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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 관료제는 정치적 거버넌스의 전반적인 틀이 갖춰진 후에 탄생했으며, 정책 문제를 해결하고 각각의 영역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는 목적이 뚜렷한 테크노크라시 성격의 도구였다. 즉, 관료제는 전쟁, 세금 징수, 의료 운영, 산림 관리와 같은 업무별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생겨났지 전반적인 거버넌스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중략)

반면 왕조 시대 중국의 관료제는 사회가 막 태동하여 힘겹게 헤쳐나가야 하는 연약한 시기에 생겨났다. 과거 제도의 확장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립했다. 이 지배는 행정적이고 관념적인 지배였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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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 때 한국 정부의 결정은 한미동맹에 대한 고려와 주한미군 감축 또는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는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이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원하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1966년 초 브라운 각서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브라운 각서는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뿐만 아니라 경제 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브라운 각서를 한국 정부에 대한 마지막 보상으로 생각했던 반면, 한국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신호로 생각했다.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의 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후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에 요구했던 숙원 사업이었다.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 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산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대한 원조를 더 보상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1967년 브라운 대사의 후임자로 온 포터 대사의 임무는 전투부대의 3차 추가 파병을 위한 한국 정부와의 협상이었다. 1967년 9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포터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추가 파병의 여부는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다.

이 시점에서 포터 대사는 한국군의 적극적인 (대북) 공세가 결국 북한과의 더 많은 충돌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전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은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알라딘의 램프‘라고 말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 전쟁의 본질을 한국전쟁과 같은 남북 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본질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호찌민의 지원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베트남전쟁 과정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북베트남 공산당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폭격을 통한 압력이 평화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오판은 닉슨 행정부 초기부터 파리평화협정이 끝나는 1973년 초까지 4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됐다. 닉슨의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공세 강화는 비밀리에 수행됐고, 군사 활동은 의회에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는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 누설을 막는 사람들의 모임(White House Plumbers)‘이 조직됐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닉슨의 두 얼굴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진행됐던 폭격이 1969년 5월 9일 뉴욕타임스 기자에 의해 폭로됐다.

‘종전‘이 아니라 ‘확전‘이 알려지면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1968년 5월 중순까지 사립대학의 89%, 공립대학의 76%에서 반전 시위가 있었으며, 448개 대학에서 수업거부가 있었다. 오하이오주의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경찰 발포로 인해 학생 5명이 사망했다. 닉슨은 그들을 ‘부랑자(bum)‘로 치부했다. 닉슨은 딸 줄리의 스미스대학 졸업식, 사위 데이비드의 에머스트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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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분하는 작업은 말로 하긴 쉽지만, 실제로는 다소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거래에 시간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팔고 사기(매매)‘에서 지금 바꾸지 말고 ‘미래 시점에 바꾸기‘로 지금 약속하는 거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빌리고 빌려주기(대차)‘는 원래 시간이 개입된 거래이지만, 선물거래와 같이 추가로 다른 시간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오늘은 아무리 복잡한 거래도 ‘팔고 사기‘와 ‘빌리고 빌려주기‘로 분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P34

인간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인간 욕망의 공통분모인 ‘돈‘도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금리를 만들고 공간은 환율을 만듭니다. 금리는 시간의 차이에 따른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환율은 지리적 공간의 차이에 따른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단순한 ‘팔고 사기‘에는 시간이 개입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외환을 매매하면 그뿐이므로 현재의 환율에는 시간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리고 빌려주기‘에는 시간이 개입됩니다. 빌려준 것을 나중에 받아야 하니까여. (중략) 이렇게 시간이 개입되는 곳에 반드시 금리가 있습니다. (중략) ‘시간 개념이 있는 금리‘와 ‘시간 개념이 없는 환율‘이 곧 우리가 연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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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경에는 도시 주민의 거의 3분의 1이 아일랜드인이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자기들만의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신교고들의 공립학교 동맹과 투쟁했다. 그들은 맨해튼의 타락한 민주당원들이 결성하여 정치와 재정을 부패시킨 기구인 ‘태머니파‘에 합류하기도 했다. 다른 당들은 모두 그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젠틀맨‘, 다시 말해 은행가나 부유한 상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야비한 직업인 정치가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의 후반기와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아일랜드인들이 뉴욕을 통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 P32

뉴욕파의 화가들에게는 그들만의 위대한 여사제가 있었다. 1942년에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화랑에서 ‘금세기의 미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페기 구겐하임이 바로 그들의 여사제였다. 그녀는 막스 에른스트의 부인이었다. 구겐하임 화랑은 전쟁중에 로스코와 폴록의 유일한 고객이었고, 생계가 어려운 많은 화가들을 도왔다. - P60

뉴욕주의 죄수들 가운데 85% 이상이 흑인이거나 히스패닉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에디 엘리스가 처음으로 밝힌 것은 그중 75%가 뉴욕 시티의 100여 개가 넘는 구역 중에서도 특히 서로 이웃한 다음 7개 구역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할렘, 로어이스트사이드(맨해튼), 사우스 브링크스, 사우스 자메이카(퀸스), 이스트뉴욕, 브라운스빌,배드퍼드스 투이베산트(브루클린). 그전까지는 어떤 경찰이나 범죄학 전문가도 ‘죄수 4명 중 3명이 이 7개 구역에서 태어나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은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이 구역들이 감옥과 마찬가지로 범죄의 출입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P68

1900년 시청에서 맨해튼의 하류 지역을 할렘의 주거지역과 연결하는 지하철을 레녹스가에 건설할 예정임을 공고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건설 과역 현상이 빚어지면서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할렘의 지하철 노선과 그 노선이 끌어들일 주민들의 수를 예측하고 호화로운 임대 아파트를 지었다. 그런데 지하철 개통과 함께 엄청난 경기 침체 바람이 몰아쳤다. 지나치게 많은 건물이 세워진 할렘은 순식간에 겉만 번지르르한 유령도시로 변모했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백인들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턱없이 높은 임대료를 받고 흑인들에게 세를 놓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할렘은 맨해튼의 ‘그늘진 도시‘가 되었다. (중략) 흑인들이 장악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늘어나자 백인들은 할렘 밖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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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황은 제조 대기업이 생산직 노동자의 숙련을 우회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재편하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들 대신 고학력의 대졸 엔지니어를 많이 뽑아 그들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제조 대기업의 관심사다. 저학력이지만 고숙련 공정을 담당했던 정규 생산직 노동자의 자리가 자동화와 로봇에 의해서나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나 저임금-저숙련 하청 노동자로 대체됐다.

중숙련 업무인 사무직 자리는 신규 채용 대신 ‘경력직 같은 신입‘이나 경력직을 통해 충원되거나, 전직을 바라는 엔지니어에게 돌아간다. 특히 산업도시에서는 사무직을 정규직으로 뽑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다. - P86

몇 년 전까지 화두가 됐던 ‘젠트리피케이션‘의 경우처럼 도심의 공업 지대가 쇠퇴하고 나서 탈공업화 과정에서 상업지로 조성되는 사례는 많다. 지금은 ‘패션 피플‘과 예술가들의 성지처럼 불리는 뉴욕의 브루클린 같은 곳이 전형적 사례다. 코로나19 백신 때문에 더 익숙해진 화이자가 브루클린에 본공장을 갖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사례야말로 탈공업화 이후 전형적인 도심 공업 지역이 문화예술 산업으로 전환된 경우다. - P78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의 지자체는 산단 유치를 강력하게 히망하고 중앙정부는 이에 호응한다.(중략) 하지만 결국 제조 대기업의 하위 단계 하청이나 모듈 생산 공장이 산단에 입주하고, 단기 계약직 ‘뜨내기‘ 노동자나 저렴한 인건비를 맞추기 위해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는 상황이 된다.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만 양상되는 셈이다. (중략) 지역에 남아 있는 청년들은 공장에 가느니 배달이나 쿠팡 등의 물류센터 상하차 작업 등 플랫폼 노동을 선택하고 만다. 여성 일자리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는다. - P84

한국식 생산방식은 일본이나 독일과 유사하게 애초 고졸 엔지니어도 많았고, 생산직과 엔지니어의 협업이 많았던 작업장의 역사도 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노사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함에 따라 사측이 미국식 경영 방식을 적용해 오고 있다. 자동화와 로봇 도입을 밀어붙이고 생산 현장에서 가능하면 노동자의 숙련에 기반을 둔 개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애썼다. 물론 산업에 따라 일정한 차이는 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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