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 다섯 남매 태어나서 한글 배울 때까지
박정희 지음 / 걷는책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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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 아닌 ‘사랑’으로 보살필 아이들
 [푸른책과 함께 살기 85] 박정희,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걷는책,2011)



- 책이름 :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 글 : 박정희
- 펴낸곳 : 걷는책 (2011.6.27.)
- 책값 : 28000원



 (1) 효도를 가르칠 수 없어요


 어버이 된 사람은 아이한테 효도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어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전쟁이 터졌을 때에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어느 아이가 되든, 전쟁이 터진 자리에서 목숨을 바치며 다른 사람을 죽이는 짓에 나서면 안 됩니다. 전쟁이란 처음부터 터져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전쟁을 터뜨리는 사람은 권력자이거나 독재자입니다. 권력을 움켜쥐거나 독재를 휘두르는 우두머리가 전쟁을 일으키는데,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야 할 아이들이 총칼을 들고 스스로 바보짓을 하는 군인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 된 사람은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베풀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누기에 사랑이요 함께하기에 사랑이며 어깨동무하기에 사랑이에요. 아이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사랑스러운 목숨으로 살아가도록 이끌 사람이 바로 어버이입니다. 내 목숨이 산 목숨이고, 내 산 목숨을 잇자면 다른 산 목숨을 끊임없이 받아먹어야 하는 줄 느끼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어버이예요. 고마운 내 목숨을 아끼면서 내 밥이 되는 다른 목숨 또한 고맙게 여길 줄 아는 사랑을 살과 피와 뼈로 헤아리도록 보살피는 사람이 바로 어버이입니다.


.. 좋은 동화책을 찾아다니다가 구할 수가 없어 직접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 넣은 〈육아일기〉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었다. 꼭 필요한 것만 기록했었는데, 아이들이 한글을 깨우치는 데 큰 몫을 했고, 덤으로 아이들은 모두가 그림 선수가 되었다 … 자식들이 유명한 사람,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즐기는 행복한 어른으로 크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너희 일생을 통해 큰 힘”이 되리라고, 나중에 자식들이 일기를 보면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고 기쁘겠기에” 썼다 ..  (머리말)


 어느 어버이라 하든, 아이한테 목숨을 먹입니다. 목숨 아닌 쇠붙이나 돌덩이나 흙모래나 종이조각이나 돈뭉치나 기름(석유)이나 자동차를 먹일 수 없습니다. 목숨이 깃든 밥을 마련해서 아이를 먹이는 어버이입니다. 쌀이든 보리이든 목숨입니다. 두부이든 콩나물이든 목숨입니다.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목숨입니다. 갈치와 오징어와 돼지불고기만 목숨이 아니에요. 튀김닭과 새우젓만 목숨이 아니지요. 모든 밥은 목숨이고, 사람은 누구나 숱한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예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목숨을 다루며 목숨을 보살피는 어버이는 거룩합니다. 나라에 충성하거나 회사에 근면하대서 거룩하거나 훌륭한 어버이가 아닙니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아이한테 목숨을 깨닫도록 살아가는 어버이가 거룩하거나 훌륭합니다. 수수한 어버이가 거룩하고, 여느 어버이가 훌륭합니다. 날마다 세 끼니 밥상을 꼬박꼬박 차리며 알뜰히 먹이는 어버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어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목숨을 잇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는 삶입니다. 어버이가 마땅히 할 일이란 넷째도 다섯째도 여섯째도 내 목숨과 같이 네 목숨과 우리 목숨과 너희 목숨을 사랑하며 아끼도록 하는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건사할 일이란 일곱째도 여덟째도 아홉째도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나날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삶입니다.


.. 네(명애,첫딸)가 태어난 집은 이 그림과 같이 ‘꽃집’이었다. 주소는 평양 룡흥리 부영주택 20호였다. 뒤는 솔밭이고 앞은 넓은 들인데, 그 가운데 50호쯤 되는 집들이 나란히 있어 볕과 공기가 참으로 풍부하고 경치는 더 말할 수 없이 좋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집 안팎을 곱게 꾸미셨다. 해바라기, 나팔꽃, 양귀비, 과꽃, 국화, 앵두, 복숭아, 벚, 개나리 들이 화려하게 필 때 나는 얼마나 환희를 느꼈는지, 얼마나 그리고 싶어 애썼는지 모른다 … ‘꽝’, ‘꽝’. ‘야! 무서운 소린데……. “저건 나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나님이 폭탄을 떨어뜨리시는 거야.” “잘못해서 다른 데로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 나라로 가지. 하나님 나라는 아름다운 꽃고 많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많아요.” “우리 재미있게 피란 가는 장난하자!” 너희들은 이러한 소리를 매일 했고 할아버지는 지붕에서 유엔군 비행기들의 폭격하는 모습을 구경하시고, 나와 순임이는 벼를 매에 갈아 현미밥을 짓고 보리쌀을 곱게 갈아 죽도 쑤고 고구마 순을 다듬어 된장국도 끓이고 하여 무서운 생각은 안 하고 캘캘대며 날을 보냈다 ..  (28, 48쪽)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효도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나라에 충성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가 발디딘 보금자리를 아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근면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 일터나 배움터를 좋아해야 합니다.

 사랑할 어버이입니다. 아낄 보금자리요 삶터이자 마을입니다. 좋아할 일터이면서 배움터입니다. 어버이가 하는 말이라 해서 그예 따른다든지,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라 해서 그저 한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옳고 바른 말을 사랑해야 합니다. 착하고 참다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어버이가 되든 동무네 어버이가 되든, 옳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할 뿐입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일이 나라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전쟁훈련과 살인훈련에 젊음을 바치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이 바보짓입니다. 군대를 만들어 군대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 나라는 조금도 사랑할 값이나 아낄 뜻이 없습니다. 북녘이든 남녘이든,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군대를 꾸리는데, 두 나라 어느 쪽이든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군대가 지키지 않거든요. 나라는 흙을 일구는 일꾼이 지키거든요. 나라는 건물을 쓸고 닦는 일꾼이 지키고, 나라는 버스나 기차를 모는 일꾼이 지킵니다. 나라는 집안일을 하며 집살림을 돌보는 일꾼이 지킵니다.

 회사일에 목매달며 새벽부터 밤까지 매이는 일은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회사일을 앞세우고 모든 내 삶을 뒤로 젖히는 삶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도록 돕는 회사가 아니라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한 해에 1억을 주든 한 달에 천만 원을 주든, 돈을 많이 준대서 좋은 회사가 아닙니다. 일하는 터전, 곧 일터인 회사는 사람다이 땀흘려 일하는 곳이어야 하고, 이웃과 내 살붙이를 아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푸나무와 햇볕과 흙과 바람을 돌볼 수 있는 터여야 합니다.


.. 맑게 갠 가을날, 아버지가 미리 “16일쯤 낳게 될 거야.” 한 바로 그날, 외할머니가 남양에 가신 동안에 아버지가 너(현애,둘째)를 받아 주셨다. 학교 가는 아저씨더러 일찍 오라고 부탁하고, 문간방 영자 어머니더러 밥 지어 달라고 부탁하고, 노할아버지께는 방에 불을 때 주십사 여쭙고,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의 힘으로 해산이 이루어지려니 하는 침착한 태도로 너를 낳았다. 명애를 낳을 때와는 퍽 달리 쉽게 낳았다. 아저씨가 학교에서 온 다음, 연시와 침시를 사다가 잡수시며 나에게도 물렁한 것으로 골라 주시어 먹던 생각이 난다. 우리는 너를 낳았을 때 “또 딸이야!” 하고 조금 섭섭해 했다. 노할아버지께 “저는 왜 딸만 낳을까요?” 한즉, “응, 괜찮다. 너의 할머니를 닮은 게지. 아들 넷을 내리 낳고 그 다음에 딸 셋, 그리고 또 아들을 둘, 이렇게 낳았단다. 너는 딸부터 시작한 게지.” 하셨다. 아버지는 둘째라고 헌 옷만 주지 말고 새 옷도 꼭 같이 입히라고 하셨다 ..  (58∼59쪽)


 아이를 슬기롭게 키우고 싶은 어버이라면 아이 앞에서 “어버이한테 효도해야지.”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효도는 덕목이 아니고, 미덕 또한 아닙니다. 더욱이, 아이한테 효도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어버이 삶을 아이한테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물려줄 뿐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사랑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면서 물려줍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착한 매무새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드러내면서 이어줍니다. 고운 넋을 보듬는 어버이로서 고운 넋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밝히면서 나눕니다.


 (2) 사랑은 돈·이름·힘이 아니에요


 인천 화평동에서 수채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박정희 할머님이 쓰고 그린 육아일기를 그러모은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걷는책,2011)를 읽습니다. 2001년에 처음 나온 책이고, 2011년에 새옷을 입고 다시 나온 책입니다. 2001년에 책이 처음 나올 때에 할머님 나이는 여든이었고, 2011년에 새옷 입은 책이 나올 때에 할머님 나이는 아흔입니다. 박정희 할머님이 50∼60년대에 다섯 아이 육아일기를 쓰고 그릴 때에는 이렇게 낱권책으로 태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셨을 테고, 더구나 새삼스레 되펴내 주리라 바라지 않으셨겠지요.

 돋보이는 글이나 그림이 실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는 아닙니다. 눈부신 글이나 그림이 담긴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또한 아닙니다. 반짝반짝거린다든지 알록달록 어여쁘다든지 새록새록 빛난다든지 하는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나누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뜰히 담은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입니다. 하늘이 내린 고운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고운 숨결 그대로 보살피며 아이들 스스로 얼마나 고마운 사랑인가를 느끼도록 돕고픈 마음으로 쓰고 그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예요.

 2001년에 처음 읽고, 2011년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어여쁜 육아일기가 2021년에도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눌 수 있도록 새책방 책시렁에 예쁘게 꽂힐 수 있을까 헤아립니다.

 2001년에 처음 나온 책은 몇 해 지나지 않아 판이 끊어졌습니다. 헌책방 책시렁에서 힘겹게 찾아내어 둘레에 선물해야 했습니다. 이웃이나 동무한테 이 어여쁜 육아일기를 장만해서 읽으라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헌책방마실까지 하면서 책 하나를 찾아 읽으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셋째 딸로 고운 아기를 주셨을 때부터 그 아기, 즉 인애가 국민학교에 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 놓았다. 너를 낳은 아버지, 어머니, 또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생각하면 인애가 사는 동안 착한 일꾼이 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자기의 존재가 퍽 고맙고 귀하다고 생각하며, 기쁘겠기에 바쁜 틈을 타서 이러한 글을 써 놓기로 했다. 1956년 6월. 엄마 … 위층에서 떠들면 ‘진찰을 못한다’, ‘좁으니 어서 치워라’, ‘진찰실에는 나가지 말자’ 등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자는 자리도 너무 좁아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인애가 율목동 집을 그리워하고 경룡이네를 좋아한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좁은 집 가운데서도 빨래를 널게 만든 지붕 위와 위층 큰 다다미방 사이에 있는 좁은 방은, 인애의 소꿉놀이터로 좋았다 ..  (83, 89쪽)


 그러고 보면 여느 사람들은 그림 할머님 이야기를 들을 때에 ‘할머니한테 그림을 배우면 좋겠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막상 할머님한테 그림을 배우러 한 주에 한 번 틈을 내지 못합니다. 박정희 할머님한테서 그림 배우는 삯은 한 달에 오만 원인데, 이 오만 원을 마련하지 못한다거나 한 주에 한 번 말미를 얻지 못해요. 할머님 나이가 여든을 지나 아흔이요, 앞으로 할머님을 몸소 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나날이 그리 길지 않은 줄 살갗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박정희 할머님이 꾸리는 ‘평안 수채화의 집’ 수채화교실은 수채그림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이 배움자리는 물과 물감을 써서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솜씨를 배우는 자리라 할 수 있으면서, 할머니한테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마음’을 함께 익히는 자리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할머니는 그림 재주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면서 즐기는 마음씨를 스스로 보여주면서 물려줍니다.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솜씨가 있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없고, 그림을 즐기지 못할 때에는 눈앞에 아름다운 삶이 있어도 그림에 담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앎조각이나 학술이론이나 비평이 아닌 온 몸뚱이로 밝힙니다.


.. 순애 네가 이 세상에 나서 제 손으로 글씨를 쓸 줄 알기까지의 일을 몇 가지만 적어 놓아 주련다. 어떻게 낳고 어떻게 자랐나? 어떠한 분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컸나? 그런 이야기들은 순애 너의 일생을 통해 큰 힘이 되리라고 믿는 까닭에서다. 하나님께 순애를 기르라고 명령을 받은 엄마는, 자기의 힘은 몹시 약했으나 온 식구들의 힘을 얻어 크게 앓거나 실수하거나 하지 않고, 똑똑하고 명령하고 재주 많은 순애를 길러 왔으니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 아버지께서 “내가 번번이 받아서 딸만 낳은 것 같으니 전 산파께 수고해 달라자.”고 하셨다. 장작 꺼들이다가 별안간 진통이 시작되기에, 김 외과 간호원으로 있는 전순임 산파에게 기별을 하고 너를 뉠 자리와 입힐 옷들을 준비해 놓고 또 슬슬 장작을 날랐다. 장작을 깨끗이 쌓고 너를 낳았다. 전 산파는 모습도 아름답고 마음도 고운 처녀로 참 정성껏 우리를 도와주었다. 지금은 동서대 약방 주인한테 시집을 가서 아기 엄마가 되었지. 과일이 흔한 때라 너를 씻긴 다음 참외를 대접했다. 할머니도 전 산파와 같이 너를 받아 주시고 첫 목욕을 시킨 다음 하나님께 순산을 감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 넷째 딸로 태어난 순애는 섭섭하기는 했지만 교양 있는 어른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태어났다고 기도를 올리며 엄마는 뜨거운 눈물을 금치 못했다 … 부산에 계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너를 순산했다는 편지를 보시고 ‘아들 딸은 마음대로 낳지 못하는 것이니까 섭섭해 하지 말라.’고 어느 이화대학 출신 엄마의 이야기를 적은 긴 편지를 써 보내 주셨다. 성함은 박두성 씨고 우리 나라 맹인 교육에 공로가 많으신 분이고 많은 동생들을 데리고 교동이라는 섬에서 서울로 나오셔서 활약하시고 교육계와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치신 분이시다. 노년에는 만성 기관지염과 중풍으로 오래 병객으로 지내셨으나 누구에게나 구슬다운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  (108, 111, 128쪽)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어버이는 사랑 아닌 다른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자가용이나 아파트나 땅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그예 사랑 하나만 물려줍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젖을 물리고 씻기며 재우는 일입니다. 젖을 물리고 씻기며 재우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따스함을 느끼도록 하는 일입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면 몸에 맞는 옷을 마련하거나 얻어서 입히고, 어버이가 여느 때에 늘 쓰는 말을 아이한테 가르치며, 어버이가 어린 날부터 좋아하던 책을 아이한테 들려주거나 읽힙니다.

 어버이 이름값을 아이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가 아름다이 믿으면서 일구는 삶을 물려줍니다. 어버이로서 따스하게 돌보며 어깨동무하는 삶을 물려줍니다. 이웃을 믿고 손을 맞잡는 매무새를 물려줍니다. 착한 마음이나 참다운 넋을 물려주지, 잘난 이름이나 못난 이름을 물려주지 못해요.

 흙을 일구는 어버이 곁에서 흙을 일구는 아이가 자랍니다. 자가용을 타며 돌아다니는 어버이 곁에서 자가용을 (고맙거나 미안하다는 마음이나 느낌 없이) 아무렇지 않게 타며 돌아다니는 아이가 자랍니다. 손으로 빨래해서 햇볕 드는 마당에 너는 어버이 곁에서 집일을 손수 거들고파 하는 아이가 자랍니다. 청소기를 쓰고 세탁기를 쓰는 어버이 곁에서 집일을 찬찬히 느끼지 못하면서 손이 하얗게 곱기만 한 아이가 자랍니다.

 어버이가 휘두르거나 거머쥐는 권력을 아이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를 생각하는 어버이라면 권력을 휘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아끼고픈 어버이라면 권력을 거머쥐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보살피려는 어버이라면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하고, 아이를 보듬으려는 어버이라면 작고 조용한 집에서 작고 조용한 일을 건사하면서 작고 조용한 나날을 누려야 합니다.

 더 좋다는 학교에 보낸대서 아이가 더 좋다는 앎조각을 거머쥐지 않습니다. 더 낫다는 학원에 넣는대서 아이가 더 낫다는 마음으로 더 나은 앎조각을 움켜쥐지 않습니다. 사람한테서 사람을 배우는 사람인 아이인 터라, 둘레 어른 됨됨이와 마음씨가 어떠하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내 삶을 짚으면서 어른인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아끼며 누구랑 이웃하며 일구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 네(제룡,아들)가 언제나 자기를 그지없이 사랑해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어떠한 힘든 고비에서도 착하게 행복하게 이겨 나가라고 이 글을 써 주련다. 1962년 2월 엄마 … 6·25동란으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입은 서울 인천 간의 모습은 급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정치는 권력이니 빽이니 하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대였다. 어찌하면 권력을 잡아 보나 어찌하면 연줄을 붙드나가 큰 문제거리고 대학 입학, 군대의 의무까지도 우물쭈물 뇌물로 해결이 되는 시절이었다 … 셋째 작은어머니가 마루에 그네를 매어 놓았다고 할머니와 놀러가서는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꽃을 주면 싫다고 내던지니 여자 아이만 기르던 때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복잡한 한길로 자전거를 밀고 나가기 일쑤고 재게 달아다니 쫓아가기가 힘이 들었다. 넘어져서 콧잔등에 큰 허물이 생긴 것도 너무 재게 달아나서 그랬다. 젖도 다 먹이지 못하게 세차게 빨아서 자꾸만 젖꼭지가 고장나 혼이 났다. 희고 예뻐서 계집애 같다는 말을 늘 들었다 ..  (145, 148, 159쪽)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삶을 담은 육아일기를 새삼스레 읽으면서 우리 집 두 아이를 가늠합니다. 그림할머니는 ‘고마운 사랑’인 아이를 보살피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림할머니는 ‘착한 믿음’인 아이를 돌보면서 같이 지냈습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힘들거나 홀가분하거나 언제나 복닥복닥 어우러지는 한식구인 아이들입니다.

 우리 집 둘째는 장마철에도 여느 때와 똑같이 기저귀에 똥을 누고 오줌을 눕니다. 장마철에 기저귀가 얼마나 안 마르는데, 갓난쟁이로서는 이런저런 일을 알 턱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런 둘째를 바라보며 첫째 때에는 참 용하게 이런 나날을 잘 견디며 받아들였구나 싶고, 두 아이를 키운 내 어버이는 내가 갓난쟁이였을 때에 어떤 마음이요 삶이었을까를 넌지시 톺아봅니다.

 우리 집 첫째는 밤오줌가리기를 하려고 밤 한 시 십 분에 살며시 일으켜서 오줌을 누였더니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되도록 다시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안 합니다. 한 시 십 분부터 둘째 기저귀를 빨아 한 시 오십 분에 들여다보니 눈이 말똥말똥한 채 노래를 부르며 놉니다. 낮잠 없고 밤잠조차 제대로 안 자면 아침부터 또 얼마나 무거운 몸으로 칭얼대려나 생각하니 골이 띵합니다. 그렇지만, 아이 어머니도 어릴 적에 첫째와 같았다 하고, 아이 아버지인 저 또한 어릴 적에 틀림없이 이와 같았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도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될 때에 저희네 아이한테서 이런 모습 저런 삶 그런 이야기를 똑같이 느끼거나 받아들이겠지요. 그리고, 저희네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2001년과 2011년에 나란히 장만한 박정희 할머님 육아일기책 두 권을 나란히 펼치고 읽으면서 삶과 사람과 사랑이 어우러지는 고리를 살포시 느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두 아이 어버이부터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크게 얻거나 힘을 마음껏 부리려는 삶이 아닐 뿐더러, 돈이든 이름이든 힘이든 아무것 없는 삶인데다가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는 좋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니까요. 나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우리 아이한테 예쁜 삶 담긴 고운 책을 사랑스레 물려줄 테고, 아이는 아이 깜냥껏 씩씩하고 다부지게 아이 삶을 사랑스레 즐기면서 누릴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흙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6.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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