤롯 대왕 생전에 구레뇨는 아직 시리아의 총독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B.C. 4년 이전에 유대에서 호적등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복음서에서 의심이 가는 기록은 또 있다.
동방에서 세 사람이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와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별이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었을까 하고 당시의 별자리를 천문학적으로 따져보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낙담하고 말 것이다.
천문학적으로 산술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에 연연해하기보다 예수가 누구이며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활동했을까에 관심을 돌리는 것이 그의 생애에 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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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예수는 과연 누구일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이 물음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알아봐야 할 주제이지만 여기서 간략한 답을 먼저 찾아보자.
그는 산타클로스처럼 가공의 인물도 아니고 상징주의자들의 인격화된 신화적 인물도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사도 바울에게서 들을 수 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여인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놓였던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들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지 여드레 후에 할례를 받았으며 아주 흔한 이름인 여호수아로 불리었다.


그의 청소년기는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유언비어 같은 가설들이 전해졌다.
그가 장사꾼들을 따라 영국까지 갔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인도로 가서 불교 교리와 요가를 몸소 익혔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요가법으로 살아남아 인도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예수는 누구일까?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연히 우리는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도록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누가복음서에 유일하게 어린 시절의 기록이 있는데 예수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이다.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갔다(관례에 따르면 열두 살의 어린이는 율법과 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글쓴이).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르고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다가 찾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를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의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누가복음서 2:41-50】


유월절이 되면 면적이 약 30만 평 되는 예루살렘 성내 전체가 북새통을 이룬다.
유대의 각 지역뿐 아니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에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망국의 한을 푼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는 순례자들의 행렬로 파도를 이루며, 그들 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예루살렘의 거리들은 아주 비좁아서 흔히 미아들이 속출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몹시 낙담했다가 사흘 후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하자 매우 기뻤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아들의 말은 아주 뜻밖이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는 예수를 감히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는 조숙한 소년으로 묘사하여 경건함과 지혜가 이미 어린 소년에게 깃들어 있었으며, 그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져 있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이후 약 20년에 걸친 예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 누가마저도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 무렵 유대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사망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세 아들이 유대를 분할하여 다스렸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 터전을 마련하고 유대, 이두매아, 사마리아를 다스렸으며, 안디바는 갈릴리와 요르단 동편 베레아를, 빌립은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에 접경을 둔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호수)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베들레헴 주변의 사내아이를 죽인 헤롯은 B.C. 4년에 사망한 헤롯 대왕을 가리키며 그 이후에 나오는 헤롯은 아들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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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예수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기록했으며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밤나무골 용식이, 만수의 아들 용팔이 식으로 부르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야고보를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마리아는 야고보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예수의 호칭은 그가 나사렛에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 불렀으며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마태와 누가는 나사렛을 큰 동네처럼 기술했지만, 나사렛은 갈릴리 남부 산간지대의 그리 경사지지 않은 언덕 위에 있는 해발 380m의 조그만 마을이다.
나사렛은 구약성서에서는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만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B.C.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예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예수가 바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분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나다나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복음서 1:46】


이렇듯 나사렛은 베들레헴처럼 유대의 왕이 나실 곳으로 예언된 마을도 아니고 예루살렘처럼 경건화 된 곳도 아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락이다.
나다나엘의 말처럼 그야말로 특별히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이 바로 예수가 성장한 고향이었다.


갈릴리 지방은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비가 적당히 내려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며, 갈릴리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4km이며 둘레는 약 50km이고 넓이는 약 170km2 나 된다.
호수의 북쪽 헤르몬 산으로부터 흘러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이루며, 호숫물은 남쪽으로 흘러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빠진다.
호수는 고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작은 하프 모양의 악기처럼 생겼는데, 양손으로 줄을 뜯어 연주하는 그 악기를 헤브라이어로 ‘긴노르(Kinnor)’라고 부른다.
호수의 모양이 긴노르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긴네렛 호수라고 불렀고 예수 당시에는 게네사렛 호수로 불렸다.
복음서에 나오는 게네사렛 호수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이다.


《유대 고대사》의 저자 요세푸스는 갈릴리의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칭찬해마지 않았다.
그는 갈릴리에는 모든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다고 하면서 특히 게네사렛 호수 주변의 온화한 기온을 지적했다.
오래 전부터 대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지었고 부유한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와 대지주가 되었다.
갈릴리의 대지주들이 농부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부렸으므로 그들이 대지주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예수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갈릴리라는 말은 ‘민중들의 지방’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형성되기 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엔 갈릴리를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불렀다(마태복음서 4:15).
유대 지역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배타적이라고 여겼지만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신앙에 비해 오히려 순수한 편이었다.


갈릴리의 산간지대에 위치한 나사렛은 예수 조상대부터 살던 마을이다.
예수는 가축을 기르는 우리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촌락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나사렛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했음을 알려주었다는 집이 있는데 그곳에는 오늘날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가 있다.
예수는 적어도 여섯 남매와 함께 나사렛에서 성장했다.
결혼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여러 누이들 외에도 네 형제들의 이름이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마태복음서 13:55-56】


예수가 처형된 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 요셉의 헬라화된 이름인 요세, 신약성서 유다서의 저자로 믿어지는 유다,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는 시몬이 예수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조상의 이름에서 딴 것이며 요세(Joses)와 예수(Jesus)는 헤브라이어를 그리스어로 부른 이름이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건축업자가 아니라 목재를 다루는 목수였다.
165년에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요셉이 목재로 된 농기구나 쟁기, 멍에 등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예수가 청년이었을 때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불리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직업도 목수였다(마가복음서 6:3).


나사렛에 보존되어 있는 예수가 생존했던 당시의 서민주택을 보면, 흰 석회를 바른 골방에 창문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예수가 살던 집도 그와 같은 골방이었을 것이다.
당시 갈릴리 목수들의 대부분이 품팔이꾼이었듯이 예수도 일감을 찾아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며 노동을 해서 홀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하는 가난한 생활을 했다.


나사렛에는 불구자와 병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낮에는 무척 덥고 밤에는 비교적 추운 동네라서 동풍이 부는 계절에는 폐렴환자가 급증하며, 이질도 가끔 발생하고 말라리아 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복음서에 언급되는 고열병 환자와 귀신들린 자는 말라리아 환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귀신들린 자와 갖가지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병자들을 낫게 했다.


나사렛에서 성장하는 소년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이라고는 회당에서 행해지는 구약성서에 관한 가르침이 전부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배웠다.
그가 회당에서 강론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읽을 줄 알았고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줄도 알았다.
그가 글을 써서 제자들에게 준 적은 없었지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요한복음서 8:6, 8:8).
그가 구약성서를 읽은 것으로 보아 헤브라이어를 알고 있었으며 일상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갈릴리가 헬레니즘 지방에 근접해 있으므로 예수와 제자들은 그리스어도 알았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예수는 예언자들 가운데 이사야를 가장 존경했다.
그는 이사야서를 가장 많이 인용했으며, 이사야의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기를 즐겨했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은 적도 있었다(누가복음서 4:16-17).
그는 헬레니즘과 로마의 풍습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는 영향 받은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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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예수는 언제 어디에서 활동했을까?
김광우의 <예수 이야기> 중에서

 

예수는 삼십대 초반이던 27년 또는 28년 초봄에 고향 나사렛을 떠나 유대 광야로 갔다.
청년 예수의 행적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당시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약한 반면, 그들에게 반감을 가졌던 비주류 종교운동의 지도자들은 주로 광야에서 활동했다.
세례자 요한 역시 광야에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광야로 간 예수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한동안 요한의 제자가 되어 광야에 있었다.


맑고 푸른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은 요단강을 이루며 유대 광야 옆을 흐른다.
그 물로 예수는 세례를 받았다.
세례예식은 네 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듯이 예수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분봉왕 안디바에 의해 처형당하자 예수는 광야가 자신의 사역지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요한과 같은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았던 예수는 갈릴리를 자신의 사역 지역으로 생각하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에 비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고집이 셌다.
이들은 유대 사람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으나 훨씬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수는 가버나움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리에 있는 동네들을 방문하면서 설교하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당시 갈릴리는 안디바의 통치영역이었다.
예수는 안디바가 새로 건설한 도시에는 가지 않았으며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가버나움, 벳새다, 거라사 등 주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는 회당이나 산과 들에서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도 병자들을 직접 고쳐주는 것도 그의 사역에 포함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를 지상에 이룩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 목적으로 삼았다.
그가 병자들을 고쳤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갈릴리 전역에 퍼졌으며, 연일 병자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가르침을 듣고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직접 보려고 오는 사람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갔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가르쳤으며,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여 낡은 율법으로 인한 속박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다.


예수가 얼마 동안 활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예수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세 번 갔다고 기록했는데 그렇다면 그 기간은 3년이 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그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한 차례만 언급했으므로 그것은 1년에 해당한다.
예수의 활동은 27년 또는 28년 이른 봄부터 시작되어 29년 또는 30년 4월 7일에 마감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가 안디바가 단장한 성전을 비유로 들어 말한 적이 있는데 안디바가 성전을 건축한 시기가 27년과 28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복음서 2:19-20】


예수는 30년 4월초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의 사역을 마감했다.
그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 자신이 생명이며 또한 부활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며,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아 하나님의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되돌려놓았다.
이는 마치 유대교에 대한 정결예식과도 같았다.
이로써 그는 지상에서의 과업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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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가 떠올리는 예수의 모습은 영화나 그림에서 본 모습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성화에 나타난 예수의 공통점은 큰 키에 건장하고 미남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어디서 그처럼 잘생긴 모델들을 구해왔는지 궁금하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전기작가 바자리Giorgio Vasari(1511-74)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거리를 헤집고 다니면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한 모델을 찾았다고 한다.

실존인물 예수는 어떻게 생겼을까?
유대인들의 규정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는 키가 크고 건장해야 한다.
예수의 키가 작다거나 허약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한 그 역시 큰 키에 건장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이란 근거는 없다.
예수의 얼굴에 관한 유일한 언급을 요한복음서에서 본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요한복음서 8:57)

서른서너 살 된 예수가 자신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의미의 말을 하자 사람들은 위와 같은 말로 질책했다.

예수가 나이에 비해 늙은이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주름이 졌던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고뇌하는 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위의 말에서 그의 생애가 편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짐을 대신 졌기 때문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의 짐이란 구약성서에 나오는 613가지나 되는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그토록 많은 제제를 받았던 것이다.
힘에 겨운 일임에 틀림 없다.
613가지나 되는 율법에는 구레나룻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다.
법을 어기지 않는 결백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생활에 간섭을 받아야 했다.
예수는 그러한 간섭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그 짐들을 대신 지고 율법학자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어야 했다.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란 오늘날처럼 고상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논쟁에서 지면 정죄를 받아 중의회에 회부된다.
신성모독죄가 적용되면 돌팔매로 목숨을 빼앗기고 만다.
검사와도 같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검사보다 더 법에 정통해야 할 뿐 아니라 검사의 책략까지도 알아채야 하는 일이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다.
예수의 얼굴에 근심이 없고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일이란 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나의 저서 <예수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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