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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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춤 좀 추지 그래?" 부터 "한 마디 더"의 17개 단편으로 구성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읽고 나면 몇 개의 잔상만 남을 뿐이다. 17개 각 이야기별로 줄거리를 기억하거나 그것을 구분 짓는 것은 불가해 보인다. 의미가 없어 보이고 그것이 카버가 의도한 것만 같기도 하다. 장대한 긴 이야기가 우리의 영혼까지 그 이야기의 주제를 각인시키는 것이라면 짧은 이야기는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시간도 없이 눈앞에 '제시'하고는 곧 사라져버려 그 '잔상' 마저도 거머쥐기 힘들다.


서브리미널 (Subliminal)

"인지의 아래(Below threshold, 식역하(識閾下))", 즉 우리가 뭔가를 감지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감지한 것을 의미한다.

(출처: 나무위키)


우리가 보는 영상은 대부분 초당 30장의 이미지가 연속되는 것이고, 그 30장에 광고 이미지 한 장을 삽입하는 것이 서브리미널 광고 (Subliminal Advertising) 이다. 눈으로 명확하게 인지되지 않지만, 무언가를 본 것 같은 느낌이 겨우 들지만, 영화를 보고 났는데 서브리미널 광고로 삽입된 코카콜라 이미지 때문에 콜라가 마시고 싶다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런 광고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카버의 단편들은 마치 서브리미널 광고의 한 장의 이미지처럼 연속된 삶의 프레임에 슬쩍 끼워져 우리 잠재의식만이 겨우 그것을 인지하는 것 같다. 내 의식이 닿지 않는 저 아래 깊은 곳을 흐르는 잠재의식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읽고 있지만, 언어정보의 해석을 담당하는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이 어떤 정보를 해석하는지는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고, 읽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출력을 담당하는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은 애를 먹는다.


레이먼드 카버가 다루는 삶은 본인도 겪었던 '술', '중독', '파산', '불화', '밑바닥'과 같이 '삶에 지친, 자포자기 상태'에 처한 인물들의 일상'p245 이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그 일상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한다. 

일상의 내부에 때로는 미세하게, 때로는 심각하게 나 있는 흠과 금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면서 가볍게 전율하거나 머리를 내젓게 된다. p245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한 남자가 집안 물건을 모조리 마당에 내놓고 팔고 있고, 딸에게 자신의 불륜을 애쓰며 설명하고, 말다툼 끝에 딸과 아내를 등지고 아버지는 짐을 싸서 나가고, 행복해 보이는 두 친구의 가족들이 만나고 있는 와중에 두 가장은 젊은이로 돌아가 두 여자를 쫓아다니고, 이발소에서는 거칠게 욕설을 주고받고, 아이가 밤새 울고 아침까지 진정이 되지 않아 말다툼을 극단적으로는 하지만 젊은 남편은 사냥 약속을 취소하고, 아내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자신이 아끼는 배스가 가득한 호수로 들어가 자살하는 등. 이 모든 이야기는 오래된 영화 속에 나오는 먼지가 가득하고 붐비는 대합실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버스를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랠 정도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브리미널 광고의 한 컷 이미지처럼 그런 이야기들은 삶의 어느 순간 갑자기 그리고 연관 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흠과 금이 갔을 때.

그것들은 우리 삶에 단절을 가져올지 모른다.

무거운 수납을 하고 병원의 비상계단을 오르내릴 때 그것이 이제 시작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길고 억척스러워야 하는 터널 앞에 있지만, 나는 계단을 하나하나 또는 두 개씩 밟고 오르내려야 한다. 그리고 나와 같이 덜하거나 더한 보호자들이 서로 교차한다.

출퇴근의 도로에서 겨우 보이든 부러운 아파트 단지들을 병원 고층의 긴 복도에서 내려본다. 주말이나 연휴 때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그 흠과 금은 충전 중이든 핸드폰의 케이블을 무심코 발로 살짝 건드렸는데, 책상에서 핸드폰이 떨어지면서 액정이 흉한 금이 쫙 갔을 때처럼 갑자기 어이없이 나타난다. 그 직전까지 터치하던 액정은 이제 유릿가루가 떨어질까 봐 손을 댈 수도 없다.


내 의식의 인지와 통제를 벗어나는 단편들. 내 잠재의식만이 읽고 있을 것 같은 단편들. 그래서 그 단편들이 내 삶에 흠과 금이 갔을 때 갑자기 찾아와 위안을 주는 이전 일상에서의 건너온 따뜻한 커피나 다정한 말 한마디 먼지를 들추며 내리쬐는 빛줄기처럼 '위안'을 주는지는 모르겠다. 주는 것 같기도 하다.


References

서브리미널 (Subliminal)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

브로카 영역(Broca's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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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24 07: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서브리미널이라는 단어를 배우고 갑니다. ㅋ 정말 이책 읽고 제가 느낀 감정이 딱 초딩님이 쓰신 글과 비슷한것 같아요. 서브리미널 광고 같은 단편~!!

초딩 2021-07-24 14:09   좋아요 4 | URL
이번에 쓰면서 용어는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런 광고가 있는건 알았는데 :-)
단편을 읽고 덮었을 때 좀 당황했는데 (뭘 느꺼야하는지 떠 써야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돌이켜 보니 서브리미널 광고 같았어요 :-)
파랑님 안전한 한 주 되세요~

독서괭 2021-07-24 07: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있는데 예전에 몇 편 읽다 말고 여태 못 읽고 있는데요, 이게 뭐지? 했던 기억이 있어요.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초딩님 글이 설명해 주는 것 같네요^^

초딩 2021-07-24 14:10   좋아요 4 | URL
저도 이 책 책장에 있어서 단편 한 두개씩 읽다 이 번에 그냥 다 읽고 봤었어요
정말 이게 뭐지 였는데
그 이게 뭐지가 오래 가게 하는 것은 마술 같아요 :-)
독서괭님 좋은 하루 되세요~

mini74 2021-07-24 17: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삶의 흠과 금 사이를 채우는 위로라니 !! 너무 좋은 비유에요 *^^*

초딩 2021-07-24 22:34   좋아요 0 | URL
삶의 단절을 야기하는 흠과 금 그리고 그 위로 참 좋은 같아요
좋은 밤 되세요~ ☺️☺️☺️

붕붕툐툐 2021-07-24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배경 지식 풍부한 자만이 쓸 수 있는 리뷰! 책이 어떤 느낌일지 너무 잘 알겠어요~ 감탄하고 갑니다~

초딩 2021-07-24 22:34   좋아요 1 | URL
툐툐님의 마법같은 댓글은 항상 최고의 칭찬과 격력을 해주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