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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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여러 명의 학자들이 모여 서양 문화사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을 기술한 책이라 깊이가 있고 무척 흥미롭다.

대학에서 수업 교재로 이용할 수 있게끔 따로 정리해 뒀다고 한다.

맨 앞 부분의 블랙 아테나는 미케네 그리스인의 기원이 바로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이라 신선하면서도 학계에서 얼만큼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하다.

그리스 신화가 곧 이집트와 페니키아 등에서 건너온 조상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탈린의 폭력 정치가 단순히 그가 미치광이 살인마여서가 아니라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국가의 힘을 절대화 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견해가 기억에 남는다.

그에 동조한 집단이 바로 중간 인텔리겐차들인데 전문적 관료들로 양성했으나 실력보다 당파성을 앞세웠기 때문에 비효율성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소련은 망하고 만다.

이런 주장에는 깊이 동의하지만, 맨 마지막에 미국 때문에 지역 분쟁이 악화됐다는 주장은 뜬금없다.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는 식의 결론이라 황당하다.

중세 신학의 발전이 근대과학 혁명을 견인했드는 주장도 인상적이었다.

산업화가 아무런 배경 없이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의 발견 만으로 갑자기 일어났던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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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영국사회와 문화
최영승 지음 / 석당(동아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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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과는 달리 내용은 아주 알차다.

그런데 솔직히 저술이 아니라, 거의 다 번역한 건 아닌지 의심이 많이 된다.

이를테면 

136p

"노년기에 접어들자 엘리자베스와 벌리는 인지능력이 저하되면서 더 현명하지 못해 정책과 업무 결정을 하는데 있어 더 부주의하고 더 느려졌다. 잉글랜드는 의회에 동의로만 수행될 수 있는 세금 개혁이 필요했다. ... 치안판사가 지불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인기 없는 세금을 거두어야 할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밑줄 친 문장 같은 수동태의 어색한 부분들이 책 전반에 걸쳐 아주 많다.

번역서라면 또 이해를 하겠는데, 명백히 저자가 있고 더군다나 이 분은 전공 교수가 아닌가?

저술과 인용은 명백히 다르며, 출처 표기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서 철저한 저자를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영국이 프랑스와 다르게 시민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명예혁명 즉 일종의 의회 쿠데타를 통해 입헌군주제에 성공하고 최고의 국가로 성장했는지 사회적 배경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헨리 7세부터 스튜어트 왕조에 이르기까지 부의 핵심이 바로 무역에 있고 섬나라로써 국가가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이 필요함을 일찍 깨달았다는 점이 놀랍다.

스튜어트 군주들이 과학적 실험과 합리주의 정책을 왕립 학회 등을 통해 지원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뉴턴이 갑자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특히, 지배층에서 후원했기 때문에 창의력이 만개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부를 증강시키고 삶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실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성리학이라는 정신적 가치에만 매몰됐기 때문에 구체제의 일원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대항해 시대 이후의 영국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발명품과 과학적 합리주의를 지지했으니 결국 나라가 부강해졌던 것이다.

영국의 의회제도나 정당 정치가 조선 시대의 신권론과 비슷하다고 서술한 책도 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명백히 다른 개념임을 깨달았다.

조선은 대한제국 성립시에도 여전히 고종이라는 한 절대 군주의 전제국가였고, 영국의 의회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지는 오늘날의 민주국가의 원형이었다.

좋은 대목들이 너무 많아 1/3은 옮겨 적은 것 같다.

유익한 독서 시간이었다.


<오류>

127p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 그리고 그녀의 사촌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에 의해 처형된 메리

->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촌이 아니라 5촌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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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책봉의례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1
신명호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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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생각보다 흥미롭고 유익했다.

역시 본격적인 연구자들의 저작은 역사를 움직이는 내면의 원리들에 대해 잘 짚어준다.

자세한 의례 절차는 어렵기도 하고 지루해서 많이 건너 뛰었지만 책봉와 봉작이라는 제도가 관료제와 더불어 조선 시대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새롭게 알게 됐다.

단순히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외교적 절차가 아니라 대외적인 승인은 물론 국내에서도 책봉시 받은 교명과 금보 등을 통해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공신과 왕족들을 봉작하였다.

봉작을 받은 이들은 세습되는 특권과 경제적 부를 향유하면서 조선을 받드는 울타리가 됐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명나라가 세워진 후 공민왕이 자청하여 명의 제후국으로서 책봉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라고 하면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려 한 왕이 아닌가?

원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니 간섭에서 벗어나야 하고, 명나라는 중화의 나라니 자청하여 제후국이 되려 한 것인가?

역사책에서 흔히 보는 당당한 국왕의 모습이 전혀 아니고, 오늘날 후손들이 생각하는 외교적 측면의 사대는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4p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선왕조 500년을 드러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성리학적 유교문화와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가 아닐까 싶다.

12p

주 대와 춘추시대의 봉건제도 입각한 봉작제에서는 의례가 매우 중요하였다. 사실상 독립국의 통치자인 제후들을 평화적으로 연대, 협력하게 만든 매개체가 바로 의례화된 서열로서의 봉작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례>에 수록된 의례 중의 많은 부분이 봉건 제후들의 연대, 협력에 필요한 의례였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치자들이 각각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거행함으로써 조공, 책봉 체제에 편입하였다. 삼국시대의 통치자들은 대외적으로 중국 황제에게 국왕으로 책봉되었고, 그것에 입각하여 대내적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봉작하였다.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단순히 양반관료 체제를 보완하는 부차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국왕의 정통성은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왕조의 핵심 세력인 왕족과 공신들을 포섭, 예우하던 제도 역시 봉작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봉작제와 책봉의례는 관료제와 함께 조선왕조를 규제한 가장 강력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27p

"우리 중국은 강상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 

77p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관계가 조선의 요청으로 시작하고, 이에 명이 반응하고, 또다시 조선이 반응하는 연속적인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조선과 명의 조공, 책봉제도라는 것은 조선에서 책봉을 요청하는 조공 사신의 파견, 그에 따라 명에서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조사 또는 칙사의 파견, 이후 조선에서 명의 조사 또는 칙사 파견에 대한 사은사의 파견 등이 연속적올 맞물려 있는 의례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에서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하여 조선국왕을 책봉하는 의례는 기본적으로 명에서 제정한 의례를 기준으로 거행되었다. 즉 명은 조사 또는 칙사를 파견할 뿐만 아니라 피책봉국에서 거행해야 할 조사 또는 칙사의 영접의례 및 책봉의례까지 <대명집례>에 규정하였던 것이다.

114p

중국에서 봉작제의 형식과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상관없이 봉작의 대상자는 왕족과 공신에게 한정되었으며 봉작에 수반되는 경제적, 형사적 특권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는 봉작제가 왕족과 공신 등 왕조의 핵심 세력들을 포섭하고 봉작에 따른 기득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왕조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제도로 이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20p

종친, 부마, 국구는 왕의 가까운 친족이라는 점과 함께 왕권에 직접 도전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왕실 봉작제는 이들을 봉작함으로써 이들에게 최고의 명예와 부를 허락하는 대신에 사환과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금하여 왕권을 안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비되었다고 하겠다.

175p

빈에게는 비록 왕비에 비해 격하된 임명의례를 거행하였지만 다른 후궁들에 비해서는 임명의례를 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었다. 빈 이하의 후궁들은 임명의례 자체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빈이 임명의례를 통해 교명을 받았다는 것 역시 커다란 특권이었다. 물론 빈 이하의 후궁들은 교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간택빈의 임명의례는 왕비 바로 아래 위치이자 후궁 중 최고 위치인 빈의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202p

왕자 봉작 이후에 교지와 녹봉 그리고 공상과 전결을 받는 것은 왕자 봉작이 일종의 관료 임명으로 간주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대군이나 군 또는 공주, 옹주는 비록 어린 나이에 봉작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봉작 이후에는 독립적 생활단위인 房 으로 간주되었다. 정식으로 봉작된 후 방을 구성하면 그에 상응하여 공상과 전결을 지급했던 것이다.

219p

지방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지방 군현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현지의 향리들이었다. 고려시대 군현의 잡공 즉 상공과 별공 및 삭선, 별선 등을 징수하여 중앙정부 또는 궁중에 상납하는 책임 역시 군현의 향리들이 지고 있었다.

220p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군현 향리가 잡공을 징수하여 중앙 각사에 상납하면, 이를 중앙 각사에서 궁중에 공상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됨으로써 고려시대의 잡공을 계승하는 공물 징수와 상납을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책임지게 되었다. 

230p

형평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양도성을 무단으로 이탈하지 말아야 하는 규정을 어긴 종친보다 이들을 서울로 돌려보내지 못한 수령이 더 중벌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물론 지방 수령과 종친을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들이 공동이익에 근거한 일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장치였다.

341p

을미개혁으로 각 전궁에 소속되었던 환관과 궁녀는 거의 대부분 도태되고 그 대신 기왕의 환관과 궁녀의 10% 정도에 불과한 관료들이 배속되었다. 이는 기왕의 환관과 궁녀를 보유하던 조선왕실 구성원들의 권리가 을미개혁을 통해 크게 위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가 줄었다는 측면에서의 권리 위축이 아니라 배속된 사람들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권리 위축이었다. 왜냐하면 각 전궁에 소속된 환관과 궁녀는 기본적으로 각 전궁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존재지만, 관료들은 충성보다는 오히려 관리 또는 감독에 치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367p

조선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는 고려시대의 왕비 책봉의례에서 사용되지 않던 명복이 추가로 사용되었다. 왕비의 명복은 근본적으로 명에서 받은 것이므로 이를 책봉의례에 사용한 것 역시 조선왕실의 의례가 제후국 체제에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의 황자와 황녀에 대한 책봉의례가 있음에 비해 조선시대 왕자와 왕녀에 대한 봉작의례가 없었던 이유는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왕실이 명과 동일하게 왕자와 왕녀를 책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자와 왕녀의 봉작 자체가 책봉의 효과를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책으로 작위를 임명하던 대상은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에 한정되었다. 나머지 후궁, 왕자, 왕녀는 비록 왕실 작위를 받는 대상이기는 했지만 책으로 임명하지 않고 교지로 임명했다. 이는 왕의 배우자 중에서 처첩을 구별하고 자녀들 중에서 장자와 중자 그리고 적자와 서자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372p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에도 황실 구성원들은 환관과 궁녀를 받지 못하였고, 나아가 진상과 공상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기의 황실 구성원들은 책봉된 후 인적 측면과 물적 측면에서 큰 권리를 향유하였다.

 대한제국기 친왕의 물적 권리를 오히려 조선시대 왕자군의 물적 권리보다 더 커졌다. 의친왕은 친왕에 책봉된 후 대략 40만 평의 토지를 확보했는데, 이 규모는 의친왕이 의화군에 책봉된 후 확보한 42만 평과 근사한 규모였다. 따라서 의친왕은 의화군에 책봉된 후 42만여 평, 친왕에 책봉된 후 40만여 평 합하여 82만여 평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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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민족 2천년 사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곽영완 옮김 / 애플미디어(곽영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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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왠만하면 읽어 보려고 했는데 포기했다.

한 번에 쭉 읽어야 집중도가 있는데 중단하고 한참만에 보니까 도저히 후반부는 읽기가 어려워 덮어버렸다.

통사 식으로 터키 역사를 쭉 나열하는 방식이라 흥미가 떨어지는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수많은 투르크족 칸국의 흥망성쇠까지 읽다가 포기했다.

너무 아쉽고 다른 책으로 도전해 봐야겠다.

역자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어색한 번역이 종종 눈에 띄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4p

투르크족은 아시아 중심부에 있던 근거지에서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대부분은 서쪽으로 향했다. 이들의 이주는 수세기 동안 지속됐다. 비좁은 땅 문제와 인구 증가에 따른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또 가축 방목을 위한 목초지를 찾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외부 세력과의 전쟁이나 내부 구성원 간의 전쟁을 겪게 되자 이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48p

투르크족의 역사는 중동과 소아시아를 향해 서쪽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우마이야와 아바스 등 이슬람 왕조를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들과 접촉하면서 대대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59p

가즈나 제국은 인도까지 원정대를 보내는 등 이슬람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인해 투르크족의 이슬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2p

투르크족의 모든 이주 역사에서 보듯 그가 떠난 이유도 부족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새로운 거주지와 목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66p

셀주크 제국의 영토 확장과는 별도로 투그룰 베이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은 투르크멘들의 도움을 받아 소아시아로 진입한 것이다. 오구즈족은 셀주크의 통제 아래 이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했다. 이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항상 주변 지역을 혼란에 빠트리곤 하던 투르크멘들의 정착지를 찾기 위해 투그룰 베이는 투르크멘들을 비잔티움이 지배하던 소아시아로 인도했던 것이다. 거듭된 침략과 정복을 통해 소아시아는 점차 투르크족의 근거지가 됐다.

 투그룰 베이 시대에 이뤄진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아바스 칼리프 조와의 우호적인 관계 성립이었다. 이 우호적인 관계를 발판으로 셀주크는 이슬람 세계의 유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그는 재위 초기부터 칼리프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쿠바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69p

만지케르트 전투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은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영구적인 근거지로 만들기 위해 밀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소아시아를 투르크족의 근거지로 만들려는 움직임은 만지케트르 전투 승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 지휘관들에게 소아시아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만지케트르 전투가 남긴 또 하나의 결과물은 유럽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투르크족의 만지케르트 전투 승리가 이슬람 세계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반면, 유럽 기독교 세계에는 분노를 불러 일으켜 투르크로부터 비잔티움을 구하자는 십자군 구성이 촉발된 것이다.

 


<오류>

24p

돌궐은 동 돌궐에 이스테미가 있고, 서 돌궐에 무칸이 있을 당시가 최전성기였다.

->동 돌궐이 무칸이고, 서 돌궐이 이스테미다.

26p

쿠툴룩의 아들인 카프간은 부왕의 정책을 이어

-> 카프간은 쿠툴룩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이다.

79p

셀라하딘은 동생 투란 샤와 함께 시리아를 정복하고 이라크까지 통치권을 넓혔다.

-> 셀라하딘이 곧 십자군 전쟁으로 유명한 살라흐 앗딘이고 그의 동생은 알 알아델이다. 투란샤는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이다.

81p

반란군은 피에세르-우드-두르를 새 술탄으로 옹립했다. 피에세르-우드-두르는 선대 술탄인 말릭 네크메틴 샤리의 미망인이었다.

-> 샤자르 알 두르는 앗 살리흐 나짐 앗 딘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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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나무 2019-10-10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 책에 저런 오류가 있는 것은 심한데요. 쿠르드족이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받는 터키군에 의해 학살 당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리네요.
 
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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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은 스페인의 중세 이야기였고, 이 책은 후속판 격으로 근현대사에 관해 쓰고 있다.

전공한 학자도 아닌데 이런 자세한 역사책을 발간했다는 게 신기하다.

아무래도 스페인 현지에 있다 보니 스페인에서 직접 발간된 책들을 참조해서 내용의 충실도가 높은 듯하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쉬운 문체로 소개하는 책을 본 적이 없다.

스페인 역사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저자의 두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20세기 역사는 다소 지루했다.

세계사적인 중요도가 떨어지는 시대라 더 그런 것 같다.

온건파와 공화파의 대결 속에서 군부 쿠데타가 지속되고 프랑코가 근 40여 년에 걸친 독재를 자행하고도 유럽 민주주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인상깊은 구절>

33p

알바 공작이 1할세를 걷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알바 공작으로서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펠리페 2세가 보내는 돈은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를 일반적인 식민지로 생각했다. 본국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36p

이러한 약탈이 계속된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 용병들의 급여가 제때 지불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국적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군인들은 애국심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뿐이다. 스페인에서 급여가 지급이 안 되니 도시를 약탈해서라도 이득을 챙기고 보급을 해야만 했다. 이는 딱히 스페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다. 이 시기 유럽의 대다수 나라는 용병을 주로 이용했는데 문제는 용병의 경우 군기가 엉망이었고, 급여를 지급받지 못하면 점령지를 약탈하는 일도 흔했다는 사실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져올 수 있었던 스페인이 왜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을까?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 많은 금과 은이 있었지만, 은행에서 필요할 때처럼 꺼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스페인을 왕래하는 배편은 일 년에 많아야 두 편이었다. 게다가 해적들은 그 배를 약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수송선이 무사히 세비야에 도착했다고 네덜란드에 바로 보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다시 네덜란드의 지역으로 수송해야 했다.

59p

펠리페 2세는 열심히 일하는 군주의 전형이었다. 루돌프 2세가 이처럼 수집에 열중하는 동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펠리페 2세도 결국 죽고 말았다. 펠리페 2세는 평생 춤이나 술, 파티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취미는 책을 읽고 미술품, 시계, 무기, 특이한 물건 등을 모으는 일이었다. 부인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고 거리를 두는 편이었으며 금요일, 토요일, 종교 축제 전날에는 혼자 저녁을 먹을 정도였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왕이 된 후에 나라 걱정으로 쉴 새가 없었다. 그는 통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했다. 일 중독자였던 펠리페 2세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점심 때까지 수많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결재했다. 가족과 거리를 두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차갑고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펠리페 2세 시절만 해도 귀족들은 궁정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펠리페 3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 능력이 뒤떨어졌고 정치에는 큰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를 대신해 줄 사람, 섭정이 필요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던 레르마 공작과 누군가 대신해서 나라를 통치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펠리페 3세는 서로에게 딱 필요한 사람이었다.

 현재를 즐기자는 자세는 펠리페 3세가 왕이 아니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광대한 영토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왕이었다. 그가 나랏일을 외면하자 신하들도 나랏일을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느라 바빴다.

67p

전쟁, 전염병 외에 스페인 본토에서 신대륙으로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 인구가 줄어드는 시점에 모리스코를 추방하자 스페인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제일 큰 피해는 농촌에서 나타났다. 모리스코는 주로 농촌에 힘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모리스코가 추방당해 스페인을 떠나자 대체 인력을 구할 수 없었던 농촌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인구가 줄어들어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17세기 초중반에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많은 농경지와 목초지도 파괴되었다. 

74p

올리바레스의 연합군 제도에는 군대 유지비용도 절약하고 스페인 출신의 강력한 국민군을 육성하여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 군대도 용병이 아닌 프랑스의 국민군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만약 스페인이 올리바레스 대공의 원안대로 연합군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스페인은 프랑스와 영국을 공략하여 다시 한 번 유럽의 패권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08p

30년 전쟁의 희생자 수는 750만 명에 이르렀다. 신성로마제국은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2100만 명이던 신성로마제국의 인구는 135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종교가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30년 전쟁을 겪으며 종교 때문에 지옥과 같은 일들이 현실 세계에 펼쳐지자 신과 종교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아무리 종교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17세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위대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속속 등장해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과학 발전에 기여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종교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나며, 종교의 힘은 약해졌다.

 스페인은 신성로마제국처럼 초토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은 신교를 인정하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며 발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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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절대왕정으로 돌아가자 제일 먼저 신분제가 다시 생기고, 종교재판이 부활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은 자유주의 무역으로 부를 쌓고, 교회보다 이성을 중시하여 발전하던 다른 유럽 국가와 정반대의 길 걸었다. 카디스 헌법이 무효화 되면서 자본주의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인 길드가 부활하여 생산을 통제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활보하는 바람에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이념이 전파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프랑스 중심으로 통일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는 유럽을 제패하면서 한 나라를 점령하면 그 나라의 왕을 유폐시키고 그의 친척을 왕위에 올린 뒤, 프랑스식 근대화된 제도를 도입했다. 나폴레옹이 점령한 나라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이유는 거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 덕분에 유럽의 근대화가 앞당겨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명확했다. 프랑스 혁명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프랑스 시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다른 나라에 무력을 동원해 강요했다. 나폴레옹의 강제적인 근대화는 그게 얼마나 좋든 간에 많은 사람이 불만을 품었다. 그런 이유로 나폴레옹이 사라지마자 다시 절대왕정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생겨났다. 

 페르난도 7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스페인은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모든 상업 활동이 마비되어 있었고, 은행은 파산 상태였다. 스페인이 사상적으로 뒤처져 있었지만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에 거대한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힘이 약해지자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시도했다. 예전에는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을 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 식민지들도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247p

개혁이 성공한 뒤 집단 간 의견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격해지면서 일상생활은 위협을 받는다. 일상생활이 위협받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개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개혁을 지지한 이유는 잘살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혼란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차라리 절대왕정 시절의 안정적인 사회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나타났으며, 뒤늦게 근대화된 스페인에서도 반복되었다.

268p

자유 진영이 진보파와 온건파로 분열하고, 온건파와 진보파의 대결로 정국이 혼란해지는 상황은 스페인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전 유럽에는 자유주의가 자리를 시작해서 역사가 짧았기 때문에 다른 유럽 나라에서도 자유주의 내 갈등이 심했다. 자유 진영 내부에서 갈등이 생긴 이유는 정치 참여와 직결되는 투표권을 국민 누구에게 얼마만큼 주느냐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온건파는 될 수 있으면 투표 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소수에게 주려고 했고, 진보파는 더 많은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기 원했다. 진보파도 여성의 참정권은 제한했지만, 일반적으로 진보파의 입장이 오늘날 민주주의에 더 가까웠다. 

291p

공화국 정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제 이룬 성과는 별로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에는 귀를 기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에서부터 큰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공화정 출범 이후 짧은 시간 여러 명의 대통령이 바뀌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지친 상태였기에 안정을 원했다. 최초 공화정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실패한 바 있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서 안정적이기만 하다면 약간의 불합리함이 있더라도 기존 방식을 선호했다.

 스페인에서 정치적 안정이란 기존 방식대로 다시 왕을 옹립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국민에게 제한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뜻했다.

300p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카노바스는 보통선거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정 조건을 지닌 사람만 투표와 선거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정부에서는 의회에 들어갈 수 있는 의원 후보자의 자격과 의원을 뽑기 위해 투표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그 자격 요건의 핵심은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의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투표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돈이 없는 농민이나 노동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온건파 정당은 자본가의 편에 서서 자본주의를 숭상했다. 



<오류>

48p

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자리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촌이며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를 앉히려고 했다.

->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그 손녀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다. 마거릿 튜더는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이므로,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의 5촌 조카이다.

121p

마르가리타 공주는 21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네 번 임신했고 그중 두 번을 유산했다. 

-> 레오폴트 1세의 배우자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중 뒤에 낳은 두 명이 그 해에 사망했으므로 유산은 아니다.

201p

카를로스 4세는 사촌인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와 결혼했다. 그녀는 펠리페 5세의 두 번째 부인 파르네제와 같은 파르마 출신이었고,

-> 마리아 루이사의 할머니가 곧 파르네제이고 아버지인 필리포와 카를로스 4세의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친형제이므로 특별히 마리아 루이사만 파르마 출신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

217p

페르난도 7세는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의 아홉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 페르난도 7세는 여덟 번째 아이이고, 장남이다.

251p

페르난도 7세의 두 번째 부인은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포르투갈 왕 주앙 4세와 그의 누나 카를로타의 딸이었다.

-> 마리아 이사벨은 주앙 6세의 딸이다.

298p

알폰소 12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사촌이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버지가 사촌간이므로 둘은 6촌 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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