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전 하는 날 저녁,
울산에 있는 허름한 호프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토고팀 분석, 시청 앞 광장의 응원 열기, 2002 하이라이트 등
방송 3사는 경기 몇 시간 전부터 채널을 고정시키려고 난리였다.

2002 하이라이트를 호프집의 대형 TV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렬하고도 비장한 음악과 함께 보고 있으니,
축구에 별 관심이 없는 나까지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 오르며
애국심(?)이 마구 고취되었다.

그러다 광고가 나오자, 사람들은 잡담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그 때, 필이 확~꽂히는 광고를 봤다.

한 젊은 여자가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벤치에 앉아
남친과 키스를 하고 있다.(부러워라!)

카메라가 왼쪽으로 이동하며,
테이크 아웃 커피 종이컵을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을 보여준다.

화면이 바뀌며,
같은 벤치에 40대 아줌마가 테이크 아웃 커피 종이컵을 들고
"혼자" 앉아 있다. 옆에는 쪼글쪼글해진 곰인형이 휑하게 앉아 있다.

그 때, 자막이 나온다.
사랑의 평균지속기간 18개월 / 종이컵 분해시간 20년

"인생은 짧고 일회용품은 길다."
- 공익광고 협의회 "일회용품 사용자제-환경수명편"

아!!! 공익광고를 보고 이렇게 울컥~하기는 처음이다.

사랑의 평균지속시간 18개월,
종이컵 분해시간 240개월.

그렇게 다들 웃고,울고,죽네 사네 목숨 거는 사랑의 평균지속시간이
종이컵 수명의 7.5%!!!

어제 본 영화 <내 남자의 유통기한>도
주인공 커플이 3년 동안 서로 사랑하면
저주를 받아 잉어가 된 잉어 커플의 마법이 풀린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30년도 아니고 딱 3년!!!
짧아 보이지만, 사랑의 평균지속시간의 딱 2배다.

그럼 부부들은 정으로 사는건가? 초코파이 나눠 먹으며?

어쨌거나...
사랑의 평균지속시간의 "평균"을 깍아 먹는 연애는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p.s) 글 쓰기 시작할 때는 나름 필 받았었는데,
에어컨 안 나오는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수박 껍데기에 파리 꼬이듯이 생각이 꼬인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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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아봤는데요, 제가 했던 연애들은 통계에 안들어갔더군요. 님은 대표적인 능력있는 미녀이니 통계에 들어갔을지도...^^

로드무비 2006-07-0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군요.ㅋㅋ
하긴, 처음부터 덤덤했던 터라 식고 자시고 할 게 없지 뭐유.^^;;

클리오 2006-07-0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같이 뜨거운 연애를 하면 그럴지 모르지만...(반드시 식어야 되니까..) 그렇지 않은 친구같고 우정같은 사랑은 정까지 더해져 상대를 점점더 이뻐보이게 만들어군요... ^^ 임자를 잘 만나야지 저도 그 전엔 평균지속시간 6개월 미만.... --;;

바람돌이 2006-07-0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랑이란게 눈 뒤집어져서 좋아죽는거 말이겠죠. 그거 18개월도 안돼요. 한 6개월쯤? ^^ 근데요. 사람이 늘 그렇게 눈 뒤집혀있으면 어떻게 산대요. 좋아하는 일도 좋았다 싫었다 할 때가 있듯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좋았다 싫었다 할때가 있는것 같아요. 그런데 웃긴건 그 싫었다 시기를 잠시 지나고 나면 또 상대가 새롭게 보인다는거죠. 그건 눈 뒤집히는거하곤 다르지만 뭔가 다르게 좋다는 느낌이 확실히 와요. 아마 그렇게 부부들이 사는게 아닐까 싶은데..... ^^

조선인 2006-07-03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좀 황당한 얘기인데 연애기간 5년 동안 옆지기가 '사랑해'라고 말해달라고 조를 때마다 참 싫었어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러다 마로 가진 뒤, 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긴 하는구나 느꼈고, 마로 걸음마할 때쯤 비로소 '이 사랑이 사랑이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직 정들기엔 느린 듯. 굉장한 slow starter죠?

마늘빵 2006-07-0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뜨거운 사랑을 해서 그런가. -_-

비로그인 2006-07-0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반 광고보다는 공익광고가 더 좋아요. 유명 연예인이 잘 등장하지 않아서 창의력 하나로 승부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공익광고 저도 보았는데 참 슬프다, 생각했어요. 18개월밖에 안된다면, 남는 긴 시간을 베어내지 못할 때는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너덜너덜해지는 일은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는 아직 어려요.

글샘 2006-07-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놈의 수치란... 뭘로 평균을 낸 걸까요. 설문지로? ㅋㅋ
사람 나름이죠.

BRINY 2006-07-0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개월이나 간다면 그나마 임자 제대로 만난 거네요. ㅎㅎㅎ. 만나서 2,3개월만에, 10번 만나고 결혼했다는 사람들 보면, 전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펄쩍 뛰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 들어요. 조건 맞으면 만나서 2, 3개월째가 가장 좋을 때죠~ 싸움 한번 안하고 눈에 뵈는 거 없고~

혜덕화 2006-07-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광고 보고 느낀 게 많았어요. 아마 여기서의 사랑은 연애기간의 사랑을 말하겠지요.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면 18개월도 길거예요. 끝없이 주고 또 주면 유통 기한이 없어요. 처음엔 그야말로 사랑으로, 그 다음엔 아이 커가는 것 보면서 끝없이 추억을 공유해 나가는 것, 그것이 부부의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미울 때는 원수가 따로 없다가도 작은 일에 서로 감사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 글쎄 그게 정인지 사랑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좋은 감정이 있어 부부로 사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랑>은 그야말로 이름일 뿐이죠.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든, 애플이라고 부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2006-07-05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06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0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0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0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2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12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생각했다.
하루키가 변한걸까? 아님 내가 변한걸까?

<어둠의 저편>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인터넷 서점 독자서평에 "배신과 실망", "늙어버린 하루키" 이런 제목의 글들이
많은 걸 보면, <어둠의 저편>을 읽으며 허탈해 한 건 나만이 아닌 것 같다.

도리스 되리의 [Der Fischer und seine Frau](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러
설레이는 마음으로 메가 박스에 갔다.
(강남은 메가 박스, 강북은 씨네 큐브에서만 상영중)
"파니 핑크"가 떠올라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런데...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95년에, 그러니까 11년 전, 독일에 어학연수 갔을 때,
독일 할머니랑 일주일에 한번씩 "꽁짜"로 "free talking"을 했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말동무도 할겸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했다.
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했다.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그런데....한달쯤 지나니까 그 할머니를 만나는 시간이 슬슬 힘들어졌다.
할머니는 만날 때 마다 똑 같은 얘기들을 했다.
말이 "free talking"이지 난 몇번을 들었음에도 놀라는 표정으로
"echt? (really?)" 하며 듣는 것 밖에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외로우면, 얼마나 말할 사람이 없으면 그럴까...생각하며 열심히 들었다.
누가 자원봉사를 하는 건지 헛갈리는 상황이었다.

오늘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보다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도리스도 이제....늙은걸까?

<파니핑크>는 1994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2005년.
11년 동안 휙휙 세상이 변했듯이, 도리스도...변했다.
'♬ 사람들은 모두 변화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그래...나도 변했다.
내가 11년 전 <내 남자의 유통기한>을 봤다면,
그저 웃긴 장면에서 킥킥 거리며 즐겁게 봤을지도 모른다.
이것 저것 많이 생각하지 않고...

도리스도 변했다.
11년의 세월만큼 성숙해지고 깊어졌다면 좋으련만,
그런 느낌 보다는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처럼 관객을 가르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또, 전형적인 서양인의 관점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직도 많은 서양인들에게 인도는 명상과 요가의 나라고,
일본은 소박하고 순하고,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나라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에서 일본은 완전 시골이고,
주연급 조연 Yoko(한국계 배우 김영신)는 오직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일본 여자 캐릭터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난 긴 한숨을 쉬고 있었다.

p.s) 이 영화의 원제는 [Der Fischer und seine Frau].

그림 형제의 동화 제목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어부가 물고기를 잡았다.
그 물고기는 자기가 마술에 걸린 왕자라고 말하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어부는 물고기를 보내줬다.

집에 와서 아내한테 그 말을 하자, 아내는 다시 가서 마술에 걸린 왕자를 불러서
보답으로 새 집을 달라고 하라며 남편을 들볶는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물고기(왕자)를 불러 집을 달라고 말한다.
집이 생기자 더 큰 욕심이 생긴 아내는 성(castle)을 지어 달라고 하고,
성이 생기자 왕이 되고 싶다고 하고,
왕이 되자 하느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왕이 되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에
어부와 욕심 많은 아내는 성도, 왕관도 다 잃고
다시 헛간에 살게 된다.

<내 남자의 유통기한>의 제목과 모티브는 바로 이 동화다.
그렇게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 안해줘도 되는데,
비단잉어 부부(진짜 잉어다!!!)가 나레이션으로 주제를 다 말해준다.

도리스 언니는 너무 친절해진 것 같다.
내겐 너무 친절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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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7-02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자고 뭐해요? ㅋㅋㅋㅋㅋ

로즈마리 2006-07-02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보러갈까 했는데...아닌가? ㅠㅠ

마태우스 2006-07-02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내일 이 영화 볼건데...퍼니펑크의 기대감으로 이걸 본 분들이 많군요. 전 다행히 퍼니를 안봤답니다 근데요 수선님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셨군요!

프레이야 2006-07-0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의 눈을 참고해서 볼게요^^ 좋은 글입니다...

moonnight 2006-07-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기대만큼 아닌가보네요. 역시 수선님의 맛이 나는 멋진글이세요. ^^

다락방 2006-07-0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보고싶었던 영화예요. 아마 제가 보기도 전에 내려질것 같네요.흐음~

kleinsusun 2006-07-0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매너! 울산에서 술을 넘 많이 마셨어.ㅠㅠ 당분간 술을 못 마실 것 같아... 넌 안자고 뭐했어? 행복한 일요일 보내....^^

로즈마리님, 아니진 않아요. 기대를 넘 많이 해서 실망이 컸을 뿐...^^
<흑설 공주>나 <루비 레드>처럼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동화를 재해석하는 그런 영화거든요. 도리스판 <어부와 그의 아내>라고나 할까요?

마태님, 아...오늘 보시는 군요. 씨네 큐브에서 보시나요?
<파니 핑크> 안 보셨군요. < 내 남자의 유통기한 > 먼저 보고 보세용!^^

혜경님, 감사합니다.^^

달밤님, 전 별로였는데 친구는 재미있었데요. 빨리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영화 오래 안하쟎아요.^^

다락방님, 네... 보시려면 서두르세용. 메가 박스는 14관(젤 작은데), 씨네 큐브 달랑 2군데서만 해요. 언제 끝날지 모르죠.
참! 그림 형제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 읽고 보시면 더 재미있으실 꺼예요.^^

로드무비 2006-07-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친절하면 부담스러운데.
도리스 언니, 수선님과 저한테는 그러지 마세유.^^

kleinsusun 2006-07-0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직 영화 안보셨죠?
제가 삐딱하게 쓰긴 했지만 그건 넘 애정과잉상태라 그런 거구요,
여전히 도리스만의 뭔가가 있어요. 언제 보실꺼예욤?^^

비로그인 2006-07-03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도리스 되리. 너무너무 보고싶은데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그저 보셨다는 그것 하나로 부러워집니다.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난 잡지를 거의 읽지 않는다.
김경이 기자로 있는 <바자>(Bazaar Korea)도 읽은 적이 없다.
미장원에서 몇번 본 적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보그나 다른 잡지들이랑 구분이 되지 않을 뿐.
당근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경'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 책에 실린 22편의 인터뷰는
잡지 <바자>에 실렸던 인터뷰 모음집.
사실....읽으면서 좀 놀랐다.
패션지에서 연예인 아닌 사람들하고도 인터뷰를 하네?
특히 2001년 8월, 대선주자였던 노무현 '고문'과의 인터뷰를 읽으면서는 고개가 갸우뚱했다.

외국 패션쇼 사진이랑 화장품 광고만 잔뜩 실리는게 패션지인지 알았는데,
정치인들도 예술가들도, '주성치'까지도 <바자>랑 인터뷰를 하는구나....

솔직히 '패션지에 다이어트 노하우 외에 읽을만한 기사가 있어?'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 책에 실린 첫번째 인터뷰, <김훈 - 저기, 한 사내가 있다!>를
읽으면서 명함에 있는 김경의 본명은 '김경숙'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이름에서 한 글자만 빼도 정말 느낌이 다르다!
'김경숙'이라면 정말 흔한, 이웃집 언니 같은, 평범하고 얌전한 느낌인데,
한 글자를 빼고 '김경'이라고 하니까 뭔가 재기발랄해 보인다.

동시에...비약이겠지만, 뭔가 자신의 정체성을 쿨하게 꾸미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존경하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약간의 배신감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 김경이 쓴 <서울을 축제의 도시로>란 칼럼을 봤다.

"그렇다면 4년 전에 비해 한층 더 요란해지고 적나라해진 월드컵 패션이 은폐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2002년 이후 이 도시와 이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뭔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믿었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진실에 대한 은폐가 아닐까? 나는 그 책임을 젊은이들이 온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열망을 가득 담아 표를 던졌던 대통령에게 묻고 싶지만(그의 당선도 젊은이들에겐 하나의 축제였다), 지금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존재 여부조차 확인이 안 돼 그 일은 그만둔다."

바로 5일 전, 6월 20일자 칼럼이다.

5년 전, 그러니까 2001년 8월,
김경은 지금은 존재 여부조차 확인이 안된다는 대통령과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는....인터뷰라기 보다는 차라리 '헌시'에 가깝다.
누군가 노무현은 '어딘지 눈물 나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p315)

똑 같은 사람이 쓴 5년 전의 인터뷰와 5년 후의 칼럼을 보니
참....착잡하다.

이 책에 실린 22편의 인터뷰에서 김경의 일관된 자세는
인터뷰 대상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거다.
어떤 인터뷰를 읽으면서는 <성공시대> 나레이션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자신이 반한, 사랑에 빠진 사람을 인터뷰 대상으로 감수성 넘치는 글을 쓰는 건 좋지만,
지금도 22명의 인터뷰 대상에 대해 김경이 그런 감정을 유지하고 있을까?는 의심스럽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불편함'은
정혜신의 [남자 vs 남자]를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과 비슷하다.

정혜신이 분석의 대상을 선정한 기준은
정혜신이라는 한 개인의 'preference'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preference'는 대중의 인기와 그대로 부합한다.
그 대상과 비교하는 'negative'한 대상은
비판을 하면 일반대중이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사람들로 선정되어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좋게 쓰는 것.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 대중의 지지도 변화에 따라
저자의 관점도 같이 변한다는 것.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애매한 불편함을 글로 표현하자면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인터뷰의 미덕이 톡톡 튀고, 재미있는 거라면
김경의 인터뷰는 최고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대상과의 거리 두기', '공정한 시각'을 인터뷰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마지막으로 김경의 글쓰기 뿐만 아니라 요즘 많은 칼럼리스트들에게 느끼는 불만 하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글쓰기를 할 때,
그러니까 전문지가 아닌 잡지나 일간지, 사보들에 글을 쓸 때,
제발 니체나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지 마시라!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가?
글의 완성도를 위해서 꼭 필요한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꼭 필요한가?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로 꼭 필요한가?

도대체 왜, 왜 쌩뚱 맞게 '니체'가 툭툭 튀어 나오는가?
무슨 리어카에서 파는 '체 게바라' 면티도 아니고 도대체 니체가 웬 유행인지?

이 책의 두번째 인터뷰 [DJ DOC 네 멋대로 놀아라]에도 니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그들은 마치 니체처럼 나타났다.
" 죽여 없애지 못한다면 그들은 더욱 강해질 뿐이다
(What doesn't kill them makes them stronger)."
(p34)

<씨네21>의 영화 리뷰들에서도 이런 식의 인용을 쉽게 볼 수 있다.
외래어 남용과 함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얻은게 있다면 이상일,양혜규,조성룡 등 이름도 몰랐던 사람들에 대해
단편적으로 나마 알게 되었다는 거다.

소개팅할 땐 넘넘 재미있었지만 다시 만나기엔 긴가민가한 남자 같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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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6-2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할 건 추천밖에 없습니다. 김경이란 이름이 주는 느낌과 대상자에 대한 저자의 느낌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에도 감탄을 하구요, 그보다 더, 니체랑 하이데거를 인용하는 풍조를 비판한 것에 더 큰 찬사를 보냅니다. 이상 하이데거와 니체를 인용하고싶어도 무식해서 인용 못하는 마태 드림

로드무비 2006-06-2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요, 어찌 이리 콕 집어주셨나이까.
인터뷰 할 때는 열광해 놓고, 바로 딴 얼굴을 할 것 같다고 느꼈어요.^^

nada 2006-06-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뜻하는 바는 뭘까... 궁금해지네요. 어쨌든 어딘가 눈물나게 하는 구석이 있다던 노무현의 배신은.. 안타깝습니다.

끼사스 2006-06-2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일보를 구독하면서 김경씨 칼럼을 종종 읽는데, 뭐랄까, sensitive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적인 글을 쓰는데 명분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도 차마 감정을 주체 못하겠다는 태도. 확실히 읽는 재미는 있죠.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kleinsusun 2006-06-2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저도.....인용을 못해요. ㅎㅎㅎ
그런데... DJ DOC이 '니체' 처럼 나타났다는 표현은 넘 웃긴 것 같아요.
요즘 외래어를 남용하듯이 인용을 남발하는 칼럼리스트들이 많아요. 아마도...몇줄 쉽게 더 쓰기 위해서? ㅋㅋ

로드무비님, 네....쉽게 열광하면 그 만큼 쉽게 식죠. 열광이 습관적이라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꽃양배추님, 제목이 뜻하는 바는.....대조되는 두 인물의 이름을 반복, 대비함으로서 강한 impact → 판매량 증대???

훈성님, 닉네임을 바꾸셨군요. 누군가 했어요. 앞으론 끼사스님이라고 부를께요.^^
강준만 교수가 말했죠. 글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감정 과잉을 경계해야 된다고...

글샘 2006-06-2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인데, 노무현은 놈현됐고 김경은 김경숙이었군요. 결국.
앙녕하세요~ 드자이너예요, 레 이름은, 김봉남이에요.ㅋㅋㅋ
하던 산뜻한 개그 만큼이나 <본질>과 <이름>은 착각과 오해로 일관하는 관계 아닐까요?

잉크냄새 2006-06-2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문회가 밝혀낸 지상최대의 진실...
"저 아아아앙~ 앙드레 김의 본명은 김봉남이에요."

2006-07-03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6-09-26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보자면 전 지승호씨 인터뷰 책 말인데요, 물론 성실하고 훌륭하지만, 선생님에게 강의듣는 듯한 태도가 다소 부담스럽더군요

2007-01-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요일 밤.
한국과 스위스의 결전을 몇 시간 남겨 놓은 시청 앞은
온통 빨간 티와 두건, 또는 태극기로 탑을 만들어 입은 섹시(?)하고 용감한 10~20대,
'김밥 한줄에 1000원!'을 외치는 장사치들,
별로 팔릴 것 같지 않은 허접한 빨간 티를 5천원에 팔고 있는 좌판 등 북새통이었다.

시청 앞 광경은 분명 '축제' 였는데,
난 그 북새통 속을 까만 정장을 입은 채로 뻘쭘하게 걸었다.
운동을 하고 막 샤워를 하고 나왔던 터라 맨 얼굴에
채 다 말리지 못한 긴 머리는 젖어 있었다.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배꼽티를 입은 혈기왕성한 어린애들 사이를
터벅터벅 걷는데, 뭔가 뻘쭘하고 어색했다.
새벽 4시에 하는 경기를 보려고 초저녁부터 모여든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기도 했고,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번 사건 이후로 글 쓰기에 대한 무식한 열의도 한 풀 꺽이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왜 나란 인간은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못사는 걸까?)

일주일간 빡세게 운동을 했다.
몸을 만드려고 저녁은 먹지 않고
요즘 열광하고 있는 '매일 순두유' 한병으로 때웠다.

목요일 회식은 팀 '주무'라는 권력(?)을 활용,
삼겹살의 무서운 열량을 피하기 위해 횟집으로 예약을 하고
회와 야채만 먹고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일주일간 빡세게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잘해왔던 터라 내심 뿌듯했는데,
너무 먹지 않아서인지 고질적인 외로움이 또 스물스물 기어 올라온건지
금요일 밤은 아주아주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 보는데
치킨집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오뎅바에서 정종을 마시는 사람들,
길가에 내어 놓은 테이블에서 신나게 술을 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술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순간 핸드폰을 꺼냈다.
누구 불러내서 술 한잔 할까?

하지만 이내 다시 핸드폰을 가방 속에 넣었다.
맨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약속을 피하다가
내가 술 마시고 싶다고 전화하는게 치사하게 느껴졌다.

술이 마시고 싶고, 뭔가 거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치킨 다리를 뜯고 싶기도 했고,
감자탕 속의 푹 익은 고기 생각도 나고,
평소 좋아하지 않는 족발까지 떠올랐다.

뭘 먹을까 계속 생각하다가
아파트 상가 앞을 지나면서는 캔 맥주만 몇개 샀다.
며칠 빡세게 운동한 걸 도루아묵으로 만들지 말자는
강한 이성과 '본전 의식'으로.

집에 와서 캔 맥주 하나를 마시고는 뻗어서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지 못해 축구도 보지 못했다.
그리곤 토요일 내내 자다,깨다,먹다를 반복했다.

자다 깨면 멍하니 TV를 봤고,
동생이 극찬한 피자 헛 '치즈 바이트'를 게눈 감추듯이 먹었으며,
중간 중간엔 캔 맥주를 홀짝 홀짝 마셨다.

요즘 유행하는 책 <하류사회>에 묘사된
전형적인 '하류'의 일상이었다.

축 늘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운동을 빡세게 했더니 근육통인지 뭔지 몸이 욱신거리기도 했다.
느끼한 피자와 맥주가 그렇게 땡겼던 걸 보면 '욕구 불만' 같기도 했다.

욕구 불만, 욕구 불만, 욕구 불만.

어찌 보면 난 항상 '욕구 불만'의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별로 '멋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깡그리 망가져본 적도 없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범생이의 피가 혈관을 타고 콸콸 흐르고 있다.

2002년 11월, '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하나로
무식하고 용감하게 사표를 냈지만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달 넘게 잘 놀다 온건 좋았지만,
집에 와서는 '엄숙주의+성실주의'의 극치, 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도서관에 갔다.

거 참....쉬고 싶다고 번듯한 직장에 사표를 내고는
새벽 6시에 도서관에 가는 꼴이라니?

출근하는 아빠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온갖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빠의 눈은
어떤 악랄한 상사의 괴롭힘 보다도 나를 힘들게 했다.

그 때, 참 많은 소설을 읽었다.
편입 시험,공무원 시험,법무사,회계사,변리사,공인 중개사 등등 다양한 수험서에
고개를 쳐박고 형광펜으로 줄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이브'하게, 편한 자세로 앉아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한권 다 읽으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그래서 인터뷰를 한다면,
기자가 '당신의 문학적 기반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 네, 백조 시절 아빠를 피하기 위해 새벽에 도서관에 가서 읽었던 많은 소설들입니다."

뭐....고통스런 기억이지만 써놓고 보니 약간 웃기기도 한다.

어쨌거나 또 이렇게 주말이 가고,
내일이면 또 새벽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 간다.
아마....오늘 밤도 2주 전 처럼 짐을 싸기가 싫어서 끙끙 거릴 것이며,
'아....오늘 출근할껄! 워크샵 자료는 언제 만들지?' 하며 짧은 탄식을 뱉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6월이 가고, 06년의 상반기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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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6-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은 있잖아요.
그래도 저는 수선님이 사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내일은 멀리까지 오시네요. 저는 아랫쪽이니까 오신다고.... ^^

프레이야 2006-06-2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욕구불만이면 마구 먹어요. 스위스전 보면서도 치킨 시켜놓고 마구 먹었어요. 상반기가 가는 무렵이라 님도 흘러가는 시간을 어쩌지 못함에 약간의 불만이 엿보여요^^ 그래도 지금처럼 그렇게 열심히~ 때로는 내맘대로~ 뭐 그렇게 화이링~~

2006-06-25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리오 2006-06-2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은 거~하게 먹어줘야 몸이 기아상태에 빠져 지방을 축적하지 않는답니다. 치즈바이트보다는 삼겹살(혹은 목살?)과 야채 잔뜩~ 힘내시구요..

BRINY 2006-06-2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생활하고 나서는 늘 일정체중 이상 늘지 않더라구요. 그렇다고 몸매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마른 비만 체형이 되어버렸지만 말여요. 작년에 인문계 고등학교 와서는 글쎄 귓속의 지방이 빠져서 소리가 안들리는 현상이 나타나질 않나. 빠지라는 뱃살과 팔뚝살은 안 빠지고 말여요. 하여간 그래서! 허기질 때는 먹어줘야 합니다. 그만큼 먹고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요!

2006-06-26 0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 2006-06-2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누가 있어줬음 싶을 때 연락하려다 망설이게 되는 거... 사람들은 그러게 평소에 인간관계 관리 잘 하라고 그러겠죠. 그런데 인간관계까지 그렇게 관리해야 한다는 거, 슬프지 않나요? 그럴 땐 만만한 애인 하나가 딱인데 말이죠. 아무 근심 없이 도서관에서 하루 죙일 책읽기... 제 꿈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는 만만한 남편도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뭐.
그러려니 하시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수선님과 꽃양배추님.=3=3=3

잉크냄새 2006-06-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5일제가 된 이후의 금요일 퇴근길은 좀 거시기해요. 예전에는 금요일 퇴근길이 가장 활력이 있었던것 같은데, 토요일 환한 햇살속으로 퇴근하던 기억도 참 그립군요.

moonnight 2006-06-2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수선님 너무 기운이 없으니까 맘이 더 허해진다구요. 제가 보기엔 연약하기만 하신데 좀 더 드셔도 돼요. ㅠㅠ 지금 많이 힘드시겠지만 좋은 일이 있으리라 믿어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시니 당연히. 힘내세요. ^^
 

문학평론가 김동식의 <소설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일반인들과 문학전공자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 그 깊고 깊은 심연에 대해 절감했다.

회사생활 10년차.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 '나부랭이'를 즐겨 읽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30대 여자들은 그래도 좀 많이 읽는 편이고,
남자들이 소설을 읽는다면 주로 <삼국지>,<로마인 이야기> 이런 책들이거나,
아님 출장갈 때 지루한 비행시간을 견디기 위한 무협지가 대부분이다.

매일 소설을 읽고 평론을 쓰는 것이 생업인 문학평론가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회사원들의 독서 수준을 가늠하기란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번은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회의에서 K과장이 엉뚱하면서도 쌩뚱 맞은 말을 하자 K2 과장이 말했다.
" 형! 꼭 황만근 같아."

K과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물었다.
" 황만근? 황만근이 누구야? 개그맨이야? "

K2 과장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뻘쭘해 하며 말했다.
" 아...그게...얼마 전에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는데,
그 주인공 황만근 같다구."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 야...너 그런 소설도 읽냐? "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배수아, 김영하, 박민규, 전경린, 조경란...
이런 소설가들은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들이다.
당연히 문학평론가들은, 문학평론가까지 아니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작가들의 이름 정도는 알겠지...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모른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회사 가서 옆에 앉은 사람한테 물어보라!
(출판사나 신문사 문화부, 이런 회사는 제외)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실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걸 말하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원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마시멜로 이야기>,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괴짜 경제학>, <경제학 콘서트>.... 이런 책들은 많이 읽는다.

최근에 울 팀장이 읽고 술 마실 때 마다 얘기하며 직원들에게 권한 책은
공병호의 <10년 후 한국>이고,
울 상무님이 읽고 팀장들에게 읽어보라고 한 책은 <양치기 리더십>이다.

2005년 SERI CEO 추천도서 목록에는 소설이 단 한권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20권 중에 소설은 단 한권도 없다!

<블루 오션 전략>, <잭 웰치 위대한 승리>, <짐 콜린스의 경영전략>, <미래 기업의 조건>, <톰 피터스의 미래를 경영하라>.....
다 이런 경영/경제서들이다.
그나마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장영희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달라이 라마의 <용서>.

이러니 기업들한테 '문화 경영', '감성 경영'을 바라는 건 웃기는 소리다.
CEO들의 책장을 보라, 소설이 몇권이나 있는지!

회사원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퍽퍽하고 드라이하다.
이 '드라이'한 환경에서 감수성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면 힘들기만 하다.

그래서 난...신입사원 때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 <삼국지> 빼고.
안 그래도 힘든데, 힘들어 죽겠는데,
읽고 나면 우울해지거나 생각이 많아지는 소설을 대하기가 싫었다.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은 1997년,
'드라이'한 인간이 되려고 발악을 했던 해였다.

요즘 문단과 출판사들은 '한국 소설의 위기'를 말한다.
그런데....한국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탓만 하지 말고,
소설가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회사원들은 죽어나는데, 소설가들은 너무 뜬금 없는 얘기들만 하고 있는게 아닌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은희경 소설 중에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 여자가 훌쩍 여행을 떠나며
사표를 우체통에 넣어 부치는 '낭만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소설가들이여!
요즘 회사들에 그런 낭만은 없음을 알아주시라.
사표도 다 전자결재다. 시스템에 입력하고 전자결재가 나야 한다.

여름방학에 대학생들이 인턴을 하듯이,
소설가들을 위한 인턴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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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6-06-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녔던 회사는 작은 데라, 전자결재란 게 아예 없었고, 당연히 사직서도 전자결재가 아니었는걸요.^^;;

하이드 2006-06-18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백수이거나, 대학 시간 강사이거나, 출판사 직원인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한가한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맨날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아프리카로 떠나는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물론, 위에 언급하신 작가들의 소설들은 들쳐봤습니다만 ^^;) 위의 말은 참 공감이 가네요.

2006-06-18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18 0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6-06-1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시와 동떨어져 사는 제게 조금 위안이 되는 글이네요. ^^;;

마태우스 2006-06-1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만근은커녕 성석제도 모르는데요 뭐... 은희경을 모르는 친구도 숱하게 있더이다... 문학은요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조그만 나라라고 알더군요.

BRINY 2006-06-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결재는 아니더라도 미리 얘기 안하고 저런 식으로 사표 던지고 떠나버리면 욕 무지 먹는 거 사실이죠 뭐~~

kleinsusun 2006-06-1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네...제가 대기업 생각을 했네요. 갈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드님, 한국 여자 작가들이 쓴 소설에서 툭하면 여자 주인공들이 인도나 아프리카로 떠날 때 허망하다니깐요.ㅎㅎㅎ

조선인님, 며칠 전에도 <신 기생뎐> 읽으셨쟎아요. 소설이랑 친하신데요 뭐^^

마태님, 맞아요 . 소설 전혀 안 읽는 사람들 많아요. 국어 시간에 나왔던 소설가 아니면 대부분 모르는 게 현실이죠.ㅠㅠ

BRINY님, 네....소설 속 사표는 '낭만적'이긴 한데.... 엄청 욕 먹고, 또한...담 직장 구하기 힘들겠죠? ㅎㅎㅎ

stella.K 2006-06-1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맞는 말씀하시네요. 글치 않아도 엊그제부터 간만에 우리나라 신세대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긴 합니다만, 그게 모문학상 후보에 올랐드리구요. 평도 좋아 읽어 볼 생각을 했습니다만, 묘사는 그럭저럭 좋은데 서사가 없다고나 할까? 수선님 말씀 공감은 가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한숨이 나오네요. ㅜ.ㅜ

kleinsusun 2006-06-1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stella님도 밤 새셨어요?^^
소설가 지망생들이 처음부터 문창과 가서 계속 습작만 하지 말고, 뭔가 일을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소설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는건 좀 허망하쟎아요.ㅎㅎ

2006-06-2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즈마리 2006-07-02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수선님 욜라 동감입니다...ㅋ ㅠㅠ
근데 소설가들이 다 백수거나 시간강사거나 그렇죠 모..ㅋㅋ
악순환인 거 같네요. 회사다니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고, 소설가는 백수독자를 위해서만..쓰는 듯..ㅋ ㅠ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kleinsusun 2006-07-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네...요즘 문학상 수상작들도 다 소재가 "백수" 더군요.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자전적 경험"을 참고해서 썼다는데....
정말 악순환인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