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한국과 스위스의 결전을 몇 시간 남겨 놓은 시청 앞은온통 빨간 티와 두건, 또는 태극기로 탑을 만들어 입은 섹시(?)하고 용감한 10~20대,'김밥 한줄에 1000원!'을 외치는 장사치들, 별로 팔릴 것 같지 않은 허접한 빨간 티를 5천원에 팔고 있는 좌판 등 북새통이었다. 시청 앞 광경은 분명 '축제' 였는데, 난 그 북새통 속을 까만 정장을 입은 채로 뻘쭘하게 걸었다. 운동을 하고 막 샤워를 하고 나왔던 터라 맨 얼굴에 채 다 말리지 못한 긴 머리는 젖어 있었다.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배꼽티를 입은 혈기왕성한 어린애들 사이를 터벅터벅 걷는데, 뭔가 뻘쭘하고 어색했다. 새벽 4시에 하는 경기를 보려고 초저녁부터 모여든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기도 했고,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번 사건 이후로 글 쓰기에 대한 무식한 열의도 한 풀 꺽이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왜 나란 인간은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못사는 걸까?) 일주일간 빡세게 운동을 했다. 몸을 만드려고 저녁은 먹지 않고 요즘 열광하고 있는 '매일 순두유' 한병으로 때웠다.목요일 회식은 팀 '주무'라는 권력(?)을 활용, 삼겹살의 무서운 열량을 피하기 위해 횟집으로 예약을 하고 회와 야채만 먹고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일주일간 빡세게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잘해왔던 터라 내심 뿌듯했는데, 너무 먹지 않아서인지 고질적인 외로움이 또 스물스물 기어 올라온건지 금요일 밤은 아주아주 무기력하고 우울했다.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 보는데 치킨집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오뎅바에서 정종을 마시는 사람들, 길가에 내어 놓은 테이블에서 신나게 술을 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술 한잔 생각이 간절했다. 순간 핸드폰을 꺼냈다. 누구 불러내서 술 한잔 할까? 하지만 이내 다시 핸드폰을 가방 속에 넣었다. 맨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약속을 피하다가 내가 술 마시고 싶다고 전화하는게 치사하게 느껴졌다. 술이 마시고 싶고, 뭔가 거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치킨 다리를 뜯고 싶기도 했고, 감자탕 속의 푹 익은 고기 생각도 나고,평소 좋아하지 않는 족발까지 떠올랐다.뭘 먹을까 계속 생각하다가 아파트 상가 앞을 지나면서는 캔 맥주만 몇개 샀다. 며칠 빡세게 운동한 걸 도루아묵으로 만들지 말자는 강한 이성과 '본전 의식'으로. 집에 와서 캔 맥주 하나를 마시고는 뻗어서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지 못해 축구도 보지 못했다.그리곤 토요일 내내 자다,깨다,먹다를 반복했다. 자다 깨면 멍하니 TV를 봤고, 동생이 극찬한 피자 헛 '치즈 바이트'를 게눈 감추듯이 먹었으며, 중간 중간엔 캔 맥주를 홀짝 홀짝 마셨다. 요즘 유행하는 책 <하류사회>에 묘사된 전형적인 '하류'의 일상이었다. 축 늘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운동을 빡세게 했더니 근육통인지 뭔지 몸이 욱신거리기도 했다.느끼한 피자와 맥주가 그렇게 땡겼던 걸 보면 '욕구 불만' 같기도 했다. 욕구 불만, 욕구 불만, 욕구 불만. 어찌 보면 난 항상 '욕구 불만'의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별로 '멋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깡그리 망가져본 적도 없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범생이의 피가 혈관을 타고 콸콸 흐르고 있다.2002년 11월, '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하나로 무식하고 용감하게 사표를 냈지만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달 넘게 잘 놀다 온건 좋았지만,집에 와서는 '엄숙주의+성실주의'의 극치, 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도서관에 갔다. 거 참....쉬고 싶다고 번듯한 직장에 사표를 내고는 새벽 6시에 도서관에 가는 꼴이라니?출근하는 아빠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온갖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빠의 눈은 어떤 악랄한 상사의 괴롭힘 보다도 나를 힘들게 했다.그 때, 참 많은 소설을 읽었다. 편입 시험,공무원 시험,법무사,회계사,변리사,공인 중개사 등등 다양한 수험서에고개를 쳐박고 형광펜으로 줄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이브'하게, 편한 자세로 앉아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한권 다 읽으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그래서 인터뷰를 한다면, 기자가 '당신의 문학적 기반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 네, 백조 시절 아빠를 피하기 위해 새벽에 도서관에 가서 읽었던 많은 소설들입니다." 뭐....고통스런 기억이지만 써놓고 보니 약간 웃기기도 한다.어쨌거나 또 이렇게 주말이 가고, 내일이면 또 새벽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 간다. 아마....오늘 밤도 2주 전 처럼 짐을 싸기가 싫어서 끙끙 거릴 것이며, '아....오늘 출근할껄! 워크샵 자료는 언제 만들지?' 하며 짧은 탄식을 뱉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또 6월이 가고, 06년의 상반기가 간다.