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애의 경제학
가가와 도요히코 지음, 홍순명 옮김 / 그물코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03 - 가난한 이웃끼리 사랑을 나누는 살림살이, ‘생협’
: 가가와 도요히코, 《우애의 경제학》
- 책이름 : 우애의 경제학
- 글 : 가가와 도요히코
- 옮긴이 : 홍순명
- 펴낸곳 : 그물코 (2009.2.10.)
- 책값 : 9000원
(1)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옆지기 어머님이 지난해께였나, 인천 관교동에 다녀오실 때 그곳에 빼곡하게 들어찬 술집으로 이루어진 거리마다 자동차가 촘촘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많’은 듯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동자날부터 어린이날까지 징검다리 쉬는날이 이루어졌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하는 어느 아주머니가 모처럼 나들이를 해 보려고 차편을 알아보는데 닷새에 걸쳐 예약이 꽉 차 빈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며,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도 안 그런’ 듯하다고 말씀을 잇습니다.
이런 말을 따로 듣지 않더라도 배부른 사람들은 그야말로 배부른 삶을 이어갑니다. 배부른 사람이 몇 퍼센트이고 배곯는 사람이 몇 퍼센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살림이 기우뚱하더라도 배터지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나라살림이 넉넉하더라도 배고픈 사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고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이웃과 고르게 나누려는 마음이 적습니다.
.. 오늘날 가난은 물질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풍부에서 생기고 있다. 물질이나 기계의 과잉생산, 과잉노동이나 지식층의 존재에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들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부는 아주 작은 한 줌 사람들의 손에 쌓여 있고, 사회의 일반 대중은 헛된 외침을 부르짖고 있다. 물자가 넘치는 창고 밖에는 한없이 많은 실업자가 굶주리고 있다 … .. (14쪽)
자전거를 타고 인천과 서울을 가끔 오가곤 하는데, 이때마다 길거리를 가득가득 누비는 자동차물결을 구경합니다. 전철을 타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동안에도 한강을 따라 이어진 찻길에는 자동차가 빼곡합니다. 때때로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볼일을 보러 움직이노라면, 버스가 많이 막혀 제대로 못 가곤 합니다.
기름값이 하늘 모르게 치솟는다 하여도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기름 먹는 자동차만 달리는 길’을 새로 닦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지구자원을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제 살림을 줄이면서 모자라거나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려는 마음 또한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씀씀이와 이웃이 함께 사는 씀씀이를 헤아리는 눈썰미를 찾기 힘듭니다. 내 살림을 즐기거나 누리자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살피는 눈매를 찾기 어렵습니다. 내 앞날을 걱정하며 돈을 쌓아두는 손길은 있으나, 바로 오늘 걱정스러운 삶을 가까스로 잇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형제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날 도시 생활을 비참하다. 도시가 크게 될수록 범죄가 많아진다. 법률만으로 범죄자나 빈민가 소년들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일본에서 우리들이 농민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도둑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좋은 협동조합이 있으면 도둑질 하려는 욕망이 사라진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도 그렇다. 그들 나라에는 도둑이 적다. 그러나 미국에는 많은 경찰관, 감옥 그리고 범죄자가 있다. 좋은 국민실업보험, 노령연금, 큰 도시가 있으면 연기로 뒤덮인 문명이 있다. 그리고 좋은 협동조합운동이 있으면 그 나라에 절도가 사라진다 .. (32쪽)
그래도 이웃을 보듬는 손길을 아예 못 찾지 않습니다. 배부르거나 배터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만, 똑같이 배고프거나 배곯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쉽게 찾아보곤 합니다. 이랜드 일반노조 사람들 목소리가 담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예배당에 몇 억도 아닌 수십 수백 억에 이르는 돈을 척척 갖다 바칠 줄은 알아도,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안 쓰고 비정규직으로 쓰다가 내치려고 하는 기업주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말해요 찬드라》 같은 책에도 나옵니다만, 똑같이 힘겨운 일을 하는 노동자 사이이지만,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가볍게 손찌검을 하고 자연스레 일삯을 떼먹는 일이 버젓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더 안쓰러운 일이라 한다면, 우리 스스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목아지까지 날아가 길거리로 쫓겨나기까지는 이런 얼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아니, 있는 그대로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정작 나 또한 길바닥에 내팽개쳐질 그때가 되어서야 ‘그렇구나. 이런 일이 거짓이 아니구나. 이렇게 길바닥으로 내몰리니까 악을 쓰며 내 권리를 찾으려 하고, 평등과 평화를 바라게 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진작 우리 스스로 정규직 자리에 있을 때부터 비정규직을 보듬으며,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일에 똑같은 대접을 받는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을 못 품습니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이라지만 나 또한 당신처럼 힘들다’는 핑계 한 마디로 고개를 홱 돌릴 뿐입니다.
.. 중세의 길드는 착취 없는 경제활동의 조직화를 이루었지만, 그 조직은 비조합원까지 형제애를 미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현대 협동조합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그 서비스를 지역사회 전체에 확대하는 것이다. 옛 조합은 서비스를 자기 조합에 한정하였다 … 조합의 기본 신조의 하나는 정치와 종교 양쪽에서 중립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현대의 협동조합은 단일한 조직 속에 일정한 사회집단의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런 단일 조직은 어느 땐가는 기능을 계속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 강제 협동조합에서는 개개인이 비밀 매매로 협동조합의 본질에 어긋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시스템 전체가 헛돌게 되고, 계획경제는 무너지게 된다. 다른 한편, 자발적인 조직에서는 이런 유혹이 없을 것이다. 협동조합 경제의 진정한 모습은 착취 없는 계획된 경제체계라는 데 있다 … 소비자협동조합은 단지 먹을거리 잡화를 사기 위한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협동조합이란 새 사회의 경제 단위이고, 조합원은 거기에 충실히 협력해야 한다. 설령 서비스가 조금 늦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조합원은 그 이익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 노동으로 생산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목적의식적인 견실한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은 암초에 부딪쳐 버린다 … 조직된 조합 사회에는 형제애가 필요하다. 자본가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그들이 교정되도록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한다 .. (94, 100, 105, 108∼109쪽)
홍세화 님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같은 책에도 썼지만, 고리끼 같은 분은 일찌감치 《러시아 이야기》나 《이탈리아 이야기》 같은 책에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제 권리를 되찾고자 주먹 불끈 쥐며 어깨동무를 할 때에, 옆에서 이들이 손을 놓은 일 때문에 전차도 못 타고 가게에조차 못 가게 되더라도 얼굴 찡그리지 않고 똑같이 어깨동무를 해 주는 노동자 벗’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느끼는 일이지만, 지난날 이 나라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민란’이나 ‘소작쟁의’ 같은 일 또한,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어깨동무’가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를 역사책에 적바림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까닭이라든지 이 움직임은 어떠했는가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품앗이나 두레와 같은 모둠일을 헤아리면서, ‘있는 사람이 나누어 주는 고마움’보다 ‘없는 사람이 종이 한 장 맞잡는 나눔’이 훨씬 오래도록 이 땅 구석구석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과 낮과 저녁 사이 골목길 쓰레기를 줍는 할매와 할배 같은 손길이 바로, 없는 가운데 낮은자리에서 이웃을 생각하며 서로 돕는 매무새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 현재 노동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에 아무 주목도 하지 않고, 신용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조합이 그와 같이 근시안적인 정책을 유지하는 한, 설령 정치권력에 아무리 이기더라도, 자본주의적 압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자본가가 파산을 하고 노동자가 실업에 빠졌을 때, 노동자들은 수요자인 자본가로부터 공장을 맡아 자기 임금을 조정하는 권리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전의 체제와 비교하여 수입은 줄었지만 실업은 벗어날 수 있었다 … 만일 사람들이 새 지하철 건설에 도시 공채 발행보다 협동조합 자본을 이용하면, 자본가들이 합법적 이익을 도시에서 빨아들이는 것을 막을 것이다 … 현재 시스템에서는 예를 들면, 철도나 항만, 시장이나 해운 등 자체 공익사업은 정치의 돈잔치가 된다. 정권과 정당이 바뀐다 해도 다음 선거 뒤에는 포기할지 모르는 계획이 세워지게 된다 .. (116, 118, 132∼133쪽)
새 살림집 보증금을 빌리려고 은행에 찾아가며 느꼈는데, 나라에서는 우리 식구 같은 사람한테 도움을 준다면서 ‘저소득자 전세자금 대출’이나 ‘무주택자 전세자금 대출’ 같은 제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만, 정작 저소득이든 무소득이든 무주택자이든 영세민이든, 우리 같은 사람은 대출을 받을 수 없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저소득자라 하여도 ‘돈 좀 있고 정규직으로 느긋한 일자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싼 대출, 이를테면 전세돈 천만 원이나 오백만 원을 빌릴 수 있었고, 다문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조차 빌려 주는 대출이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 광고에서 수없이 떠드는 ‘대출 대부업’이 그토록 판치고 넘치는 까닭을 알 만합니다. 없는 사람은 은행문을 두드릴 수조차 없음을 익히 알기에 그런 대출 대부업이 넘칠 테지요.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은 그 같은 대출 대부업에 손을 뻗게 되면, 그날부터 죽는 날까지 빚잔치 하느라 살아가는 즐거움을 싹 잊고 주름살이 늘어갈 테고요.
(2) 베푸는 삶, 나누는 삶
자전거를 타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안이나 부평 둘레에만 가도 우람한 예배당 건물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인천 중ㆍ동구 옛 도심지에도 비죽비죽 뾰족탑 높이 올린 예배당이 꽤 많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받이 꼭대기마다 천주교회나 성공회교회니 감리교회니 장로교회니 안식일교회니 또 무슨무슨 교회니 하면서 우람한 건물이 지붕 낮은 집을 내려다봅니다. 구멍가게 숫자와 맞먹는, 어쩌면 구멍가게 숫자를 훨씬 뛰어넘을 만한 예배당 숫자입니다.
집없는 사람 많으나 예배당 어느 곳도 이들한테 사랑을 베풀지는 않습니다. 드넓는 예배당은 하느님 사랑을 노래하고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고 비손을 올리지만, 예배당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쳐다보지 않습니다. 길 가는 사람한테 티슈꾸러미를 안기며 교회 나오시라며 꾸벅하고 절을 할 줄은 알아도, 집집마다 어떤 근심과 걱정으로 하루하루 실낱 같은 삶을 붙잡는 줄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예배당한테 가난한 사람들 눈높이에 서라고 하는 일은 처음부터 잘못이었을까요.
.. 일본에는 1800개 교회가 있지만 그 대부분이 도시에 있다. 시골에는 3천만 명의 사람이 있고 9천 개의 마을이 있지만, 그 사람들을 위한 전도소는 겨우 170개가 있을 뿐이다 … 예수 종교의 위대함은 그의 가르침이 우수한 데 있지 않고, 그의 의식이 하나님의 그것과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끝마친 짧은 삶에서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발달을 체현한 데 있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완전한 융합을 보인 것이다 .. (23∼24, 38쪽)
낡고 헐어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신자 숫자가 늘어 큰 건물을 지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은 옳습니다. 거룩한 집을 새로 지어야 하기에 신자들이 돈을 바쳐야 한다는 말도 옳습니다. 그러면, 거룩한 집에 바쳐지면서 거룩한 집이 지어진 다음에, 이곳은 누구한테 문을 열어 놓습니까. 그 넓디넓고 따뜻하거나 시원한 거룩한 방 한 칸쯤 우리들한테 내어주면서 다리를 쉬고 몸을 뉘일 수 있게끔 열어 놓고 있습니까. 또는, 예배당에 쌓이는 돈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몇 해 앞서 몇몇 재벌회사 우두머리 되는 분들이 몇 천 억씩 턱턱 ‘사회에 바치겠다’고 내놓은 돈을 보면서, 그만한 돈을 일찌감치 나눌 수 없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돈이란 우리한테 입이 쩍 벌어지는 크기이지만, 그이들한테는 그리 큰돈도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이들은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할까요. 너무 많지만 너무 많은 줄 모르고, 탱자탱자 써도 다 쓰지 못할 그 끔찍한 돈에 갇혀 사람을 못 보고 사랑을 못 느낀다고 할까요.
..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의 실천에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귀의하는 데 있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 신앙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믿는 그 자체가 인간의 행동을 요구한다 … 만일 하나님만 생각하고 인간을 무시한다면 종교는 무의미하게 되고 인간을 창조한 이유도 없게 된다 … 사실 사랑은 인간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 신앙이란 언뜻 봐서 약하게 보이는 사랑의 힘이 인간 폭력의 힘보다 위대함을 믿는 데 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하나님을 믿는 일은 같은 일, 하나의 일이 되어야 한다 … 그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 개신교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제한한다. 한편 가톨릭은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한다 … 신앙을 단지 이론적인 것으로 알고, 삶 전체의 문제로 삼지 않는 신학자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 햇볕을 받으면서 그것을 통과시키지 않는 유리창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 (40∼43, 46쪽)
사랑을 베풀라고들 하지만, 사랑은 베푸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랑은 나누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나눌 수 있으니 사랑이요 믿음이지, 베풀 수 있다면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나한테 넉넉히 있기에 베풀 수 있는 사랑이나 믿음이 아닙니다. 내 온몸으로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내 온몸으로 함께하는 삶이기에 나누게 되는 사랑이요 믿음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이면서 얼마든지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난하면서 조금도 안 나누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조금 베푸는 척 시늉을 하지만, 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닌 자랑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팔고 얼굴을 팔 뿐인 겉치레로 그칩니다. 베푸는 사람은 저한테 넘치거나 많은 무엇을 덜어내지만, 나누는 사람은 ‘나누어 받을 사람한테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를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어깨동무를 합니다. 돈을 쥐어 주어야 할는지, 일을 거들어야 할는지, 밥상을 나란히 마주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할는지를 그때그때 알맞게 느낍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사랑이란 돈으로만 할 수 있지 않거든요. 이웃집 꽃그릇에 물을 주는 일도 사랑이요, 이웃집 할매 다리를 주물러 주어도 사랑이며, 이웃집 할배한테 책을 읽어 주어도 사랑입니다.
.. 오늘날 방탕에 쓰이는 막대한 돈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에서 공인 매매춘과 사적 매매춘에 쓰이는 금액은 연간 10억 엔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쌀의 연간 소비는 15억 엔으로 그 금액의 1.5배에 지나지 않는다(1936년) …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기 위하여 종교단체가 늘어나, 미국에서만 건물 유지를 위하여 약 70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사용되고 있는가. 그 총액은 아무도 계산할 수 없다 .. (60∼61쪽)
하기는. 지나온 제 삶을 돌아보니, 먹고 입고 쓰고 마시고 하는 모두를 아끼거나 줄이면서 악착같이 살림을 꾸려 몇 천만 원짜리 전세집에서 산 적이 있는데, 이렇게 아끼고 전세집에서 살 때에는 이만한 ‘집크기’를 지키거나 ‘조금 더 큰 집자리’를 알아보려고 내 자리만 더 돌아보게 되지, 좀더 값싼 전세집으로 옮기면서 ‘그만큼 덜어진 돈’으로 이웃과 나누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저 한다는 생각이라면, 한 달에 십육만 원 벌면서 살던 때에는 오백 원이나 천 원을 동냥그릇에 넣으면서 나눈다고 하다가, 한 달에 백만 원 넘게 벌면서 지내니 만 원짜리나 오천 원짜리도 넣으면서 나눈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십육만 원 벌며 천 원을 내는 푼수라면, 백육십만 원을 벌 때에는 만 원을 내는 일이 ‘손 떨리는’ 일이 아닐 텐데, 손이 떨렸습니다.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참말 그러했습니다.
이제 다시 아주 작은 살림을 꾸리고, 벌이 또한 아주 낮아진 이즈음에는, 때때로 만 원이나 이만 원 거들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손 떠는’ 일이 없습니다. 척척 바칩니다. 돈을 바쳐야 할 때에는 돈을 바치고, 몸을 바쳐야 할 때에는 기꺼이 자원봉사를 합니다. 더 있다고 베풀 수 없는 사랑이며, 아무것도 없다 하여 나누지 못하는 사랑이 아님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 일반적으로 현대의 입법부는 설령 사회민주주의 성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것을 막거나 그들을 공황과 불황에서 구출하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의회의 기구가 주로 입법의 여러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산업이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인 직업의 기본적 사항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으로 생활의 여러 문제를 파고들지 못한다 … 산업조직은 윤리 의식이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의원들이 자기중심의 이윤 추구자가 되어, 국내 문제에는 공정한 법안을 가결하지만 국제관계에는 지나치게 국가주의가 되는 수가 있다 … 소는 잡초가 40퍼센트 이상이면 먹이로 할 수 없으나, 염소는 90퍼센트 잡초 사료로도 훌륭하게 자라난다. 덴마크에서는 젖 짜는 염소의 대규모 사육장이 72군데 있지만, 일본에는 한 군데도 없다. 사람이 염소 키우는 법을 알고 젖을 식재로 받아들이면 일본의 식량 공급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농업과 낙농 제품의 새로운 계획을 무시해 왔다. 우리가 현재 군비에 쓰는 돈을 그런 사업에 투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 군인들은 이런 경제의 문제를 잘 모른다. 그들은 칼만을 절거덕절거덕 울리고 싶어 한다 … 유일한 해결은 경제 기획에 쓰는 돈을 더 늘리고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다 …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를 개선해 가려면, 현재 군사비로 낭비되는 몇 백만 파운드 돈을 가난한 나라의 경제 상태 개선에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 (140, 147, 166∼167, 174쪽)
새로 옮길 달삯집에 아침에 찾아가 계약서를 쓰는 자리에서, 집임자 할매는 ‘십 년 전에도 월세를 30만 원 받았고, 이제도 35만 원 받는데, 더 달라고 하기가 힘들다’고 말씀합니다. 30이든 35이든 달삯을 낼 사람한테는 만만하지 않은 돈이지만, 두 어르신은 그렇게 삯 사는 사람이 쥐어주는 돈으로 고만고만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집임자라고 하나 자가용도 없고, 2층과 3층에 삯을 놓고 1층에서 마흔 해 남짓 살아오면서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집을 돌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말씀을 가만히 들으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당신들이 처음 이곳에 자리잡고 지낼 때에 둘레는 죄다 풀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벌써 마흔이 넘은 딸아이도 이 집에서 키웠고 적잖은 사람들이 당신 집을 거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홉 달짜리 갓난쟁이가 밤에 빽빽 울어댈지 모른다 하여도 ‘사람 사는 데에 다 그러하지 않느냐’면서 ‘삯집이 비니까 허전하고 심심하다’면서 ‘손주 뻘 애들 구경하는 일이 즐겁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도장을 안 갖고 가 손으로 이름을 적으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로서는 달삯 35만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랄 수 있지만, 골목집을 곱게 가꾸면서 뿌리내려 온 이분들한테 앞으로도 튼튼하고 즐겁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내어드리는 선물로 여긴다면 아무것 아닌 돈이라고도 여길 수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 주제에 무슨 베풂이 있겠느냐만, 그저 이만큼이라도 나누면서 우리 어버이를 떠올리고, 우리 어버이와 비슷한 또래인 할매 할배를 생각하면서 하루 한삶을 고맙게 맞아들이자고 생각합니다.
(3)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을 말하는 《우애의 경제학》
1888년에 태어나 1960년에 세상을 떠난 ‘가가와 도요히켜(賀川豊彦)’ 님이 1936년에 내놓은 책 《우애의 경제학》이 나라안에 처음으로 옮겨졌습니다. 자그마치 일흔 해나 묵은 책입니다만, 여느 ‘고전’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묵은 세월’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깊고 너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천 해가 훨씬 넘은 세월을 ‘묵었’으나, 참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루 읽히듯, 《우애의 경제학》 또한 사람이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흔 해가 넘은 책임에도 기꺼이 옮겨서 읽을 만하지 않느냐 생각해 봅니다.
.. 내 조상은 봉건사회에서 19개 마을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커다란 집과 많은 하인을 두었다. 그러나 아무 사랑도 없는 커다란 집에 사는 일은 내게는 지옥이었다. 내 가족은 부자였으나, 그들의 행동양식은 가혹한 것이었다. 나는 밤낮으로 울면서 세월을 보냈다 .. (18쪽)
가가와 도요히코 님은 목사이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분이었고, 가난한 이웃한테 전도를 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했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던 때에는 반전운동을 하면서 옥살이를 했고, ‘가난을 떨치자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만으로는 안 된다’고 깨달으면서, ‘올바른 소비자-생산자 운동’을 일으키고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듭니다.
이 책 《우애의 경제학》은 바로 낮은자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협(생활협동조합)을 꾸려 서로 돕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밝힙니다. 생산은 어떻게 소비는 어떻게, 그리고 유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생협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돈이 많다고 이룰 수 없는 생협이요, 또한 돈을 벌자고 하는 생협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생산자 스스로 참다이 생산을 하면서 일하는 보람을 얻고, 소비자 스스로 올바르게 소비를 하면서 제 삶을 한껏 넉넉하게 꾸리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있다고 더 잘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니요, 빈손이라 하여 못할 수 있는 생협이 아님을 들려줍니다.
.. 우리들은 부자만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자선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의 지원 기초는 더 굳건하게 된다 … 우리가 있어야 하도록 생활하면 식량 결핍의 위험은 없다.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탐욕이다. 사람은 사치와 미식을 갈망하고 돈을 갈망한다. 그것이 투쟁과 알력을 일으킨다 .. (160, 167쪽)
나라안에는 ‘우찌무라 간조’라는 이름은 제법 알려지기는 했으나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알의 밀》이나 《신과 걷는 하루》 같은 책, 또는 《사선을 넘어서》 같은 책이 알려지고 읽히면서 ‘하느님과 예수를 따르는 믿음을 바탕으로 저마다 제 삶터에서 바른 길을 찾아 즐겁게 어우르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가 조곤조곤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1990년대 접어들어 처음으로 《우애의 경제학》이 나오기는 했습니다만(1993년에 《사선을 넘어서》가 다시 옮겨진 뒤로는 이번이 첫 책).
그리고, 이번에 나온 《우애의 경제학》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분이 ‘하느님 사랑’만 외친 분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외치는 까닭’을 보여주는 첫 책이라 손꼽을 수 있고, ‘하느님 사랑은 어떻게 외쳐야 하는가’를 들려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 사랑을 참되이 이루는 길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첫 책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키우는 믿음이 아닌 사람을 키우는 믿음이어야 하며, 모든 독재권력을 물리치는 믿음이어야지 사람을 억누르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첫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신조만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조나 교리와 함께 사회에서 속죄애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 20세기에는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적 공산주의는 다함께 포기해야 한다 .. (6∼7쪽)
지금 우리 식구는 두 군데 생협에 회원으로 들어가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있습니다. 쌀은 홍성 풀무학교생협에서 받아 먹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생협 먹을거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옆지기가 생협 물건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깨우쳐 주어, 뒤늦게 알아차리라 함께하고 있습니다.
으레 생협 물건은 ‘비싸다’고 여기곤 하지만, 비싼 물건이 아니라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러 주는 값’이 붙은 물건입니다. 우리 스스로 생산자한테 알맞는 대가를 치르면서 ‘싼 물건을 억수로 쟁여 놓고 먹지 않게 되’니, 몸이며 마음이며 살림살이이며 한결 넉넉하고 따뜻해진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알맞는 만큼 밥을 먹으면 되며, 우리 식구들한테 알맞는 만큼 돈을 벌면 됩니다.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즐기고, 어느 만큼 넘치면 넘치는 대로 나누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더 먹으려 하고 더 가지려 하고 더 쓰려 하니까 생협 물건을 쓰기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더 나누려 하고 더 함께하려 하며 더 흐뭇하고자 한다면, 저절로 생협 회원이 되거나 생협 물건을 가까이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종교가 가르치는 슬기이기도 하지만, 종교 없는 사람 스스로도 옳고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된 종교란 종교라는 울타리가 없고, 참된 사람이란 종교가 있건 없건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이란 가난한 자리에 나란히 서면서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즐거움을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기에. (4342.5.6.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