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이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 때 한국 정부의 결정은 한미동맹에 대한 고려와 주한미군 감축 또는 베트남으로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는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이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원하고 있는 만큼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1966년 초 브라운 각서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브라운 각서는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뿐만 아니라 경제 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브라운 각서를 한국 정부에 대한 마지막 보상으로 생각했던 반면, 한국은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신호로 생각했다.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 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의 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후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에 요구했던 숙원 사업이었다.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 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산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대한 원조를 더 보상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1967년 브라운 대사의 후임자로 온 포터 대사의 임무는 전투부대의 3차 추가 파병을 위한 한국 정부와의 협상이었다. 1967년 9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포터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추가 파병의 여부는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언급했다.
이 시점에서 포터 대사는 한국군의 적극적인 (대북) 공세가 결국 북한과의 더 많은 충돌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받아내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전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은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알라딘의 램프‘라고 말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 전쟁의 본질을 한국전쟁과 같은 남북 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본질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호찌민의 지원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베트남전쟁 과정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북베트남 공산당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폭격을 통한 압력이 평화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오판은 닉슨 행정부 초기부터 파리평화협정이 끝나는 1973년 초까지 4년 동안 지루하게 계속됐다. 닉슨의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공세 강화는 비밀리에 수행됐고, 군사 활동은 의회에도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는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 누설을 막는 사람들의 모임(White House Plumbers)‘이 조직됐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닉슨의 두 얼굴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진행됐던 폭격이 1969년 5월 9일 뉴욕타임스 기자에 의해 폭로됐다.
‘종전‘이 아니라 ‘확전‘이 알려지면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1968년 5월 중순까지 사립대학의 89%, 공립대학의 76%에서 반전 시위가 있었으며, 448개 대학에서 수업거부가 있었다. 오하이오주의 켄트주립대학교에서는 경찰 발포로 인해 학생 5명이 사망했다. 닉슨은 그들을 ‘부랑자(bum)‘로 치부했다. 닉슨은 딸 줄리의 스미스대학 졸업식, 사위 데이비드의 에머스트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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