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평점 :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p6 우리가 원하는 것.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p7 실천하는 것.
간극.
저 두 문장의 간극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어떤 사람들은 '방황'이라고도 하고 좀 더 고상하게는 '사색'이라고 하며 학문적으로는 '철학'이라고 명한다.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원치 않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알면서도 말이다. 누군가 직장에서 어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수많은 말도 안 되는 상황들과 이분법적인 악역이 가득해서 도대체 해 먹지 못하겠다는 푸념에서 취중 절규까지 하더라도, 그 자신은 그 일을 어제처럼 지난해처럼 할 것을 알고 있고, 그의 이 어리광 같기도 하고 징징거림 같은 쏟아냄을 듣고 있는 상대마저도 그가 내일이면 아무 일 없이 그 일을 얄미울 만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알고 있다.
살아오면서 실천에 걸맞은 실천을 행한 것은 손꼽을만하다. 나의 모든 실천이 실천답다면, 나는 벌써 내 후손들이 땀 흘려 기리 모셔야 할 위인의 반열에 끼어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기만당하는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그 '원하지 않는 것'을 기어코 '실천'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불능의 상태가 된다. 완전히 기만당한 것이다.
우리 누구도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자서전이나 수필집에 쓰지 않는다. 행여라도 일기에 쓴다면, '초딩' 취급도 못 받는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논할 대상도 아니고 '둥근 해가 동쪽에서 떴습니다'를 추억할 때나 좀 더 격상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지켜지지 않는 것, 지키길 바라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알리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을 쓸 때나 우리는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인 것을 읽을 때 읽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에 관해서 그렇게도 명상록에 썼나 보다. 그도 결국 죽음은 원자가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명의 한 단계라고 고집스럽게 말하지만, 결국 그렇게 수백 번 말하고 써도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원하는 것이 원하는 것도 아닌 데다, 아는 것마저 실천다운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우린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것을 쓰기까지 한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을 '번거롭게'를 넘어 짜증 나게 하는 산파법으로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의 문제에 좀 더 가깝게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질문함으로써 무지에 가깝게 갔다. 기만하고 있는 나를 가장 많이 벗겨냈다.
"내가 이것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이것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맞을까? 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찾아냈을까? 그리고 실천답게 실천했을까?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바치고 독배를 마신 그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눈 딱 감고 곧장 실천으로 옮겨버린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은 상반되는 것이 있다'로 시작해서 영혼 불멸을 설파하고 뿌듯하게 손꼽듯이, 그의 독배를 마신 죽음에 그는 또 하나의 손을 꼽으며 그 위대한 '실천'을 행한 것일까?
심장의 철학자 소로는 왜 그렇게 걸었을까? 시속 5㎞의 속도로 걸을 때, 정신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하는데, 소로는 그 활발한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루소가 골똘히 자신에 대해 생각하며 걸었다면 이름을 뒤집은 듯한 '월든'의 소로는 외부를 바로 보았다. 흥분해서 도파민이나 내뿜으며 원하는 것을 얻었다며 히죽거리는 자기 내부가 아닌 외부를 바라본 것일까?
'바로 보았다'. "소로는 너무 많이 봤다" p141
왜 그토록 관찰했을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해서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까?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p141
전체에서 자기에게 해당된 부분만을 제하고 전체를 여집합으로 도려내어 그 바깥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보려 했던 것일까?
물론,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원하는 것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 원하는 것이었다로 꼬리 무는 관념론자 같다.
원하는 것.
'원하는 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원하는 것'이 진정 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진짜처럼 보이려는 것이든 - 위선, 위악처럼 위원이라고 할까 -, 나 자신을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전락시키는 것이든, 인류애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든, 그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원전 341년 사모아섬에서 태어난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그러면 우리는 그 쾌락을 근원적으로 원하는 것일까?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쾌락의 정의가 지금의 그것과는 다르다. 보통의 우리는 긍정 정서 (positive 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생각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즉, 좋은 일이 가득하다가 아니고 나쁜 일이 없다를 그 쾌락의 상태라 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 (atarxia)라 불렀다. '문제가 없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향락이 아닌 평정을 추구했고, 부처처럼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으며, 평정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애초에 그리고 바람직하게 '없었다'는 말인가? 공허.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시몬 베유는 세상과 공감했을까? 베유는 세계의 모든 일과 동조되어 울리는 심장을 가졌다. 그리고 공감에 수반되는 '관심'을 정의했다. 관심은 강제할 수 있는 집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며, 수축하는 집중에 반해 확장한다 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의 잘못된 한 형태로 치부될 수 있는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욕망의 주체가 문제라고 했다. 내가 우리가 말이다. 그래서 또한 정신적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버리고 없애는) '아타락시아'를 말한다. 벗어나고 버리는 것은 변장한 욕망인 체념과는 다르다. 체념은 결국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얻는 것이 없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얻는 것이 없어 보여도 '관심'은 선하고 긍정적인 진전을 이룬다. 그래서 '체념'은 아닌 '기다림'을 해라고 했다.
인간다움의 인으로 친절과 사랑을 이야기한 공자도 외부의 세계로 한없이 나아갔다. 베유가 선하고 긍정적인 진전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공자도 타인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p329
행위의 끝점보다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진 위인이 있다. 간다. 간디는 싸움을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으로 보았고, 싸움의 목적보다는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 가장 큰 싸움이라고 했으며,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폭력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 우리가 결과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때, 어쩌면 결과는 너무 크고 정의하기 어려우니 간디는 결과 이전의 과정에서 치열하게 행했다. 과정 속에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그 주체는 자격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간디는 인도의 독립보다 독립할 자격을 추구했다. '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간극을 전혀 줄일 생각이 없다. 관계지을 생각도 없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분리해 이제 '원한다'를 지운다. '원한다'를 '나아간다'로 치환시킨다면 머무는 것은 무엇이 치환된 것일까? '감사한다.'.
조금만 먹고, 무소유로 권위에 도전하는 견유학파 영향을 받아 "배가 난파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라는 말은 제논의 스토아학파에게 유명한 말이다. 스토아학파에게는 고통을 통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교리로 삼는 엄격함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들이 멀리 던져 버린 것은 기쁨이나 쾌락, 행복이 아닌 '부정적인 감정' 뿐이다. 그래서 유리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네에 그치지 않고 유리잔도 가지고 있네라고 여기며 감사해한다.
'원한다'가 '나아간다'이고 '감사한다'가 '머문다'라면, '무관심하게 즐긴다'는 '되돌아간다'를 치환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칭하고, 그 무관한 것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 무관심을 바탕으로 즐긴다.
우리가 우마차에 묶인 개일 때, 질질 끌리는 것보다는 함께 뛰라고 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우리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원하는 것'은 환원된 채 '원하다'가 소멸해버리는 대목이다. 분자가 원자로 환원될 때 그 성질을 잃어버리듯, 우리는 '것'만 남았을 때 '사유'의 의도도 동력도 잃어버렸다. 내려놓았다. 남은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되었다.
다행히 간디가 '원하는 것'과 '실천' 사이의 간극에 있는 연결선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실천'은 '원한다'를 소멸시키고 베일이 벗겨진 '모든 것'의 정당한 '동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니체는 쐐기를 박는다. 주어인 우리가 목적어인 모든 것을 서술인 '실천'을 똑같이 반복한다고 느낌표를 찍는다. 끊임없이 물음표 찍던 소크라테스에 니체는 느낌표를 덧칠한다. 인도 경전 베다부터 피타고라스까지 말했던 우주가 똑같이 반복된다는 그 느낌표를 말이다. 그리고 그 느낌표는 성공의 모습을 한 시시포스의 행복을 가리키고 있다.
'원한다'가 없는 '모든 것'은 방향성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으니 붓가는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히츠를 하는 쇼나곤이 말하는 것처럼 덧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긴 터널을 덧없이 반복하며 보부아르처럼 늙고 몽테뉴처럼 죽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